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먼발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부자父子의 모습이 보였다.
조금 전의 일이었다. 링에서 퇴장해 나를 따라 안으로 들어온 와이엇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방문에 깜짝 놀란 반응을 보였다.
머뭇거리던 두 사람이 이내 대화를 위해 자리를 비웠고, 나는 지금 그걸 몰래 따라온 상황.
‘오늘은 잘했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았다.
저러다 아버지의 말에 멘탈이 박살 나서 다음 주 경기를 개떡 같이 한다면 나까지 큰일이었다.
‘좋은 소식이어야 할 텐데.’
차라리 뭐, 앞마당에서 석유가 터져서 더 이상 프로레슬링을 할 필요가 없다던가 말이다.
그렇게 헛된 생각을 하며 두 사람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눈이 휘둥그레 떠지는 걸 느꼈다.
‘뭐야?’
예상 외로 분위기가 훈훈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아들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샥스터. 와이엇도 눈가가 촉촉하게 물들어 있었다.
“본디 아들이란 아버지를 뛰어넘어 인정을 받고 싶은 법이지.”
“……?! 바, 바쿠?!”
“쉿, 들을라.”
내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바쿠가 입술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
그 역시도 두 사람이 걱정 되서 따라온 모양이었다. 거기다 또 멋들어지게 한마디까지 하셨다.
“근데 방금 뭐라 하셨…….”
“너도 그렇지 않냐?”
“……예, 뭐.”
나는 쓰게 웃었다.
맞는 말이었다.
나 역시 당신들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면 금의환향해 실컷 호강을 시켜드리고 싶었다.
내가 받은 은혜에 더해 부모님께 돌려드리는 것. 아마 그것은 모든 자식들의 꿈일 터였다.
더군다나 와이엇의 경우는 대물림된 ‘가업’이었다. 아버지의 인정이 갖는 의미는 말하지 않아도 되겠지.
거기에 계속해서 무시 받던 취미를 가지고 만들어낸 결과라는 부분에서 더 값진 것이었다.
게다가 우리의 일이 프로레슬링이었기에 가능한 결과물이었다.
나는 내 뒤에 서서 흐뭇하게 웃고 있는 바쿠를 슬쩍 돌아보았다.
“뭐 하나 여쭤 봐도 됩니까?”
“뭐냐, 꼬마.”
“왜 뽑으신 겁니까? 와이엇.”
이렇게 기믹을 만들기 전까지 그는 이쪽 일에 전혀 흥미가 없는 눈치였는데 말이다.
“재능이 보였거든.”
“재능……이요?”
“그래, 말 하나는 끝내주게 잘하잖냐. 원래 재능이 있는 일은 좋아할 수밖에 없는 법이거든.”
“재미있는 말씀이시군요.”
“너도 그런 거 아니냐?”
“……글쎄요.”
나는 잠시 침묵했다.
재능이 있는 일은 좋아할 수밖에 없다.
“뭐,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그렇다면 나는 프로레슬러로서 재능이 출중한 거겠지.
이렇게 업계에서 내 아이디어로 인해 일어나는 일들 하나하나가 정말로 좋았으니 말이다.
* * *
그로부터 2주가 지났다.
시청률과 관객 수는 연일 상승했으며, 사람들은 매주 쇼가 끝날 때마다 일주일을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걸어 스토리를 물었다.
또한 그것은 전문가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뉴스레터의 발행인들은 근 2주 동안의 스토리에 대해서 신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브로큰 와이엇! 와, 내 벌써부터 ‘올해의 기믹’에 뽑힐 선수가 나올 줄은 몰랐는데?]
[러셀이 난입할 거란 사실을 절묘하게 예언처럼 말했잖아. 사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인데.]
[그래서 신이 졌지. 난 그 친구가 챔피언 먹어도 이야기가 재미있었을 것 같은데 말이야.]
[그랬다면 역반응이 나왔을걸.]
[역반응? 그건 선역한테나 쓰는 말이잖아. 선역이 선역으로서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할 때.]
[지금 신에게 보내는 사람들의 야유는 좋은 반응이잖아. 하지만 지금 챔피언을 먹는다면 대부분 너무 작위적이라고 느낄 거야.]
[그건 그렇지. 아무리 그래도 바로 챔피언을 먹는 건 좀 그래.]
[맞아. 지금도 좋은 악역이니 괜찮아. 지는 걸 보고 싶어서 쇼에 오도록 하는 악당. 신은 벌써부터 그 포텐션을 보여주고 있고.]
[러셀과의 대립도 있고 말이야. 아무래도 이 대립은 무척이나 감정적이고 상징적인 만큼 확실하게 종지부를 찍고 넘어갔으면 하는데.]
[맞아. 마지막에 누가 서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하게 두 사람 다 차세대 거물이 될 거야.]
[근데 이건 좀 쓴 소리를 하나 하고 넘어가야겠어. 난 신을 ‘사랑’하게 되어버렸지만 말이야.]
“…….”
“소름이 돋아?”
