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28화 (28/634)

28.

그날 저녁, 가볍게 식사를 마친 우리는 훈련장에 모였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우리’는 GCW의 입사 동기인 나와 시나, 그리고 러셀을 말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입사 후 딱히 이유가 없더라도 이처럼 어울리고는 했다.

물론 오늘 같은 경우에는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었지만 말이다.

어두운 밤, 더위를 쫓기 위해 큰 문을 완전히 열어둔 상태에서 밤벌레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적막에 가까운 소리를 덜어내듯 나는 힘차게 링 위를 내달렸다.

지금 러셀과 나는 기술 몇 가지를 주고받으며 ‘스팟’을 짜는 중이었다. 시나도 아래에서 우리의 모습을 보며 감상을 말해주었다.

다소 거창한 준비였지만, 우리 둘 다 동의하고 하는 것이었다.

다음 주의 경기는 기대치를 끌어올려둔 만큼 확실한 결과를 보여주어야만 했기 때문이었다.

좋은 대립과 라이벌리는 선수의 가치를 크게 끌어올려주었다.

나는 러셀의 능력을 신용했다.

GCW에서 그는 따라올 자가 없는 멋진 재능을 가진 선수였다.

거기다 나와 대비되기도 했다.

그와의 라이벌리는 내 GCW 커리어에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로프 반동 후, 반대편으로 달려간 나는 러셀의 가랑이 사이와 어깨를 잡고 반대편으로 돌았다.

반동을 이용해 그를 링 바닥에 처박았다. 반격기로 주로 사용되는 기술, ‘스쿱 파워 슬램’이었다.

반격과 반격 끝에 내가 러셀을 제압하고 경기의 주도권을 손에 쥐는 마지막 기술이 끝났다.

“이렇게?”

“좋은 것 같은데.”

“시나, 보기에 어땠어?”

“……대체 어떻게 하면 몸이 그렇게 움직일 수가 있는 거야?”

녀석은 그저 감탄한 눈치였다. 러셀 역시도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합이 잘 맞아서 관객들도 이 정도면 만족하지 않을까?”

“글쎄.”

“왜, 마음에 안 들어?”

“스토리가 없잖아. 뭔가 좀 인디 느낌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

“그래, 내가 그쪽 출신이지. 그렇기 때문에 잘 아는 거고.”

사실 전생에는 별로 느끼지 못했던 부분이었지만, 레슬러들이 흔히 빠질 수 있는 함정이었다.

또한 인디 레슬링에서 별수 없이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했다.

무작정 화려한 기술만으로 경기를 구성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 기술에는 리스크가 있다. 선수 생명을 갉아먹는데다, 큰 부상을 당할 위험성 역시 커진다.

그럼에도 인디에서는 그런 식으로 레슬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일 부킹이 잡히는 경우도 많아 이야기를 넣기 어렵고, 화려한 무브로 관객들의 눈에 들어야 유명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스토리가 있지. 그걸 활용해야 해.”

관객들의 마음을 빠져들게 하는 훌륭한 스토리가 있다면, 화려한 기술보다도 더욱 몰입감을 부각시키는 것이 가능하다.

매일 밤마다 상대가 바뀌는 인디 레슬링에서는 절대로 쓸 수 없는 방식이기도 했다.

“이렇게 가자.”

무엇보다 전생의 나는 선수 생활 7년차에 무릎 연골이 박살 나 이후에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평생을 고생했으니, 이번에는 몸을 소중하게 아껴 쓸 생각이었다.

“내가 무릎을 가지고 도발할게.”

“무릎?”

“그래. 이게 참 재미있는 게…… 잘 쓰면 호쾌하지만 못 쓰면 또 비겁한 방식이라서.”

나는 미소를 지었다.

러셀 하트의 피니시 무브는 상대방의 ‘무릎’과 허리에 충격을 주는 관절기인 ‘샤프 슈터’였다.

그리고 내 피니셔는 무릎으로 상대의 안면을 걷어차는 니 킥.

“내가 경기 초반부터 계속 도발을 하는 거지. 네가 비겁하게 내 무릎을 공격할 거라고 말이야.”

아마 그에 대한 설명은 해설자들이 도와줄 수 있을 터였다.

“너는 선역이니까 그런 도발은 무시하겠지. 하지만 내 도발이 커질수록 사람들은 네가 거칠게 나오기를 원할 거야.”

“……잘만 쓰면 내 캐릭터를 만드는데 도움이 될 것 같은데.”

“위대한 삼촌하고 차별성을 두는 거지. ‘루키’로서 말이야.”

이해가 빨랐다.

러셀의 현역 삼촌인 그렉 하트는 완전무결한 영웅이었다.

나이를 먹은 요즘에는 끝물이라는 평을 들었지만, 그럼에 아직까지도 엄청난 인기를 자랑했다.

그런 영웅상을 원하는 여자와 아이들, 그리고 노인들에게.

하지만.

“너도 알잖아. 삼촌의 마이너 카피로는 성공하기 힘들다는 거.”

거기다 그건 러셀 본인의 모습을 투영한 것 또한 아니었다.

