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그날 밤.
훈련장에 켜진 작은 조명 아래 모인 선수들은 담배나 위스키, 얼음찜질로 통증을 달랬다.
나 역시도 얼음이 가득 담긴 불투명한 백을 목에 대고선 통증을 잠재우고자 노력했다.
우리가 이렇게 모인 이유는 간단했다.
GCW에는 라디오가 하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어메이징한 경기였어.]
[맞아. 스타 선수를 윗선에 빼앗기면서 어찌되나 싶었는데, 토너먼트로 분위기를 반전시킨 것도 멋졌고 경기도 죽여주더군.]
[그 신이라는 선수는 대체 누구지? 혹시 아는 바가 있나?]
라디오에서 우리 GCW에 대해 떠들고 있는 것은 ‘올 레슬링 뉴스레터’의 평론가 두 사람이었다.
1980년대부터 프로레슬링에 관련된 칼럼이나 뉴스를 발행해온 인물들로, 선수들 역시 그들을 크게 신뢰했다.
인디 선수들의 경우에는 그들이 경기를 보고 매기는 평점에 따라 몸값이 크게 달라질 정도였다.
그런 그들이 오늘 우리가 한 쇼에 대한 감상을 나누고 있었다.
[인디 쪽 선수였는데. 그때는 그다지 인상적이지는 않았거든.]
[인디? 링네임이 뭐였는데?]
[헌터 킬러.]
“…….”
나는 얼굴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그때 당시의 나는 왜 저런 이름으로 링네임을 지었던 걸까.
[아, 나도 기억나네. 그냥저냥 평범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갑자기 GCW에 나올 줄은 몰랐어.]
[거기다 러셀 하트를 잡고.]
[웃기는 게, 그 친구, 인디 쪽 마지막 경기 기록을 살펴보니 별로 오래되지 않았단 말이지? 그럼 훈련생 계약을 맺자마자 선수 계약도 맺고 시작했다는 건데.]
[러셀도 그렇다고 하던데.]
[아니, 러셀은 어려서부터 레슬링과 관련된 교육이라면 뭐든 받아온 엘리트고. 그러니까 선수 데뷔를 해도 이상할 건 없거든.]
“재미없게 네 이야기만 한다야.”
이야기를 듣던 선배 중 하나가 장난스럽게 나를 놀려댔다.
하지만 물론, 그 사실을 알 수 없는 평론가들은 계속해서 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문제는 그 러셀이 이 신이라는 선수한테 경기 주도권을 완전히 내준 상태에서 이렇게 멋진 경기가 뽑혔다는 말인데…….]
[아니, 이 경기의 멋진 부분은 위험한 범프가 거의 없었는데도 이런 반응이 나왔다는 점이야.]
[그래, 어린 나이에 이런 레슬링을 할 수 있다는 건 재능이지.]
[제기랄. 이렇게 다음 주가 기대되는 쇼는 정말 오랜만이군.]
[아, 다음 주가 기대되는 이유로는 물론 ‘그것’도 있지.]
[브로큰 와이엇?]
[원래 허스키 해릿 아니었어?]
[이 선수도 마찬가지야. 허스키 때는 그저 그런 선수 중 하나였거든. 경기력은 아직 모르겠지만 프로모 능력은 정말 환상적이더군.]
“와이엇! 네 이야기도 나왔다!”
선수들이 제 일처럼 기뻐하며 떠들썩하게 웃었다. 그 말에 와이엇은 머쓱한 듯 뺨을 긁적였다.
다들 즐거워하며 라디오를 듣는 가운데, 평론가들은 쇼에 대한 칭찬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전생에는 이렇게 칭찬을 듣기는커녕 언급조차 안 됐는데.’
지금은 선수들의 중심에 내가 있다.
모두가 은근히 나와의 대립을 원하는 눈치였고, 거기다 기믹에 관련된 이야기도 하고 싶어 했다.
GCW의 선수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신인으로서 이러는 경우는 전혀 없겠지.
업계에 끝까지 남아 프로듀서 업무를 보고, 각종 요령과 지식을 익힌 보람이 있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뭔가 업계에 묘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는 느낌이야. 앞으로 꽤나 재미있겠어.]
[온갖 미친놈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에 있으니 러셀 하트의 착한 캐릭터가 도리어 돋보이던데.]
하지만 그들은 지금 이 순간 러셀의 캐릭터에 대해 오판을 했다.
‘착한’ 캐릭터라고 말이다.
‘그럴 리가 있나.’
단순히 그것만으로는 사람들을 열광시킬 수가 없는 법이었다.
* * *
관객의 숫자는 단숨에 반등했다.
첫 번째 토너먼트 16강 이후, 8강, 4강 첫 경기까지 관객 숫자는 천 명을 가볍게 넘어섰다.
