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다시 선배들에게 불려간 나는 토악질이 나는 훈련을 한 번 더 하고 있었다.
이가 갈렸다.
하지만 설령 눈앞에 있는 것이 150kg이 넘는 거구의 사내라고 할 지라도, 도망칠 수는 없었다.
왜?
‘한 번 도망친다면 두 번 그러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거든.’
때문에 버텨볼 생각이었다.
내 계산이 맞는다면 몸에 무리는 가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간다! 백 바디!”
“큭……!”
나는 로프 반동을 통해 쿵쿵 대며 달려오는 허스키 해릿 앞에서 허리를 숙였다.
근육통으로 몸이 삐걱거리며 말을 듣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무릎에 손을 대고 뒤로 넘겼다.
백 바디 드롭.
“끄흑!”
그 무게는 팔을 쓰지 않으면 허리가 나갈 정도로 무거웠다.
하지만 나는 허스키를 최대한 높이 던졌다. 그래야만 그가 낙법을 쉽게 치기 때문이었다.
만약 애매하게 던졌을 경우에는 낙법을 칠 시간이 부족해서 목을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그렇게 기본적으로 어제 했던 방식의 훈련을 그대로 반복했다.
하지만 조금 달라졌다.
“끄으윽!!”
“뭐야, 고작 이 정도냐!”
나는 어제와 달리 셰무스의 완력에 그대로 밀려 물러났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소위 말하는 ‘알’이 배긴 것이다.
심한 운동으로 근육이 찢어져 회복 중인 상황이었다. 이런 날에는 목욕과 얼음찜질, 가벼운 운동 등으로 회복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식이지만…….
물론 오늘은 그럴 수 없었다.
쿠앙!
쾅!
돌아가면서 나를 상대해 체력이 넘쳐나는 선배들은 어제보다 더 혹독한 방식으로 나를 상대했다.
내가 버티고 설수록 그들은 더 큰 기술로 나를 상대했다. 하지만 나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 ‘한 번, 두 번’ 어쩌고 하는 이유도 있었지만.
‘솔직히 좀 열 받거든.’
이처럼 누군가 날 찍어 누르려는 상황은 이미 전생에 지긋지긋하게 겪어본 것이었다.
WWF 회장인 바트 맥센, 프로듀서, 그 밖의 각종 높으신 분들.
이제는 그런 자들에게 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꾹 참아냈다.
그냥 웃었다.
……왜, 일류는 힘든 상황에서 웃는다고 하잖아? 그런 느낌으로.
사실 너무 힘들어 어떻게든 버텨보려는 헛짓거리였지만 말이다.
그렇게 오전 내내 시달린 나를 도와준 것은 바쿠였다.
정확히 12시 반.
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나를 한창 가지고 놀던 선배들을 툭툭 건들며 쫓아내려고 들었다.
“니들 점심 안 먹냐?”
“조금만 더 하고요.”
“뭘 조금만 더 해. 식당 아줌마들 음식 다 버리려고 하니까 어서 가서 먹고 나와라.”
“조금…….”
“어서 가.”
말 뒤쪽에 ‘내가 너희를 죽여버리기 전에.’를 빼먹은 듯했다.
실전 싸움 최강자인 바쿠의 말에 현직 프로레슬러들도 꼬리를 말고 제각기 빠져나갔다.
링 위로 올라온 바쿠는 포스트에 기대어서있던 내게 다가왔다.
“할 만하냐?”
“여기가 지옥이라고 생각하면 그럭저럭 버틸 만하네요.”
“짜식,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내가 쏠 테니까.”
“밖에 나가자고요?”
“그래, 이대로 뒀다가는 내일 경기 있는데 너 링에 올라가지도 못할라. 어서 샤워하고 나와.”
그 말을 따른 나는 락커룸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
확실히 내일 경기를 위해서는 이 정도에서 멈춰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옷을 갈아입고 나가자 바쿠가 이미 차를 빼놓은 상태에서 서있었다.
조수석에 올라타 안전벨트를 매자 그가 웃으며 물었다.
“뭐 먹을래?”
“김치찌개 같은 거요.”
반쯤 정신이 희미해져 있던 나는 되는 대로 대답했다. 거기에 바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킴치, 뭐?”
“김치요. 김치.”
김치찌개.
한인 2세로 태어난 나는 부모님과 함께 살 때는 한식도 가끔 먹고는 했다. 왠지 그게 생각났다.
물론, 지금 조지아에 코리안 식당이 있더라도 제대로 된 게 있을 리는 만무했지만 말이다.
“농담이에요. 그냥 이 근처에 햄버거나 먹으러 다녀오죠.”
