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Gay Costume!]
경기장이 떠나가라 소리친 관객들이 박자에 맞춰 박수를 쳤다.
형식 없는 공연 예술.
어느 정도 그와 같은 프로레슬링의 특징을 정확히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나는 관객들을 단숨에 내 마이크워크의 배우로 끌어들였다.
잠시 침묵하던 러셀이 마이크를 입가에 가져다댔다. 관객들은 그의 반응을 기대해 입을 다물었다.
러셀은 눈썹을 찡그린 채 당혹스럽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이 ‘게이 옷’을 입지도 못할 네게 듣고 싶은 소리는 아닌데.”
“뭐라고?”
“아니지. 이건 게이 옷이 아니야. 싸우기 위한 전투복이지. 워터맨이나 알파맨처럼 말이야.”
그는 뭔가를 떠올린 듯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알파맨의 팬티 코스튬을 누가 역겹다며 욕하던가? 아니지. 그건 신념을 드러내는 수단이야.”
“신념?”
“그래, 너 같은 양아치와는 달리 남자답게 주고받겠다는 상징이지. 청바지를 입고 충격이나 줄이려는 네 옷이 더 게이 같은데?”
“이 자식…….”
“워워, 기다려. 내 말 아직 안 끝났으니까. 이 옷은 너와 달리 ‘레슬링’을 하는 나 같은 남자들에게만 허락된 진짜 옷이거든?”
러셀은 씨익 웃었다.
“링 위에서 무릎이 쓸릴 게 걱정이라면 니 패드라도 덧대는 게 어때? 카우보이.”
나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설득력이 있는 말이었다. 그에 따라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반응을 보여주었다.
[Knee pad! Knee Pad!]
거기에 맞춰 나는 놀란 듯 물러섰다. 그러자 관객들은 더 신이 나 ‘니 패드’ 챈트를 이어나갔다.
“아니라면 여기 올라와! 네가 겁쟁이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
[Hart! Hart! Hart!]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이 위대한 이름에 맞서보라고!”
분위기가 절정으로 치달았다.
사람들은 러셀의 마이크 워크에 완전히 감화되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서있던 나는 이내 마이크를 던지고 링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올라가지는 않았다.
러셀의 패기에 짓눌린 사실을 애써 감추려는 듯 씨익 웃었다.
[Booooooooooooooo!]
관객들이 맥이 빠진 듯 야유를 보냈다. 하지만 나는 그걸 무시하고 천천히 뒤로 물러서 그대로 백스테이지로 퇴장했다.
계속해서 야유가 이어지는 와중, 나는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내며 안으로 들어섰다.
‘어떻지?’
상황을 보기 위해 돌아서자 러셀의 음악이 연주되었다. 음향팀장이 늦지 않게 맞춘 것이었다.
관객들이 링 위에 서있던 러셀에게 집중했다. 그는 승리를 약속하듯 링 포스트 위로 올라갔다.
‘됐군.’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니 이내 어깨 위로 툭, 바쿠의 두터운 손이 얹어졌다.
“덕분에 살았다.”
“이번 건 제가 생각해도 좀 멋지게 커버 치기는 했네요.”
쓰게 웃으며 돌아보자 바쿠는 진지한 눈을 해보이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할리 레이시와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직원들 모두가 나를 경외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었다.
대단하다 정도가 아니었다.
‘와, 솔직히 좀 멋졌는데?’
내가 생각해도 그러니 남들이 보기에는 오죽할까. 프로레슬링의 신이 보더라도 혀를 내두를 거다.
나는 조금 전, 자칫 나락에 떨어질 뻔했던 러셀의 기믹을 완벽한 방법으로 구해낸 것이었다.
문제는 태연히 연기하는 데 체력 소모가 심해서 식은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는 점이었지만.
직원 하나가 건네는 물병을 받아든 나는 가득 찬 갈증을 비워내며 러셀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직원들 역시도 긴장한 얼굴로 러셀이 퇴장하는 걸 확인했다.
TV에는 이미 광고가 흘러나가고 있었지만 현장에서는 그와 별개로 액션을 취해줘야만 했다.
러셀은 침착하게 레슬러로서의 자신을 보여주며 커튼을 걷고 안으로 들어왔다.
“…….”
그리고 힘이 빠져 쓰러졌다.
미리 예상하고 있던 나는 곧바로 팔을 뻗어 그를 부축해주었다.
“고마워. 신.”
“별말씀을.”
“아니, 계속 같은 말만 하는 것 같은데. 진짜 네 덕분에 살았어.”
“네가 받아치는 것도 멋지던데.”
나는 덜덜 떨고 있는 러셀의 뺨을 툭툭 어루만지며 위로해주었다.