생방송 시청률 역시도 1퍼센트를 당연히 넘겼다. 그리고 재방송의 시청률이 거의 두 배 가까이 뛰어올랐다.
그날 라디오 방송으로 전국에 ‘GCW에 데뷔한 신인들과 기성 선수들의 조합이 핫하다.’라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16강 토너먼트 이후, 전국의 프로레슬링 너드Nerd들이 모여 우리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대박’의 조짐을 느낀 방송사에서는 몇 번이고 쇼를 재방영했다.
심지어는 토너먼트 특집으로 편집된 쇼가 따로 나갈 정도였다.
덕분에 일이 배는 늘었지만, 관계자들은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인터뷰요? 서류 처리되는 대로 이쪽으로 오시죠. 선수들 모두 성실하게 응할 것입니다.”
GCW의 캡틴인 할리 레이시는 매순간마다 새로운 계약을 따내며 일거리를 계속해서 물어왔다.
“그게 아니라고! 리버스 스윙 넥브레이커냐? 인버티드 아토믹 드랍을 쓰는데 왜 리버스 넥이야!”
바쿠는 선수들을 다그치며 그들이 조금이라도 더 멋지고 안전한 경기를 치르기를 염원했다.
그 외에도 각종 홍보 영상 제작에 프로모 제작, 선수들의 몸을 생각하면서 쇼의 흥미를 놓치지 않기 위해 모두가 노력했다.
GCW라는 배에 올라탄 사람들은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었다.
‘좋은 쇼를 만들어 관객들의 성원에 보답하자! ……그래야 내가 버는 돈이 더 많아지겠지?’
그리고 그런 GCW 임직원 모두의 노력은 멋진 결과로 찾아왔다.
시청률 2퍼센트 돌파.
관객 동원 1,200명 돌파.
차근차근 올라가는 숫자들.
그 결과를 전해들은 나는 온몸에 전율이 이는 것을 느끼며 커튼 뒤에서 몸을 풀었다.
“신, 오늘도 터뜨려줘요.”
“맡겨만 둬.”
여자 직원 하나가 근육으로 뒤덮인 내 팔을 툭 치고 지나갔다.
나는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반응이 전생에 비해 엄청나게 달라진 걸 실감했다.
전생에 이 나라에서 만나는 여성들은 대부분 나를 이성으로서 매력적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인종적인 편견의 영향도 물론 있었을 터였다. 동양인 남성은 ‘그게’ 작다던가 하는 소문 말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되도 않는 편견이다. 내 아랫도리의 샷건은 무지막지하게 크고 잘 쏴진다.
어쨌든, 여자들이 날 매력적으로 생각하지 않은 이유는 그와는 별개로 내가 찌질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몇 번이고 말했듯, 이제는 아니다.
나는 피부 아래를 가득 채우고 있는 근육을 느끼며 천천히 커튼 밖으로 걸어 나갔다.
[Boooooooooooooo!]
관객들의 야유를 씨익 웃으며 받아치고는 링으로 향했다.
오늘은 경기가 있는 날은 아니었다. 되도록 공을 들이는 편이 좋다는 판단 하에, 나와 브로큰 와이엇의 경기는 다음 주로 밀렸다.
각본팀에서 관객들에게 그의 캐릭터를 조금 더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마이크를 쥔 나는 그것을 위해 열심히 입을 털어댔다.
“지난주 기억 나? 웬 멍청이가 갑자기 정신이 나가서 흔들의자에서 끼익, 끼익…… 끼익.”
관객들의 반응이 조금 식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브로큰 와이엇의 기믹 변경이 너무 갑작스럽다고 느낀 것이었다.
물론, 그걸 예상한 만큼 나는 대처할 방법 또한 준비를 해왔다.
‘여기서 농담 한번 가야지.’
나는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관객들을 바라보았다.
“뭐, 나 같은 놈한테 뒤지게 얻어터졌으니 그럴 수도 있지. 흔한 일이잖아? 사람이 미치는 거. 사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안 미치고 사는 게 이상한 거지. 그 왜, 나한테 얻어터진 도련님처럼 말이야.”
그 말을 들은 관객들이 야유를 보냈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러셀의 착한 캐릭터가 먹히는 것이었다.
지난번에 전문가들이 말했던 것처럼 지금 GCW에 워낙에 미친놈들이 많아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다음주 4강에서 나와 그 미친놈이 싸우기로 했는데 말이야. 아마 내가 다시 또 두들겨 패주면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을까?”
내가 주먹으로 허공을 휘저어대자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쨌든, 이름이 뭐라고? 브로큰 와이엇? 이름은 잘 지었군. 내가 다시 박살내도 좋게 말이야. 너희 모두 다음 주를 기대해도…….”
바로 그 순간, 주변이 한순간 어두컴컴해지며 소음이 들려왔다.
기타와 바이올린이 한순간 날카롭게 연주된 뒤, ‘뚜웳!’ 하는 사내의 기괴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고요한 침묵. 완전한 어둠.