잠시 침묵하던 러셀은 이내 내 무릎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나라면 공격할 거 같은데.”

“그렇다면 네가 그런 캐릭터라는 걸 관객들에게 보여줘야지.”

“그래, 재미있겠어.”

내 말을 완전히 이해한 러셀은 흥미롭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우리는 링 위에서 부딪히며 경기를 짜기 시작했다.

* * *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우리의 아이디어를 들은 윗선에서는 좋은 경기가 될 것임을 느꼈는지 20분을 보장해주었다.

신인 두 사람의 경기치고는 무척이나 긴 시간이었다. 거기다 무려 ‘메인이벤트’ 경기였다.

쇼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경기.

말인즉슨 회사에서 나와 러셀을 미래를 책임질 선역과 악역으로서 크게 밀어주겠다는 뜻이었다.

‘물론 허스키의 기믹 변경 역시도 우리가 메인이벤트를 맡는데 큰 영향을 끼치긴 했겠지만.’

그조차 내 제안이었다.

덕분에 의욕이 생긴 나와 러셀은 최선을 다해 경기를 준비했다.

모든 스팟에 의미를 부여했고, 각본팀, 해설팀을 번갈아 오가며 우리 두 사람의 의사를 전달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된 경기.

러셀이 먼저 자신의 테마 음악에 맞춰 경기장으로 입장했다.

[Russell! Russell! Russell!]

사람들은 연신 러셀의 이름을 챈트했다. 그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듯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그리고 다음은 나였다.

[Boooooooooooooooo!]

등장만으로도 어그로가 잔뜩 끌렸다. 나는 그것을 비웃으며 사람들의 반응을 좀 더 유도했다.

덕분에 링 위로 올라가 대치했을 때, 신인 둘의 경기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반응이 나왔다.

프로레슬링은 관객들의 챈트가 중요한 포인트였다. 그것이 쇼가 가진 특수한 형질 중 하나였다.

현장감이라고 해야 할까?

거기에 관객들의 반응으로 인해 선수의 위상을 느낄 수 있었다.

위대한 선수는 가만히 서있는 것만으로도 반응을 끌어낸다.

우린 아직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잘 쓰인 각본 하나로 여기까지 이른 건 고무적인 일이었다.

달아오른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기술을 주고받으며 계획했던 대로 경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몸을 상하게 하는 큰 기술 없이 레슬링을 하는 내내 스토리를 보여주어 반응을 이끌어냈다.

나는 여유롭게 계속해서 러셀을 도발했고, 그가 반격할 때마다 반칙을 통해서 흐름을 끊었다.

우리는 양분된 반응을 보여주기 위해 주먹을 연속해서 주고받았다. 거기에 관객들이 반응했다.

[Boo! Yeah! Boo! Yeah!]

내가 러셀을 때릴 때 나오는 Boo와 러셀이 날 후려칠 때 나오는 Yeah가 번갈아 이어졌다.

관객들은 그렇게 해서 쇼에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덕분에 오디오가 비는 일은 없었다.

러셀이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그를 내던진 뒤 벌떡 일어난 나는 시간을 좀 끌기 위해 관객들을 도발했다.

[Booooooooooooooo!]

반대로 내가 쓰러졌을 때는 러셀이 벌떡 일어나 힘을 과시했다.

우리는 그렇게 영리하게 경기를 끌어나갔다. 위험한 기술이 없이도 사람들을 즐겁게 만들었다.

그렇게 경기는 계속 이어졌다.

러셀과 나는 몇 가지 기술을 주고받으며 점점 거칠게 싸워댔다.

몇 개의 스팟이 지나갔고, 그 끝에 나는 러셀을 쓰러뜨렸다.

야유 속에서 일어섰다.

씨익 웃고 있는 것과는 달리 나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거듭했다.

‘여기서는 조금 천천히.’

15분이 넘도록 경기가 이어져 슬슬 숨이 찼다. 경기의 절정으로 달려가기 전에 조금 쉬어갈 타이밍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나는 바닥에 쓰러진 러셀의 머리를 툭툭 건들며 일어서게 했다.

“실수하지 마.”

“……알겠어.”

작은 목소리로 말을 주고받은 뒤, 나는 무릎을 접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계속 러셀을 도발했다.

아마 해설은 이 모습을 보고 우리가 말했던 설명을 더 해주리라.

[신이 러셀에게 다시 심리전을 걸고 있습니다! 왜 무릎을 건들지 않느냐고 묻는 것 같은데요!]

[레슬러로서의 긍지 따위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정말이지 악독한 짓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이런 식으로 말이다.

러셀이 비틀거리며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무릎을 꿇은 채 녀석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반대편으로 내달려 크게 로프 반동을 했다.

신의 피니시 무브.

무릎을 들어 상대의 안면을 인정사정없이 걷어차는 니 킥.

그것이 들어가기 직전, 러셀 하트의 눈빛에 생기가 돌아왔다.

위로 치켜세운 무릎이 자리에 주저앉은 러셀의 손에 붙잡혔다.

“큭……?!”

신음을 흘린 나는 뒤이어 몸이 뒤쪽으로 붕 기우는 걸 느꼈다.