함께 라디오를 듣고 있던 러셀이 날 보며 웃었다. 시나는 장난인 줄 모르고 정말 놀란 눈치였다.
[러셀의 난입이 벌써 세 번째야. 슬슬 식상한데다가 러셀의 캐릭터와도 맞지 않아. 이렇게 계속 난입만 반복한다면 사람들은 ‘저놈은 뭔데 계속 경기에 나타나서 방해를 해?’라고 생각하겠지.]
[아, 확실히 그건 좀 작위적이었어. 선역 캐릭터에도 맞지 않고. 러셀은 올바른 녀석이잖아.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없지만 있어줬으면 하는 그런 캐릭터 말이야.]
[아마 이번 대립으로 인해 확실하게 정해질 거야. 러셀 하트가 과연 그렉 하트를 이은 팬 페이보릿Fan Favorite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WWF 역사에 흔하디흔한 ‘실패한 선역’으로 남을 것인가.]
“실패한 선역?”
시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 선역이 실패하기도 해?”
“아주 많이 하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회사에서 밀어줘도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한 선역은 반드시 실패하기 마련이거든.”
“그렇다면 선역으로서의 의미가 없는 거 아니야? 왜 그런 캐릭터를 자꾸 내놓는 거지?”
“…….”
그 질문에 대답하기 전, 나는 시나를 침묵한 채 바라보았다.
사실, 지금 내 눈앞에 계신 이 분 역시도 그렇게 ‘흔하디흔한 선역’으로서 실패할 뻔했다.
관중들의 공감을 사지 못하는, 현실에는 절대 없을 올바르고 착한 캐릭터였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런 고난을 이겨내고 아이콘으로 우뚝 섰다.
왜 계속해서 실패할 게 뻔한 선역 캐릭터를 계속 미는가?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 기믹이 먹혀들고 성공만 한다면 업계 전체를 바꿀 정도의 슈퍼스타가 나오게 되거든.”
“호오, 그래?”
“캡틴 로건이 어린아이들에게 ‘비타민을 먹고 항상 기도하라!’고 말했던 거 기억 나? 그 유행어를 하는 내내 WWF에서는 의약업계와 제휴를 맺어 ‘캡틴 로건 비타민제’를 팔고 대박을 쳤거든.”
“그런 비하인드가…….”
“애들은 비타민을 먹기 싫어하지만 캡틴 로건이 그려진 알약이라면 실컷 먹어댔지.”
“그런 걸 어디서 들었어?”
러셀이 물었다.
“……음, 바쿠가 말해줬어.”
나는 적당히 변명하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니 타이밍 좋게 라디오에서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무튼, 기대되는 대립이지만 그만큼 우려도 된다는 거야.]
‘우려가 된다고?’
나는 미소를 지었다.
* * *
그리고 다음 주.
링 위에서 마이크를 쥔 나는 힘차게 열변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렉 하트라고 알고 있냐?”
사람들이 환호성을 보냈다.
그렉 ‘어쌔신’ 하트.
‘처형의 달인’, ‘영웅’, ‘일곱 가지 기술의 마스터’, 갖가지 이명을 가진 WWF의 슈퍼스타.
‘캐나다인’이라는 불리한 입지를 가지고도 무려 7회의 월드 챔피언 기록을 가진, 희대의 테크니션.
WWF의 회장 바트 맥센은 그의 존재 하나만으로 프랜차이즈를 만들 수 있을 만큼 카리스마와 실력을 갖춘 선수라고 평했다.
비록 자신만의 시대는 만들지 못했지만, 그 역시도 확실히 시대의 주역이었던 레전드였다.
지금은 비록 노쇠해 예전 같은 인기를 자랑하지는 못하지만, 그는 현역의 황혼기에서도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슈퍼스타였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노인네는 얼른 은퇴하고 캐나다로 돌아가서 아이스하키나 보는 게 좋지 않겠어?”
순간 찾아든 침묵.
그리고 이어진 야유.
아니, 그보다 더했다.
[F-ck you! SIN! F-ck you! SIN! F-ck you! SIN! F-ck you! SIN! F-ck you! SIN!]
사람들은 구호에 맞춰서 나에게 쌍욕을 해댔다. 하지만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재미있는 사실을 말해주지! 난 지금 링 위에서 그 자식 주름이 다 펴질 때까지 패줄 수 있어! 그리고 그놈의 ‘마이너 카피’에 불과한 조카 놈도 마찬가지지!”
[Boooooooooooooo!]
“사실을 말해서 찔리나? 너희들도 봤을 거 아니야? 내가 러셀 그 자식의 엉덩이를 걷어찬 걸!”
그 말에 맞춰 날카롭게 찢어지는 기타 리프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링 위로 나온 러셀은 나를 노려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를 욕하는 건 참아도 수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은 위대한 사내를 욕하는 건 참을 수 없다!”
“‘마이너 카피’ 주제에 무슨 소리야? 난 이제 ‘메이저 카피’를 따먹으러 올라갈 건데?”
“나와 한판 붙자.”
