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16화 (16/634)

16.

“실력으로 정하죠.”

갑작스러운 남자의 말을 들은 직원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작스러운 스니키의 콜 업 요청이 오고 다음 날 아침이었다.

웬일로 바쿠가 선수를 회의실에 데려오나 싶더니, 이처럼 뜬구름 잡는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현재, 회의실에 모여 있는 것은 각 부서의 팀장들이었다.

의상팀, 각본팀, 자재팀, 방송팀, 관리팀. 그 밖에 수많은 부서에서 짬이 찬 베테랑들.

하지만 그중에서 준호의 말을 이해한 것은 오직 왕년의 슈퍼 스타였던 할리 레이시뿐이었다.

실력.

업계에서 오래 구른 이들조차 전부 다른 답을 내놓을 정도로 이게 참 또 애매한 문제인 것이다.

일반적인 스포츠라면 간단했다.

골을 가장 많이 넣은 선수.

혹은 팀의 중심이 되는 선수. 아니면 방어에 능숙한 선수.

하지만 프로레슬링은 아니었다.

경기력이 좋은 선수? 아니, 애초에 경기력이라는 개념 자체가 정립되지 않은 허구의 무언가다.

마이크워크가 좋은 선수? 그것만으로는 관중들이 원하는 ‘스포츠’를 채울 수 없다.

카리스마? 그걸 검증하는 것이 바로 프로레슬링의 ‘쇼’였다.

희생정신? 그러다 부상이라도 당하면 식힌 돌죽과 같아진다.

결국 답은 수백 가지에, 까보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

그것이 프로레슬링에서 말하는 ‘실력’이었다. 마치 포커에서 좋은 카드를 뽑는 능력과 같았다.

하지만 프로레슬러로서 관중들과 소통하면서 수십 년을 보내온 할리 레이시는 이해하고 있었다.

프로레슬링 선수의 실력은 오직 단 한 가지로만 알 수 있었다.

바로 ‘인기’였다.

짧은 경기 시간에 모든 걸 보여주고, 한 마디 단어로 사람들을 열광시키거나 야유하게 만드는 재능.

그 모든 것은 지켜봐주는 관객들의 호응으로만 판가름되었다.

말인즉슨, 조금 전 준호가 제시한 ‘실력으로 뽑자’는 말은…….

‘대체 뭐지?’

할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실력을 보기 위해서는 결국 초콜릿 박스를 열어야만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실력으로 뽑자.’는 말의 신빙성은 어떤 식으로든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할리는 애용하는 시가를 입에 물고 입을 열었다.

“패배만을 거듭하던 선수가 어느 날부턴가 사람들의 반응을 얻고 슈퍼스타가 된다…….”

그 말을 모두가 경청했다.

“아예 없는 이야기는 아니지. 누군가는 요행이라고도 하고, 누군가는 그게 실력이라고도 하고.”

“실력이죠.”

“그렇다면 애송이, 당장 밑바닥부터 시작해야 하는 우리가 대체 어떻게 그걸 알 수 있단 거지?”

당장 다음 주에 실시간으로 프로레슬링 쇼를 내보내야만 했다.

다시 말해, 관객들에게 검증받을 시간이 없다는 뜻이었다.

“설마 첫 주는 우리 감만 믿고 가자는 것은 아니겠지?”

바쿠가 요즘 들어 저 동양인 꼬마를 귀여워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할리는 절대로 거기에 맞춰줄 생각이 없었다.

분명 준호는 괜찮은 실력을 가졌다. 협조성도 좋았고, 나쁜 버릇은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거기다 멋진 대립도 보여주었다.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GCW에 들어온 이후 확연히 좋아진 그의 몸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럼에 규칙은 규칙인 법.

할리는 솔직히 말해 바쿠의 비호를 등에 업고 의견을 개진하는 꼬마를 조금 경계하고 있었다.

“물론이죠.”

“그럼 어쩌자는 거냐?”

“간단합니다.”

준호는 미소를 지었다.

“모두 무승부로 하는 거죠.”

“……?”

“뭐?”

“그게 무슨…….”

그 말을 들은 팀장급 인사들은 모두가 황당해 입을 다물었다.

무승부.

[과연 그게 먹힐까?]

곧,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얼굴이 되었다. 준호의 말이 흥미롭다고 여기는 것이었다.

GCW에는 남성부 두 개, 여성 부 하나를 더해 총 세 가지 종류의 챔피언십이 존재했다.

먼저, 선수 둘이 팀으로 경쟁하는 ‘GCW 태그 팀 챔피언십’.

두 번째로 여성 선수들이 경쟁하는 ‘GCW 위민스 챔피언십’.

