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33화 (33/634)

33.

경기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라커룸 안으로 들어온 나를 맞이한 것은 의료팀의 직원이었다.

“신 선수, 이쪽으로.”

숨을 몰아쉰 나는 그 말에 따라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니 다짜고짜 소독용 거즈가 이마에 닿았다.

“끙…….”

“그래도 잘 찢었네요.”

“이 일 잘리면 고향에서 정육점이라도 하려고 배워뒀죠.”

가볍게 농담을 건네자 직원이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상처를 의료용 스테이플러로 꿰매고 처치를 끝냈다. 아드레날린이 식자 통증이 천천히 올라왔다.

“진통제 드려요?”

“아니, 괜찮아요.”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뒤이어 타이밍 좋게 얼음주머니를 든 러셀이 나타났다.

그 역시도 대강 처치를 끝낸 듯 이마에 거즈를 붙인 상태였다.

얼음주머니 하나를 건네받은 나는 싱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고생했어.”

“네 주먹 매섭던데.”

“너도.”

그래도 서로 완벽하게 합을 맞춰서 한 이틀 약 바르고 푹 쉬면 나을 터였다. 서로 조심을 했기에 대미지가 남을 염려도 없었다.

“셔츠 벗어요.”

직원의 말대로 러닝셔츠를 벗고 상반신을 드러낸 나는 가슴에 발리는 연고의 따끔함을 견뎠다.

나와 다른 직원에게 치료를 받고 있던 러셀이 말을 이었다.

“오늘 잘한 것 같아?”

“관객석만 봐도 알잖아?”

나는 싱긋 웃었다.

3,000석 규모의 경기장은 빈 구역이 거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러셀과 나의 대립이 티켓 판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리라.

이따가 녹화된 경기를 보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해볼 생각이었지만 걱정하지는 않았다.

‘관중 반응이 죽여줬으니까.’

그들은 우리가 의도한 대로 날뛰어주었다. 현장감이 생생해지며 경기의 몰입도는 훨씬 높아졌다.

세상의 그 어떤 쇼나 스포츠에도 없는 프로레슬링만의 문화.

바로 이처럼 관객들과 실시간으로 소통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주 제대로 나왔으니 나는 확신을 느꼈다.

‘멋진 경기였어.’

감회가 새로웠다.

전생의 나는 제대로 된 반응 한 번 얻지 못했던 찌질한 동양인 쿵푸 악역이었는데 말이다.

사실 여기에 러셀의 도움이 컸다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었다.

내가 러셀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미국의 비주류인 동양인이다. 하지만 러셀은 반대로 미국인은 아니지만 백인이었다.

하지만 그와의 대립을 통해 잘만 연출한다면 사람들은 우리 둘 모두에게 환호를 보내줄 터였다.

러셀 역시도 그렉의 마이너 카피라는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나 역시도 반대로 내가 가지고 있는 인종적인 약점을 극복한다.

‘멋진 관계야.’

솔직히 말해서 신인 두 명이서 이 정도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페이퍼뷰까지 대립을 끌어가는 것뿐이었다.

* * *

GCW의 주간 쇼는 페이퍼뷰를 향해 방송을 이어나갔다.

나와 러셀 역시도 매주 한 타임씩 차지해 계속 대립했다.

타격 입은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 신체적인 접촉은 하지 않았지만 그조차 연출로 사용했다.

주간 쇼의 링 위.

먼저 등장해 내 비겁함을 토로한 러셀에 이어 뒤따라 나타난 나는 야유 속에서 욕을 들어먹었다.

“비겁한 자식. 신발 끈 푸는 방법이 안 통하니까 심판을 당겨?”

“진정하라고. 러셀. 전날 타코를 잘못 먹어서 어쩔 수 없었어.”

“……타코?”

“그래, 여기 쇼 보러 오는 뚱보들이 자주 먹는 그거 말이야.”

“그게 무슨 소리야?”

“몸 상태가 안 좋았단 말이지. 타코가 조금 상했었나봐.”

“하, 무슨 되도 않는 변명이야.”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은 러셀은 링 위에서 다시 마이크를 들었다.

우리는 각자 짼 이마에 밴드 한 장씩을 붙이고 있는 상태였다.

“좋아. 그럼 결착은 페이퍼뷰에서 내자고. 그때 되서 또 같잖은 변명이나 하지 말고.”

“좋아. 거기에서 내가 어떤 남자인지 제대로 보여주지.”

우리 둘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그것을 본 관객들이 ‘YES’ 챈트를 보냈다.

지난 경기의 좋지 못한 결말에 실망한 이들이 우리가 제대로 붙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대립을 진행하며 페이퍼뷰의 기대감을 쌓아올렸다.

하지만 전과 다른 부분이 있다면, 두 번째 경기 이후로 분위기가 한층 누그러졌다는 점이었다.