[Yeaaaaaaaaaaaaagh!]

환호하는 관객들.

나는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내 발목을 붙잡고 일어선 러셀이 곧바로 기술을 걸었다.

“자, 잠깐!!”

손을 내저었지만 늦었다.

러셀의 허벅지에 내 다리가 얽혔고, 몸이 빙글 뒤로 돌았다.

샤프 슈터.

하트 가문의 성명절기.

“크하악!!”

허리와 무릎을 동시에 압박하는 통증에 나는 비명을 내질렀다.

링 바로 앞에 서있는 관객들이 자리에서 일어선 것이 보였다.

그간의 고구마를 씻어내는 듯한 엄청난 크기의 환호.

러셀 하트는 경기 내내 신에게 도발을 당한 대로 그의 무릎을 아주 충실하게 조져주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이 줄곧 사용해왔던 피니시 무브인 ‘샤프 슈터’로 말이다.

“끄하아아악!!”

“항복하겠나?!”

어느새 내 앞으로 돌아온 심판이 다급한 얼굴로 의사를 물었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중 하나를 해내야만 했다.

하나는 기술을 풀어내는 것.

아니면 어떻게든 반대쪽으로 기어가 로프를 붙잡는 것.

마지막으로 항복하는 것.

고통 속에서 내가 비명을 내지를 때마다 사람들의 환호가 더욱 커졌다. 나는 묘한 쾌감(?)을 느끼며 더 힘차게 연기를 해댔다.

그리고 심판이 신호를 보냈다.

“슬슬 끝내.”

거기에 맞춰 나는 경기의 마지막 시퀀스를 수행하기 시작했다.

등 뒤로 손을 뻗은 나는 스쿼트 자세로 앉아 있는 러셀의 신발 끈을 움켜쥐고 휙 당겼다.

“……억?!”

중심을 잃은 러셀이 앞으로 털썩 쓰러졌다. 야유가 쏟아지는 가운데 나는 녀석을 밀어내고 일어서 반대편으로 내달렸다.

로프 반동 후, 고개를 든 러셀의 면상에 무릎을 꽂아 넣었다.

쩌억-!

허벅지를 내리치는 호쾌한 소리가 이어졌고, 뒤로 나가떨어진 러셀이 바닥에 대자로 쓰러졌다.

나는 재빨리 커버했다.

1, 2, 3……!

땡땡땡!

날카롭게 공이 울렸다.

러셀의 위에 쓰러진 채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나는 이내 녀석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고맙다.”

“나야, 말로.”

작은 소리는 관객들의 환성에 묻혔다. 결과가 어찌되었건 그들은 멋진 경기를 보여준 우리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었다.

지금쯤이면 또 해설자들이 내가 얼마나 비겁한 행동으로 승리를 갈취했는지를 말하고 있겠지.

‘악당 짓도 참 힘들어.’

쓰게 웃은 나는 남은 연기를 끝내기 위해 고통을 참고 일어났다.

링 포스트의 로프를 밟고 위로 올라서자 어마어마한 야유가 쏟아졌다. 관객들은 내 도발에 다시금 쇼에 몰입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Boooooooooooo!]

하지만 나는 그걸 무시하고 셔츠를 벗었다. 사람들에게 내 멋진 몸을 과시하며 계속 도발했다.

몇 달간 죽어라 단련한 끝에 내 몸은 프로레슬러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우락부락하지는 않았지만 건강하고 강해 보였다.

[Booooooooooooooo!!]

일부러 근육을 과시하는 동작을 취하자 사람들이 더 야유했다.

‘이거 좀 재미있네.’

나중에 혹여나 다른 곳에 취직하게 된다면 경력란에 ‘개새끼’라고 적어놔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카메라를 끌고 다니며 야유하는 관객들에게 내가 슈퍼스타라도 된 것처럼 허세를 부렸다.

그들이 손에 든 카메라를 빼앗아 사진을 찍었고, 야유하는 이들의 팝콘을 빼앗아 씹어댔다.

그리고 러셀이 빠져나간 링 위에 혼자 서서 마이크를 쥐었다.

“내가 누군지 확실하게 봤지?!”

[Boooooooooooooo!!]

“너희들이 아무리 야유해도 내가 최고란 사실은 변하지 않아! 4강! 결승전! 모조리 이겨주……!”

그 순간, 누군가가 불길하게 웃는 소리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크크크크…….]

나는 깜짝 놀란 얼굴로 입장로 위의 큰 스크린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 위로 흔들의자에 앉은 한 사내의 모습이 비춰졌다.

[아주 멋져. 정말 대단하군.]

흔들의자가 삐걱거렸다.

관객들이 그 불길한 모습을 보고는 한순간 침묵했다. 나에게 이어지던 야유가 마치 마법처럼 싹 잦아든 것이다.

나는 확신했다.

원래의 역사보다 조금 이른 시기에 나왔지만, 지금 ‘브로큰 와이엇’ 기믹은 확실하게 통했다.

내가 ‘잡질’을 해줄 만한 가치가 있는 괴물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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