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리틀 바비, 만약 네가 겁쟁이가 아니라면 지금 당장 나와서 이 벨트에 도전하도록 해라.]
어깨에 벨트를 건 와이엇은 링 위에 서서 카리스마를 뽐냈다.
현장의 열기가 벽을 타고 라커룸까지 전해져왔다. 싱긋 웃으며 나는 모니터링 TV를 확인했다.
엄청난 환호성 속에서 와이엇은 쉴 새 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는 이들이 원하는 것을 보여줄 의무가 있다. 기다릴 필요는 없어! 지금 당장 시작하자고!]
시원한 외침에 사람들은 와이엇의 이름을 연호했다. 그러자 잠시 후, 바비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검은 피부를 지닌 야수.
130kg을 넘는 체중을 지닌 그는 신화 속에 나오는 영웅 같았다.
페이퍼뷰는 GCW 챔피언십을 오프닝 매치로 삼아 시작되었다.
보통 오프닝 매치에서는 열광적인 환호를 받을 수 있는 선수를 내세워 전반적인 쇼의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두 사람은 몹시도 적절한 대상이었다. 반응은 우리가 설계한 예상대로 흘러갔다.
‘경기는 좀 그렇지만.’
최근 들어 술도 끊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음에도 많이 부족했다.
하지만 그 약점을 자신의 카리스마로 보완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아낌없이 환호를 보내주었다.
그렇게 경기가 무르익어가며 바비 쪽으로 주도권이 넘어갔다.
전통적인 파워하우스 스타일을 선호하는 그는 거구의 와이엇을 번쩍번쩍 들어 가볍게 내던졌다.
사람들은 초인적인 무력을 선보이는 바비에게 환호했다. 두 선수 모두가 리스펙트를 받는 상황에 걸맞은 챈트가 울려 퍼졌다.
[Fight Forever!]
짝! 짝! 짝짝짝!
[Fight Forever!]
짝! 짝! 짝짝짝!
우렁찬 박수 소리와 함께 와이엇의 반격이 이어졌다. 하지만 바비는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현재 GCW 내에서 최강자로 분류되는 선수다운 강인함이었다.
토너먼트에서 와이엇이 이긴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는 듯, 그는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나갔다.
연이은 공격에 맥없이 쓰러지는 와이엇. 관객들 모두는 바비의 강인함에 매료되어 크게 환호했다.
그리고 바비가 자신의 피니시 무브인 ‘도미네이터’를 사용하기 위해 포즈를 취한 순간이었다.
갑자기 경기장 전체에 기괴하고 불쾌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비명을 지르는 목소리, 벌레가 기어가는 소리, 칠판을 긁는 소리, 그런 게 한데 뒤섞이고 경기장 내에 한순간 어둠이 찾아왔다.
웅성거리는 관중들. 그 뒤로 해설자들의 코멘트가 이어졌다.
[무, 무슨 일이죠?! 이게?!]
[브로큰 와이엇이 또 뭔가 심리전을 걸고 있는 것 같습니다!]
혼란스러운 와중, 꾸웳! 하는 소리와 함께 다시 불이 켜졌다.
와이엇과 바비는 링 위에 그대로였다. 하지만 잠깐의 암전 사이, 두 남자가 링 밖에 나타났다.
자기로 된 검은 양 가면을 쓴 두 남자는 큰 위압감을 뿜어냈다.
흑인 사내는 위아래가 하나인 정비공 옷을 입었고, 근육질의 백인 사내는 멜빵바지를 입었다.
심판이 놀라 돌아보았고, 바비 역시도 도미네이터를 사용하지 못하고 두 사람을 경계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아주 멋지군.’
하지만 사람들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경악한 얼굴이었다.
그런 가운데 가면을 쓴 두 사람이 로프를 잡고 위로 올라갔다.
