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36화 (36/634)

36.

체어샷.

그 앞에서는 만민이 평등했다.

의자를 들고 달려간 내가 링 위로 미끄러지듯 올라가자 사람들이 전율을 느끼고 엄청난 환호를 보내주었다.

앞에 서있던 에디의 복부를 의자 끝으로 찌른 나는 그대로 돌아들어가 강하게 등을 후려쳤다.

쩌억!

시원한 소리에 관중들의 더 크게 열광했다. 와이엇이 링 아래로 내려갔고, 나는 시나와 에디를 번갈아 공격하며 링을 정리했다.

두 사람이 바닥에 쓰러졌고, 그사이 러셀이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나는 녀석에게 의자를 내밀었다.

고통에 눈썹을 찡그린 채 나와 의자를 번갈아 바라보는 러셀.

[Yes! Yes! Yes! Yes! Yes!]

관객들은 얼른 의자를 받으라는 듯 크게 소리쳤다. 망설이던 러셀이 이내 의자를 잡고 휘둘렀다.

뻐억!

괴로워하며 링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에디. 나 역시 시나를 발로 밀어 링 밖으로 내보냈다.

우리 둘은 링 위에 서서 와이엇을 노려보았다. 계획이 틀어지게 된 와이엇은 자신의 옆에 선 두 부하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관객들이 계속해서 ‘Yes!’를 외치는 가운데, 나와 러셀은 링 위에 서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렇게 페이퍼뷰는 열광적인 환호 속에서 끝이 났다.

* * *

그날 저녁 이어진 라디오 방송.

프로레슬링이라면 질릴 정도로 봐온 전문가들이 어린아이처럼 흥분해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더블 턴이라니!]

[이 정도로 훌륭한 각본이 근래 북미 프로레슬링에 있었던가?]

[없었지. 와이엇은 스테이블을 결성해 턴 힐 하고, 서로를 증오해 싸우던 두 남자는 거기에 맞서서 팀이 되었지. 마치 슈퍼히어로와 빌런의 팀 업 같아서 멋졌어.]

[거기에 더 좋은 점은 이 쇼가 온전히 그 두 신인들을 띄우기 위해서 쓰였다는 거야. 그럼에도 반응이 전혀 죽지 않았지. 오늘 테이크다운은 프로레슬링의 본질을 꿰뚫는 쇼였던 것처럼 느껴지는군.]

[신과 러셀은 오늘 제대로 ‘겟 오버(떡상)’했어. 팬 페이보릿이 되었지. 두 사람 다 아주 잘생겼고 앞으로 GCW의 메인을 책임질 슈퍼스타가 될 게 분명해.]

[그런데, 그 둘을 붙였다는 건 태그 팀으로 가겠다는 거지?]

[그렇겠지. 아무래도 2선 벨트부터 차례차례 먹이면서 올라가는 것이 일반적인 루트니까.]

[그렇다면 바비가 턴페이스를 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겠군.]

[그렇게 셋과 와이엇의 스테이블이 붙는다니. 아주 자연스럽게 큰 그림까지 그리고 있어.]

[그렇다면 내일 쇼에서는 신과 러셀의 팁 업이 정해지겠지?]

거기까지 들은 바쿠가 라디오의 소리를 최소한으로 줄였다.

그는 샤워를 끝마치고 모인 우리 여섯 명을 보고 씨익 웃었다.

“그렇다고 하는데?”

“멋지게 배신해줘야죠.”

고개를 끄덕인 나는 옆에 앉은 러셀을 향해 주먹을 내밀었다.

가볍게 서로 주먹을 맞댄 우리 두 사람은 반대편의 바비, 와이엇, 시나와 에디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여섯 명이 또 다음 3개월을 함께할 동료들이었다.

페이퍼뷰는 성황리에 끝났지만 아직 ‘내일’ 사용할 프로모의 촬영이 남아있었다.

* * *

방송 일정으로 인해, 바로 다음 날에 이어진 GCW 주간 쇼는 대부분 페이퍼뷰가 끝난 이후의 애프터 스토리를 담고 있었다.

다음 대립의 예고, 대립이 끝난 후의 후일담 같은 것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시합은 구색 맞추기 식으로 운용되었고, 페이퍼뷰를 뛴 선수들은 체력을 생각해 프로모만을 수행했다.

쇼의 처음을 장식한 것은 브로큰 와이엇과 그 동료들이었다.

랜턴과 챔피언 벨트를 들고 나온 그는 관객들의 앞에서 자신의 의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나의 형제들이다.”

시나와 에디가 가면을 벗었다.

모니터링 TV로 확인한 그 두 얼굴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잔뜩 굳어진 얼굴은 어딘가 이상한 사람처럼 느껴져 오히려 그 기믹에는 잘 어울렸다.

“모두가 나와 함께하지. 우리는 방해가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하고 이 링의 지배자로 우뚝 선다.”

[Booooooooooooo!]

관객들은 더 이상 와이엇의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았다.

경기를 망치고 비겁하게 벨트를 지킨 그는 존중받지 못했다.

