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23화 (23/634)

23.

“덕분에 살았다.”

“……예?”

“고맙다고.”

짧게 이야기한 셰무스는 머쓱한 듯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앞으로 누가 괴롭히면 말해. 내가 확실하게 도와줄 테니까.”

그 앞에 선 나는 다소 황당한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이 양반이 왜 이리 솔직해?’

기숙사 건물의 뒤쪽.

녀석에게 불려서 나왔을 때만 해도 ‘건방지게 굴지 마라.’라고 한 소리 들을 줄 알았는데.

‘목숨을 구해준 게 효과가 컸던 건지. 아니면 바쿠 앞에서 커버를 쳐준 게 먹힌 건지.’

그런 의문은, 이어진 셰무스의 말에서 조금 해소되었다.

“그리고 어제 정말 멋졌다.”

“어……. 감사합니다.”

결국 셰무스도 어제 내가 끌어낸 야유에 감탄했다는 것이리라.

거기에, 나를 ‘신뢰할 수 있는 상대’라고 생각하게 된 듯했다.

상대의 공격을 받아야 하는 프로레슬링만의 독특한 부분이었다.

선배들이 날 시험해보고자 했던 것도 결국 그 이유 때문이리라.

표정이 한껏 풀어져 웃은 셰무스는 이내 벽에 기대어 섰다.

“덕분에 나는 완전히 새됐어. 어디 가서 악역이라는 소리도 못 하겠군.”

“선배도 선배 나름대로 장점이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어라? 혹시 너, 입사하기 전부터 우리 쇼를 봤던 거냐?”

“예, 일단은.”

“조지아 밖에서 보기는 꽤 힘들었는데. 정말 대단하군.”

“뭐, 제가 입사하고 싶었던 회사니 당연한 거죠.”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반만 사실이었다.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그다지 전생에 GCW를 즐겨 보지 않았다.

어차피 산하 단체 쇼고, 퀄리티도 들쭉날쭉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지금 내가 선수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전생에 애덤으로부터 들은 것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 자식, 매일같이 전화해서 어찌나 자랑을 해대던지.

그래도 인생이라는 게 참 어찌될지 모르는 노릇이다. 그때 지겹게 들어준 지식이 지금에서야 도움이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

‘지금쯤 뭘 하고 있으려나.’

나는 턱이 길쭉한 애덤의 생김새를 떠올리며 쓰게 웃었다.

그러자니 셰무스는 주변을 힐끔 돌아본 뒤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네 생각은 어떠냐?”

“뭐가요?”

“내 기믹 말이야. 나름대로 장점이 있다면서.”

“예, 분명히…….”

바로 그때였다.

“셰무스, 너 인마! 또 엄한 애 붙잡아다 갈구고 있냐?”

“바, 바쿠. 그런 게 아니라요.”

벽 뒤쪽을 돌아 바쿠가 모습을 드러내자 셰무스가 당황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계약 때문에 그러지.”

“아.”

“따라와라. 그리고 셰무스. 너는 엄한 애 괴롭히지 말고 할 일 없으면 운동이라도 해.”

바쿠가 지릿 노려보자 셰무스는 기를 펴지 못하고 쪼그라들었다.

‘그게 아닌데.’

불쌍한 오해에 쓰게 웃은 나는 이내 바쿠를 따라 움직였다.

* * *

조용한 사무실.

내 앞에는 바쿠와 누군지 모를 백인 남자가 하나 앉아있었다.

처음에는 재무팀장인가 싶었는데, 두꺼운 노트북을 꺼내든 걸로 봐서는 아닌 모양이었다.

사내는 나에게 큰 호의를 가진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신 선수.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모셨어요.”

“계약은……?”

“그건 이 일의 다음으로.”

바쿠가 짧게 쳐냈다.

“아, 저는 각본팀장인…… 그냥 편하게 퍼키라고 불러주세요.”

“퍼키……요?”

“하키퍽에서 따온 별명인데, 그대로 쓰면 욕이 되잖아요.”

“선수 출신이신가 보군요.”

“그게 아니라 고등학생 때 하키퍽으로 많이 맞았거든요.”

“…….”

도대체 저걸 별명으로 쓸 정도면 얼마나 넉살이 좋은 거야.

“어쨌든, 이번에 토너먼트 아이디어도 제시해주셨으니 혹시 다른 생각이 있으신가 싶어서요.”

“……어, 지금 선수인 제게 각본을 상담하는 건가요?”

“뭐, 뭐어, 그렇죠?”

“나쁘게 생각하지 마라.”

