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GCW의 경기장 건물에는 쇼의 촬영을 돕기 위한 갖가지 부가 시설들이 다수 갖춰져 있었다.
개중 하나가 쇼에 삽입될 프로모를 촬영하기 위한 방이었다.
프로모는 ‘판촉물’이란 의미에서 알 수 있듯, 쇼와 경기를 기대하게 만들기 위한 모든 걸 뜻했다.
선수 인터뷰, 백스테이지 난투극, 솔로, 듀오, 트리오로 이어지는 마이크워크 등이 그러했다.
방 안에 각종 물품들이나 GCW의 로고를 크게 박은 커튼을 두어 공간을 속인 것이 특징이었다.
화면에 잡히지 않는 공간에서 다른 선수들이 대기하고 있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자면 나도 그랬다.
나는 난입을 위해 커튼 뒤쪽에 서서 인터뷰를 지켜보고 있었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여성 인터뷰어와 러셀의 모습이 보였다.
하트 가문의 번개 문양이 들어간 레슬링복을 입은 러셀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그걸 본 카메라 감독은 덥수룩한 수염을 매만지며 낄낄 웃었다.
“긴장되나, 꼬마?”
“조금 그러네요.”
“걱정 마. 적당히 한두 마디 주고받을 때쯤 난입할 테니까.”
“열심히 버텨보겠습니다.”
러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녀석과 한순간 눈이 마주친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사실 걱정할 건 없었다.
저래 보여도 러셀은 전생에 꽤나 달변가였다. 게다가 지금은 좀 긴장을 해도 괜찮은 상황이었다.
‘좋은 연기를 위해서는 스스로 그 사람이 되어야만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선수 데뷔로 긴장한 청년’은 지금의 러셀 하트에게 딱 맞는 옷이라는 거다.
문제는 나였다.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막상 무대에 오를 순간이 오자 갑자기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이래서야 ‘뒷골목에서 온 자신만만한 악당’ 연기는 할 수 없었다.
아무리 GCW 직원들이 좋다고 말했어도, 전문가들의 의견과 관객들의 의견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 진정한 시험대에 오르게 된 셈이었다.
아무리 실력이 좋아도.
말을 잘해도.
레슬링 솜씨가 출중해도.
‘동양인인 내가 다른 인종의 관중들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그게 다시 발목을 잡았다.
수도 없이 겪어본 일이었다. 누구도 내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백인 챔피언을 돋보이게 만들기 위한 스테레오 타입 동양인.
우스꽝스러운 광대.
푸-만추 수염을 기른 남자.
그게 나였던 것이다.
‘마스크라도 쓸 걸 그랬나.’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을 떠올렸던 나는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또 도망칠 수야 없지.
일단 집중하고 나를 믿자.
방 안의 모니터링TV로부터 실시간으로 촬영된 쇼가 흘러나왔다.
쇼의 오프닝 영상이 끝났고 GCW 챔피언십의 다음 주인을 가린다는 내용의 프로모가 나왔다.
‘이제 16강 대진표.’
영상팀에서 제작한 대진표가 나왔다. 하지만 거기에 두 선수의 모습은 물음표 처리가 된 채였다.
그것을 확인한 해설자가 의아한 듯 말을 이었다.
[왜 두 자리가 비어 있죠? 짐?]
[새 튀김은 새 접시에 담아야죠. 아주 강력한 우승 후보 두 명이 오늘 GCW에 참전했습니다. 광고 방영 후에 바로 돌아오죠!]
광고가 시작되었다.
문 바깥에 서있던 직원 하나가 지휘부의 지시를 받고는 소리쳤다.
“잭! 광고 끝나고 바로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해주세요!”
“좋아! 새끼들아! 어디 한번 저 엉덩이가 먹음직스럽게 잘 빛나도록 환상적으로 닦아보자고!”
프로레슬링 특유의 거친 표현.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직원들은 러셀 하트를 빛내기 위해 준비를 시작했다.
반사판이 들렸고, 카메라가 돌았다. 마이크가 가까이 다가왔다.
감독이 손을 뻗었다.
“3, 2, 1, Go!”
어마어마한 침묵.
미소를 지은 인터뷰어가 클로즈업 되었다. 마이크를 쥔 그녀는 낭랑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신사숙녀 여러분, 환영해주십시오. 오늘 막 입단서에 사인한 슈퍼스타, 러셀 하트입니다.”
러셀이 앞으로 나섰다.
카메라는 러셀의 모습을 한 번 크게 잡고는 이내 인터뷰어와 함께 두었다. 카메라는 살짝 로우 앵글로 찍어 러셀의 포스를 강조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러셀! 모두가 명문가의 후계를 환영하고 있는데요. 소감이 어떠신가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입단하자마자 챔피언이 될 기회를 얻으셨는데 소감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착하고 올바른데다 순박한 청년.
