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26화 (26/634)

26.

어두운 밤.

GCW의 선수들과 훈련생들, 그리고 직원들이 모여 ‘영상’ 하나를 시청하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훈련장 바깥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철문이 열렸고, 나는 사람들의 뒤에 서서 슬쩍 미소를 지었다.

와이엇과 내가 만들어낸 작품이 세상에 공개되는 순간이었다.

‘반응들이 기대되는데.’

그렇게 생각한 나는 바로 옆에서 긴장한 듯 서있는 와이엇의 어깨를 툭 치며 가까이 다가갔다.

“괜찮아요?”

“그, 그래. 후. ……음, 사실 아냐. 좀 긴장되는군.”

“쇼에 나가는 것도 아니잖아요? 게다가 다들 좋아해줄 거예요.”

“그건 그렇지만……. 음, 어딘가 좀 이상한 기분이야.”

“선배가 좋아하는 걸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시간이니까요.”

“……그래. 확실히 그렇군. 프로레슬링을 하면서 이와 같은 감정을 느껴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와이엇은 복잡한 감정을 가라앉히려는 듯 잠시 콧대를 어루만졌다.

그가 긴장하고 있는 건 그만큼 열심히 준비했기 때문이다.

말인즉슨 와이엇 역시도 프로레슬링에 아예 흥미나 재능이 없는 인간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예 이쪽에 뜻이 없었다면 자기가 좋아하는 기믹을 만드는 것조차 비협조적으로 굴었겠지.’

단지 아버지와의 불화로 인해서 진심으로 하지 못했을 뿐.

실제로 미래에는 이 업계에서 오랫동안 일하기도 했고.

그는 잘만 이끌어주면 확실히 업계에 자신의 족적을 남길 수 있는 선수였다.

실제로 나와 기믹을 준비하는 동안 술은 입에도 대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걸 방증했다.

그렇게 생각에 빠져있던 와이엇은 이내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맙다. 신.”

“뭘요.”

“아냐. 정말로 재밌었어. 혹시 보고 싶은 호러 필름이 있으면 말만 해. 나는 모두 다 가지고 있으니까.”

“……가, 감사합니다.”

딱히 좋아하진 않는데.

일이어서 봤지.

거기다 실제로 ‘회귀’라는 초자연적인 일을 겪은 만큼, 요새 들어 저런 게 다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을까 무섭단 말이다.

“일본 호러 영화도 많아. ‘이어링’이니 ‘주오프’ 같은 거.”

“저 한국계인데요.”

“거기라면 ‘남고괴담’이라는 영화를 하나 가지고 있지.”

정말로 다 가지고 있군.

확실히 질릴 정도의 너드Nerd였다. 지금은 인터넷도 그렇게 발달하지 않았을 시기인데.

그런 정보에 다소 경외감마저 느끼고 있자니, 옆에서 기기를 만지던 직원이 고개를 들었다.

“신, 준비 끝났어요.”

“슬슬 시작하죠.”

고개를 끄덕인 나는 링 위며, 그 주변에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사람들 앞으로 다가갔다.

그 중심에 있던 할리가 물었다.

“꼬마, 언제 시작하나?”

“아 예, 지금 막 준비가 끝났는데, 시작해도 괜찮을까요?”

“그래, 오늘은 또 뭘 준비해서 우릴 놀라게 하려는 거냐?”

다 알고 있으면서 굳이 그런다.

적당히 맞춰주자.

“새 기믹입니다.”

“벌써 기믹을 바꾸려고?”

“제 기믹은 아니고…….”

나는 뒤쪽에 서있는 와이엇을 돌아보았다. 그는 표정이 잔뜩 굳어진 채 사람들의 앞에 섰다.

“제 기믹입니다.”

“허스키, 너로군.”

할리는 씨익 웃었다.

“요새 회사 밖으로 잘 나가지도 않아서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뭐 좋아. 한번 틀어봐라.”

기대감에 찬 얼굴.

