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Boooooooooooooooo!]
사람들이 내게 야유를 보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쇼의 일부분이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싫어하는 선수에게 마음껏 욕을 해대며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물론 여기에서 사람들을 대신해 악역을 응징해줄 선역이 나타난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였다.
그것을 기다리며 나는 링 위에 서서 있는 대로 어그로를 끌었다.
“오, 나에게 야유를 보낸다고? 그래봤자 현실은 변하지 않아! 난 다음 주 있을 경기에서 도련님의 엉덩이를 걷어찰 테니까!”
바로 그 순간, 날카로운 기타 리프 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삼촌인 그렉 하트의 것과 흡사한 느낌의 음악이 신나게 연주되었다.
러셀이 입장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엄청난 환호를 보냈다.
이 모든 것이 링 위에 올라온 5분 동안 내가 쌓은 결과물이다. 어그로가 폭발한 것이다.
당당하게 웃으며 나는 러셀에게 나오란 듯 입장로를 향해 손짓했다.
큰 환호와 함께 바깥으로 나온 러셀이 링 위로 올라왔다. 나는 그런 그를 경계하듯 물러서 링의 반대편으로 돌아들어갔다.
‘여기서는 링을 크게 써야지.’
거기에 호응하듯 러셀도 황야의 카우보이처럼 크게 움직였다.
마이크를 쥔 그가 입을 열었다.
“정말이지 못 들어주겠군. 그게 네가 제일 잘하는 거냐, 신?”
“뭐?”
“보여준 건 아무것도 없으면서 남들 욕이나 해대는 거 말이야. 네가 지금 링 위에 올라와서 뭘 했지? 이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뭔가를 보여줬어? 아니지. 박스 버니처럼 떠들어대는 게 전부였어.”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크게 웃었다.
나 역시도 속으로는 그랬다.
여기서 떠들어대길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를 제시하다니.
‘박스 버니라.’
각본에는 없던 이야기였다. 러셀이 순간 유머로 현장의 분위기를 자신에게 끌고 간 것이었다.
나는 눈썹을 찡그렸고, 그것을 본 사람들이 통쾌해하며 한 마음으로 나를 놀려대기 시작했다.
[Box Bunny! Box Bunny! Box Bunny! Box Bunny!]
여러 번 이어진 ‘박스 버니’ 챈트.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고는 이내 다시 마이크를 손에 쥐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셔, 선생?”
박스 버니의 명대사를 그대로 읊자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여기 있는 모두를 대신해 내가 네 엉덩이를 걷어차려고 나왔지.”
“그래? 어디 한번 해보셔.”
나는 러셀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그 역시도 지지 않고 내게 맞섰다.
우리는 당장에라도 맞붙을 것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을 연기하며 사람들의 기대치를 끌어올렸다.
‘페이스 투 페이스’.
그런 상황을 깨뜨린 것은 바로 허스키 해릿의 메탈 음악이었다.
러셀과 나는 김이 빠진 얼굴로 입장로 위를 돌아보았다. 몰개성한 음악과 함께 나온 허스키는 특유의 미소와 함께 링 위로 올라왔다.
눈치 없는 밉상 악역.
나와 러셀이 싸울 거란 기대감이 무너진 사람들은 허스키에게 커다란 야유를 퍼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허스키는 전혀 개의치 않고 러셀에게서 마이크를 받아 자신의 말을 시작했다.
“워워, 그렇게 열 낼 필요 없잖아? 다들 여기 와서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열정적이군.”
그는 우리 두 사람을 ‘애송이’ 취급하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보다, 두 사람의 경기는 어찌되든 좋잖아? 어차피 둘 중 하나가 이기고 올라와도 그다음 4강에서 나한테 깨질 텐데 말이야.”
내가 마이크를 들었다.
“근데 너 누구냐?”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다시금 웃음을 터뜨렸다. 무시를 당한 허스키의 얼굴이 굳어졌다.
“너도 루나 툰이냐? 러셀, 이 녀석은 ‘타즈 마니아’쯤 되냐?”
“뭘 또 친한 척이야.”
“애송이 자식이……. 네가 어디에서 굴러먹다 온 놈인지는 모르겠는데, 여기는 GCW다. 네가 함부로 굴 장소가 절대 아니지.”
허스키가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현재 각본에 깊게 몰입하고 있기 때문인지 전에 비해 훨씬 연기력이 더 좋아졌다.
“내 링에서 꺼져. 애송이들아.”
관중들이 재차 야유를 보냈다.
하지만 허스키는 개의치 않고 우리를 노려보았다. 관객들이 야유하는 소리가 점차 커졌다.
나는 그 반응을 보고 생각했다.
‘이건 좀 아닌데.’
원래 각본대로 간다면 크게 문제가 있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나는 러셀보다 선수를 쳤다.
“뭐, 좋아.”
허스키와 러셀이 순간 의아한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으니…… 서로 만반을 갖춘 상태에서 제대로 붙어보자고. 러셀.”
나는 피식 웃으며 이야기했다.
