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21화 (21/634)

21.

드디어 내 차례였다.

기나긴 실패를 맛본 뒤 돌아온 이번 생애, 선수로서는 첫 번째 입장.

“후우.”

길게 심호흡을 한 나는 눈을 감고선 온전히 정신을 집중했다.

커튼 너머에서는 내 상대인 셰무스의 입장이 막 끝난 직후였다.

사람들이 악역 캐릭터인 그에게 드물게 환호를 보낸 것 같다……고 느낀 것은 내 설레발일까?

만약 사람들이 정말로 셰무스라는 선수에게 환호를 보냈다면 이유는 몇 가지 없었다.

셰무스가 선/악역을 넘어서 존중을 받을 정도의 거물이거나.

아니면.

‘그 상대가 너무나도 개자식이어서 제발 이겨줬으면 하거나.’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가 의도했던 대로 프로모가 확실히 먹혔다는 말이겠지.’

그걸 확인하고 싶어졌다.

나는 곧바로 뒤를 돌아보았다.

지켜보던 할리가 오케이 사인을 내렸다. 그러자 음향팀에서 기기를 조작해 내 음악을 재생시켰다.

탄흔투성이인 재킷을 점검한 나는 곧바로 나갈 준비를 했다.

그러자 문득, 거물이었던 한 선배로부터 오래전 들은 말이 떠올랐다.

우리는 연기자다.

우리는 스포츠 선수다.

우리는 만들어진 상품이다.

우리는 현실의 슈퍼 히어로다.

‘우리는 프로레슬러다.’

그것은 이 일을 할 때 절대로 잊어선 안 되는 사실이었다.

내 테마곡이 시작되었다.

남자의 묵직한 허밍.

그 뒤를 잇는 날카로운 멜로디.

다소 느릿하면서도 확실히 자신의 색을 가진 멋진 곡이었다.

나는 멜로디와 허밍이 겹쳐지는 타이밍에 맞춰, 당당히 커튼을 걷고 바깥으로 나갔다.

링으로 향하는 입장로 위.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나는 씨익 웃으며 관객석을 확인했다.

[Booooooooooooooo!]

어마어마한 야유가 쏟아졌다.

나는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긴장이 한순간 싹 가시며 공연자로서의 피가 끓어올랐다.

‘그래, 이거지.’

이제야 확인이 되었다.

나와 러셀의 프로모는 완벽하게 먹혀들었다. 나는 관객들의 반응에서 완벽하게 그것을 느꼈다.

발밑으로 자욱하게 연기가 깔렸다. 등 뒤의 거대한 스크린에는 역십자가 새겨진 ‘SIN’이라는 글자가 나왔다.

나는 어슬렁어슬렁 걸어 링으로 향했다. 모든 관객들이 나를 욕하고 야유를 보냈지만 무시했다.

악역으로서 완벽한 데뷔였다.

링 가까이 다가가자 링 아나운서가 큰 소리로 나를 소개했다.

“그 상대는! 뉴욕 브루클린 출신! 190센티미터에 105킬로그램!”

다소 과장된 신체 스펙.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시이이이이이이인~~~~~!!”

링 아나운서는 내 이름을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소개했다.

평소에 저런 말을 듣는다면 조금 오그라들겠지만 여기는 현대의 콜로세움인 링 위였다.

전장에 출진할 때 우렁찬 북을 치듯이, 남성적인 소리를 내서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것이다.

음악 소리, 관중들의 야유와 함께 아나운서의 멘트는 내 귓가에 때려 박혀 심장을 후려쳤다.

나는 링 위로 올라갔다.

그때까지도 줄곧 내 손은 주머니에서 빠질 줄을 몰랐고, 거만하게 셰무스를 지나친 나는 링 포스트를 밟고 위로 올라갔다.

힘차게 팔을 펼쳤다.

[Boooooooooooooo!!]

끝없이 쏟아지는 야유 속에서 나는 재빠르게 판단을 내렸다.