분명히 일반적인 방식의 업무 처리는 아니었다. 당장 WWF 메인으로만 올라가도 프로듀서에 온갖 높으신 분들의 손을 거쳐서 관리되는 것이 이 ‘기믹’이었다.

하지만 여기는 산하 단체였다.

할리는 선수들을 믿어주었다.

빔 프로젝터가 반대편의 콘크리트 벽에 영상을 쏘았다. 모두들 자리에 앉아 그것을 지켜보았다.

낡은 영사기가 돌아가는 소리.

그 뒤를 이어 잔뜩 노이즈가 낀 화면이 서서히 재생되었다.

음산한 분위기의 시골.

통나무로 된 집.

풀벌레가 울고, 파리 떼에 뒤덮인 말의 시체가 순간 지나갔다.

마치 음모론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 같은 모습이었다.

몽환적이면서도 현실적인 영상미에 사람들은 금방 영상 속으로 빠져들었다.

‘자, 이쯤에서…….’

흔들의자가 삐걱대는 소리.

그와 함께 기괴한 모습을 한 ‘브로큰 와이엇’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저분하게 기른 수염, 챙이 짧은 중절모와 하와이안 셔츠.

그가 말을 시작했다.

[난 언제나 나의 추종자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내 형제, 자매이며 우리는 함께 걷는다.’고.]

화면을 보며 웃었다.

[너희는 무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지. 무언가를 원하고 있지만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고 있지.]

모두들 묘한 설득력과 강대한 카리스마를 가진 브로큰 와이엇의 모습에 감탄한 모습이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그가 화면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는 카메라를 직접 쥐고 얼굴을 들이댔다.

[나를, 받아들여.]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끊겼다.

주변을 살핀 나는 사람들이 빔 프로젝터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침묵이 계속해서 이어지던 와중, 할리가 가볍게 혀를 찼다.

“……다음 편은?”

확실히 먹혀든 모습이었다.

* * *

허스키의 새 기믹인 ‘브로큰 와이엇’은 간단히 심사를 통과해 쇼에 투입될 준비를 시작했다.

사실 새로운 기믹은 방송에 나가지 않는 ‘다크 매치’를 뛰어 먼저 관객 반응을 보는 것이 순서였지만, 지금은 특별한 상황이었다.

선수가 지닌 기믹에 대한 이해도도 뛰어났고, 시청률이 반등하고 있는 시기에 새 시청자들의 이목을 끌만한 요소를 투입하는 것은 쇼에 있어서 필수적인 일이었다.

그렇게 플랜이 정해지자 다시금 고난의 한 주가 시작되었다.

우리가 제시한 브로큰 와이엇 기믹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한 바쿠는 또 내가 제대로 한 건 해냈다며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크하하! 네 덕분에 다들 또 고생 좀 하겠구나! 애송이!”

“……좋은 거 맞죠?”

“물론이지! 할 일이 있다는 건 정말이지 좋은 일이야! 껄껄!”

선수 관리를 전담하는 총괄팀장으로서, 바쿠는 이제부터 브로큰 와이엇이라는 기믹에 대해 이야기하고 경기 도중 어떤 기술을 구사할지를 정해야만 했다.

프로레슬링은 ‘쇼’였기에 관객들에게 화려하고 인상 깊은 연출을 해야만 했다. 따라서 선수들은 각자 개성에 맞춘 기술을 구사했다.

경기 스타일에 맞게 관객들에게 자신의 기믹이 어떤지 보여주기 위해, 그리고 그 밖의 여러 이유로 기술은 최대한 다른 선수와 겹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일단 저쪽은 저렇게 두고.’

각 팀에서 알아서 브로큰 와이엇을 꾸며줄 터였다. 그들이 내 기믹을 완성해주었듯이 말이다.

이제부터 내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바로 코앞으로 다가온 쇼였다.

매일같이 하는 전체 훈련이 끝난 뒤, 모든 선수들은 돌아가지 않고 훈련장에 남아 대기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각본 회의를 끝낸 할리와 각본팀장이 훈련장으로 들어왔다.

선수들은 다소 긴장한 얼굴로 두 사람의 모습에 주목했다.

