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SIN.
그것이 내 링네임이었다.
신.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원죄인Original Sin에서 따온 말이셨다.
나는 큰 실패를 겪고 회귀한 스스로가 그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프로레슬링 업계의 사람들은 지금의 나로 인해 모르는 사이에 원죄를 짊어지게 된 셈이었다.
그들은 날 피부색으로 규정지었고 나 자신을 억누르고 짓밟았다.
그렇기에 ‘지금의 나’는 어찌 보면 그들이 만들어낸 원죄였다.
자신들은 기억에 없겠지만, 나는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죄.
그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그것과 닮았다. 그렇기에 나는 신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인종에 의한 편견으로 태어난 악당. 성공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각오가 되어있는 남자.
‘물론, 나 자신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종의 과장이다.
김준호인 나는 나 자신의 노력 역시 부족했다고 생각하는 쪽이고, 악당인 신은 정반대인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이런 내 말을 오해해서 ‘쓰레기 자식, 자기 실패를 남 탓으로 돌려?’라고 하겠지만.
그게 악역의 묘미니까 오해하면 그건 그거대로 괜찮겠지 싶었다.
가죽 재킷에는 내 링네임인 SIN이라는 글자를 새기기로 했다.
거기에 나는 너무 심심하니까 십자가까지 넣을 것을 주문했다.
이름 옆에 십자가를 그려 넣은 팀장은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굳이 십자가를 새겨야 할까?”
“예, 좀 종교적인 색채를 넣으면 캐릭터가 좀 더 복잡해 보이겠죠.”
“……? 굳이 복잡할 필요가?”
“그런데 그걸 티내진 않잖아요? 설명하지도 않고. 깊게 파는 친구들만 ‘신은 십자가를 짊어진 채 싸우네? 이런 뜻이 있는 게 아닐까?’ 해석하면서 노는 거고.”
그렇게 해서 캐릭터에는 깊이가 생긴다. 해석이 맞건 틀리건 사람들은 흥미를 느끼는 것이었다.
은퇴한 후에도 꾸준히 WWF를 시청한 결과, 확실히 깨달았다.
사람들은 80년대처럼 단순한 캐릭터에는 금방 흥미를 잃었다.
악역에 선의 특징이 있고, 선역에 악의 특징이 있는 것이 보다 현실적으로 이입하기에 좋았다.
그렇게 되면 선역이 악으로, 혹은 악역이 선으로 돌아설 때도 훨씬 이야기가 풍부해졌다.
오직 자기 자신밖에 믿지 않는 인디 출신의 프로레슬러, 신.
‘그것만으로는 재미가 없지.’
때문에 나는 종교적인 부분을 넣어 이 캐릭터에 양면성과 보다 복잡함을 부여하려는 것이었다.
“음, 이렇게 하는 건 어때?”
팀장은 그림을 슥슥 수정했다.
SIN이라는 글자를 각 지게 쓰고 중간의 I를 위로 늘린 뒤 가로로 선을 그어 십자가로 만들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아예 마크가 되겠네요.”
“이게 훨씬 낫네.”
의상팀장은 연필을 손가락 위에서 돌리며 설명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내가 거기에서 한 가지 아이디어를 더 떠올렸다.
“역십자로 가는 건 어때요?”
“역십자?”
“예, 역십자는 인식과 달리 가톨릭의 상징물이기도 하니까요.”
“나쁘지 않네. 아니, 아예 두 가지 패턴을 함께 쓰지. 티셔츠 종류도 훨씬 더 늘어날 테고.”
“멋지네요.”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왔다.
하지만 팀장은 거기에서 또 몇 가지 아이디어를 더 제시했다.
“그리고 너, 총 맞아봤어?”
“예? 아뇨?”
나는 멀리서 총 소리가 들려오면 잽싸게 도망치는 쪽이었다.
“맞아봤다고 치자.”
“…….”
뭐, 캐릭터니까.
그렇게 생각하려자니 의상팀장은 가죽 재킷 위에 총알을 맞은 듯한 자국을 그려 넣었다.
“이렇게.”
“오, 좋은데요?”
“그렇지? 좀 거칠게 살아온 남자라는 느낌을 주자는 거야.”
그런 식으로 몇 가지 아이디어가 모여 디자인이 완성되었다.
개성도 있고, 내 캐릭터 역시 만족스럽게 드러난 복장이었다.
의상팀의 직원들도 완성된 디자인을 보고는 모두들 만족했다.
“너무 일반인 같지도 않고, 또 너무 화려하지도 않고. 정확히 중간 지점을 찾은 느낌이네요.”
“와, 이거 진짜 괜찮은데요? 팀장님, 오늘도 한 수 배웠습니다.”
“하하, 이거 아이디어 선수 본인이 제출한 건데 왜들 그래?”
그 말에 모두가 나를 돌아보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미소를 지은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다 여러분 덕이죠.”
원래 사회생활이란 이런 법.
더군다나 의상팀에서 자칫 밋밋해질 수 있는 디자인에 포인트를 더해준 것은 사실이었다.