마지막으로 지금 도마에 오른 남성 선수들의 ‘GCW 챔피언십’.

이 모든 벨트는 선수들의 최종적인 꿈이었다. 스토리로는 물론이고,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말이 된다.

단체의 간판선수임을 뜻하는 GCW 챔피언십을 걸고 선수들이 혼신을 다해 싸우는 시나리오.

챔피언십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걸 보여주면서 동시에 관객들의 기대감을 크게 높인다.

‘괜찮은데.’

할리는 시가를 만지작거렸다.

발상의 역전이었다.

하지만 크나큰 도박수였다.

만약에 관객들이, 지역 방송국의 시청자들이 관심을 가지지 못한다면 자충수나 다름없었다.

무슨 헛짓거리를 하냐는 소리를 들을 것이 뻔했다.

그럼에 할리 레이시는 그 과감함이 마음에 들었다. 예전에 겪었던 포커 중독이 올라올 정도로.

왜냐하면 그런 도박을 성공시킬 근거가 있기 때문이었다.

지역 신문의 기자.

방송국의 연줄.

GCW에는 방법이 있다.

바쿠는 곧바로 옆에 앉아있던 관리팀 팀장에게 물었다.

“……지금 우리 쪽에서 싱글로 돌릴 선수가 몇 명쯤 되지?”

“스무 명 가량입니다.”

“저기 애송이랑 하트 패밀리의 꼬마까지 포함해서 열여섯으로 맞춰. 경기를 여덟 개로 잡자고.”

그는 머리를 굴렸다.

GCW의 방송 시간은 한 시간 삼십 분. 즉 오프닝을 10분 정도 빼고, 한 경기당 10분 내외를 줄 수 있다는 뜻이었다.

“좀 짧을 것 같은데요.”

그렇게 의견을 내자 옆에 있던 각본팀 팀장이 의아해했다.

“무승부면 더블KO가 나올 텐데 저희 레슬러들이 연약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음.”

“저기…….”

바로 그때, 준호가 손을 들었다.

모두가 이제는 기대감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 경기는 다크 매치로 가죠.”

“뭐? 다크 매치? 방송에 내보내지 말자는 건가?”

“예, 일곱 번째 경기에서 시간이 모자라 중계를 끝내는 연출을 쓰는 거예요. 그러면 여섯 경기만 방송에 내보내면 되죠.”

“그렇게 되면…….”

“경기당 13분이네요.”

계산에 밝은 재무팀 팀장이 금방 답을 내놓았다.

그럼에도 조금 짧았다.

할리가 다시 생각에 잠기려니, 준호가 번개같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제 경기를 두 번째 정도로 해주십시오. 경기 시간은 3분 정도면 충분합니다.”

“……뭐?”

“오프닝 인터뷰 타임에 러셀이 나오고 제가 습격을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 경기 때 러셀이 난입해 경기를 망치는 거죠.”

그렇게 되면 러셀의 경기와 내 경기는 자연히 빠지게 된다.

여섯 경기 중 다시 두 경기가 빠지면 총 네 경기.

“경기 당 20분은 보장해줄 수 있다는 이야기인가.”

할리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준호의 세 치 혀로 순식간에 네 경기가 사라졌다. 어디서 수십 년 프로모터라도 한 듯한 솜씨였다.

“예, 그 네 경기를 가장 경기력이 좋은 선수들로 구성하고, 가장 인기가 좋은 선수들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빼는 겁니다.”

그렇다면 남은 건.

“관객과 시청자들에게 다음 주를 기대하게 만드는 거죠.”

“신문과 방송을 이용해서?”

“예, 일단 제 아이디어는 여기까지입니다.”

“흐음…….”

할리는 시가에 불을 붙였다.

뻐끔거리며 연기가 피어오를 때까지, 자리에 앉은 팀장들은 생각을 정리하며 고민에 빠졌다.

할리는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제일 먼저 바쿠.

아이디어를 가져온 장본인인 만큼 말할 것도 없이 그는 준호의 말에 찬성하는 눈치였다.

그리고 나머지.

‘제기랄.’

할리 레이시는 쓰게 웃었다.

프로레슬링 관련 직업을 가진 이들은 대부분이 업계에 대한 동경과 꿈을 가지고 들어왔다.

그리고 준호의 아이디어는 그들의 안에 있던 ‘너드’로서의 감성을 자극한 것 같았다.

할리는 머릿속으로 대강 할 일을 정리한 뒤 입을 열었다.

“……빡센 일정이 될 거다.”

“하지만 재밌겠죠.”

“그러니 문제라는 거지.”

