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31화 (31/634)

31.

백스테이지 프로모.

말 그대로 스테이지 뒤에서 하는 프로모를 뜻하는 말이었다.

백스테이지 프로모는 드라마처럼 프로레슬링의 스토리를 전하기 위해 주기적으로 사용되었다.

입장로 위의 거대한 스크린에 내 모습이 비춰졌다. 관객들이 크게 야유를 보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티셔츠를 보여주었다.

앞에는 Major Copy.

뒤에는 Minor Copy.

그러자니 옆에서 다가온 아나운서가 내게 질문을 해왔다.

[신 선수, 오늘 러셀과의 일전이 준비되어 있는데…….]

[쉿쉿, 내가 할 말이 있으니 입을 열 때는 좀 조용히 있어.]

그 말에 아나운서의 표정이 구겨졌다. 나는 카메라에 잘 비치도록 가슴팍의 글씨를 내보였다.

[이건 날 바라볼 때의 러셀 하트를 그려낸 티셔츠야.]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그 자식이 이렇게 날 볼 때는 자신의 ‘메이저 카피’가 있는 거지. 아 물론, 나는 그 늙은 삼촌보다도 훨씬 위대한 남자지만.]

그리고 나는 뒤로 돌아섰다.

[놈이 쓰러졌을 때는 돌아선 날 바라볼 수 있겠지. 거기에 비친 이 ‘마이너 카피’는 놈 자신을 뜻하는 말이야. 러셀 하트는 절대로 날 넘어설 수 없어. 알겠어?]

[그, 그렇군요.]

[너희 찌질이들은 입을 일이 없는 셔츠겠지. 너희는 모두 누군가의 마이너 카피에 불과하니까. 이렇게 멋진 셔츤데 말이야. 촉감도 좋고 통풍도 잘 되고. 거기다 지금 샵에서 막 판매를 시작한 따끈따끈한 신상이기까지 하고.]

[……혹시 티셔츠 팔아먹으려고 이러시는 건 아니죠?]

아나운서의 말에 잠시 침묵하던 나는 그대로 뒤돌아 물러났다.

가벼운 유머로 끝낸 프로모에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나쁘지 않군.’

고릴라 포지션에서 장내 분위기를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프로모를 본 사람들은 나에게 티셔츠를 보여주고 조롱하기 위해 상품을 구매할 터였다.

‘마이너 카피 챈트가 나올까?’

그렇게 생각하며 웃던 나는 이내 누군가 어깨에 손을 얹는 것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러셀이었다.

“멋진 프로모였어.”

“고맙다.”

“오늘 경기도 잘 부탁한다.”

“그래, 오늘도 관객들이 미치도록 한번 제대로 붙어보자고.”

둘 다 프로였기에 한껏 조롱하는 프로모가 나와도 우리는 반응만 좋다면 뒤끝은 전혀 없었다.

쇼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새로이 GCW 챔피언에 오른 와이엇이 나와 링 프로모를 했고, 사람들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냈다.

그 뒤로도 몇 개의 경기가 이어졌다. 평범한 퀄리티였지만 사람들이 큰 호응을 보여주었다.

일종의 선순환이었다.

좋은 선수, 나아가 좋은 대립과 경기는 관객들이 쇼에 더 몰입하고 환호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리고 그런 열기가 TV로 보는 시청자들에게도 전해져 평범한 쇼라도 멋지게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의 열광적인 반응 속에서 메인이벤트가 찾아왔다.

먼저 러셀이 큰 환호 속에서 입장했다. 나는 마지막까지 VTR로 녀석의 반응을 살펴보았다.

비장한 얼굴.

‘확실히 난 놈이야.’

나처럼 회귀를 한 것도 아닌데 벌써 저 정도의 연기력이라니.

질 수 없군.

“신! 준비해주세요!”

직원의 신호에 따라 심호흡을 마친 나는 음악 소리를 들었다.

음악의 패러다임을 바꿀 남자의 재능이 더해져 완성된 나의 테마.

거기에 맞춰 밖으로 나가자 사람들이 웃고 있는 게 보였다.

다들 광고 시간에 내 티셔츠를 즉석에서 사와서 입은 것이었다.

어깨를 으쓱한 나는 재킷 밑에 입고 나온 티셔츠를 보여주었다.

“넌 내 마이너 카피야!”

사람들이 마구 욕을 해댔다.

‘6달러쯤 들어왔겠군.’

그렇게 생각한 나는 사람들이 욕하는 것을 여유로운 얼굴로 받아치며 링 위로 올라섰다.

아나운서가 날 소개했고, 이내 공이 울리며 경기가 시작되었다.

나는 여유롭게 러셀 앞으로 다가가 티셔츠를 보여주었다.

“러셀, 어때. 멋지지 않냐?”

녀석은 나를 노려볼 뿐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녀석의 앞에서 무릎을 탁탁 쳐댔다.

“그리고 이거. 네 안면과 키스했던 무릎인데, 공격할 수 있겠어?”

사람들이 야유하는 소리에 목소리가 묻힐 정도였다. 그렇게 분위기가 한계까지 과열되었다.