바비는 링을 포위하고 있는 두 사람을 당황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 틈을 타 와이엇이 그를 공격했다. 두 사람 역시도 합류해 바비에게 무자비한 린치를 가했다.
[아~ 이게 무슨 일인가요! 브로큰 와이엇! 출신을 알 수 없는 두 사람과 함께 무자비하게 바비 애슐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저는 도무지 와이엇이 하는 생각을 모르겠군요! 릭! 뭔가 이런 행동에 목적이 있는 것일까요?!]
‘뭐긴 뭐야. 스테이블이지.’
나는 피식 웃었다.
와이엇의 무지막지한 카리스마라면 초짜 둘을 붙여 경험을 키워줄 수 있겠다는 판단이 나왔다.
그렇게 해서 선발된 두 초짜는 ‘숀 시나’와 ‘에디 모리스’였다.
‘시나의 역할이 전생과는 크게 달라졌지만, 애초에 GCW에서 그리 두각을 드러내진 않았으니까.’
그가 성장하는 건 WWF 메인에 올라가면서부터였다. 지금은 이렇게 가도 괜찮으리라.
[Boooooooooooo!]
관객들의 야유가 엄청났다.
경기의 결말이 나지 않고 비겁하게 끝나자 다들 화가 난 것이었다. 하지만 그조차 의도대로였다.
브로큰 와이엇은 어디까지나 악역이어야만 했다. 사이비 교주를 선역으로 밀면 단체 이미지에 딱히 좋을 게 없으니 말이다.
때문에 GCW에서는 와이엇을 카리스마 있는 탑힐로 밀기 위해 스테이블을 만들도록 했다.
테이크다운의 첫 시합은 그렇게 성공적으로 망쳐지고 있었다.
* * *
그 뒤로 이어진 세 경기 모두 훌륭하게 관객들을 열광시켰다.
이 모두가 앞에서 끌어주는 탑급 선수들이 아주 높은 수준의 결과를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그들을 따라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GCW는 자연스레 북미 프로레슬링계에서 가장 핫한 지역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런 탑급 선수 중에서 최고는…… 물론 나일 터였다.
경기에 나서기 전, 나는 가볍게 몸을 풀며 살짝 삐져나온 자신감을 다시 채워 넣었다.
‘나는 최고다.’
최고가 될 수밖에 없다.
통한다는 것을 알았다.
꼬마, 네드가 보고 있다.
‘해내고 만다.’
마치 팝의 황제 미라클 잭슨처럼, 쇼에서 누군가 날 보고 기절할 정도의 경기를 뽑아내겠다.
아이콘이 되어 프로레슬링 역사에 한 획을 그어 넣겠다.
그렇게 다짐한 직후, 직원이 외치는 소리가 귀에 내리꽂혔다.
“신 선수! 입장해주세요!”
내 음악이 울려 퍼졌다.
거기에 맞춰 커튼을 걷고 밖으로 나가자 사람들의 열광적인 환호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워-워-워어워어어어어!]
‘바로 이거지.’
성가대의 목소리에 맞춰 사람들이 힘차게 내 테마송을 따라 불렀다. 나는 마치 선역 슈퍼스타처럼 더 큰 목소리를 내라 요구했다.
‘반응이 좋군.’
그렇게 생각하며 링 위로 올라섰다. 아예 흥에 겨워 턴버클 좌우로 난 미들 로프를 밟고 올라가 크게 팔을 펼쳐 보였다.
“내가 이기는 게 보고 싶냐?!”
그 목소리는 들리지 않을 터였지만 대신 마음이 전해졌다. 사람들은 열광적으로 노래했다.
그리고 뒤이어 러셀 하트가 가문의 음악 아래에 입장했다.
날카로운 기타 리프.
보컬은 없고, 드럼과 베이스가 마구 날뛰었다. 러셀은 진지한 얼굴로 천천히 링에 들어왔다.
‘저게 멋진 부분이지.’
씨익 웃은 나는 링 벨이 울리자 악수를 청하는 척 손을 뻗었다.