지금 관객들은 내가 얻어터지는 것을 무척 기대하고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악역인 셰무스에게마저 큰 환호를 보내준 거겠지.

하지만 모처럼 상황이 이렇게 됐는데, 사람들의 환호를 악역인 셰무스에게 향하도록 유도하는 것은 큰 손해가 아닐까.

그렇기에 우리 생각은 맞았다.

‘러셀 본인이 나서야지.’

그게 맞는 방향성이었다.

지금 분위기대로라면 러셀이 나올 때까지 5분 동안은 내가 비겁한 행동을 취해 관객을 더 기분 나쁘게 만드는 것이 맞았다.

‘문제는 셰무스 본인이 날 그렇게 놔둘 것 같지 않다는 건데.’

링 포스트 위에서 내려온 나는 전과 다름없이 차갑게 눈을 빛내는 셰무스를 보면서 생각했다.

‘이를 어쩐다.’

일단 재킷을 벗었다.

심판이 룰을 설명하고, 링 벨이 울렸다. 셰무스는 한 수 가르쳐주겠다는 듯 나를 노려보았다.

멋지게 야유를 받은 것과는 별개로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었다.

협조할 마음이 없는 상대와 레슬링 경기를 해야 하다니 말이다.

게다가 지금 셰무스는 경기에 대해서 나와는 정반대의 생각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거구를 앞세워 달려드는 모습만 보아도 대충 견적이 나왔다.

녀석과 나는 세차게 부딪혔다. 근육통의 여파로 몸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아 휘청거렸다.

녀석 역시 그것을 알고 있을 터.

그럼에 이처럼 전력을 다해서 부딪혀왔다는 사실은…….

“버텨, 인마.”

링 위에서 나를 찍어 눌러 개망신을 주겠다는 의미일 터였다.

하지만 건방진 신인에게 참교육을 시전할 때는 아니었다.

나는 침착하게 말을 걸었다.

“……러셀에게 넘기죠?”

“시끄러워. 오 분 동안 아주 철저하게 가지고 놀아주마.”

“크윽?!”

직후, 셰무스가 강하게 밀어붙인 탓에 나는 버티지 못하고 링 포스트까지 비틀거리며 밀려났다.

순간적으로 적의가 느껴졌다.

프로레슬러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행위. 하지만 나는 냉정하게 연기를 하며 받아주었다.

관객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것이 절대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이 환호는 러셀을 위해 아껴둬야 하는 게 맞았다.

그럼에 셰무스는 그런 내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결국 보다 못한 심판이 끼어들었다.

“셰무스! 그만해! 원, 투!”

한순간 물러서는가 싶었던 셰무스는 내 가슴에 찹을 먹였다.

쫘악!

“……!”

맹렬한 한 방.

눈앞이 아찔해지는 통증이 찾아왔다. 나는 비틀거리며 로프를 붙잡고 옆으로 빠져나갔다.

셰무스는 말리는 심판을 피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다짜고짜 내게 자신의 피니시 기술인 ‘바이시클 킥’을 날리려고 들었다.

그대로 쓰러져 바닥을 구른 나는 링 아래로 빠져나갔다.

‘시간을 벌어야 해.’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 몸을 풀며 링 주변을 맴돌기 시작했다.

관객들이 내게 야유를 보냈다.

심판을 밀어낸 셰무스가 링 아래로 내려왔다. 나는 그 타이밍에 맞춰 곧바로 녀석을 공격했다.

“윽……!”

그래도 접수를 해주는군.

프로레슬링의 각본을 부수고 실전으로 상대를 박살내는 ‘슛’을 걸어올 생각은 아닌 모양이었다.

뭐, 당연했다. 그랬다가는 이 업계에 있을 수 없을 테니까.

‘일단 시간을 끌자.’

나는 셰무스와 다시 맞붙었다.

녀석의 지시에 따라 힘에 밀리는 척하며 링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심판의 뒤로 돌아들어간 나는 예정과 다른 행동을 취했다.

“뭐, 뭐야?!”

“좀 쉬엄쉬엄합시다……!”