* * *
이것으로 하나가 확실해졌다.
아직 러셀 하트는 슈퍼히어로로서 홀로 서지 못했다. 그가 누리던 환호는 모두가 빌런인 나에 대한 반발에 기댄 반쪽짜리였다.
쇼가 끝난 뒤, 테이블에 앞에 앉은 나는 잠시 고민에 잠겼다.
‘예상 못한 건 아닌데.’
그래도 반 박자 빠른 타이밍에 찾아왔다. 그 이유를 깊이 고민해보던 나는 이내 답을 내렸다.
일단 첫 번째로, 러셀의 복장을 봤을 때 사람들이 실제로 ‘게이 코스튬’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실제로 그렇진 않았다.
나 역시도 게이들이 그런 옷을 입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폄하할 마음도 없고.
‘비즈니스라서 한 말이었지.’
간단한 유머에 불과했다. 나쁜 행동이기는 했지만 쇼의 흥행을 위해서 꼭 필요한 행위였다.
실제로 사람들은 그 말을 좋아했다. 아마추어 레슬링이 가진 ‘게이 같다’는 편견에 공감했다.
그리고 그런 반응을 통해 또 다른 하나의 결론이 도출되었다.
‘신’이라는 캐릭터가 사람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어낸 것이었다.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배드애스BadAss. 미국인이라면 누구나 환장하는 마초적인 캐릭터였다.
인종을 넘어서서(아마 그들은 내게서 브룩 리 같은 느낌을 받았겠지만) 내 경기력과 유머가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이 모든 걸 예상하고 페이퍼뷰를 넘어서까지 각본을 짰다. 그럼에 벌써부터 러셀의 반응이 죽은 건 불편한 부분이었다.
자칫 그가 ‘떡락’한다면 나에게도 안 좋은 영향이 올 테니까.
“좀 예상치 못한 상황이군.”
테이블의 반대편에 앉아있던 바쿠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자리에 함께 있던 다른 직원들이 동의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은 오늘 일로 큰 실의에 빠져있던 러셀을 자극했다.
“죄, 죄송합니다.”
“……네가 왜 사과를 해?”
바쿠가 눈썹을 찡그렸다.
“오히려 우리가 사과해야 하는 일이야. 네 캐릭터가 우습게 보이도록 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잠시 침묵하고 있자니 바쿠는 싱긋 웃으며 날 돌아보았다.
“그래도 어찌어찌 잘 넘겼다.”
“그러게요. 모두 신이 나가서 커버를 쳐준 덕분입니다.”
“각본에 문제는 없겠어요.”
“모이기 전에 라디오 듣고 왔는데, 렐처가 오늘 각본에 대해서 환상적이라고 극찬하던데요.”
직원들이 한마디씩 했다. 그것을 머릿속에서 종합해낸 바쿠가 결론을 내린 듯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게이 관련된 농담은 좀 자제하는 걸로 하지. 각본은 그대로 진행하는 걸로 하고.”
‘일단은 그게 낫겠군.’
관객들의 반응을 아예 무시하는 것까지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일단 대립이 끝날 때까지는 그 노선을 유지하는 게 좋을 듯했다.
자칫 러셀이 우습게 보인다면 이번 대립은 끝장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손을 들었다.
“바쿠, 지금 의견에 한 가지 더 추가해도 괜찮을까요?”
“뭐냐, 신.”
“다음 주 경기에서 ‘하드 히팅’을 하고 싶은데요.”
“하드 히팅……?”
바쿠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리고 블러드잡도요.”
“블러드자압?”
거기에 더해 어이가 없다는 듯 눈이 크게 뜨였다.
다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나는 진심이었다.
지금 이 상황을 매끄럽게 헤쳐가기 위해서는 무조건 그에 걸맞은 경기가 필요한 법이었다.
* * *
좋은 프로레슬러는 언제나 모든 상황에 최선을 다하지는 않는다.
프로레슬링은 몸을 던지고 공격을 맞아주는 일이다. 그렇기에 언제나 최선을 다한 선수는 그 말로가 언제나 좋지 못했다.
무릎이 망가져 바람만 불어도 큰 고통에 시달리거나, 그 고통을 잊기 위해 약물에 의존하거나.
나 역시 그랬다. 그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회귀한 뒤로 계속해서 몸을 아껴왔다.
내가 가진 지식 속에서,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한의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도록 노력했다.
‘한 경기 내에서의 완급 조절도 중요하지만 선수 커리어 내의 완급 조절 또한 중요한 법이거든.’
그럼에도 필요할 때는 몸을 던져야 하는 법이다.
