15.
그렇게 몸을 씻은 뒤, 훈련장으로 나오자 두 사람이 서있었다.
바쿠와 러셀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아, 나왔냐.”
뭔가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바쿠는 날 보고는 쓰게 웃었다.
“너희 두 사람에게 할 이야기가 있어서 불렀다. 최대한 빠르게 TV쇼에 출연 해줬으면 하는데.”
“……? 러셀과 저요?”
“그래.”
고개를 끄덕이는 바쿠.
그 무슨 뜬금 없는 소리인가.
물론, 러셀과 나는 언젠가 TV쇼에 출연할 수 있을 정도기는 했다.
알음알음 들려오는 평가에 의하면 나는 타이밍만 노리고 있고 러셀은 받쳐주는 사람이 하나 정도 있으면 괜찮을 거라고 했던가?
어쨌든 그렇긴 한데.
‘아무리 그래도 너무 빨라.’
아직 여기에 온지 3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빨라도 최소 6개월은 WWF의 방식을 가르치기 마련일 텐데.
‘뭔가 이유가 있나?’
그렇게 생각한 나는 어쩐지 좋지 못한 바쿠의 표정에서 한 가지 이유를 생각해냈다.
“상황이 심각한가요?”
“상황이라니?”
“누군가 콜 업 됐다거나.”
결국 GCW의 역할은 선수를 육성해 ‘위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것을 ‘콜 업’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대한 주도권은 전적으로 모회사인 WWF에게 있었다.
말인즉슨, 그들이 ‘누구 올려 보내!’라고 명령을 내리면 거부할 수 없는 을의 입장이었다.
내 말에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바쿠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각본팀 직원을 한 명 붙여줄 테니 두 사람 다 하고 싶은 기믹을 정리해서 보고해라.”
딱히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지 대답을 회피하는 바쿠.
그는 평소답지 않게 어깨가 축 늘어진 채 돌아갔다.
어쩐지 좀 신경이 쓰였다.
“……흐음.”
“왜 그래?”
“메인 쇼로 콜 업 된 선수가 생각보다 거물인 모양인데.”
“그래?”
“엉. 그게 아니라면 우리를 빨리 데뷔시킬 이유가 없잖아.”
그런 내 말을 들은 러셀의 얼굴이 아주 약간 창백해졌다. 나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걱정돼?”
“다, 당연하지.”
러셀이 눈썹을 찡그렸다.
“넌 괜찮아? 난 오히려 기믹 쪽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인데.”
“미리 짜둔 거 있잖아.”
“그것만으로 될까? 뭔가 좀 더 독특한 성격을 붙이는 게…….”
“걱정 마. 사람들은 네 캐릭터를 분명 좋아할 수밖에 없을 거야.”
스스로는 부담스러워했지만 위대한 삼촌이 있다는 점은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한 개성이었다.
어쨌든, 러셀이 긴장할 정도로 우리의 데뷔는 빠른 편이었다.
바쿠는 최대한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아무래도 쇼에 문제가 생긴 것이 틀림없었다.
‘한번 이야기를 해봐야겠군.’
그런 결론을 내리고 있을 즈음, 훈련장으로 직원들이 들어왔다.
각본팀의 사람들이었다.
“킴, 이쪽으로 와주세요.”
“러셀, 저희는 여기서 하죠.”
두 사람의 이야기에 따라 나와 러셀은 각자 자리를 이동했다.
조용한 탈의실.
안경을 쓴 직원은 정리된 자료를 확인하며 눈썹을 찡그렸다.
“흐음…….”
뭔가 문제라도 있나.
내내 말이 없어 좀 수상하다고 여길 즈음, 그는 떽떽 짖어대는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주노 킴이라고 읽는 건가요?”
“……준호 킴입니다.”
“설마 이 이름 그대로 쇼에 데뷔하실 생각은 아니시죠?”
“물론 그렇죠.”
이번에도 링 네임을 쓰기는 할 생각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회사에서 그걸 권장하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왜냐고? 링 네임의 저작권을 회사에서 가져가거든.
본명을 쓰더라도 교묘하게 철자를 바꿔 기어코 저작권을 가져가는 게 이 회사의 방침이었다.
‘거기다 준호 킴은 사람들이 외우기도 어렵고, 말하기도 어렵고.’
따라서 나는 링 네임을 정할 생각이었다. ……데뷔가 이렇게 빠를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눈앞의 직원, 태도가 이상했다.
전반적으로 뭔가 좀 이쪽을 가르치려는 듯한 기미가 보였다.
“그리고 기믹. ‘인디 출신의 프로레슬러’라고요? 이런 일차원적인 기믹은 난생 처음 보는군요.”
“그렇습니까.”
일단 상대해줬다.
“뭔가 좀 개성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뭔가 범죄자적인 이미지를 풍기는데 그런 캐릭터를 조금 더 입히는 것은 어떨까요?”