“일단, 이번 쇼부터 8강전은 두 경기씩 나눠서 내보내기로 한다.”

할리가 말을 시작했다.

“1경기는 바비, 무스. 2경기는 티카랑 ‘허스키’가 붙는다. 승패는 팀장한테 듣는 걸로 하고.”

그 뒤로 여성부 경기와 태그 팀 경기가 하나씩 열린다. 모두 반응을 보기 위한 시험용 매치였다.

그리고 마지막.

메인이벤트.

“신과 러셀의 링 세그먼트를 가진다. 두 사람이 다음 주에 대결하리라는 걸 보여주면서…….”

그 순간, 밉상 악역인 허스키가 나와서 눈치 없게 관객들이 원하는 신과 러셀의 싸움을 말린다.

“러셀이 만반의 상태로 오라며 들어가고, 허스키가 링 위로 올라가 신에게 공격을 당한다.”

신의 잔학하고 강력한 모습, 다음 주 경기에 대한 기대감, 마지막으로 허스키의 기믹 전환까지 고려한 복합적인 세그먼트였다.

“이상이다. 자세한 디테일은 지금 각본팀에서 열심히 작업하고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리고.”

“할리, 질문이 있습니다.”

“뭐냐. 바비.”

“시청률은 잘 나왔습니까?”

“이 자식아, 이상한 거 신경 쓰지 말고 낙법이나 한 번 더 쳐라.”

“에이! 알려주십쇼! 할리!”

선수들 중 몇몇이 반발했다.

전반적으로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노력한 만큼 쇼의 반응이 나오자 다들 즐거운 것이었다.

그런 분위기에 초를 놓고 싶지 않았는지 바쿠는 쓰게 웃었다.

“최종 집계가 1.2퍼센트다.”

그 말을 들은 선수들의 눈이 놀라 크게 뜨였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1.2라고?’

자세한 수치는 더 들어봐야 알겠지만, 생각보다 훨씬 좋았다.

1퍼센트를 간당간당하게 채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우리들을 보고 피식 웃은 할리가 근엄하게 말을 이었다.

“뭐, 홍보팀에서 뭐 빠지게 움직인 덕이지. 허나 너희 애송이들이 대단한 점은 방송 시작 후 30분에 찍은 최고 시청률을 쇼가 끝날 때까지 이어나갔다는 부분이다.”

‘그건 확실히 대단하군.’

어떤 식으로든 채널을 돌려 쇼를 접한 시청자들이 끝까지 보았다는 건, 다음 주에도 그대로 유입될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었다.

“어쨌든, 사람들이 기대하는 만큼 다들 잘 해주리라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이어진 할리의 격려에 모두가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들을 돌아본 나는 확실히 프로레슬링 단체의 일원으로서 소속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선수들 모두가 쇼를 준비하며 나 또한 거기에 협력해 무언가 임무를 부여받아 수행하는 것.

‘나쁘지 않아. 아주 좋군.’

선배들의 신고식도 뚝 멎었고, 이제 완전히 이곳에 적응하게 된 것 같아져서 기분이 좋았다.

전생에서는 쭈뼛거리며 전혀 나다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는데.

새삼 감격스러운 일에 웃고 있자니 누군가 가까이 다가왔다.

“신? 다음 주 각본 관련해서 잠깐 이야기 좀 했으면 하는데.”

각본팀장이었다.

“예, 바로 가시죠.”

고개를 끄덕인 나는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쨌든, 할리와 각본팀의 결정으로 이번 쇼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하게 된 것은 바로 나였다.

솔직히 데뷔한 지 3주째인데 이래도 되나 싶기도 한데.

뭐, 능력이 있는 걸 어쩌랴.

* * *

내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고릴라 포지션에 있던 사람들이 나에게 각자 한마디씩을 건넸다.

“신! 힘내라!”

“오늘도 한 방 먹여줘요!”

나는 뒤이어 나올 러셀, 허스키과 주먹을 한 차례씩 맞댔다.

그리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커튼 밖으로 나서자 눈이 아파질 정도의 조명이 날 비췄다.

