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링 앞으로 다가간 나는 선배들에게서 격렬한 환영사를 받았다.
“이 새끼 옷이 왜 이래?”
“어디 난민촌에서 왔냐?”
“게이 포르노라도 출연하면 딱 어울릴 것 같다, 이 새끼야!”
묘한 기분이었다.
스무 명의 프로레슬러들이 날 적대시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다들 내 능력을 궁금해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신참에게 과연 믿고 등을 맡길 수 있는가?
다들 그걸 보고 싶은 거겠지.
‘굳이 이런 방식을 쓰지 않아도 방법은 얼마든지 있지만.’
뭐 어쩌랴.
지금은 2002년이다.
다소 낡았을지언정 이들의 방식에 맞춰주는 편이 좋을 터.
거기다 난 자신도 있었다.
당당하게 링 위로 올라가자 먼저 서있던 셰무스가 목을 우드득 꺾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몸은 다 풀었냐?”
“예, 선배님.”
“체인부터 걸어보자고.”
고압적인 표정으로 이야기한 셰무스가 손을 들어 공방을 주고받기 위한 자세를 취했다.
체인 레슬링.
락 업으로 맞부딪혀 힘을 겨룬 두 선수가 연속해서 관절기를 주고받는 행위를 뜻했다.
대부분의 경기는 체인 레슬링으로 시작되는 게 보편적이었고, 그만큼 중요한 기술이었다.
‘기초 중의 기초지.’
하지만 이걸 맛깔나게 살리며 스토리를 담아내는 건 상당히 난이도가 높았다.
말하자면 프로레슬링계의 오믈렛과 같다고 할까?
간단하지만 깊이를 담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후우.”
그러므로 나는 일부러 링을 크게 돌며 셰무스를 바라보았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해?”
“체인 레슬링이요.”
“……빨리 덤벼.”
“어떻게 처음 상대하는 덩치 큰 레슬러한테 바로 덤벼듭니까?”
그 말에 한순간 내게 향해지던 적대적인 시선이 멎었다.
링 아래의 선배 레슬러들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눈썹을 찡그린 셰무스가 달려들었다.
키 196cm, 체중 110kg.
거구의 백인 사내가 순식간에 내 머리와 팔을 붙잡았다. 나 역시도 그를 똑같이 붙잡았다.
뒤로 약간 밀려났다.
“……?”
거기에 의아해하는 셰무스.
그는 분명 락업을 건 뒤 온 힘을 다해 나를 밀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버텨냈다.
‘나쁘지 않군.’
회귀한 후로 근육만 5kg 가까이 불어났다. 잘 먹고, 잘 자고, 체계적인 운동까지 병행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20kg의 체중 차이를 극복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러므로 나는 ‘기술’을 사용했다.
셰무스가 힘을 줄 때마다 몸을 비틀어 체중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도록 막아냈다. 그 새하얀 얼굴이 순간 당혹감에 일그러졌다.
몇 번이고 힘을 주어 날 밀어내려던 셰무스는 이내 포기했는지 다음 지시를 작게 속삭여왔다.
“……헤드록.”
그와 동시에 팔이 뻗어져왔다.
나는 일부러 놀란 척 물러서며 셰무스의 팔에 붙잡혔다. 그리고 그에게 이끌려 몸을 움직였다.
셰무스는 내 머리를 겨드랑이 아래에 넣은 상태에서 팔을 조였다. 나는 괴로움에 몸부림쳤다.
실제로 그랬다.
‘아, 암내가…….’
거기에 데오도란트가 섞여 누린 잡내가 장난이 아니었다.
……티를 낼 수는 없었지만.
어떻게든 버텨낸 나는 셰무스와 계속해서 공방을 주고받았다.
팔을 꺾고 꺾일 때마다 발을 크게 굴렀다. 셰무스는 눈썹을 찡그린 채 그런 날 바라보았다.
점점 속도가 높아져가는 공방을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따라가고 있어 당황한 것이리라.
그는 나를 떨쳐내기 위해 다음 지시를 내렸다.
“로프 반동.”
체인 레슬링은 경기가 시작한 직후부터 상대보다 우위를 먼저 점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거기에 서로의 수준 차이를 가늠하기 위한 척도이기도 했다.
마치 코믹스에서 히어로들의 강함을 나누는 것처럼 말이다.