“그, 그래.”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하던 바쿠는 이내 브레이크에서 발을 뗐다.
‘이제 좀 쉴 수 있겠군.’
딱딱한 의자에 몸을 뉘인 나는 한바탕 샤워를 했음에 아직도 심장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내일 경기는 고작 3분짜리라서 크게 걱정이 없었지만, 몸의 피로감이 다소 부담스럽기는 했다.
그걸 알았는지 바쿠 역시도 도로에 나서자마자 물어왔다.
“몸은 좀 괜찮냐?”
“언제나 백 퍼센트로 경기에 임할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
“어떻게든 3분 동안 버텨봐야죠. 그래도 덕분에 이틀 동안 열심히 기술 연마 했습니다.”
“하하하, 우리 바보들도 네 실력을 보고 좀 놀랐을 거다.”
“……보고 있었으면 말려주시지.”
“쉽게 말을 듣게 하려면 적당히 만족한 시점까지 놔둬야 했지.”
“그냥 하나 붙잡고 얼굴 뭉개면 다들 말 들었을 텐데요.”
“으하하하! 우리 소중한 선수들한테 어떻게 그렇게 하냐!”
‘선수는 안 때리나보군.’
나는 약간 안심(?)했다.
밴은 한적한 도로를 내달렸다.
이 틈에 좀 물어봐둘까.
“쇼 준비는 어떻습니까?”
“다들 잘해주고 있다. 잠은 못 자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그보다 신기한 게 뭔지 아냐?”
“뭔데요?”
“다들 네가 온 뒤로 신기한 일이 자꾸 벌어진다고 하더라.”
“제가요?”
“그래, 우리 쇼에 부족한 화제성이 덕분에 채워지게 되었어.”
“뭐어……. 온전히 제가 한 일은 아니죠.”
대부분이 바쿠 선생님의 주먹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
강도를 당하던 코너 일가족을 구해준 것 말이다.
사람을 주먹으로 몇 대 패고 머리 좀 움켜쥐니 싸늘한 시체처럼 되더라.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지. 내일 쇼도 오랜만에 다들 기대해서 준비하고 있어.”
중얼거린 그가 오디오를 틀었다.
“……?”
순간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지난번에 밴에 탔을 때 바쿠의 노래를 들었던 게 떠올랐다.
[컨트리 로드여~ 나를 집으로 데려가주시오~ 웨스트 버지니아의 마운틴 마마여~.]
그 주먹만큼이나 매서운 노래 솜씨였지. 하마터면 고막이 파열 당할 뻔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다소 긴장하고 있자……. 뜻밖에도 흘러나온 것은 아아- 하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바쿠, 이건?”
“네 테마송이다.”
“…….”
다른 의미로 눈이 뜨였다.
신성한 멜로디.
마치 중세 시대의 그레고리아 성가처럼, 남자의 목소리가 우아하게 울렸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종교적이고 신성한 분위기의 보컬 아래에서부터 힘찬 일렉트로니카 비트가 타고 올라왔다.
종교와는 정반대.
날카롭게 찢어지는 소음.
그리고 장엄하게 찬미하는 음성.
그 두 가지가 섞이며 하나가 되었다. 그로써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강렬한 분위기의 멜로디가 연주되기 시작했다.
“……죽이는데.”
나는 미소를 지었다.
프로레슬링의 테마곡에서 가장 중요한 것, 그 두 번째.
이처럼 ‘따라 부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의외로 이게 충족되는 노래는 많지 않았다.
마치 스포츠의 응원가처럼 특정한 멜로디에 따라 야유를 보내고 선수를 응원할 수 있는 노래.
내 테마송은 그것을 아주 확실하게 충족하고 있었다.
“좋게 들리냐?”
“네, 멋진데요.”
“이거 만드느라 음향팀장 일주일 밤새고 지금 링거 맞으러 갔다. 나중에 고맙다고 말해.”
“이 빚은 꼭 갚아야겠군요.”
“나한테는 좀 이상하게 들리는데……. 뭐, 젊은 놈들 귀에만 좋으면 그걸로 됐지.”
바쿠는 뺨을 긁적였다.
“그 음향팀장 놈도 갑자기 자기를 살리에리에 비유하질 않나.”
“살리에리요?”
“그래, 모차르트의 스승인 안토니오 살리에리 말이다.”
“그럴 만하죠.”
“응?”
“아뇨, 아무 것도.”
나는 가볍게 대답을 회피했다.
10년 후에나 스타가 되는 천재, 스컬렉스에 대해서 설명해도 알아들을 리가 없겠지.