그리고 공격했다.
하지만 러셀은 그렇게 쉽게 당해주지 않았다. 가볍게 공격을 피한 녀석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 악수를 청해왔다.
“…….”
“어때?”
반대의 상황이었다.
전까지는 내가 이런 식으로 도발을 하는 쪽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정반대의 상황이 되었다.
나는 놀란 듯 주변을 살폈다. 그러자 관객들은 악수를 받아주라는 듯 크게 환호성을 내질렀다.
나는 더 큰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관객들의 환호가 더 커졌다. 나는 그대로 러셀의 악수를 받으려고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러셀은 내밀었던 손을 회수해 머리를 쓸어 올렸다.
훌륭한 도발이다.
나는 그대로 잠시 굳어졌다.
[Russell! Russell! Russell!]
관객들이 크게 환호했다. 러셀은 더 이상 내게 당해주지 않고 반대로 멋지게 엿을 먹인 것이었다.
피식 웃은 나는 그대로 고개를 들었고, 러셀과 눈이 마주쳤다.
본격적인 경기가 시작되었다.
그동안 내내 합을 맞춰왔던 러셀과 나는 기가 막힌 호흡을 선보이며 초반 탐색전을 해나갔다.
팔을 꺾고 몸을 조이고 내치는 체인 레슬링. 딱히 합을 맞춰둔 부분은 아니었지만 엄청난 속도에 관객석의 열기가 뜨거워졌다.
이어서 내가 주도권을 잡았다.
나는 브롤러 스타일에 맞춘 타격기로 러셀을 제압해 나갔다.
해머링과 찹, 각종 킥 공격. 그 사이사이에 수플렉스와 스쿱 파워 슬램 같은 기술을 섞었다.
최대한 빠르고 시원시원하게 경기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기술들이었다. 러셀은 빠른 템포의 경기를 그럭저럭 잘 따라왔다.
그렇게 공방을 주거니 받거니.
업계 관계자들이나 레슬링에 익숙한 관객들은 지금쯤 모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을 터였다.
수없이 반복된 훈련 속에서 경기의 질은 상승했다. 러셀과 나는 이제 말하지 않아도 자신의 몸을 믿고 맡길 수 있는 파트너였다.
쿵!
공중에서 몸이 붙잡혀 내동댕이쳐졌다. 낙법을 쳐서 격렬한 통증을 견뎌낸 나는 그대로 이어지는 러셀의 안면 공격을 접수해주었다.
[Russell! Russell! Russell!]
[Sin! Sin! Sin! Sin! Sin!]
관객들의 우리의 이름을 번갈아 소리쳤다. 프로레슬러로서 누릴 수 있는 가히 최고의 상황이었다.
대립을 하는 상대방, 그리고 나.
어느 것 하나 모자람이 없었다.
우리는 이 순간의 아이콘이었다.
그렇게 경기가 무르익어갔다.
“허억, 헉…….”
나는 체력적인 한계를 연기하며 러셀과 마주보았다. 녀석 역시도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우리 두 사람을 지켜보던 심판이 이내 내 곁으로 다가왔다.
“신, 하나 크게 먹이라는데.”
“그래요?”
“그래, ‘나온다고’ 하는군.”
경기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심판이 반대로 가 러셀에게 마찬가지로 말을 전했다. 잠시 후, 녀석이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난타전을 치고받았다.
러셀 콜과 신 콜이 번갈아 울려 퍼졌다. 지친 러셀을 몰아붙인 나는 그대로 녀석을 로프 반동 시킨 뒤 달려들어 니 킥을 먹였다.
하지만 러셀은 그것을 피하며 동시에 내 다리를 붙잡았다.
바닥에 쿵! 넘어진 나는 그대로 허리를 숙이는 러셀의 멱살을 붙잡았다. 하지만 러셀은 억지로 사프 슈터를 걸려고 들었다.