낄낄 웃은 할리는 이내 당당하게 서있는 준호를 가리켰다.

“일단 신인들부터 포장해.”

아직 그들은 상품으로 선보일 준비를 마치지 않은 상태였다.

* * *

내 프레젠테이션(?)을 들은 바쿠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완벽했어.’

씨익 웃으며 내 등을 후려친 그는 각본팀장과 함께 사라졌다.

선수들에게 지금 회의로 정해진 사항을 말하러 가는 거겠지.

하지만 나는 그를 따라가지 않고 회의실에 서서 기다렸다.

할리가 말했던 것처럼 나는 준비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경을 쓴 흑인 남자가 걸어와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의상팀의 팀장이었다.

“들었죠, 준?”

“예. 먼저 의상부터 만드나요?”

“그렇게 해야죠. 따라오세요.”

뒤로 돌아선 의상팀장이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를 따라 평소에 가본 적이 없던 곳으로 이동했다.

가는 동안 약간의 호감을 표시하려는 것인지 팀장이 몇 가지의 칭찬을 건넸다.

“그쪽 복장하고 기믹은 지난번에 확인해봤어요. 멋지던데요.”

“뭐, 인디 쪽에서 활동하던 경험을 나름대로 살려본 거죠.”

“사실 그러기가 쉽지가 않잖아요? WWF라는 단체의 거대함 때문인지, 인디 레슬러들도 들어오면 다들 개성이 사라지더라고.”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쪽 복장은 만드는데 재미있을 것 같아요. ……잘 찢어지지 않으면서 늘어나는 소재를 고르는 게 꽤나 어렵겠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감사를 담아 인사했다.

오랜 레슬러 생활로 그를 이해할 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내 레슬링 기어에서 핵심이 되는 부분은…… 물론 청바지였다.

온갖 화려한 움직임을 할 때 찢어지거나 불편하지 않도록.

거기에 선수의 경기 스타일도 신경 써서 특별 제작한다.

그것이 WWF의 레슬링 기어였다.

의상팀장은 나를 의상실 안으로 안내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

“일단 아이디어가 하나 있는데.”

“어떤 겁니까?”

“무릎 부분을 찢는 거예요. 그쪽 피니시 무브가 니킥이라고 했죠? 거기에 맞춰서.”

“흐음…….”

나는 고민에 빠졌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그다지 촌스러운 스타일은 아닌가?

“스타일에 관련해서는 전문가에게 맡기는 편이 좋겠죠.”

“혹시 무릎으로 떨어지는 무브를 하는 편인가요?”

“아뇨, 아마 아닐 겁니다.”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다행이네요. 만약 그랬다면 무릎 찢는 아이디어는 못 썼지.”

무릎으로 떨어지는 무브가 많다면 선수 생명을 위해 그쪽에 패드를 착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릎, 팔꿈치, 어깨, 등, 목.

선수 생활을 길게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영리할 필요가 있었다.

자신의 책상 앞으로 간 의상팀장이 곧바로 스케치를 시작했다.

내 몸과 엇비슷한 체격의 남성이 청바지와 러닝셔츠를 걸쳤다.

“여기서 무릎만 찢고……. 컬러링은 조금 다크하게 갈까요?”

“그렇게 하죠. 아무래도 저는 힐(악역)이다 보니까.”

“그래서 일부러 화려하게 안 꾸미고 기믹을 만든 건가?”

“그런 것도 있습니다.”

“감각이 있는데? 보통 초짜들은 거기까지는 생각을 안 하거든.”

의상팀장이 미소를 지었다.

15년의 경력이 농축되어 있는 만큼 나는 사실 초짜가 아니었지만, 칭찬은 감사히 받기로 했다.

밝은 목소리를 들은 의상팀의 직원들이 자리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뜻밖에도 날 알아보았다.

“아, 킴. 맞죠?”

“예, 그렇습니다.”

“경기 영상 잘 봤어요. 러셀 하트를 상대로 탑독 운영을 하다니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나는 뺨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전생에는 대충 검정색 팬티 하나 받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이렇게 사람들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협력해 멋진 상품으로 꾸며주려고 하다니.

나 자신이 자신감을 갖고 행동한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의상 팀장이 뭔가 궁금했는지 슬쩍 나를 돌아보았다.

“그쪽 링 네임, 듣기는 했는데 뭐라고 했죠?”

“아, 그거요.”

나는 쓰게 웃었다.

사실, 제일 정하는데 오래 걸린 게 나의 링 네임이었다.

나 자신을 드러내며 동시에 기억하기 쉬운 프로레슬러의 이름.

그건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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