잠시 침묵하던 바쿠는 이윽고 조수석 밑의 글러브 박스를 손으로 가리켰다.
“거기 열어봐라.”
그 말에 안을 확인하자 파일철이 하나 나왔다.
“연출팀에서 네 입장 씬의 스토리보드를 구상해봤다는데 어떤 게 좋을지 한번 골라봐.”
“……이것도 밤 샜겠는데요.”
“그쪽도 테마곡하고 네 기믹을 보더니 아이디어를 계속 쏟아내더라. 할리가 말하기를 예산 맞추느라 힘들었다고 하던데.”
“흐음.”
이게 기대 받는 신인에게 주어지는 혜택이라는 건가.
나는 어깨가 으쓱한 것을 느끼며 스토리보드를 확인했다.
자욱하게 깔리는 연기.
‘이건 좋군.’
관에서 일어나는 시퀀스.
‘이건 거르고.’
조명은 빨간색.
‘흡혈귀 기믹이 아니라고.’
지금 시대에 그런 기믹을 사용했다가는 단숨에 긱GEEK 취급이나 받을 게 뻔했다.
“어떠냐?”
“다 나쁘진 않은데. 처음이니까 심플하게 가는 편이 좋겠네요.”
“의견 말해주면 연출팀에 가서 전해주마. 그대로 말해봐.”
“연기 깔고, 조명은 어둡게.”
“등장 연출은 다 빼고?”
“저 악역이잖아요.”
“뭐, 그건 그렇지.”
악역은 선역을 돋보이기 위해 일반적으로 연출을 수수하게 가져가는 게 보통이었다.
현재 WWF의 탑힐로 군림하는 ‘트리플H’ 정도의 압도적인 악역이 아니라면 말이다.
“제가 나중에 탑힐이 되면 그때나 화려하게 연출해주십쇼.”
“신이 났구나. 꼬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날 위해 밤을 샌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걸 알게 되자 지금 당장 시합이 하고 싶을 정도였다.
준비는 모두 다 끝났다.
이제 남은 과제는 쇼에 나가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일뿐이었다.
* * *
GCW의 ‘썬더’는 오늘부로 273회 에피소드가 반영되는 주간 프로레슬링 쇼였다.
햇수로는 대략 5년째.
토요일 밤에 생방송되며 시청자 수는 0.7% 남짓. 산하 단체인 것을 감안하면 좋은 수치였다.
하지만 썬더는 몇 가지 기형적인 문제로 인해 전문가들에게 그다지 좋은 평을 받지 못했다.
첫 번째는 WWF의 이름을 등에 업은 쇼라는 것. 썬더 자체의 브랜드 가치는 떨어진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메인 콜 업’이 시청률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점.
실제로 GCW는 출연하는 레슬러가 사라지며 쇼가 휘청거릴 정도의 위기를 많이 겪어왔다.
그때마다 인력을 갈아 넣고 스타를 발굴하며 어떻게든 버텨왔지만…… 이번 위기는 꽤나 컸다.
전생에서도 내가 입사하는 내년까지도 좀처럼 시청률을 터뜨리지 못해 사람들이 괴로워했었다.
‘하지만 그건 전생의 일이지.’
이번에는 다르다.
나는 내 손으로 이 쇼를, 황금기의 시청률이었던 3.0%를 넘어설 정도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 재료는 많았다.
메인에 올라가 승승장구하는 미래의 슈퍼스타들.
그들이 있다면 가능하겠지.
그리고 오늘은 그 시작이었다.
[GCW 새터데이 나이트 썬더! 지금 바로 출발합니다!]
정장을 입은 해설자가 500명 남짓한 관객들을 향해 열변을 토하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음향팀에서 우리 쇼의 메인 테마곡을 연주했다.
카메라팀이 링과 관객들, 세트장을 비추며 방송을 시작했다.
쇼는 오늘 ‘하트 던전’에서 데뷔한 유망주, 러셀 하트의 인터뷰로부터 시작되었다.
음악이 연주되는 사이 세트 뒤쪽의 고릴라 포지션에서는 분주하게 그 준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지휘관인 할리 레이시가 말했다.
“러셀 쪽은 준비됐나?”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음악 끝내고 바로 들어가게 해! 어이! 거기 꼬마!”
고개를 끄덕인 할리가 날 돌아보았다. 직원들 역시도 가만히 서있던 날 바라보았다.
“멋지게 해내라!”
오늘 내 첫 번째 역할은 바로 러셀 하트를 습격하는 것이었다.
“맡겨만 주세요.”
나는 탄흔으로 범벅이 된 재킷을 걸친 채 씨익 웃어 보였다.
일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