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그리고 다음 날.
페이퍼뷰가 개최될 예정인 건물 앞에는 수많은 인파가 모여들어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정도였다.
아틀란타의 시민들과 미국 전역에서 비행기를 타고 올 정도로 열성적인 레슬링 너드들이었다.
그들은 각기 구매한 레슬링 셔츠나 벨트, 굿즈를 입고 나와서 낮부터 입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스포츠 문화가 활성화된 미국에서는 대낮부터 축제 분위기를 즐기는 것이 보편적인 일이었다.
물론, GCW 측에서도 거기에 대응해 일부러 판을 깔아두었다.
티셔츠와 굿즈를 판매하는 노점이 건물 바깥에 가득 깔렸다.
거기다 일부러 주변의 식당들마저 섭외해 노점식당을 차렸다.
샌드위치, 핫도그, 제너럴 쿵-파오 치킨, 프라이드치킨, 감자튀김, 칩스, 펍시콜라에 이르기까지.
인근 맛집의 주방장들이 나와 GCW에 낼 수수료 5%를 제외한 선에서 솜씨를 발휘했다.
그처럼 사람들이 즐겁게 축제를 즐기는 가운데, GCW 측에서는 인터뷰나 설문 조사로 오늘 온 관객들의 반응을 확인하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었다.
1. 어디서 오셨나요?
2. 누구와 오셨나요?
3. 오늘 가장 기대되는 경기는?
4. 어떤 선수를 보러 오셨나요?
5. 가장 싫어하는 선수는?
문항 모두 가볍지만 깊은 부분까지 파악하는 것이 가능했다.
예를 들자면 첫 번째 문항은 원정 온 너드 계열 관중인지 아닌지를 일차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
두 번째 문항은 가족 단위의 고객인지 아닌지가 파악된다.
세 번째 문항은 대립의 완성도를, 네다섯 번째 문항은 선수들에 대한 평가를 알 수 있다.
뉴욕에서 온 남자 대학생, 닉 존슨은 인터뷰어의 앞에서 다소 과장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역시 브로큰 와이엇이죠! 그 기믹의 완성도하며 카리스마!”
가족 팬들은 WWF 메인의 그렉 하트와 러셀 하트의 티셔츠가 섞인 티셔츠를 입고 나타났다.
“역시 러셀이죠. 잘생기고 배울 점도 많아서 우리 아이도 너무 좋아해요. 꼭 이겼으면 좋겠어요!”
아내의 말을 들은 남편은 어이가 없다는 듯한 얼굴이 되었다.
그는 4인 가족 중에서 유일하게 악역인 신을 응원하는 남자였다. 그래서 최근 발언권을 잃었다.
하지만 그는 모름지기 남자라면 신과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만해 보일 만큼 자신감이 있고, 이기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정도의 패기.
‘너희들이 하는 헛소리에는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한 태도가 젊은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게 했다.
프로레슬러 신은 다른 인종의 사람마저도 자신의 팬으로 만들 정도의 카리스마를 보였다.
왕년의 홍콩 무비 스타이자 무술가였던 ‘브룩 리’처럼 말이다.
* * *
창문 바깥에서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위기가 좋군.’
싱긋 웃은 나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눈앞의 책상을 확인했다.
사인지와 사인펜, 그 밖에 발매된 내 티셔츠들이 놓여있었다.
우리 선수들은 추가 티켓을 구매한 사람들에게 사인 및 악수를 해주는 스케줄을 소화 중이었다.
내 옆에는 러셀 하트과 바비 애슐리, 브로큰 와이엇이 앉았다.
모두가 나름대로 팬층이 있다고 판단된 선수들이었다.
‘사인은 오랜만인데.’
거기다 이런 자리에 선발된 건 처음이었다. 나는 약간 긴장되는 기분을 느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니 자리에 앉아있던 레슬러들 중, 와이엇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 거야?”
전에 비해 수염을 네 배쯤 더 기른 상황이라 굉장히 무서웠다.
거기다 실제 쇼에서 사용하는 랜턴까지 가지고 나왔다.
“뭐가요?”
“케이페이브 말이야.”
“……사생활에서도 자기 기믹을 그대로 지키는 그거요?”
좀 긴장이 되어서 그런 것인지 이상하게 말이 막 나왔다.
“그래. 지킬 거야?”
“글, 쎄요. 저는 그렇게 하면 아마 팬하고 싸울 것 같은데.”
“저는 지키려고요. 어린이 팬들이 많을 것 같아서.”
러셀이 싱긋 웃었다.
“바비, 너는?”
“상대한테 맞춘다.”
내 결론도 그랬다.
바비와 나는 악역인 만큼(물론 와이엇도 명목상으로는 악역이지만) 관객과 문제가 생길 수 있는 상황은 최대한 피해야만 했다.