바쿠가 끼어들었다.

“그걸 그대로 채용하겠다는 건 아니고 아이디어를 입안한 네 생각이 듣고 싶은 것뿐이니까.”

“아니, 바쿠. 조금 불편한데요.”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선수가 각본에 관여하다니.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각본에 개입하는 선수는 반드시 다른 선수들과의 관계가 불편해지기 마련이다.

당연한 일이다.

함께 뛰는 선수가 직접 자신의 승패와 스토리 제작에 개입한다는 걸 알면 그 누가 좋아하랴?

때문에 선수가 각본에 개입하는 행위는 파벌 싸움을 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프로레슬링 판은 정치 싸움이 극심했다. 물론 나 역시 각오한 일이지만, 지금 당장 뛰어들기에는 여러모로 문제점이 많았다.

일단 내 편이 부족했다.

‘게다가 이 작은 곳에서 그래봤자 내가 얻는 것도 없고.’

GCW는 산하 단체라 비교적 선수들 간에 그런 싸움이 덜하다는 것이 좋은 점이었다.

단호한 내 얼굴을 본 각본팀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꺼냈다.

“그, 그러지 마시고.”

“우리만의 이야기로 해두지.”

“끄응…….”

하지만 솔직히 말해 구미가 당기는 제안인 것도 사실이었다.

메인 쇼에 올라갈 때 내 몸값을 확실히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쇼 자체를 흥행시켜야만 했다.

그를 위해서는 쇼 전체가 유기적으로 발전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전생의 기억을 가진 지금의 나라면 아마…….’

가능하겠지.

아이디어는 많았다.

미래에 나온 멋진 각본들. 프로레슬링뿐만 아니라 격투기나 복싱 등의 환상적인 라이벌리.

아니면 간단하게, 지금 선수들이 겟 오버Get-Over 할 수 있는 기믹들.

‘그걸 안정적으로 제시할 수만 있다면 참 좋을 것 같은데.’

또 다시 독이 든 성배다.

과연 마셔놓고 다음 날 기지개를 펴며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

설레발일 지도 모르지만, 바쿠나 퍼키의 얼굴을 보자니 내 생각을 상당히 기대하는 듯했다.

“……그냥 제 아이디어입니다.”

나는 주변을 힐끔 살펴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야 대답했다.

“일단, 선수들의 실력(인기)을 봤을 때 우승은 바비 애슐리가 하는 게 맞는 듯합니다.”

“그래?”

“한 번 더 악역 챔피언이라면 사람들이 식상해하지 않을까?”

“턴 페이스를 시켜야죠.”

“……바비를?”

“예, 어렵진 않을 겁니다.”

나는 설명을 시작했다.

어제의 토너먼트 8강전은 시청자들에게 분명한 화제가 되었다.

다음 주까지 누가 승리할 것인가. 경기가 어땠는가.

소문이 퍼져 시청자층은 크게 늘 터였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선수들 모두가 절 빼면 관객을 ‘즐겁게’ 해주었다는 부분이죠.”

“그게 왜?”

“리스펙트가 쌓이면 당연한 수순으로 턴 페이스를 해야죠.”

게다가 현재 바비는 무색무취의 악역 기믹이었다. 딱히 득이 될 게 없다는 소리였다.

그런 그에게 챔피언을 향해 끈질기게 싸우는 점을 넣는다면?

“사람들은 좋아하겠죠.”

원래 ‘그냥 이기는 놈’보다 ‘필사적으로 이기려는 놈’이 사람들의 마음에 먹히는 법이었다.

“호오오……. 신 선수! 그렇다면 토너먼트 결과는 어떤 식으로 진행하는 게 좋을까요?”

“그건 말했듯이 실력으로 가야죠. 어제 경기에서 관객 반응이 어땠다고 생각하십니까?”

“분명 이런 식이었지.”

바쿠가 책상 위에 프린트된 대진표를 손에 쥐었다.

나와 러셀은 상대보다 반응이 좋았기에 16강에서 승리한다.

그리고 8강에서 맞붙는 걸로.

“바비는 반대편 시드로군.”

“바비 선배도, 뭐 누구와 붙어도 반응은 확실히 챙길 것 같네요.”

“습격 씬도 한번 구상해보자고. 턴 페이스를 하려면 비겁한 공작을 이겨내는 게 포인트지.”

그들은 내가 힌트를 주자 이내 거기에 살을 덧붙여 나갔다.

“아마 지금 나오는 반응대로라면 이렇게 되겠지?”

하지만 그 표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바로 내가 결승에 올라가 바비와 맞붙는다는 부분이었다.