성스럽고, 또한 사악한 음악.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웃고 있는 나는, 미리 생각을 해두었던 대로 입장로를 털레털레 걸어갔다.

[Booooooooooooo!]

사람들이 내게 야유를 보냈다.

좋은 현상이었다.

솔직히 말해 데뷔 3주차의 신인 악역이 이만한 야유를 끌어낼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엄청난 일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심이 없는 선수에게는 아예 반응조차 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지금 아주 잘하고 있었다.

그럼에 나는 문제가 생길 만한 상황을 모조리 차단할 수 있을 만한 ‘마이크 워크’를 준비해왔다.

링 위로 올라가 껌을 짝짝 씹으며 관객들을 돌아보았다.

여유롭게, 여기가 내 앞마당이고 이제 접수하러 온 것처럼 거만한 루키의 모습을 선보였다.

그렇게 잠시 서있자니 음악이 뚝 멎고 조명이 다시 밝아졌다.

[Booooooooooooooo!!]

다시금 이어진 야유.

하찮다는 듯 피식 웃은 나는 링 아래에서 마이크를 건네받아 쥐었다.

“다들…….”

[You Suck! You Suck! You Suck! You Suck! You Suck!]

뭔가 말하려고 들자 관객들은 챈팅을 통해 소리를 드높였다.

이렇게 되면 말할 수가 없다.

무시하고 할 말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최악의 수였다.

이럴 때 ‘좋은 선수’는 멋진 기지를 발휘해야만 했다.

그리고 난 그게 가능했다.

“다들 니키 엉덩이에 흥분했군!”

그 말을 들은 관객들이 환호했다. 그들이 환호를 보내고 있는 대상은 내가 아니라 GCW의 여성 프로레슬러인 니키 제임스였다.

하지만 이걸로 그들은 내가 할 말에 대해서 흥미를 느꼈다.

갑작스럽게 성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사람을 집중시킬 때 제법 좋은 방법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들 여자친구가 오른손이니까 이런 데서나 실컷 보고 돌아가야지. 안 그래?”

[BOOOOOOOOOOOOOOO!!]

[F-ck You Sin! F-ck You Sin! F-ck You Sin! F-ck You Sin!]

어마어마할 정도의 야유였다.

설마 F로 시작하는 욕까지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주 제대로 먹혔는데?’

나는 관객들의 반응을 보며 실실 웃고는 그대로 말을 이었다.

“왜? 너희가 태어나서 잡아본 여자 손은 엄마 손밖에 없잖아?”

와, 제대로 찔렀는지 야유가 훨씬 더 심해졌다.

“거기다 엄마 집에서 살고! 엄마 돈 받아서 쇼 보러 오고!”

관객들은 내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정도의 욕설을 내뱉었다.

방송에 어떤 식으로 처리돼서 나갈까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한차례 크게 웃은 나는 링 포스트 위로 올라가 관객들이 날 더 잘 볼 수 있도록 거기에 앉았다.

그리고 웃음기를 거뒀다.

터닝.

사람들을 순간적으로 내게 집중시키는 기법이었다.

“러셀 하트도 그렇지.”

나는 순간 침묵한 관객들의 앞에서 천천히 말을 이어나갔다.

“로열패밀리라고 해봤자 내내 엄마 집에서 얹혀산 놈에 불과해. 그런 놈이 내 다음 상대야. 정말이지, 지독히도 웃기는 일이지.”

준비된 마이크워크를 했다.

러셀 하트를 관객들과 동화시켜 선역으로 띄워주는 한편, 나 자신에 대해서도 알렸다.

“반면? 나는 태어나서부터 미국 전역을 돌아다녔어. 어떤 개자식이 나오든 이 두 주먹으로 쓰러뜨리고 내가 원하는 것을 가졌지.”

그 사실이 방송을 통해 조지아 주 전역에 방영되고 있었다.

“그건 앞으로도 마찬가지야.”

오늘 밤의 세그먼트를 본 사람들은 다음 주가 기대되어 제대로 잠도 이루지 못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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