김이 빠진 듯 한숨을 내쉰 러셀은 그대로 돌아서 링을 빠져나갔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렇게 나가는 척.
천천히.
관객들의 반응을 살핀 뒤.
나는 다시 링으로 들어와 뒤돌아선 허스키를 공격했다.
의기양양하게 서있던 녀석의 뒤통수에 마이크가 작렬했다. 앰프를 타고 커다란 웅- 소리가 울렸다.
사람들이 내게 환호를 보냈다.
‘역시 그렇군.’
때문에 나는 세그먼트의 디테일을 변경한 것이다. 그에 대해서는 이따 설명해도 되겠지.
일단 내가 할 일은 남은 방송 시간 10분 동안 이 밉상인 사내를 신나게 두들겨 패는 것이었다.
나는 쓰러진 허스키의 위로 달려들어 힘차게 주먹을 휘둘렀다.
러셀은 이미 각본대로 퇴장한 뒤였다. 나는 소극적으로 저항하는 허스키를 계속해서 공격했다.
“크헉! 헉! 허억!”
몸을 둥글게 말아 자신을 보호하려는 허스키. 나는 그를 믿고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로프 반동 후 내 피니시 무브인 니 킥을 안면에 적중시켰다.
쩌억, 하는 소리와 함께 허스키가 나가떨어졌다. 호흡을 정돈하며 주변을 살핀 나는 관객들의 반응이 예상대로인 것을 느꼈다.
‘GCW에서 예상한 것과는 정반대지만 말이야.’
그들은 내게 환호를 보냈다.
프로레슬링을 하다보면 으레 자주 있는 일이었다.
모든 게 다 예상대로 돌아간다는 법은 없다.
그렇기에 이런 상황에서는 임기응변이 무척 중요했다.
나는 링 아래쪽에서 철제의자를 하나 가지고 위로 올라왔다.
업계에서 자주 사용되는 무기 중 하나였다. 특수 제작된 의자는 속이 비어서 잘 휘고 소리는 크게 울려 타격감이 일품이었다.
쩌엉-!
일어선 허스키의 머리에 대고 일격을 날렸다. 그와 함께 나는 쓰러진 허스키 앞으로 다가갔다.
욕설을 내뱉는 척 표정을 잔뜩 찌푸렸으나 내용은 정반대였다.
“선배, 블러드 잡 좀 해줘요.”
허스키가 의아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내가 환호만 받고 들어가면 캐릭터가 애매해지잖아요.”
그 말을 이해한 허스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혹시 몰라 주머니에 챙기고 있던 커터칼날을 꺼내 주먹 속에 숨겼다.
다행히 관객들의 반응이 열광적이어서 어색하지는 않았다.
나는 카메라를 가리듯 링 포스트 쪽으로 허스키를 끌고 갔다. 그 과정에서 칼날을 건넸다.
“다음 체어샷.”
상황을 전하고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의자를 집어 들었다.
비틀거리며 로프를 잡고 겨우 일어나는 허스키. 그가 돌아서길 기다린 나는 의자를 휘둘렀다.
쩌억-!
허스키가 나가떨어졌다.
관객들의 환호성이 커졌다. 내가 가하는 폭력은 아직까지는 사람들이 ‘사이다’로 받아들였다.
나는 이쪽을 찍고 있는 카메라에 얼굴을 들이밀고 소리쳤다.
“이게 체어샷이지!”
적당한 말을 지껄이는 사이 허스키가 커터칼날로 이마를 쨌다.
피가 흘러나오는 동안 나는 바닥에 쓰러진 그의 이마를 타격점으로 계속해서 의자를 휘둘렀다.
바닥에 쓰러진 허스키의 몸이 마치 시체처럼 꿈틀거렸다.
사실 내가 때리고 있는 곳은 이마가 아니라 그 위쪽에 있는 링 바닥이었지만 빠른 속도로 의자를 휘둘러 이질감을 최소화했다.
방송이나 먼 관객석에서는 아마 거의 구별을 할 수 없을 터였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의 환호성이 싹 멎었다. 그들은 내가 저지르는 행위가 선을 넘겼다고 생각해 더 이상 환호를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방송이 끝나는 순간에 맞춰 나온 심판들이 나를 말릴 때까지 허스키를 계속 공격했다.
피투성이가 된 허스키의 얼굴은 나의 잔혹함을 부각시켰다.
“그만! 그만!”
“신! 적당히 하고 들어가!”
심판 여럿의 만류에 나는 씨익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링 바깥으로 나오자 침묵이 감돌았다.
하지만 나는 여봐란 듯 손을 번쩍 들어 사람들을 조롱했다. 그제야 관객들이 야유를 보냈다.
어찌어찌 우리가 최종적으로 예상하던 결말에 다다랐다.
* * *
쇼가 끝난 뒤 샤워를 마치고 나오자 락커룸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오늘 함께 쇼를 진행한 선수들과 할리, 그리고 바쿠까지.
다들 내 링 세그먼트를 보고서는 할 말이 있는 듯한 얼굴이었다.
‘올 게 왔군.’
나는 머리를 탈탈 털어내며 할리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그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멋진 세그먼트였다.”