앞으로 나선 러셀이 내 멱살을 쥐고 티셔츠를 힘으로 찢어버렸다.

우드득! 하는 소리와 함께 티셔츠가 뜯어지고 사람들이 환호했다.

순간 당황해 뒤로 물러난 나는 이내 러셀을 향해 달려들었다. 휙 주저앉아 공격을 피해낸 녀석이 곧바로 내 무릎을 후려쳤다.

팔꿈치로 앞이나 뒤에서 상대의 무릎을 걷어차는, 일명 ‘찹 블록’이라는 기술이었다.

“큭?!”

나는 일부러 크게 뛰어 한 바퀴 앞으로 회전했다. 그러고는 공격과 동시에 앞으로 들어오는 러셀을 넘어가 바닥에 떨어졌다.

완벽한 합이었다.

관객들은 시작부터 무릎을 제대로 노리는 러셀의 모습에 속이 시원하다는 듯 환호를 보냈다.

그렇게 이어진 10분간의 경기.

계속해서 무릎을 공격당한 나는 제대로 설 수도 없었다.

어쩌다 반격을 취하려고 할 때에도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바닥에 털썩 쓰러졌다.

……물론 그 모든 게 연기였다.

실제로 러셀은 일평생 레슬링을 배워온 짬이 어디 가지 않는다는 듯 완벽하게 기술을 구사했다.

거기에 엉망진창이 되어 얻어터진 나는 마지막으로 이어진 샤프슈터를 이겨내지 못했다.

“항복! 항보오옥!!”

쾅쾅쾅!

내가 요란하게 탭을 치자 사람들이 거센 환호를 보냈다.

링 벨이 울리고 나는 러셀에게 스포트라이트를 양보하기 위해 링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 내려왔다.

날카로운 기타 리프와 함께 승자인 러셀의 테마가 흘러나왔다.

관객들의 환호 속에서 승리의 기쁨을 표현하는 그는 그야말로 시대가 원하는 선역이었다.

* * *

링에서 퇴장한 직후, 러셀은 곧바로 내게 감사를 표했다.

“고마워, 신.”

“별말씀을.”

“오늘 어땠어?”

“기술 구사 깔끔하던데.”

녀석은 무슨 일인지 경기가 끝난 뒤에 자신이 괜찮았는지 계속해서 확인을 받으려고 들었다.

워낙 잘해주고 있어서 별로 뭐라고 할 부분은 없었지만.

‘문제는 이거지.’

나는 뒤쪽에 서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바쿠를 돌아보았다.

일단 우리 선수들을 보호/감독하는 건 전적으로 그의 역할이었다. 때문에 러셀이 나에게 의지하는 건 좋지 못한 모양새였다.

“어떻게 보셨어요?”

“응? 뭐 당연한 걸 물어보냐.”

씨익 웃은 바쿠는 그래도 쿨하게 반응하며 타월을 던졌다.

“멋진 반전이었지.”

사람들은 오늘 러셀이 무릎을 공격하는 비겁한 짓을 하느냐 마느냐를 궁금해 했을 터였다.

하지만 러셀은 초장부터 시원시원하게 내 무릎을 까버렸다.

……이 모든 게 나의 아이디어였고, 그렇기 때문에 러셀이 날 믿고 의지하는 건 이해하지만.

‘오늘 이긴 건 너잖냐.’

나는 좀 더 당당해도 된다고 생각하며 러셀을 바라보았다.

“환호 죽이던데.”

“네가 잘 받쳐줘서 그렇지.”

그는 곧바로 공을 돌렸다. 싱긋 웃은 나는 우리 경기 이후 이어진 광고가 끝나가는 걸 확인했다.

이제 곧바로 내 두 번째 백스테이지 프로모가 이어질 차례였다.

“들어갑니다!”

“3, 2, 1!”

광고가 나오던 VTR이 검은색으로 변하고 이어서 백스테이지의 모습을 비추었다.

씨익, 씨익. 무릎을 절뚝이며 안으로 들어온 내가 곧바로 ‘단장실’이라 적혀진 문을 두들겼다.

안에서 나온 건 기믹 상으로 GCW의 단장을 맡아 방송에 출연하고 있는 할리 레이시였다.

[무슨 일인가. 신.]

[……리매치를 잡아줘요.]

[응? 그게 무슨 말이지?]

[러셀 하트를 완전히 박살낼 테니까 경기 다시 잡아달라고요!]

프로모는 그런 내용이었다.

나는 화가 나 할리를 노려보았다.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난 그는 이내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다면 자네도 뭔가를 걸게.]

[내가 지면 러셀 하트와 똑같은 레슬링 복장을 입죠.]

[……뭐?]

[그 게이 같은 옷 입고 사람들 앞에서 춤이라도 추겠습니다.]

[그, 그래애…….]

고개를 끄덕이는 할리.

경기가 다소 싱겁게 끝났던 것은 모두 이 2차전을 위해서였다.

거기서 무승부로 끝낸 뒤 최종전을 페이퍼뷰Pay Per View에서 치른다. 그게 우리의 목표였다.