그것이 러셀의 기믹이었다.
“오늘 상대는 GCW의 베테랑인 고릴라 무스 선수인데요. 혹시 각오라도 한 말씀…….”
바로 그때, 내게 신호가 왔다.
‘지금이다.’
나는 재킷 앞섶에 꽂아두었던 선글라스를 낀 뒤 앞으로 나섰다.
최대한 껄렁껄렁하게.
“뭐야, 나한테는 말도 안 하고 지금 인터뷰하고 있는 거야?”
카메라 앞을 가리며 앞으로 나섰다. 나는 미리 생각해두었던 대로 인터뷰어의 옆에 섰다.
그리고 허리를 숙여,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 저, 저기.”
“나도 오늘 이 냄새나는 곳에 오게 됐는데, 왜 저딴 ‘도련님’의 인터뷰나 하고 있는 거야?”
“아, 아니…… 당신 인터뷰는 바로 다음에 잡았잖아요!”
“그랬나? 이거 실례했군.”
나는 가벼운 장난이었다는 듯 낄낄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러셀이 앞으로 나섰다.
나는 다리를 살짝 벌려 녀석과 키를 비슷하게 맞췄다. 그는 감정을 억누른 채 날 노려보았다.
“넌 뭐냐?”
“혹시 영어 못해? 말했잖아. 오늘 계약서에 사인했다고.”
“무례한 놈. 당장 이 여성분을 위협한 것에 대해 사과드려라.”
“흐음……. 안 그러면?”
“내가 널 흠씬 패줘야겠지.”
러셀은 위협적으로 말했다.
거기에 잠시 침묵을 지키던 나는 이내 항복의 의사 표시로 팔을 들어 올리며 뒤로 물러섰다.
“너무 진지하게 굴지…….”
그리고 다음 순간, 러셀의 다리 사이를 힘차게 걷어찼다.
“말라고!”
갑작스러운 기습.
브레이킹 볼.
“크헉!”
“이거 뭐하는 놈이야?”
피식 웃은 나는 움츠린 러셀의 뺨을 밀어 바닥에 쓰러지게 만들었다.
“난 너처럼 세상물정 모르고 정의로운 척하는 도련님이 세상에서 제일 싫거든?”
“엇……?!”
그리고 인터뷰어의 마이크를 빼앗아 러셀의 머리를 후려쳤다.
쿵! 쿵! 하는 소리.
하지만 그건 모두가 ‘연기’였다.
카메라는 내가 마이크를 내리치는 모습만을 화면에 담아냈다.
그사이, 러셀의 얼굴에 분장팀의 직원이 가짜 피를 발라주었다.
경기 중에는 보통 진짜로 ‘째는’ 방식을 사용하지만, 지금은 영상이기 때문에 꼼수를 부렸다.
사람들은 마이크가 쿵쿵 울리는 소리를 듣고 자연스럽게 러셀이 얻어맞는 광경을 상상할 터.
그렇기에 나는 일부러 더 세게 소리가 나도록 마이크를 내리쳤다.
“자, 잠깐만요! 그만!”
보다 못한(사실은 신호가 떨어졌기 때문이었지만) 인터뷰어가 말릴 때까지 말이다.
“후우.”
몸을 일으켜 세운 나는 선글라스를 밀어 올림과 동시에 카메라를 위협적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신이라고 하네.”
과장된 연극 톤.
러셀의 예의 바른 말투를 조롱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나 자신이 누군지 소개했다.
뒷골목에서 살아남은 쓰레기.
승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는 비겁한 악당.
“오해는 말아달라고? 확실하게 미국인이니까 말이야. 오히려 가장 미국인다운 남자가 바로 나지.”
나는 일부러 그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사람들이 먼저 그런 인식을 가지고 날 봐줬으면 했다.
부모님은 아니었지만, 나는 확실하게 토종 LA 미국인이었다. 미국에서 태어나 평범하게 자랐다.
가끔 매체에 동양인이 나오면 사람들이 흔히 하는 이야기.
‘어디 나라 사람이에요?’
이런 인종적인 편견을 차단하며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었다.
“왜 이러냐고? 난 저렇게 잘난 척하는 놈들을 싫어하거든. 그리고 어떻게든 엿을 먹여야만 직성이 풀리는 종류의 잔인한 인간이지.”
나는 자신만만한 목소리로 나 자신에 대해 소개하기 시작했다.
“저 도련님께서 말씀하실 법한 명예니 신의니 하는 건 난 모르겠고. 하나는 확실히 약속하지. 나는 역사에 승자로 기록될 거야.”