“감사합니다.”
“왜 그랬지?”
“관객들이 저에게 환호를 보냈으니까요. 조금 더 잔혹하게 행동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습니다.”
나는 침착하게 설명했다.
좀 문제가 있는 행동이기는 했다. 각본상에 피를 내는 ‘블러드 잡’을 한다는 내용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반드시 해야만 했다.
나는 이제 시험대에 올라 모두를 설득해야 했다. ……안타깝게도 날 변호해줄 허스키는 치료 때문인지 자리에 없었지만 말이다.
다행히 할리는 내가 한 말을 나름대로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설명해봐라.”
“사람들이 허스키에게 보내는 반응이 생각보다 나빴거든요. 러셀이 그 자리에서 곧바로 링을 떠나면 야유를 받을 것 같았죠.”
자칫 러셀이라는 선수를 겁쟁이처럼 보이게 하는 연출이었다.
때문에 나는 그를 속여 링 밖으로 내보낸 것처럼 연출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다음 주의 싸움을 위해 내가 악역으로서 재수 없어야 할 순간에 어그로를 허스키가 가지고 갔다.
거기다 그건 좋은 의미의 어그로도 아니었다. 어찌 보자면 허스키는 나쁜 의미에서 내게 왔어야 할 스포트라이트를 앗아갔다.
그가 당장 기믹 변경을 한다는 걸 생각하면 딱히 쇼에 이득이 될 게 없었다. 때문에 나는 그 야유를 내 쪽으로 끌어와야만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게 블러드 잡이었습니다. 각본을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죠.”
“할리, 이건 확실히…….”
“바쿠, 조용히 해라.”
“옙.”
날 변호해주려던 바쿠는 할리의 말에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이야기를 들은 선수들 역시 여러모로 복잡하다는 반응이었다.
확실히 각본을 벗어나는 행동은 용서받을 수 없는 금기였다.
하지만 내 행동은 결국 각본의 연속성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침묵하던 할리는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 자식 어디 있어.”
“예? 누구…….”
“허스키 그 자식 말이야! 그렇게 깊이 째는 놈이 어디 있어?”
“…….”
확실히 블러드 잡이라기에는 피가 너무 많이 나오기는 했지.
근데 그건 허스키의 실수다.
……라고 생각했으나, 할리는 짜증스럽다는 듯 날 돌아보았다.
“너도 인마!”
“저, 저요?”
“그래! 이 자식들이 보면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진짜로 사고가 난 건 아닐까 싶었다고!”
“죄, 죄송합니다.”
결국 할리가 날 나무라는 이유는 단순히 화가 나서인 듯했다.
우리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그러는 것이었으니 그 꾸짖음을 얌전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선수들이 입을 열었다.
“그래도 ‘핫’했잖아요. 할리.”
“맞아요. 저도 보면서 다음 주 경기가 기대되던데요.”
“시끄러워, 이 자식들아. 시청률 상승한다고 니들 연봉은 한 푼도 안 오르는데 뭘 좋아들 해?”
크게 역정을 낸 할리는 그대로 몸을 훽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 타이밍에 맞춰 이마에 붕대를 감은 허스키가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들은 기다렸다는 듯 박수를 치며 그를 환영해주었다.
나는 곧바로 허스키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선배, 수고하셨어요.”
“많이 아프냐?”
“뭐, 이 정도야…….”
“너무 깊숙이 베어낸 거 아니야? 무슨 슬래셔 무비 같던데.”
선수들이 가볍게 장난을 쳤다.
소독하고 간단히 꿰맨 상처는 거즈로 뒤덮인 채였다. 나는 갑작스러운 행동을 믿고 따라와 준 그에게 감사한 마음을 느꼈다.
“덕분에 멋진 장면이 나왔어요.”
“아파서 좋은 일이 생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는 멋쩍은 듯 웃었다.
그런 허스키의 말을 듣고 주변에 모여든 선수들은 모두 호탕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건방진 루키 자식이 오늘도 한 건 더 멋지게 해낸 거지.”
“다음 주도 뭔가 멋진 걸 보여주기를 기대하겠어. 신입.”
살갑게 나를 가지고 장난치는 선배들을 보며 생각했다.
‘이제 완전히 무리에 받아들여졌다고 봐도 좋겠군.’
누군가는 이 모습을 보며 선배들이 염치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아니었다.
오히려 쿨한 것이었다.
나는 가지고 있는 스킬과 근성으로 내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믿어주는 것이 잘못된 일은 절대 아니지.
문제는 나에 의해 높아진 기대치가 다른 사람을 다소 힘들게 만들 수도 있다는 점이었지만.
“야, 러셀!”
“예, 옙!”
“다음 주에 방해 안 되도록 내일도 또 연습한다!”
“알겠습니다!”
군기가 바짝 들어 대답하는 명문가의 자식, 러셀 하트.
‘나중에 좀 도와줘야겠군.’
나는 그 모습을 다소 불쌍하다고 여겼다.
거기에 녀석과는 다음 주에 멋진 경기를 펼쳐야 하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