초짜로군.
나는 쓰게 웃었다.
알 것 같았다.
업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데 글은 오랫동안 써온 전형적인 너드Nerd 계열의 각본가였다.
프로레슬링 회사는 매주 스토리를 짜내 선보여야 하기에 이런 식으로 협업을 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렇게 자기가 뭔가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하는 인간은, 까놓고 말해 민폐 그 자체였다.
어디까지나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며 기탄없이 아이디어를 나누는 태도가 필요한 법인데.
물론 그 중심에 서있는 건 언제나 선수여야만 했다. 하지만 이 친구는 그것을 잘 모르는 듯했다.
전생의 선수 시절에는 대하기 버거운 타입이었지만, 프로듀서 생활을 할 때 어떻게 대해야 할지 질리도록 알게 된 부류였다.
‘내가 짬이 얼만데.’
일단은 헛소리를 늘어놓는 걸 좀 들어주는 시늉을 하고 있자.
“그래요. 진짜로 도둑이라는 설정을 넣는 건 어떻습니까? 챔피언 벨트도 훔쳐버린다는 기믹으로 가는 거죠. 등장할 때마다 물건이 든 보따리를 들고 나오는 거죠.”
“…….”
진짜 개 구린 기믹이었다.
말했듯 만화적인 기믹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부가적인 요소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이 양반은 지금 그것을 프로레슬러의 기믹으로 사용하자고 말하는 것이었다.
“너무 만화적이지 않습니까?”
“예? 그래야 임팩트가 있죠. 과장의 미학이라고 모르십니까?”
과장을 하더라도 거기에 현실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프로레슬러의 기믹을 도둑으로 사용한다는 건 과장이 아니라 엇나가는 거지.
‘이 친구, 좀 배워야겠군.’
문제는 그쪽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다는 거다. 자기는 각본에 대해 공부했으니 잘 안다는 거겠지.
“락콜드에게 그런 과장된 기믹이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락콜드도 그냥 ‘빡돈 레드넥’이죠.”
“그건 락콜드니까 그런 거고요. 그쪽이 락콜드는 아니잖습니까?”
“……이 새끼가 장난하나.”
“예?”
“내가 나답게 행동하겠다는데 뭐 그리 불만이 많아? 엿 같네.”
나는 표정을 잔뜩 구기며 눈앞의 직원을 노려보았다. 그는 삽시간에 안색이 파랗게 물들었다.
188cm에 90kg.
체지방 15%.
그게 내 스펙이다.
탄탄한 근육질에 어깨도 넓어 노려보면 인종을 불문하고 대부분은 입을 다물기 마련이었다.
그 말처럼 직원은 당황한 듯 애써 변명을 말하기 시작했다.
“저, 저기. 제 언행이 무례하게 느껴지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뭐? 이제 와서?”
“그으…… 미스터 킴을 화나게 할 의도는 절대 아니었고요.”
“그딴 식으로 남의 삶을 폄하하는데 안 열 받을 놈이 있겠어?!”
나는 의자를 쾅 내리쳤다.
그 말에 화들짝 놀란 직원은 여기서 한마디만 더했다가는 도망칠 것처럼 겁을 먹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나는 표정을 풀고 싱긋 웃어 보이는 걸로 그에게 지금까지의 행동이 거짓임을 알렸다.
“어때요? 제 연기.”
“예, 예?”
“꽤 괜찮지 않았나요. 글로는 재미가 없어 보여도 실제로 저 같은 꺽다리가 연기까지 살벌하게 하면 아주 달라 보이는 법이죠.”
“그, 그, 그그그, 그렇군요.”
“미안해요. 제가 말씀드렸던 기믹이 어떤지 보여주려면 이게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거든요.”
나는 이제야 겨우 안심한 직원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말했듯, 아직 좀 어리숙할 뿐, 이 친구는 나와 같은 팀이다. 너무 일방적인 관계를 쌓는 것도 사회인으로서는 좋지 않겠지.
내 행동에 조금 안심했는지 직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확실히, 실제로 연기하시는 걸 보니 박력이 다르긴 하네요.”
“감사합니다. 그쪽이 말씀하셨던 아이디어 중에도 괜찮아 보이는 게 아주 많던데요.”
“그, 그런가요?”
의욕이 돌아온 직원.
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에게 내 아이디어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물론, 내가 여기에서 좋다고 말했던 직원의 아이디어는 최종적으로 모두 제외될 예정이었다.
* * *
기믹을 정리한 뒤, 나는 곧장 사무실에 있는 바쿠를 찾아갔다.
다들 퇴근했지만 그는 생각할 게 있는지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바쿠.”
“정리는 끝났냐.”
“뭐, 그쪽이 협조적으로 나와서 적당히 잘 이야기했습니다.”