그 후, 곧장 작업이 시작되었다.
“잘 부탁해요.”
“맡겨두세요!”
인사를 마친 나는 사무실을 나와 다음 행선지를 향해 움직였다.
바로 음향팀이었다.
그곳에서 나를 위한 ‘입장 음악’을 준비하고 있을 터였다.
* * *
입장 음악은 프로레슬러에게 있어 정말로 중요한 요소였다.
무대 뒤쪽에서 나와 링으로 올라가는 것을 입장Entrance이라고 부르는데, 거기에서 선수의 개성을 드러내며 관객을 흥겹게 만드는 요소가 바로 음악이었다.
종합격투기나 복싱에서 그러듯, 프로레슬링에서도 ‘엔터테인먼트’로서의 측면을 강조해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이었다.
‘좋아하는 사람들은 입장 씬만 챙겨서 볼 정도니까.’
선수들이 자신의 음악에 맞춰 카리스마를 발산하는 모습은 정말로 멋졌다. 물론 그걸 위해서는 일단 음악 자체가 좋아야만 했다.
‘첫 임팩트가 가장 중요하지.’
처음에 유리가 깨지는 소리를 넣은 락콜드의 음악이라던가.
아니면 자신의 캐치프레이즈 대사를 넣은 더 팍이라던가.
그 외에도 특징적인 코드나 비트로 관객을 주목시키는 게 가장 우선시해야 할 부분이었다.
처음 딱 1초만 듣고도 누구의 음악인지 알 수 있을 것.
그런 내 철학을 들은 음향팀장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죠.”
“넣을 만한 소리가 있을까요?”
“음……. 방금 의상팀에서 자료 공유 받았는데, 처음에 총소리를 넣어보는 건 어떨까요?”
“그건 좀.”
내가 고개를 내젓자 그 의미를 이해한 음향팀장이 쓰게 웃었다.
“하긴, 좀 그러네요.”
미국은 총기 사고가 많은 만큼 그 소리에도 민감한 나라였다.
음향팀장은 두터운 수염을 매만지며 눈앞의 컴퓨터를 조작했다.
“일단, 제작 중인 샘플 몇 개를 들려드릴 테니 괜찮아 보이는 음악이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그 옆에 의자를 가져다가 함께 앉았다.
몇 개의 음악이 재생되었다.
기타 리프, 드럼, 베이스.
이 수많은 샘플 중에서 내 캐릭터에 맞는 음악을 찾아야만 했다.
하지만 딱히 괜찮은 음악은 없었다. 뭔가 괜찮게 들리는 음악이 있으면 전부 메인에서 쓰이는 음악의 마이너 카피에 불과했다.
“흠…….”
“어떤가요?”
“좀 더 들어보죠.”
“아, 음악은 어떤 스타일이 좋으세요? 웅장한 거? 우울한 거? 아니면 배드애스한 거?”
“글, 쎄요.”
잠시 대답을 미룬 나는 순간 얼토당토않은 생각을 떠올렸다.
만약 지금 이 시점에 ‘덥스텝’처럼 미래에 유행할 장르를 쓴다면 너무 빠를까 싶었던 것이다.
고민에 빠진 내 귓가로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이 스쳐지나갔다.
‘괜찮을 것 같긴 한데.’
하지만 내가 말하는 스타일의 음악을 만들어줄 사람이 있을까.
내 기억에 의하면, 덥스텝이 주류 음악으로 올라오는 것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10년쯤 뒤였다.
‘그때 나오는 천재 뮤지션들도 지금은 다 학생일 테고…….’
역시 너무 허황된 이야기인가?
그 친구들도 아직은 작곡 솜씨가 좋지 못할 테고. 하긴, 생각해보면 일이 그렇게 원하는 대로 쉽게 풀릴 가능성은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웃던 나는 이어 무척 시끄러운 소리를 들었다.
“……덥스텝?”
“뭐야, 이거? 내게 아닌데?”
그러자니 음향팀장이 잠깐 음악을 정지시켰다.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이내 질문을 던졌다.
“이거 누구 음악이에요?”
“잠깐만. ……이런, 이거 내가 만든 샘플이 아니잖아?”
“그러면요?”
“끄응, 플로리다에 사는 한 너드 놈이 보낸 거예요. 자기 음악 좀 써달라면서 말이지.”
“이름이……?”
“조니 무어.”
‘누구지?’
“A.K.A. ‘스컬렉스’라는군요. 메일을 보니 외주 모집하는 곳마다 다 보낸 것 같네요.”
“예?!”
순간적으로 깜짝 놀란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스컬렉스.
2010년에 데뷔해, 덥스텝을 주류 음악으로 상승시킨 천재 작곡가.
이 음악이 그의 음악이라고?
“왜, 왜 그래요? 갑자기.”
“……이 친구 음악으로 하죠.”
“네?”
“이 음악 괜찮은데요?”
나는 스페이스 키를 눌러 음악을 다시금 재생시켰다.