러셀과 나는 점점 서로의 실력을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대립을 계속 이어간 끝에 페이퍼뷰가 코앞으로 찾아왔다.

기술 훈련, 신체 단련, 프로모 촬영, 아이디어 회의, 각본 체크, 연기 연습, 쇼 촬영까지.

그런 루틴으로 몇 주를 보낸 나는, 페이퍼뷰 바로 이전 주의 쇼 촬영이 끝난 뒤 곧장 차를 타고 아틀란타 시내까지 나왔다.

페이퍼뷰가 개최되는 곳은 평소 쓰던 GCW 경기장이 아니었다.

특별한 쇼인 만큼 더 많은 관객 수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에 회사에서는 외부 경기장을 대여했다.

이번에 고른 곳은 아틀란타 시내에서 10,000명 규모를 수용할 수 있는 스포츠 경기장이었다.

‘여기였군.’

익숙한 곳이었다.

전생에 GCW에 오래 머물렀던 나는 페이퍼뷰에도 꽤 참가했다.

‘모조리 지는 역할이었지만.’

그래도 덕분인지 이곳의 지리는 훤했다. 이곳이 가지는 다른 경기장과의 차이점 역시도 말이다.

“뭘 그렇게 생각해?”

잠시 경기장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주차를 마친 러셀이 다가왔다.

녀석은 일부러 데리고 나왔다.

경기를 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아무것도.”

이제 나는 내 커리어 역사상 최대의 경기를 치르게 된다.

거기다 놀랍게도 사람들이 큰 기대를 하고 있는 경기였다.

그저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끼며, 그대로 러셀과 함께 경기장 안으로 들어섰다.

보안 요원을 통과해, 복도를 지나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자 압도적인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와…….”

러셀도 깜짝 놀란 듯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원래 쓰던 GCW 경기장과는 규모 자체가 달랐으니 말이다.

마치 우주에 나와 있는 듯했다.

천장은 수없이 많은 조명이 가득했고, 그것이 경기장의 중심에 있는 링을 비추고 있었다.

각종 시설물 설치를 위해 조명을 최소한도만 켜둔 상태에서 주변은 완전히 어두컴컴했다.

당장 저 장막의 너머에서 누가 튀어나오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나마 아래쪽에서 열심히 인부들이 자재를 나르고 구조물을 설치하고 있어서 다행이지.’

쓰게 웃은 나는 들어온 입구 바로 옆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러셀, 이리로 와.”

“그, 그래.”

“감상이 어때?”

“무지막지하게 큰데.”

“WWF 메인 쇼에서는 이 정도 경기장이 기본이야.”

“그렇다고는 하던데…….”

러셀은 벌써부터 바짝 긴장한 눈치였다. 의외로 이 녀석은 삼촌 때문인지 좀 자신감이 없었다.

이해를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위대한 가족을 둔 중압감이 계속 이 녀석을 짓누르고 있는 거겠지.

거기다 온전히 자기 힘만으로 이뤄본 게 없는 만큼 크게 압박감을 느끼고 있을 터였다.

‘그것도 좀 덜어줘야겠군.’

그렇게 생각한 나는 진지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걱정 마. 러셀. 넌 세계 최고의 선수하고 경기를 하는 거니까.”

“뭐……?”

“우리가 할 경기는 세상을 박살낼 거야. Break The World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당연하지. 여기에서 네가 도와주면 아주 환상적일 테고.”

러셀이 피식 웃었다.

“그래, 그게 너였지.”

“깡이 중요하다고, 깡이. 거짓말을 진짜처럼 보이게 하려면 하는 사람이 당당해야 하는 거야.”

거기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면 더 좋았다.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의 인생을 투영한 것이고 말이다.

온갖 인생 역정을 견디고 넘어와 최고가 되고자 하는 남자.

나는 생각했다.

‘내가 최고다.’

그걸 믿어보고자 했다.

나는 러셀을 이끌어줄 수 있고, 러셀 역시도 나를 더 높은 위치에 닿게 도와줄 수가 있었다.

“……신, 그런데 말이야.”

“응? 또 뭐.”

“줄곧 생각해오던 건데, 과연 그런 경기 결과로 괜찮을까?”

“걱정 마시게, 친구. 이게 사람들이 바라는 이야기니까.”

나는 확신에 차 대답했다.

러셀과 나의 마지막 대결은 앞선 두 번의 경기와는 전혀 다른 결말이 될 것이다.

나의 선역 전환을 위해서.

* * *

페이퍼뷰 전날.

아틀란타 스포츠 경기장의 초대형 스크린 앞에 모여선 선수진들은 바로 오늘까지 전국의 TV에 방영되었던 광고를 보고 있었다.

[나는 반드시 챔피언이 된다.]