이내, 관객들이 웅성거렸다.
나는 원래 위치에 서서 브로큰 와이엇이 등장하기를 기다렸다.
암전 후 갑작스러운 등장.
‘무대’인 프로레슬링에서 극적인 연출을 위해 쓰이는 테크닉이었다.
음산한 와중, 바닥에 드라이아이스가 깔렸다. 조명이 하나둘씩 켜지고 약간 긴장한 채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내 모습이 드러났다.
나는 그렇게 연출된 상황 하나하나를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파악하고자 노력했다.
충분히 드라이아이스가 깔리고, 관객들이 순간 환호를 내질렀다.
‘와이엇이 나타난 거군.’
위치는 내 등 뒤다.
몸에 힘을 뺀 채 기다리자 뻑! 하는 소리와 함께 어깨에 주먹이 내리꽂혔다. 나는 과도한 동작과 함께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공격이 이어졌다.
브로큰 와이엇은 자신이 당한 공격을 그대로 내게 돌려주었다.
뒤쪽에서의 습격과 공격.
연이어 내리꽂히는 주먹에 나는 몸을 웅크린 채 공격을 받아냈다.
기괴하게 수염을 기른 와이엇은 정말로 호러 필름에 나오면 딱 좋을 사이비 교주의 모습이었다.
관객들은 기괴하기 그지없는 와이엇의 모습에 빠져들었다.
“브핫! 칵!!”
그 역시도 관객들의 반응에 부응하기 위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자신의 캐릭터를 보여주었다.
짐승 같은 공격이었다.
‘바쿠가 잘해주었군.’
나는 곧바로 이어진 헤드 벗을 크게 접수하며 그런 생각을 했다.
와이엇의 지저분하게 기른 머리카락과 수염이 마구 흔들렸다.
연이은 공격에 혼란스러워하던 나는 곧장 링 아래로 빠져나왔다.
놀란 듯 위를 올려다보자 브로큰 와이엇이 마麻로 된 중절모를 쓴 채 서있는 것이 보였다.
조명은 어느새 켜진 상태.
그의 카리스마 있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크게 반응을 보였다.
[Holy Sh-t! Holy Sh-t! Holy Sh-t! Holy Sh-t! Holy Sh-t!]
박자에 맞춘 욕설. 그야말로 ‘개쩐다!’는 반응이었다. 나는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와이엇이 땅에 떨어진 마이크를 주워 쉿쉿 거리는 소리를 냈다.
“조용히, 조용히. 나의 형제여, 자매들이여……. 내가 잠깐 할 이야기가 있으니 괜찮겠나?”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장단을 맞춰준 것이었지만 그런 그들의 행동이 와이엇의 카리스마를 돋보이게 했다.
“고맙군. 그러니 약속하지.”
와이엇의 목소리는 맑고 청량했다. 그는 관객들을 자기 종교의 신자라도 되는 것처럼 대했다.
“다음 주, 저 남자는 자신의 오만으로 인해 쓰러질 것이다.”
와이엇은 링 위를 크게 맴돌며 마이크워크를 계속 이어나갔다.
“내가 손을 쓰지 않아도 되지. 나는 언제나 그래왔거든. 내 곁에는 언제나 형제자매들이 있고, 나는 그들을 인도하며 싸운다.”
와이엇이 고개를 들었다.
단지 그 단순한 동작 하나만으로 관객들이 호응을 해주었다.
[Wiaitt! Wiatt! Wiatt! Wiatt!]
나는 그 모습을 당혹스러운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와이엇은 링 위에서 왕처럼 서있었다.
그런 모습에 사람들이 미쳐 열광하는 것과 함께……. 광고 시간으로 전환되었다.
인터컴을 착용하고 있던 FD가 손을 휘저어 신호를 보냈다.
나는 끝까지 연기하는 것을 잊지 않고 입장로를 걸어 퇴장했다.
“너 이제 죽었어! 인마!”
“다음 주에 너 뒤지는 거 보러올 거니까 목 씻고 준비해라!!”
소리치는 관중들에게 나 역시 맞받아치면서.
“시끄러워!”
물론 그렇게 말한 것과는 달리 날 보러올 거란 사실이 고마웠다.
경기장 안에서의 일은 어디까지나 쇼의 일부였다. 관객들 또한 그것을 알기에 나에게 야유를 보내고 호응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사람들의 야유 속에서 퇴장했다.
커튼을 걷고 안으로 들어오자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이 느껴졌다.
그리고 눈앞에는 기다렸다는 듯 나를 반겨주는 직원들이 있었다.
“고생했어요. 신.”
“완전 멋졌어.”
그들 하나하나에게 대답을 해주던 나는 이내 뒤쪽에 한 사람이 서있는 것을 발견했다.
“샥스터 씨?”
브로큰 와이엇의 친아버지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