일명 ‘심판 잡고 늘어지기.’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위로 올라온 셰무스로부터 그렇게 나 자신을 보호했다.

그가 다가올라치면 키가 작은 심판의 벨트를 붙잡고 앞으로 내밀어 접근을 원천 봉쇄했다.

셰무스는 완전히 당황했다.

“뭐야, 이 새끼?!”

“선배, 적당히 하시죠.”

“뭐?”

“지금 경기 중 아닙니까. 사적인 감정은 잠시 내려놔주세요.”

“어쭈, 지금 나 가르치는 거냐?”

“의견을 말한 건데요.”

“뭘 지금 와서……!”

“지금껏 듣는 시늉도 안해서 이럴 수밖에 없는 거 아닙니까.”

우리의 목소리는 관객들의 야유 소리에 파묻혀 경기를 촬영 중인 카메라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때문에 설득해보고자 한 것이었지만, 아쉽게도 통하지 않았다.

“봐요. 반응도 좋잖아요?”

“닥쳐! 건방진 새끼!”

“말이 안 통하네.”

이 이상 심판으로 시간을 끌었다가는 반응이 식어버릴 터였다.

심판을 옆으로 밀어낸 나는 셰무스와 다시 한 번 맞붙었다.

락 업.

해머링 공방.

거기에서 밀린 내가 뒤로 물러섰다. 셰무스는 내 팔을 붙잡고는 곧장 반대편으로 내던졌다.

바디 슬램.

콰앙!

나에 대한 관객들의 증오가 어찌나 컸던지, 단순한 기술 하나에 엄청나게 큰 환호가 나왔다.

‘이걸 러셀이 받아야 하는데.’

나는 셰무스에게 머리채를 붙잡힌 채로 일어서며 생각했다.

주도권을 가져오기 위해 몇 번 정도 반격했지만 셰무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공격을 받아쳤다.

‘들어가면 한 소리 듣겠군.’

바로 그때, 날 붙잡고 있던 셰무스가 비웃는 목소리로 물었다.

“뭘 생각하는 척이야?”

“……?”

“신인 놈이 건방지게 각본 회의를 들어가질 않나, 결국 너도 제 잇속만 챙길 거면서 뭘 그래?”

“아니…….”

“내 말이 틀렸냐?”

“예, 틀렸습니다.”

난 단언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 모두가 윈윈 하는 길이라니까요. 선배.”

“어디 얼마나 좋은 생각이 있으시기에 이러나? 한번 해보던가.”

“…….”

“단, 반응이 안 나왔을 때 책임은 네가 진다. 그걸로 괜찮다면 네가 말하는 대로 따라줄게.”

욕이 나오는 순간이었다.

분명 관객들의 반응이 어떻든 자기 마음에 안 들었다면서 날 몰아세울 것이 뻔히 보였다.

하지만 거절할 리는 만무했다.

왜냐면,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낫기 때문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방심한 셰무스의 눈을 손톱으로 긁어냈다.

“크학!”

야유가 쏟아지는 와중, 녀석의 팔을 당겨 로프 반동을 시켰다.

그리고 달려오는 녀석의 목을 노리고 힘차게 뛰어올랐다.

쩌억!

살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녀석의 목에 내 무릎이 꽂혔다.

완벽한 타격이었다.

몸의 대미지는 제로. 하지만 닿는 각도와 소리는 제대로 치명타를 후려친 것 같은 임팩트.

거기에 놀란 관객들이 한순간 탄성을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한순간 큰 충격을 받은 듯 서있던 셰무스가 길게 뜸을 들였다.

제대로 접수를 하지 않는 녀석의 모습에 살짝 짜증이 날 무렵.

앞으로 스르륵 쓰러지는 셰무스의 모습에 순간 뒤를 돌아본 나는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로프가 바로 앞이었다.

범프 링의 로프는 속에 철심을 덧대어 무척 견고하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그 위에 잘못 부딪히면 자칫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게다가 현재 위치에서 셰무스가 쓰러진다면 로프에 목이 걸린 채로 부러져 죽을 수도 있었다.