페이퍼뷰는 따로 구매를 해야만 시청이 가능한 특별 방송이었다.

대립을 마무리하는 경기는 대부분 페이퍼뷰를 통해 이루어졌다.

주간 쇼에서 기대감을 끌어올리고 페이퍼뷰의 구매량을 늘린다.

회사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GCW에서는 석 달에 한 번 페이퍼뷰를 개최했고, 러셀과 내 대립도 거기에서 끝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다 예상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 * *

그리고 다시 일주일 뒤.

러셀과 나의 경기는 몸 관리를 생각해서 한 주를 쉬기로 했다.

따라서 오늘은 간단하게 녀석과 나의 대립을 심화시키기 위한 링 프로모만이 있을 예정이었다.

나와 러셀이 마주해 비난과 주먹을 주고받는, 프로레슬링 쇼에서 흔히 나오곤 하는 파트였다.

“러셀, 긴장하지 마라!”

바쿠의 격려를 들으며 먼저 링 위로 나간 러셀이 마이크를 들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환호를 보냈고 모두들 좋은 반응에 웃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뒤였다.

[Gay Costume! 짝! 짝! 짝짝짝! Gay Costume!]

박수와 함께 사람들이 러셀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이런.’

그 모습을 본 모두가 눈썹을 찡그렸다. 프로레슬링에서 흔히 겪는 일 중 하나였지만, 좋지 못했다.

‘내 프로모 때문이군.’

그가 입고 있는 아마추어 레슬링복을 게이 같다고 폄하했기 때문이었다. 그게 재미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겠지.

말인즉슨, 아직 러셀의 캐릭터는 사람들의 마음에 홀로 서지는 못했다는 이야기였다.

‘거기에 그냥 각본을 다 떠나서 선수를 놀려대고 싶은 거고.’

나는 가볍게 혀를 찼다.

“음.”

바쿠가 나직이 신음했다.

마이크를 입에 대려던 러셀이 이내 침묵했다. 사람들이 계속해서 그를 놀려대며 장난을 쳤다.

물론, 아예 무반응보다는 나았지만……. 어쨌거나 선수 위상에 심각하게 결함이 올 수가 있었다.

그것을 보다 못한 할리와 바쿠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할리, 뭐라도 하죠?”

“뭘 어쩌자고?”

“일단 광고로 돌리고 생각하죠.”

나는 그 사이에 끼어들었다.

“할리, 1분만 주세요.”

“신? 뭐 어쩌려고?”

“뭐, 인디에서 자주 겪었던 상황이에요. 해결할 수 있습니다.”

나는 가볍게 대답했다.

모두가 의아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는 허락을 구하기 위해 할리를 계속 바라보았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그가 내 얼굴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해봐라.”

“실망시키지 않겠습니다.”

씨익 웃은 나는 뒤로 돌아서 음향팀장에게 말을 걸었다.

“러셀이 다시 말하려고 할 때 음악 틀어주세요.”

“오케이.”

“마이크 하나만 줘요.”

직원에게 무선 마이크를 하나 받아든 나는 곧바로 링 위로 나갈 준비를 했다.

남은 건 러셀이 즉흥적으로 맞춘 우리 둘의 탱고를 따라오길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다행히 마음이 전해졌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러셀이 다시금 게이 코스튬이라는 사람들의 외침 속에서 마이크를 들었다.

“내보낸다!”

내 음악이 러셀이 말하려던 것을 막고 울려 퍼졌다.

‘좋아, 어디 해보자고.’

머릿속에 멋진 헛소리를 좀 생각한 내가 밖으로 나갔다.

관객의 반응은 전과 달리 무작정 내게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그들이 내가 한 ‘게이 코스튬’ 유머에 동했기 때문일 터였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서 이 난관을 헤쳐 나갈 힌트를 얻었다.

“러셀, 러셀, 러셀.”

마이크를 쥔 내가 말하기 시작하자 음악이 멎었다.

입장로 위에 선 나는 좌우로 크게 맴돌며 러셀을 비웃었다.

“지금 네 표정 보여? 사람들이 놀리니까 허둥지둥. 그게 네 모습이야. 아무것도 모르는, 온실 속에서 자란 화초 같은 도련님.”

러셀은 날 가만히 바라보았다.

‘뭔가 연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완전히 얼어붙었을 뿐이로군.’

그 모습을 본 나는 크게 팔을 휘둘러 관객들을 가리켰다.

“놀랐어, 러셀? 네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널 모욕하는 게? 당연하지! 사실 이 모든 사람들은 ‘내가 매수한 녀석들’이거든!”

러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렇다.

나는 이 관객들마저 쇼와 각본의 일부로서 끌어들인 것이다.

이제 남은 건 두 가지.

러셀이 과연 이 즉흥 각본을 따라와줄 것인가.

그리고 관객들 역시도 이 즉흥 각본에 응해줄 것인가.

“다시 말해봐! 게이 코스튬!”

내 말을 들은 사람들이 열광하며 신나게 소리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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