피를 연출 도구로 쓰는 블러드잡 역시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지금 자신들이 치루는 것이 처절하고 잔혹한 경기임을 드러내기 위한 선수들의 희생인 것이다.
이마를 타고 피가 흘러내렸다.
“하아, 하아…….”
링 위에 대자로 뻗은 나는 힘에 부쳐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러셀과의 2차전.
처절하고 잔혹하기 그지없던 경기는 종막으로 치닫고 있었다.
경기 내내 신나게 얻어맞아서 가슴이며 목, 뺨이 후끈거렸다.
내 바로 옆에 쓰러져 있는 러셀 역시도 꼴이 엉망진창이었다.
관객들은 우리의 경기에 압도되었다. 쓰러진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다들 지겨워하지 않고 열심히 챈트를 해대고 있었다.
[This is Awesome!]
짝, 짝, 짝짝짝!
박수와 함께 ‘개쩐다!’는 환호가 이어졌다. 나는 거기에 정신을 차린 듯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경기가 시작한 직후, 우리를 가벼운 마음으로 바라보던 관객들을 사로잡은 테크닉이 있었다.
‘하드 히팅(hard hitting)’.
말 그대로 기술을 봐주지 않고 세게 걸어버리는 것이었다.
때릴 때도, 맞을 때도.
아무리 가짜라는 걸 안다고 한들 서로 정말로 세게 후려치면 사람들은 움찔 놀라는 법이다.
거기에 더해 이 경기가 정말로 가짜인지에 대해 고민을 하겠지.
각본 밖의 문제가 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일부러 그 경계선을 넘나들며 몰입을 유도했다.
하지만 점점 서로 합이 맞아야만 시전이 가능한 기술을 보여주며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린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은 경기를 보며 또 다른 감정을 느꼈다.
바로 경외감이었다.
쩌억! 쫘악!
관객들은 살이 붓고 터지는 충격을 버텨내는 우리 두 사람을 향해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다.
거기에 ‘게이 코스튬’ 따위는 들어올 구석이 없었다. 사람들은 우리 둘을 확실히 인정해주었다.
이 둘이라면 믿고 경기를 보러올 만한 레슬러들이라고 말이다.
그건 선악과 각본을 떠나 프로레슬러라면 응당 받아야 하는 존중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사람들에게 그런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쩌억-!
내가 휘두른 손바닥이 러셀의 가슴을 힘차게 후려갈겼다. 녀석은 통증에 괴로워하며 무너졌다.
경기의 종반부.
체력은 떨어지고 지칠 대로 지쳤다. 하지만 러셀과 나는 쓰러지지 않고 계속 서로를 공격했다.
강한 기술이 들어가도 끝내 쓰리 카운트를 내주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들은 우리에게 최고의 반응을 보내주었다.
[Let’s Go Russell!]
선역에게 보내는 응원. 하지만 반대로 나에게도 응원이 왔다.
[Let’s Go Sin!]
[Let’s Go Russell!]
[Let’s Go Sin!]
사람들은 박자에 맞춰 우리의 이름을 번갈아 연호했다. 다들 우리가 펼쳐내는 경기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것이다.
싱긋 웃은 나는 반대편의 러셀을 바라보았다. 녀석 역시도 몸을 추스르며 웃고 있었다.
다시금 충돌이 이어졌다.
각종 기술이 오가며 보다 못한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러셀의 샤프 슈터가 작렬했을 때는 모두가 경기장 안으로 난입해올 것 같은 기세가 느껴졌다.
경기 막바지의 상황.
이런 순간의 서브미션이 갖는 의미는 컸다.
“크아아아아악!!”
내가 세차게 비명을 지를수록 사람들은 격한 반응을 보냈다.
과연 탭을 칠까?
벗어날까?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이어졌고 나는 지난번에 했던 것처럼 러셀의 신발 끈을 풀려고 들었다.
하지만 러셀은 한 번 당한 수에 다시 당하지는 않았다. 끈을 풀려던 손이 놈에게 짓밟혔다.
“끄흑?!”
고통에 숨을 몰아쉰 나는 바닥에 축 늘어져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자니 심판이 내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왔다.
바로 그 순간, 나는 허리를 바싹 세우며 심판의 몸을 잡아당겼다.
“어, 어어?!”
중심을 잃은 그가 내 위에서 기술을 걸고 있는 러셀과 충돌했다.
각본대로의 행동이었다.
두 번째 경기는 결국 기술을 버티다 못한 내 반칙패로 끝났다.
경기의 결과를 제대로 망치는 악역으로서의 행동이었다.
땡땡땡!
링 벨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관객들이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Booooooooooooooo!]
하지만 겨우 통증에서 벗어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