이쪽이 다짜고짜 악역 연기를 했다가 상대방이 시비로 받아들이면 분명히 피곤해질 테니까.
‘그보다 문제는, 나한테 사인을 받으려는 사람이 있냐는 건데.’
음, 괜히 불안해지는군.
등에서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나는 눈썹을 찡그린 채 안으로 사람들이 들어오길 기다렸다.
관객들의 반응은 죽여줬다.
모두가 나를 인정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새로운 형태의 시험대 위에 오르게 되자 속이 좀 부글부글 끓는 것 같았다.
‘그동안 쌓아올린 걸 믿자.’
그렇게 다짐한 직후, 멀찍이 서있던 직원 하나가 소리쳤다.
“문 개방하겠습니다!”
세 곳으로 나뉘어 있던 문이 열리자 줄서있던 사람들이 질서를 지키며 안으로 들어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우였다.
‘꽤 있다!’
내 쪽으로 들어온 손님들의 숫자는 상당했다. 거기다 대부분 내 티셔츠를 입어주기까지 했다.
나는 코끝이 찡한 것을 느끼며 가장 먼저 오는 안경을 쓴 백인 남성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름이?”
“어, C. 오코넬이요. 인터넷 닉네임인데. 혹시 ‘프로레슬 월드 파이팅’이라고 적어줄 수 있나요?”
“프로레슬 월드?”
“네, 인터넷 동호회인데.”
“제 이야기 많이 나오나요?”
“당연하죠! 요새 일본 쪽 레슬링만 찬양하던 애들도 다 당신 때문에 WWF를 보기 시작했다고요!”
오코넬은 힘 있게 말했다.
“당신은 우리 미국에 프로레슬링을 되돌려줄지도 모르는 슈퍼스타에요. 힘내요, 신.”
“……감사합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오코넬과 악수했다. 옆에 서있던 직원이 나와 그의 사진을 찍어주었다.
이렇게 해서 100달러 추가.
‘남는 장사지.’
거기에 사진을 찍은 만큼 나에게도 추가 개런티가 들어왔다.
긴장이 풀리니 바로 돈 생각이 나는 것이 인간의 영악한 부분이다.
그 밖에도 정말로 다양한 인간 군상이 나에게 사인을 받아갔다.
“넌 절대 러셀 하트를 이길 수 없어! 패배를 각오해두라고!”
“호오, 그야 시합을 보면 알 수 있겠지. 내가 지금 옆에 있는 저 초짜 놈한테 질 리가 없잖아?”
가벼운 악역 연기.
이런 게 또 프로레슬링의 멋진 부분이었다. 관객이 나서서 직접 이런 액션을 취해주니 말이다.
“넌 절대 못 이겨!”
……연기 맞지?
쓰게 웃은 나는 케이페이브를 지키고 깨며 사람들을 맞이했다.
개중에는 나와 같은 아시아 출신의 꼬마 무리 또한 존재했다.
“신! 오늘 꼭 이겨요!”
“그래, 그래. 러셀이 쓰러지면 그때 환호 쫙 해주는 거다?”
“물론이죠! 러셀 따위는 그냥 얼굴을 박살 내버리라고요!”
“…….”
컵라면의 환경 호르몬이 요즘 애들한테 그렇게 안 좋다더니.
잠깐 그런 생각을 했던 나는 이내 아이들과 사진을 찍어주었다.
이 녀석들은 내가 악역이든 선역이든 관계없이 나의 편이겠지.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아시아인인 것이 도움이 되다니 말이다.
회장은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로 인해 삽시간에 왁자지껄해졌다.
모두 예상했던 대로 러셀은 가족 단위의 팬들을, 바비는 같은 흑인이나 근육질의 팬들을, 그리고 와이엇은 주로 너드나 레드넥 같은 팬들을 맞이했다.
모두가 그들의 모습에 공감해 깊게 응원하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좀…… 묘했다.
처음의 아시아 사람들을 제외하면 프로레슬링에 깊게 빠진 너드 계통의 팬들만 오나 했더니.
“너, 내가 잘 지켜볼 거야.”
“……예?”
“게이 코스튬? 그런 게 어디 있어. 너 차별적이야. 내가 끝까지 지켜보겠어.”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 팬이 내 어깨 근육을 무슨 조각품이라도 되는 양 훑어보고 갔다.
‘……그러고 보니 예쁜 아시안 남자들이 게이 커뮤니티에서 크게 환영 받는다 그랬었지.’
뭐, 어쨌든 팬은 팬이다.
하지만 그다음으로 온 팬들은 정말이지 내 예상에서 제일 크게 벗어난 사람들이었다.
가족 단위의 팬.
내가 이런 사람들의 대변인이 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쭈뼛거리고 있는 꼬마는 분명히 내 팬이었다.
같은 아시아인.
그렇기 때문에 아마 이들은 날 응원하고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가족이라서 좀 당황스러웠다.