즉, 만약 이게 경기였다면 우위를 내주지 않고 체인 레슬링을 주고받는 나는 셰무스와 동등한 위상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었다.
‘어디까지나 가상이지만.’
나는 속도를 높였다.
반대편으로 내던져진 상태에서 로프에 몸을 걸치자 셰무스가 받아 넘기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나는 달려가 그를 뛰어넘었다.
당해주지 않았다.
셰무스는 속도를 높여 이쪽을 엿 먹이려는 속셈이었지만, 호락호락하게 당해줄 내가 아니었다.
“큭!”
셰무스는 진짜로 당황해 입술을 질근 깨물었다.
그럴 만도 했다.
인디에서 굴러먹다온 초짜가 이렇게 깔끔하고 빠른 속도로 체인 레슬링을 주고받다니 말이다.
그렇게 약 10여 분.
끝없이 이어지는 공방을 보다 못한 한 선수가 링 위로 올라왔다.
“셰무스, 내려와.”
“뭐? 아니…….”
“그 정도면 충분히 길들여놨잖아. 좀 쉬고 다시 올라와.”
‘허스키 해릿인가.’
나는 레슬링 기어 위에 큰 셔츠를 걸친 남자를 바라보았다.
키 195cm, 체중 150kg.
허스키는 다부진 근육 위에 살이 뒤덮인, 아주 커다란 체구였다.
지금은 허스키 해릿이라는 무색무취의 악역이었지만, WWF 메인으로 올라가며 새 기믹을 구상해 대박을 치는 선수였다.
‘종교지도자 기믹이었지?’
그걸로 월드 챔피언도 여러 번 지내고 확실한 스타가 되었다.
그런 허스키가 링 위에서 가볍게 몸을 털며 나를 노려보았다.
“그럼, 다시 해보자고.”
다시금 공방이 시작되었다.
‘역시 이거군……!’
셰무스와 락업을 주고받아 체력이 소모된 나는 허스키의 명령에 따라서 움직여야만 했다.
백 바디 드롭.
보디 슬램.
“끄흑!”
어떻게든 낙법을 치며 견뎌냈다.
체력이 빠진 상태에서도 계속 운동을 시키는 레슬링 업계 특유의 ‘후배 길들이기’였다.
나는 계속해서 교대하며 올라오는 선배 레슬러들을 상대했다.
범프 링 위에는 어느 순간부터 쿵! 콰앙! 하는 소리만이 남았다.
갖가지 기술의 향연에 나는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괜찮았다.
‘이럴수록 힘을 내야지……!’
나는 단 한순간도 집중을 멈추지 않았다. 기술의 하나하나를 완벽하게 받아주며 버텨냈다.
계속해서 시간이 지나도 내가 쓰러질 기미를 보이지 않자 선배들은 슬슬 당황하기 시작했다.
개중에서도 특히 놀란 것은 GCW 레슬러들의 대장이었다.
바비 애슐리.
검은 피부 위로 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끝까지 버티고 있는 나를 당혹스러운 듯 바라보았다.
거기에 대고 나는 숨을 헉헉 몰아쉬면서도 허리를 들었다.
“이제, 뭘 할까요?”
“…………여기까지.”
긴 침묵 끝에 대답이 나왔다.
선배들은 뒷맛이 개운치 못한 얼굴을 한 채로 돌아섰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그들이 훈련장을 나갈 때까지 서있었다.
그리고 쓰러졌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범프 링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들려오는 것은 내 숨, 심장 소리와 낡은 링이 삐걱대는 소리.
어느새 노을이 지고 있었다.
‘감상에 빠지려는 건 아니고.’
대충 두 시간쯤 했나?
버텨낸 게 용하군.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향후가 고달파질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반항을 하게 되면 팀플레이가 중요한 이곳에서는 독밖에 되지 않을 테고.
‘나름대로 잘 풀었나?’
그렇게 고민하려던 찰나, 머리 위로 뭔가가 불쑥 들이밀어졌다.
그와 함께 촤악, 하고 얼굴에 얼음처럼 차가운 생수가 부어졌다.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하는 거야.”
“괜찮냐?”
러셀이었다.
“불링Bullying이야?”
그리고 이 순진한 청년은 미래의 아이콘 숀 시나.
“아니야.”