시끄러운 덥스텝이 흘러나왔다.
확실히 덜 다듬어졌지만 반짝반짝 빛나는 재능이 느껴졌다.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처음에는 의아해했던 음향팀장도 집중해서 스컬렉스의 음악을 들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확실히…… 괜찮네요.”
“아뇨.”
나는 그 앞에서 고개를 내저었다. 조금 전과는 상반되는 말에 음향팀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혀 다듬어지지 않았죠.”
“흠, 그것도 그렇군요.”
“그래도 팀장님께서 도와 함께 작업해주시면 괜찮은 노래가 나올 것 같은데요.”
그랬다.
아직 학생인 만큼 스컬렉스의 음악은 그 천재성을 제외하면 부족한 부분이 꽤나 많았다.
그렇기에 전문 음악가로 오랫동안 일해 온 음향팀장이 완성을 도와줄 수 있을 터였다.
그 자신으로서도 흥미로운 작업이라 생각한 듯, 음향팀장의 대답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 대답을 기다렸다.
* * *
그 이후로도 나는 직원들의 도움을 받아 준비를 해나갔다.
새로운 삶을 시작한 후로 처음 프로레슬러가 되는 것이었다. 때문인지 적잖이 흥분을 느꼈다.
오랫동안 협업해서 만든 ‘작품’을 대중에 공개하는 기대감.
마치 조각을 빚는 예술가처럼 차근차근 준비가 이루어졌다.
‘지난 삶에서는 1년 넘게 수련하고 겨우 데뷔를 했는데.’
지금은 갓 훈련생을 달자마자 곧바로 선수로 데뷔를 하게 되었다. 거기다 러셀 하트를 이끌어주는 파트너의 위치에 서서.
어렸을 적부터 영재 교육을 받은 러셀을 이끄는 입장에 있다니. 그 부분이 또 나를 흥분시켰다.
하지만 캐릭터에 관해 설명할 때 말했듯, 세상에는 좋은 면이 있으면 반드시 나쁜 면도 있는 법.
사건은 GCW 쇼의 촬영이 이루어지기 이틀 전에 터져버렸다.
‘이럴 거라고 생각했지만.’
나는 지금 심기가 무척 불편해 보이는 남자를 앞에 두고 있었다.
피부가 일반적인 백인보다 훨씬 새하얀 붉은 머리칼의 남자.
현재 GCW의 쇼에 출연하고 있는 프로레슬러, ‘셰무스’였다.
이곳에서 2년 동안 시간을 보낸 뒤 메인 쇼로 올라간 그는 미들 카더로 업계의 베테랑이 되었다.
그런 그와 3분짜리 경기를 가지게 된 나는 계획을 짜기 위해 락커룸을 찾아온 상태였다.
레슬링 기어를 갖춰 입은 그는 나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신이라고 했던가?”
“예, 선배님.”
프로레슬링 업계는 여러 이유로 선후배 관계를 크게 중시했다.
내가 베테랑이 되었을 쯤에는 사라졌지만, 2002년인 현재는 심지어 ‘군기’를 잡을 정도였다.
‘모난 돌은 정을 맞지.’
이렇게 될 것이라 희미하게 생각하기는 했지만, 내 ‘활약’이 선배들에게는 딱히 좋게 여겨지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한참 동안이나 분위기를 잡으며 팔목에 테이프를 감은 셰무스가 이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네가 뭐하는 놈인지 보게 복장부터 입어라.”
“이게 제 복장인데요.”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청바지와 러닝셔츠.
의상팀에서 오늘 하루 어떤지 시착해보라며 입게 해준 것이었다. 결과를 말하자면 엉덩이 부분이 딱 맞아 기분이 무척 좋았다.
하지만 셰무스는 그런 내 복장을 병균을 보듯 훑어보았다.
그리고 물었다.
“그게 네 레슬링 기어라고?”
“예, 그렇습니다.”
“좋아, 어떤지 한번 보지.”
마지막으로 비웃었다.
앞장서 락커룸을 나간 셰무스는 바로 옆의 훈련장으로 향했다.
그 뒤를 따라간 나는 훈련장 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GCW의 남성부 선수들을 발견했다.
러셀이나 시나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반쯤 억지로 자리를 비우게 되었음을 알아차렸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현재 GCW의 챔피언에 가장 가까운 남자, 바비 애슐리였다.
“……저놈이야?”
‘다시 봐도 엄청난 근육이군.’
나는 검은 피부 위를 뒤덮은 엄청난 근육에 약간 압도되었다.
그는 저 압도적인 피지컬로 메인 쇼에서 크게 푸시를 받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스케줄의 혹독함을 토로하며 회사를 그만둔다.
“그렇습니다.”
“바쿠가 극찬한 놈이라고? 어디 한번 솜씨를 볼까.”
셰무스의 대답에 그 옆에 있던 다른 선수가 비아냥거렸다.
모두가 날 적대하는 상황.
하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다 아는 사람들이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