부부는 남루한 차림새였다.
이런 공간에 들어온 것도 처음인지 약간 당황한 모양새였다.
나는 친절하게 웃으며 리드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아, 네, 네!”
“가보렴. 네드.”
“…….”
우물쭈물하던 소년이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책상과 엇비슷한 키의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꽤나 야위었다.
우물쭈물하며 나와는 눈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녀석이었다.
이런 순간은 왠지 모르게 사람의 가슴을 후벼 판다. 하지만 나는 함부로 입을 열지는 않았다.
전부 내 착각일 수도, 그래서 내가 실례되는 일을 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이름이 뭐지?”
“네, 네드 김이요.”
“김?”
의외의 사실이었다.
“나도 김씨인데.”
“예?”
“부모님이 한국계 맞으시지?”
“그, 그런데요.”
“나도 그래.”
싱긋 웃어주었다.
사인을 휘갈기고 그 옆에 작게 ‘김준호’라는 이름을 적었다. 그리고는 네드에게 보여주었다.
“이게 진짜 이름.”
“전, 호, 킴?”
“준호 킴.”
“그, 그럼 신은?”
“슈퍼히어로 네임이지.”
그게 이런 소년이 단박에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일 터였다.
“부디 남들에게는 비밀로 해줘.”
“예, 예!”
“그래. 아, 어머님?”
나는 눈치를 살피며 카메라를 넣는 네드의 어머님을 바라보았다.
“아, 네.”
“사진 많이 찍어주세요. 같은 한국계를 만나서 저도 반갑네요.”
그 말에 환하게 웃은 어머님이 사진을 연신 찍어댔다. 나는 네드와 편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사는 곳은 어디인지. 왜 날 좋아하게 된 것인지. 앞으로 공부, 운동 가리지 않고 열심히 하라는 나름의 덕담까지도 더했다.
눈치 빠른 직원은 딱히 저지하지 않았다. 나는 최대한으로 시간을 끌며 네드를 상대해주었다.
그리고 마지막.
티셔츠와 GCW 모자, 운동용 리스트 밴드. 등등 갖가지 굿즈를 줘서 기분 좋게 돌려보냈다.
‘회귀했을 때는 딱히 인종적인 것에 연연하고 싶진 않았는데.’
그래도 만약 내가 동양인 꼬마들의 슈퍼히어로가 될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겠다 싶었다.
그렇게 이어진 사인회는 내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하며 끝났다.
* * *
[GCW! 테이크다운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오늘 중계를 맡은 것은 바로 저, 릭 로스와 말리부 킹입니다! 반갑습니다! 말리!]
[예~ 반갑습니다. 릭,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저야 내내 페이퍼뷰만 기대하고 있었죠! 현장의 이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시지 않습니까?]
현장 입장객수 9,842명.
메인 쇼에서도 좀처럼 볼 수 없는 대형 관객이었다.
거대한 크레인 카메라가 관객석 전체를 크게 훑고 지나갔고, 각종 피켓을 든 관객들이 환호했다.
닳고 닳은 현장 해설자인 릭 로스도 좀처럼 느껴볼 수 없었던 분위기에 전율을 느꼈다.
[모두 저와 같은 마음인 것 같네요! 오늘 선수들이 멋진 경기로 보답해주기를 기대합니다!]
[일단 매치 카드부터 보시죠!]
입장로 위의 거대한 스크린에 GCW의 로고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그 뒤를 이어 나타나야 할 매치 카드들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해설자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무척 당황했다.
[엇, 이게 무슨 일이죠?]
[잠시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시청자 여러분 죄송…….]
[모두, 내 말을 들어라.]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와 함께 스크린에 촛불 하나가 비춰졌다. 즐거운 반전에 놀란 관객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GCW의 현재 실질적인 탑 페이스인, 브로큰 와이엇이었다.
스크린에 랜턴을 든 그의 모습이 비춰졌다. 관객들은 묘한 카리스마에 공감하고 열광했다.
[모두 이걸 기다리고 있겠지.]
와이엇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GCW 챔피언 벨트를 들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뻔지르르하게 말만 하고 보여주지 않는 사람. 너희에게 희망을 주고 노예처럼 부려먹는 인간들.]
잠깐의 침묵.
수염에 뒤덮인 얼굴은 입을 다물자 푸른 눈동자만이 드러났다.
[그런 자들과 달리…… 나는 너희를 위해 왔다.]
훅!
와이엇이 랜턴을 불자 불이 꺼졌다. 그와 함께 음산하고 느릿한 기타 연주가 시작되었다.
놀랍게도 테이크다운은 GCW 챔피언십이 첫 번째 경기였다.
메인이벤트는 신과 러셀 하트의 싱글 매치.
거기에서 이번 페이퍼뷰의 가장 중요한 일이 일어날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