“다행이군.”
“그래서 말인데,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
“선수를 올려 보내라고 했나요? 그게 아니라면 저와 러셀이 갑자기 데뷔할 이유가 없잖아요.”
“……귀신같은 놈. 입사한 지 3개월밖에 안 된 애송이 주제에.”
바쿠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맞다. 네놈 예상대로 내일 또 선수를 올려 보내야 할 판이야.”
“메인 쇼에요?”
“그래, 이번에 올라가는 게 특히나 탑 힐이었던 ‘스니키’와 그 부하들이라서 완전히 망했어.”
그 말을 들은 나는 혀를 찼다.
‘역시 그렇군.’
곤란할 만했다.
잘 활동하던 선수가 갑자기 빠지는 것도 그런데 그 대상이 현 메인 챔피언과 그 부하들이라니.
이야기는 구멍이 뚫리고 시청률은 떨어질 것이 분명한 상황.
물론 재능과 실력을 갖춘 이들이 언제까지나 산하 단체에 머무를 수도 없는 법이지만.
어쨌든 여기도 TV쇼를 내보내는 단체였다. 시청률이나 실적은 분명 모두가 신경 쓰고 있을 터였다.
“분명 두 달인가 전에 쟈니 에이스도 올려 보냈는데…….”
바쿠는 한숨을 내쉬었다.
GCW는 현재 선역과 악역 메인 이벤터를 모두 빼앗긴 상황이었다.
나는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 전생에서는 이때 나 대신 합격한 애덤이 악역 선수로 투입 되어 러셀과 대립을 진행했지.’
러셀이 선역으로 말이다.
‘분명히 이때 GCW가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뭔가를 했을 텐데.’
시험에 떨어진 나는 1년 간 인디 단체를 전전하던 중, 애덤으로부터 전화로 그 소식을 들었다.
당시에는 놈이 그처럼 자랑하는 걸 들을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지.’
미소를 지은 나는 최대한 조심스러운 기색을 담아 입을 열었다.
어쨌든 지금 나는 당장 다음 주에 쇼에 투입되는 애송이였다.
여기서는 최대한 말을 예쁘게 하는 편이 좋으리라.
“저, 바쿠.”
“뭐냐.”
“그러면 다음 주 쇼부터 저랑 러셀이랑 대립하게 되나요?”
“아직 회의가 안 열렸는데. 아마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다. 너희 둘은 괜찮은 스토리도 있으니.”
그 말을 들은 나는 표정이 굳어지려는 것을 최대한 참았다.
그건 최악의 선택이었다.
신인 선수 두 명이 나와서 다짜고짜 치고 박으면 누가 좋다고 그걸 몰입해서 보겠는가?
“바쿠, 제가 인디 시절에 우연히 이와 굉장히 비슷한 상황을 겪어본 적이 있거든요.”
“어, 뭐 아이디어라도 있냐?”
바쿠는 생각보다 더 나를 신뢰하는 듯 눈을 반짝거렸다.
“그쪽에서도 탑급 선수들 다 다른 곳에 빼앗기고 당장 다음 주부터 신인과 그다지 위상이 높지 않은 선수들만으로 쇼를 꾸려나가야 하는 상황이었죠.”
“정말로 우연히도 우리랑 상황이 굉장히 비슷하군.”
‘여기가 맞거든.’
나는 쓰게 웃었다.
“그 친구들은 쇼 전체를 한 달 간의 토너먼트로 구성해서 위기를 극복했다는군요.”
“토너먼트?”
“예, 스니키가 올라갔으면 이제 챔피언 벨트도 공석 아닙니까? 위기를 기회로 삼는 거죠.”
“……더 자세히 말해봐라.”
바쿠는 내가 한 말에 흥미를 느낀 듯 의자에 바싹 붙어 앉았다.
그 앞에서 나는 전생의 기억을 토대로 말을 이어나갔다.
“마침 이유도 있죠. 챔피언이 공석이니. 기믹이 확실한 저와 러셀이 신인으로 들어가고, 선배 레슬러들과 함께 프로모 몇 편 찍어서 방영하는 건 어떨까요?”
“흐음.”
“나쁘지 않을 겁니다. 저와 러셀의 대립도 토너먼트 중간에 끼워 넣으면 어색하지 않을 테고.”
“확실히……. 지금 시점에서 그 방법이면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모든 게 해결되겠군.”
“괜찮죠?”
“그래, 하지만 만약 그 시나리오를 채택한다면 이것저것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구나.”
“뭐 걱정하는 거라도 있어요?”
“‘대체 누가 챔피언이 될 것인가.’ 일단은 그게 문제겠지.”
바쿠는 고민에 빠진 듯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그 앞에서 피식 웃은 나는 그 말에 대답했다.
“뭘 어렵게 생각해요?”
생각보다 간단한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