“저는 4강전에서 지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왜? 허스키가 너보다 반응이 더 나올 것 같지는 않은데.”

“어쨌든 저는 러셀하고 대립하면서 차근차근 위상을 쌓아가는 게 더 나을 듯해서.”

그러기 위해서는 허스키의 위상이 더 올라야 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원래 계획에 맞추기 위해서 허스키 해릿의 위상을 올릴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두고 보시죠. 허스키 선배도 한다면 하는 사람이니까요.”

하지만 나는 싱긋 웃으며 장담했다.

내가 그렇게 만들면 되거든.

* * *

그리고 다음 날부터 선수들은 각자의 ‘루틴’으로 복귀했다.

다음 주의 쇼를 대비해 몸을 단련하고 기술을 연마하며 합을 맞추는 연습을 다시 시작했다.

셰무스가 말을 해뒀기 때문인지 나를 향한 선배들의 갈굼이 뚝 멎었다. 덕분에 트레이너와 함께 편한 운동을 할 수가 있었다.

시나나 러셀은 달랐지만.

“시나! 이 쓰레기 같은 자식! 근육밖에 없는 머슬 스컴백!!”

“끄극…… 흐윽…… 마이 네임 이즈 머슬 스컴백…….”

아주 심한 영어 욕이 나왔다.

“러셀, 고작 그것밖에 못하나? 벌써 지쳐서 쓰러진 거야?”

“아닙니다!”

러셀은 정신적으로 몰아붙여져 계속 링 위에서 낙법을 쳤다.

‘다들 고생이 많군.’

나는 그런 그들을 강 건너 불구경하듯 바라보며 물을 마셨다.

시험을 볼 때 썼던 것보다 배는 더 거대한 선수 전용 훈련장.

여성 레슬러까지 포함해 30명 정도가 각자 기량을 갈고 닦았다.

그런 가운데, 나는 작은 루틴을 끝낸 후 잠시 쉬고 있는 한 무리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 레드넥이 뭐라고 했는지 아냐? ‘내 샷건에는 총알이 없어.’라고 했지 뭐냐!”

“푸하하하하! 무정자증이었던 거야? 그래서 걔 마누라는 뭐래?”

“타들어가는 목소리로 ‘한 발쯤 남았을지도 몰라요…….’라고 하던데, 어찌나 불쌍하던지!”

“크하하하하! 푸하하하하!!”

선수들이 모여 폭소를 터뜨렸다.

GCW의 자율적인 분위기를 상징하는 듯한 광경의 중심에 서있는 것은 허스키 해릿이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여전히 말을 잘하는군.’

프로레슬러로서 대성하기는 힘들다고 여겨지는 비대한 몸.

포스가 없는 순박한 외모.

그럼에 그는 메인에 올라간 뒤 새로운 기믹을 장착해 말 그대로 겟 오버 한다.

한 스테이블(조직)을 이끄는 수장이 되어서 메인 이벤터라는 위치마저도 차지할 정도였다.

그래서 그가 WWF의 메인에서 새롭게 장착한 기믹이 뭐냐.

바로 ‘사이비 종교 교주’였다.

그때 장착하는 이름이 바로 ‘브로큰 와이엇’. 신비주의적이고 자연회귀적인 기믹으로 그는 그야말로 초대박을 치게 된다.

사실, 미국 남부에는 아직까지도 그런 걸 믿는 사람이 많았다.

초자연적인 무언가.

크립티드, 음모론.

‘허스키 본인도 그렇고 말이지.’

기억하는 바에 의하면 진지하게 ‘지구평면론’을 주장했었지.

거기다 사스콰치가 실존한다고 이야기했고 말이다.

문제는 그가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이야기한다는 부분이었다.

실제로 선수들 중 몇몇은 그가 주장한 지구평면설을 진지하게 믿을 정도였다.

그야말로 사이비종교 교주가 되어도 잘할 것 같은 모습.

‘그렇게 만들어보자고.’

말했듯, 그가 겟 오버 하면 내 상황 또한 잘 풀리는 상황이었다.

나는 일부러 내 근처에서 운동을 하던 셰무스에게 다가갔다.

“셰무스.”

“그래, 신. 무슨 일이지?”

“혹시 허스키 선배랑 운동하게 좀 도와줄 수 있을까요?”

“허스키? 어려운 부탁은 아닌데…… 저 자식이랑 운동하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닐 텐데.”

“부탁 좀 드릴게요.”

나는 미소를 지었다.

일단 허스키 해릿과 직접 친해지는 일부터 시작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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