뒤엉키는 몸.
관객들이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순간.
[꾸웳!]
기괴한 소리와 함께 다시 경기장에 어둠이 찾아왔다. 우리는 탄식 속에서 기술을 풀었다.
그러자 바로 링 아래에서 한 차례 쿵쾅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갑작스러운 난입을 연출하기 위해서 시나, 에디, 와이엇이 빠져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온통 어두컴컴한 와중, 누군가 로프를 통해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계획대로 입을 열었다.
“시나, 여기야.”
“으, 응!”
“작게 말해도 괜찮아. 일단 중심을 밟고 발로 밟는 것부터.”
나는 바닥에 누워 웅크렸다.
그 상태에서 발로 시나를 건드려 이쪽의 위치를 확인시켰다. 그러자 어설픈 스톰핑이 이어졌다.
쿵! 쿵!
관객들이 웅성거리는 소리.
그와 함께 다시 불이 들어왔다.
[아아!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1경기에서 나왔던 와이엇과 그 동료들이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해설자들이 당황해 외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검은 양 가면을 쓴 시나가 나를 몇 번이고 짓밟았다. 반대편에서는 에디가 러셀을 짓밟고 있었다.
땡땡땡땡땡땡땡!!
DQ(실격패)를 알리는 링 벨이 연이어 울렸다. 당황한 심판이 다가와 시나를 뜯어말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 뒤로 나타난 와이엇이 심판마저 공격하기 시작했다.
[Booooooooooooo!]
갑작스러운 난입에 관객들이 크게 야유를 보냈다. 하지만 와이엇과 동료들은 나와 러셀을 무자비하게 공격하며 링을 장악했다.
이유도 모른 채 경기의 결과를 빼앗긴 관객들이 크게 분노했다.
그렇게 적당히 시나의 스톰핑에 당해주던 나는 그대로 바닥을 굴러 링을 빠져나왔다. 링 위에 서있던 와이엇이 날 내려다보았다.
잠시 놀란 얼굴로 있던 나는 그대로 입장로를 되돌아갔다. 이제 와이엇과 그 동료들의 공격은 러셀 한 명에게만 집중되었다.
[Boooooooooooooooo!!]
야유를 보내는 관객들.
나는 일부러 뭔가 ‘망설이는 것’처럼 입장로 위에 우뚝 멈춰 섰다. 그러자 몇몇 관객들이 그것을 알아차려 챈트가 시작되었다.
[Sin! Sin! Sin! Sin! Sin! Sin!]
러셀을 도와줘라. 바로 그 바람이 담겨 있었다.
긴장이 고조된 순간에 나는 일부러 뜸을 들여 상황을 짙게 예열했다.
이게 우리가 정한 결말이었다.
신, 바비 래슐리의 턴 페이스.
와이엇을 필두로 한 악역 스테이블의 결성.
그를 위해 필요한 최적의 결말이었다. 우리는 그동안 충분히 필요한 포석을 깔아두었다.
서로 증오해 싸우던 두 사람이 서로를 조금씩 인정한 끝에 협력해 더 큰 적에 맞서는 구도.
그게 먹히고 있다는 사실은, 관객들의 반응만으로도 느껴졌다.
[Sin! Sin! Sin! Sin! Sin!]
관객들의 챈트에 고민하던 나는 이내 바리게이트 너머에 앉아있는 관객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솔직히 좀 놀랐다.
“……?”
“시, 신! 러셀을 구해줘요!”
가장 앞자리에 앉아있는 것은 아까 사인을 받으러 온 네드였다.
아주 잠깐 침묵하고 있던 나는 이내 천연덕스럽게 입을 열었다.
“아버님, 의자 좀 주십쇼.”
“예, 예!”
“네드, 따라하면 안 된다.”
“예! 힘내요!”
네드의 아버지에게서 철제의자를 받아든 나는 역대급의 환호를 받으며 링 위로 달려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