짧은 대답과 함께 러셀이 내민 팔을 잡고 일어선 나는 시나에게서 생수를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신고식이지.”
“질투해야 하는 거야, 시나. 선배들이 이제부터 준을 아주 예쁘게 봐줄 생각인 것 같거든.”
“바꿔주랴?”
“사양할게.”
러셀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지금 상황이 ‘독이 든 성배’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는 거겠지.
‘100kg은 기본으로 넘어가는 덩치들의 관심(물리)라니.’
하지만 잘 나가는 놈으로서 어쩔 수 없는 숙명이었다.
* * *
바비 애슐리.
전前 대학 아마추어 레슬링 선수 출신.
졸업 후에는 보디빌딩에 잠시 심취했다가 곧바로 프로레슬링 업계에 투신했다.
GCW에서 3년째 선수로 활동한 그는 왠지 모르게 온몸에 힘이 불끈불끈 차오르는 걸 느꼈다.
“흠…….”
좁아터진 락커룸.
스무 명의 선수들 중 열다섯 명이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고개를 든 바비는 남겨진 선수들의 면면을 자세히 확인했다.
셰무스.
빅 티카.
모호크.
고릴라 무스.
선역, 쟈니 에이스와 악역, 스니키가 메인 쇼로 ‘콜 업’된 후, 현재 가장 GCW 챔피언에 가깝다고 여겨지는 다섯 사람이었다.
경력도 나름대로 길었고 모두가 실력이 출중한 베테랑이었다.
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큰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메인이벤터였던 두 사람이 순식간에 위로 올라갔기 때문이었다.
시청률과 관객수는 내려갈 테고, 그렇게 되면 상부에서 자신들에게 ‘스타성이 없다.’라고 판단을 내려 해고를 당할 위험이 커진다.
그렇기에 락커룸 내부에는 한동안 불편한 침묵이 맴돌았다.
훈련을 할 때도 집중하지 못해 얼마 전 한 명이 발목이 삐는 작은 부상을 당했다.
이것은 애들 장난이나 취미 활동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서든 결과를 내야만 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는, GCW의 수뇌부들과 함께 일하는 다른 동료들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와중 찾아온 바쿠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계획을 설명했다.
그 아이디어를 낸 건방진 신인에 대해 듣고 한번 알아보자고 한 것이 오늘 아침의 일.
‘별 미친놈이 들어왔군.’
바비는 몸의 탄력을 느끼고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좋은 레슬러는 상대를 다치게 하지 않는다. 거기에 상대를 편하게 만들어준다.
총 스무 명을 연달아 상대하면서도 그 꼬맹이는 절대 그 두 가지 사항에서 실수하지 않았다.
덕분에 다들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운동을 했다.
그리고 그게 그 신인 놈의 수작이라는 걸 안 다섯 사람만이 락커룸에서 곱씹고 있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27세의 백인 레슬러, 모호크였다.
“그 자식, 출신이 어디라고?”
“차이나겠지.”
“헛소리 하지 말고.”
인종적인 농담을 건네는 동료를 힐난한 그가 반응을 살폈다.
“음…… 어디 출신인지는 잘 모르겠고, 인디에서 3년인가 선수생활 하다가 왔다고 하던데.”
“그런 놈이 기술을 저렇게 받아낸다고? 대체 뭐하는 놈이야?”
그런 말에 쉽사리 대답하지 못한 레슬러들은 고민에 빠졌다.
뒷맛이 개운하지 못했던 것은, 준호가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너무나도 잘해냈기 때문이었다.
본인들은 인정하지 못했지만, 오늘 레슬러들은 준호에게 오히려 ‘가르침’을 받은 셈이었다.
힘을 주지 않고 상대를 넘겼을 때의 느낌. 재빠른 공방 속에서 기술을 거는 완벽한 타이밍.
때문에 어리둥절했고, 인정하지 못한 채 계속 골머리를 앓았다.
그런 모습들을 지켜보던 바비는 라커룸 리더로서 결론을 내렸다.
“내일 오전에 한 번 더 불러.”
“음, 그다음 날이 바로 촬영 날인데 괜찮을까?”
“오늘만 해도 웃으며 버틴 놈이잖아. 알아서 책임지겠지.”
자존심 부려 버티고 버티다 체력의 한계가 찾아와 무너졌을 때의 반응이 한번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