마지막 말은 반쯤 진심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좀 더 감정을 담아서 이야기할 수가 있었다.
카메라 옆으로 사라지듯 퇴장.
뒤로 물러선 나는 카메라가 쓰러진 러셀을 비추는 걸 확인했다.
그는 이마에서 피를 주륵 흘리고 있었다. 일부러 좀 과도한 연출을 사용했다.
“러셀, 러셀! 괜찮나요?!”
마이크를 든 인터뷰어가 가까이 다가오며 자연스럽게 화면이 페이드아웃 되었다.
카메라 감독이 박수를 쳤다.
“자, 끝.”
“수고하셨습니다!”
인터뷰어가 밝게 소리쳤다.
“아주 멋진 프로모였다.”
“생방이라서 좀 불안했지만 어떻게든 잘 풀렸네요.”
보통 프로모 같은 건 사전에 촬영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이번에는 그럴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거기에 동의하며, 나는 가짜 피를 닦아내고 있는 러셀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으켜 세워주었다.
“……너무 세게 때린 거 아니야?”
“미안, 나도 좀 긴장해서.”
사실이었다.
하지만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것을 각본으로서 풀어내자 그럭저럭 긴장이 풀리는 걸 느꼈다.
‘괜찮았어.’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이제는 반대로 기대가 되는 것을 느꼈다.
“관객 반응이 어떨지 궁금한데.”
허나 내 긴장했다는 말을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는지 러셀은 피식 웃어 보일 뿐이었다.
우리의 첫 프로모가 나갔다.
관객의 반응은 미지수였다. 반응이 정말 좋으면 벽을 넘어서까지 들려오지만 그 정도는 아니었다.
명문가의 올바른 청년에게 사람들이 얼마나 열광해줄지.
비겁하고 더러운 신에게 얼마나 야유를 보내줄지.
“이제 확인해봐야지.”
링으로 나갈 때였다.
* * *
잠깐 진정한 뒤 링 바로 뒤편의 고릴라 포지션에 도착하자 GCW의 해설가, 짐 로켓과 데이비 도슨이 열변을 토해내고 있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첫 번째 경기였던 바비 애슐리와 빅 티카의 경기가 더블 KO로 끝이 나다니요! 그만큼 선수들이 타이틀을 열망하고 있다는 거죠?”
“남자의 싸움입니다. 챔피언이라는 왕좌에 오르기 위해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겁니다.”
‘맛깔 나는 해설이군.’
모니터를 힐끔 훔쳐보자 관객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거기에 커튼 뒤에서 사람들이 열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의 관객 숫자는 사실 좀 적은 편인데, 그걸 순간 잊을 정도로 뜨거운 반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웃자, 뒤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키드, 셰무스.”
고개를 돌리자 바쿠가 서있었다. 그는 나와 줄곧 옆에 서있던 셰무스를 데려와 함께 서게 했다.
“둘 다 준비는 됐지?”
“예, 바쿠.”
“걱정 마세요.”
“첫 경기가 생각보다 일찍 끝났어. 원래 3분에 2분 더 해서 5분 뒤에 러셀이 난입할 거다. 그때까지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려봐.”
“알겠습니다.”
“좋아. 쇼를 훔쳐봐라.”
고개를 끄덕인 바쿠는 우리 둘의 등을 한 번씩 크게 후려쳤다.
등뼈가 박살 나는 듯한 충격 덕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뒤로 돌아선 나는 마지막으로 몸을 풀고 있는 셰무스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선배, 어떻게 할까요?”
사실 우리는 이제껏 제대로 된 회의 한번 하지 않았다.
나는 그 이유가 뭔지 대강 알 것 같았지만 일단 물어봤다.
그러자니 셰무스는 그런 내 질문에 똑바로 눈을 마주쳐왔다.
“내가 리드할 테니 잘 따라와.”
“방향이라도…….”
“오, 여기가 그 잘나신 인디 링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거냐?”
“그건 아닌데요.”
“그러면 초짜로서 선배 리드에만 잘 맞춰. 못하면 죽는다.”
“뭐, 그렇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대화가 통하지 않으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아직 신입 길들이기는 끝나지 않은 모양이로군.’
하지만 뭐, 그렇다면 다른 다양한 수단을 사용하면 그만이었다.
27살의 청년 셰무스는 꿈에도 모를 것이다. 내가 이런 상황을 얼마나 많이 겪어왔는지를 말이다.
무시 받고 천대 받는 자버로서 나 자신을 조금이라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 어떻게 했는지.
“먼저 간다.”
선배인 자기가 먼저 입장해야 한다는 점에서 셰무스는 또한 기분이 나쁜 거겠지.
그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셰무스는 붉은 레슬링 기어를 입은 채 커튼을 걷고 나갔다.
그다음은 내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