“뭐? 난 이미 쓰러뜨린 놈과 다시 붙는 취미는 없는데?”
“이번에는 무릎을 까주마.”
“……호오. 재밌겠는데.”
그 말을 들은 신이 흥미를 가졌고, 시합이 한 번 더 성사되었다.
그렇게 쇼를 끝마친 뒤, 이어진 라디오 방송에서는 우리 두 사람의 대립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니, 무릎을 깐다고?]
[그게 말이나 돼? 무릎을 까? 아니, 잠깐만.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선역이 무릎을 깐다고?]
[……몇 번이나 말하는 거야.]
[아니! 궁금하잖아!]
호평에 호평이 이어졌다.
관객들 역시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이제 다음 경기의 초점은 자연스럽게 ‘러셀이 정말로 신의 무릎을 깔 것인가?’로 이어졌다.
호기심은 구매로 이어진다.
기대감은 구매로 이어진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에게 질 수 없다는 듯 다른 선수들도 저마다의 개성을 뽐내기 시작했다.
쇼의 퀄리티가 전반적으로 올라가기 시작한 와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물론 와이엇이었다.
‘실력에 따라 챔피언이 된다.’고 말했던 기존의 방침에 따라 GCW 챔피언에 등극한 건 그였다.
그를 중심으로 선수들이 엮이며 메인 대립이 진행되었고, 러셀과 나도 계속 대립을 진행했다.
GCW에서도 물이 들어오는 시기에 맞춰 노를 젓고자 했다.
러셀과 나의 경기가 정해진 쇼로부터 며칠 뒤, 사무실에 불려간 나는 묘한 광경과 마주했다.
긴 테이블 위에 다섯 벌 정도 되는 티셔츠가 올라가 있었다.
“골라봐라.”
“……이게 뭡니까?”
나는 심각한 고민에 빠진 바쿠를 돌아보았다. 그는 검정색과 흰색인 티셔츠의 정중앙에 프린팅 된 로고를 손으로 가리켰다.
“네 티셔츠.”
“……제 거요?”
“그래, 이번에 상품으로 출시하려고 하거든.”
티셔츠의 앞에는 ‘Major Copy’라는 글씨가, 뒤에는 ‘Minor Copy’라는 글씨가 적혔다.
어깨 쪽에는 SIN과 역십자를 결합한 내 로고가 프린팅 된 채였다.
“별생각 없이 한 말인데요.”
“근데 반응이 좋아. 일단 네 로고 프린팅 셔츠는 따로 있고, 이것도 함께 출시할 생각이다.”
“그렉 하트 선생님께서 뭐라고 하시지 않을까요?”
“혹시나 해서 개인적으로 물어봤더니 올라오면 한 판 붙자던데.”
“……영광이군요.”
나는 쓰게 웃었다.
뭐, 좀 당황하긴 했지만 확실히 나쁘지 않은 티셔츠였다. 티셔츠 재질이나 마감도 깔끔하고.
“얼만데요?”
“샵에서 60달러. 인터넷에서 45달러. 전화 판매로 55달러.”
“왜 인터넷에서 더 싸죠?”
“사람들이 안 쓰니까.”
아, 맞다. 지금 2002년이지.
바쿠의 말에 그것을 되새김질한 나는 자리에 앉아 제일 괜찮아 보이는 셔츠를 골라 내밀었다.
“이걸로 하죠.”
“좋아. 이제 셔츠가 잘 팔리길 기도해라. 그래야지 네 녀석 통장에도 돈이 팍팍 꽂히니까.”
“아, 그럼 다시…….”
나는 바쿠의 손에 들려 있던 셔츠를 가져와 다시 살펴보았다.
이 티셔츠의 판매량이 통장에 꽂힌다면 좀 더 자세히 살펴봐야할 의무가 생기는 셈이었다.
‘계약이 어땠더라?’
나는 눈을 가늘게 뜬 바쿠를 앞에 둔 채 계약 조건을 떠올렸다.
계약금으로 받은 게 2만 달러.
그리고 선수 계약을 통해 책정된 연봉이 5만 달러 정도였다.
거기에 각종 머천다이즈 판매 수익으로 받기로 한 비율이.
“얼마였죠?”
“0.5퍼센트잖냐.”
“열심히 팔아야겠는데요.”
티셔츠 한 장이 팔리면 0.06 달러가 내 손에 들어온다는 말이었다. 세금은 여기서 다시 또 떼고.
바쿠는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게 계약이라는 거다. 애송이. 뭐, 다음 주 경기 전에 티셔츠 홍보용 프로모라도 찍어볼래?”
“시켜만 주신다면.”
고개를 끄덕인 나는 최종적으로 정한 티셔츠를 입고 일어났다.
조금 꽉 꼈지만 그게 오히려 울퉁불퉁한 근육을 돋보이게 했다.
가슴팍에 적힌 메이저 카피.
그리고 등에 적힌 마이너 카피.
이걸 통해서 선보일 좋은 프로모가 하나 생각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