멋들어진 근육을 풀어낸 바비 애슐리가 바위를 집어던지고 포효했다. 그 뒤를 이어 옆에서 랜턴을 든 기괴한 사내가 나타났다.

[외눈수리 떼를 따르라.]

브로큰 와이엇.

서로 얼굴을 맞대고 선 두 사람의 모습을 가리듯 WWF와 GCW의 로고가 튀어나왔다.

[WWF - GCW : 테이크다운! 이번 주 일요일! XXF채널!]

‘구리네.’

소파에 앉은 나는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아냈다.

물론, 지금은 2002년이다.

거기다 사실 프로레슬링 업계는 그다지 영상 친화적이지 않았다. 일종의 연극 무대 같은 것이니까.

이때는 ‘3D’라는 기술이 막 태동할 시기여서 아무데나 갖다 붙였는데, 그렇게 만든 ‘WWF + GCW’ 로고는 정말 역겨웠다.

‘그렇다고 내가 미래로 가서 기술력을 가져올 수도 없는 거고.’

참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광고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태그 팀 챔피언과 도전자.

위민스 챔피언과 도전자.

그 외에도 이번 주 페이퍼뷰의 매치 카드들과 구매를 신청할 수 있는 전화번호, 로고가 나왔다.

나와 러셀의 광고도 나왔다.

[명예, 신의, 충직.]

한 줄기 빛 아래에 서있다 날개(구린 CG)를 펴는 러셀 하트.

반대편의 어둠에서 나타난 나는 선글라스를 쓴 채 싱긋 웃었다.

[너 같은 건 수없이 봤지.]

그 뒤를 잇는 구린 로고.

‘그나마 선방했군.’

나는 안도의 한숨이 쉬어지는 걸 느꼈다. 원래는 내 등에 악마의 날개까지 돋아날 예정이었다.

그랬다면 정말 구렸으리라.

어쨌든 마지막까지 모두 시청한 선수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한마음이 되어 박수를 쳤다.

CG가 구려도 이렇게 멋진 결과물을 만들어낸 GCW의 관계자들 모두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나 역시도 미소를 지었다.

스무 명 남짓한 선수진을 가지고 최대한으로 뽑아낸 결과였다.

돌풍의 주역인 브로큰 와이엇을 중심으로, 쇼에 다양성과 특별함을 더해줄 태그팀, 여성 디비전.

마지막으로 쇼의 미래이자 조커로서 픽된 나와 러셀의 대립.

그런 박수 소리 속에서 할리와 바쿠가 입장로를 걸어 나왔다.

그 외의 직원들도 내일 자신이 있을 자리에서 대기 중이었다.

할리가 연설을 시작했다.

“누군가 말했지. 결국 레슬러들은 물풍선 같은 근육을 떼놓으면 졸렬하게 정치 싸움이나 하는 소인배들에 불과하다고 말이야.”

모두가 그것을 경청했다.

“내 시대에도 그랬지. 정치가 안 통하면 짐승처럼 힘의 논리를 발휘하고 그러길 반복했어. 너희도 전에는 그랬었지만 그래도 뭐…… 지금은 좀 많이 나아졌군.”

할리는 피식 웃었다.

“그 이유가 뭔지 아나?”

“모르겠는데요.”

대답한 것은 바비였다.

“여유가 생겼으니 그래. 시대가 발전하고 이 업계가 하나의 장르로서 자리하며 굳이 누구를 죽이지 않아도 공생할 수 있으니까.”

그 시선이 나를 향했다.

“우리에게 그런 여유를 되찾아준 놈이 누구인지에 관해선 굳이 말하지 않겠다. 생초짜에게 오히려 기본을 배워버렸으니까.”

“…….”

선수들이 날 돌아보았다.

그 시선에 신용이 담겼다.

이 녀석이라면 믿고 파일 드라이버 같은 위험한 기술을 맞아줘도 괜찮겠다는 얼굴들이었다.

나는 자긍심에 어깨를 폈다.

“메인에 올라가서도 이 순간을 잊지 마라. 우리는 언젠가 한 줌 재가 되어 사라질 테지만, 이 순간을 남겼다는 건 영원할 거다.”

멋진 말이었다.

우리 모두는 결국,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를 남기고 싶었기에 이 업계에 들어온 것이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몸을 맡길 상대와도 싸웠던 수많은 선배 레슬러들이 흘린 피 위에.

우리는 그들의 꾸며진 모습을 보고 자랐다. 그리고 현실을 깨달았지만, 설령 그게 가짜라고 할지라도 괜찮은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내일 사람들에게 ‘꾸며진 가짜’를 보여주기 위해 나선다.

할리는 전의에 불타고 있는 선수들을 보고는 씨익 웃어 보였다.

“한번 해보자고. 애송이들.”

그 말을 들은 선수들의 함성이 경기장을 가득 채웠다.

‘멋진 말이군.’

내일 페이퍼뷰가 기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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