“잠……!”

한순간 놀란 나는 쓰러지는 셰무스의 얼굴을 발로 ‘까’버렸다.

“커헉?!”

놀란 녀석의 몸이 뒤틀려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나는 그 반동으로 크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반대편에 쓰러져 고개를 든 셰무스는 로프의 위치를 보고는 다행히도 무슨 일이 벌어질 뻔했는지 알아챈 눈이었다.

“……!”

순간의 방심.

나를 믿고 경기를 하지 않아서 생길 뻔한 실수.

그로 인해 정말 죽을 뻔했다.

안 그래도 하얀 얼굴이 더 창백하게 물들었고, 셰무스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날 바라보았다.

거기에서 나는…….

‘진짜 다행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동시에 셰무스를 향해 중지를 들어보였다.

가운뎃손가락.

F-U.

엿이나 먹으란 소리였다.

……진심은 아니고 그냥 기믹을 살리기 위한 행동이었다.

이런 경기 중의 ‘실수’를 전문 용어로는 ‘보차’라고 불렀다.

물론 이건 완벽한 상대의 실수였고 내가 커버를 친 것이었다.

거기에 나는 적잖이 당황한 셰무스에게 중지로 신호를 보냈다.

관객들의 몰입을 깨지 않기 위해서 이게 경기의 일부였던 것처럼 굴자고 제안한 것이다.

‘완전히 멱살 잡고 밥을 떠먹여주고 있는 꼴이로군.’

그나마 다행인 건 셰무스가 그 말을 이해해주었다는 점이었다.

나는 여유롭게 앉아 로프에 아예 한쪽 팔까지 올리고 웃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셰무스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벌떡 일어섰다.

관객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내게 바싹 달라붙은 셰무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저, 저…….”

“대화는 끝나고 하시죠. 다쳤을지도 모르니. 적당히 갑시다.”

나는 그렇게 경기의 키를 붙잡은 상태에서 방향성을 지시했다.

살리기 위해서였지만 셰무스는 머리에 킥을 맞았다. 뇌진탕이 있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일부러 심판이 보지 못하는 사이 복부를 후려쳐 셰무스를 바닥에 쓰러지게 만들었다.

마치 보차가 난 게 경기의 스팟이었다는 듯 주도권을 받아 여유를 부리며 관객들을 도발했다.

“이 시간에 여길 와?! 이 직업 없는 쓰레기들! 가서 오늘 노숙자 쉼터 수프가 뭔지나 확인해라!!”

[Boooooooooooooo!!]

“봤지! 이게 나다! 어떤 놈도 상대가 되지 못해! 일단 챔피언 벨트부터 따먹어주마! 그러니 내게 존중을 보여라! 멍청이들아!”

내 목소리는 물론, 열화와 같은 야유 속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더 큰 액션으로 관객들을 도발하며 욕을 해댔다.

심판은 비겁한 내 공격에 당해 바닥에 엎어진 셰무스의 상태를 살피며 당황해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사람들은 갑자기 나타나 깽판을 치는 나를 보고 한 가지 생각만을 하고 있을 터였다.

제발 누구라도 좋으니 저 개자식을 흠씬 두들겨 패줬으면.

바로 그 순간, 야유와 비난을 번개처럼 기타 리프가 꿰뚫었다.

깜짝 놀란 나는 링 포스트에 올라선 상태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엄청난 환호가 이어지고, 거대한 스크린에 하트 가문 특유의 번개 문양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 아래로 명문가의 혈통, 러셀 하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삼촌인 그렉 하트와 절묘하게 닮은, 하지만 훨씬 빠른 락 음악.

녀석은 피투성이가 됐던 이마에 붕대를 감은 채 내게 달려왔다.

“젠장!”

링 포스트 아래로 내려온 나는 곧바로 응전할 태세를 갖췄다.

난입은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나는 미소가 지어지려는 걸 참느라 어쩔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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