하지만 와이엇은 개의치 않고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우리는 와이엇 패밀리다.”

그렇게 와이엇이 스테이블의 이름을 말한 직후, 경기장 내부에 바비의 음악이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고, 어제의 충격이 남은 듯 절뚝거리며 나온 바비는 마이크를 들었다.

“와이엇, 어제 너는 비겁하게 챔피언 벨트를 훔쳐서 돌아갔지.”

“이것이 바로 마땅한 길이야.”

“엿이나 먹어. 넌 내가 가장 싫어하는 짓을 했다. 자기 자신의 힘 이외의 수단을 쓴 것이지.”

바비의 그 말을 멋지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내가 가볍게 한 조언이었다.

바비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누구든 무작정 쥐어 패는 악역이었지만, 결코 비겁한 짓은 하지 않았다.

거기에서 착안해 바비에게 새로운 요소를 집어넣으며 자연스럽게 팬의 편에 서게 만든 것이었다.

턴페이스한 바비 애슐리는 이제 자기 자신의 힘을 믿고 싸워 나가는 무뚝뚝한 기믹의 선역이었다.

와이엇이 기괴하게 웃었다.

“그래서 지금 챔피언이 누구지? 금색의 상징물을 두르고 왕처럼 서있는 게 누구냔 말이야.”

“…….”

“그렇게 자신이 있다면 링 위로 올라와보지 그래. 리틀 바비.”

“좋아.”

“어디 한번 해보자고.”

“하지만 나 혼자가 아니야. 너에게 당한 다른 친구들이 있지.”

바비가 뒤를 돌아보았다.

자연스럽게 나와 러셀의 등장을 기대한 사람들이 환호했다. 그리고 먼저 러셀의 음악이 울려 퍼졌다.

하지만 눈앞의 러셀은 날 돌아보며 피식 웃을 뿐이었다.

“얼마나 기다릴까?”

“글쎄, 한 15초?”

우리의 등장을 기대하고 있던 사람들은 이내 아무도 나오지 않자 의아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비 역시도 의아한 얼굴이었다. 물론 다 연기였지만 말이다.

그 반응을 한계까지 살펴보던 할리가 입을 열었다.

“슬슬 나가라.”

“예. ……가자.”

고개를 끄덕인 러셀이 나를 향해 돌아섰다. 우리는 서로의 뒤통수를 붙잡고 주먹을 들었다.

“좋아. 해보자고.”

그리고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 커튼 밖으로 나갔다.

동시에 주먹질이 시작되었다.

의아해하던 관객들은 나와 러셀의 난타전을 보고는 환호했다.

곁눈질로 확인하자 바비가 어이가 없다는 듯 양팔을 벌린 것이 보였다. 하지만 나와 러셀은 무시하고 계속해서 주먹을 주고받았다.

전문가 선생님들께서는 우리 둘의 팀 업이 바로 오늘 밤 이루어질 것이라고 예상하셨지만.

아쉽게도 우리는 아직 그 정도의 관계까지는 아니었다. 서로에게 아직 원한이 남아있는 것이다.

계속해서 주먹을 주고받으며 움직인 나와 러셀은 그렇게 다시 백스테이지로 퇴장했다.

곧바로 손을 놓고 모니터링 TV로 밖의 상황을 확인했다.

다들 황당해하는 와중 와이엇이 음산하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게 네 친구들인가?]

[제기랄, 잠깐만 기다려.]

길게 한숨을 내쉰 바비는 우리를 말리러 오려는 듯이 퇴장했다.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와 함께 광고 시간이 되었다.

무대 위의 와이엇 패밀리는 그사이 사람들을 선동하고 퇴장했다. 사람들은 크게 야유를 보냈다.

그리고 무대 뒤.

자리에 모인 여섯 명은 일이 잘 풀린 것에 대해서 즐거워했다.

“바비 선배 연기력이 좋던데요.”

“……니들 인기 너무 좋은 거 아니냐? 나오니까 반응 자체가 아예 다르던데?”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 바비.

그렇게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자니 뒤이어 광고 시간이 끝나고 준비된 프로모가 나왔다.

바로 어제 촬영한 것이었다.

[진정해! 신!]

[러셀! 좀 참으라고!]

[너 죽었어! 이 자식!]

[어디 덤벼보시지! 도련님!]

백스테이지에서 난투극을 벌이는 우리를 보안 요원들이 제지했다. 그러자 화면 너머에서 나온 바비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지금 뭐하는 거냐?! 우리끼리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니잖아!]

[저런 도련님 하나 없어도 싸우는데 아무 문제도 없거든?!]

[저런 뒷골목 양아치와 한 팀이 될 생각은 없습니다!]

러셀과 나는 크게 흥분해 좀처럼 적의를 누그러뜨리지 못했다.

일촉즉발의 상황, 누군가 화면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워, 워. 워.]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GCW의 단장을 맡고 있는 할리가 등장한 것이었다.

[꼬마들, 무슨 일이지?]

[아, 할리.]

바비가 당황해 대답했다. 그러자니 할리는 껄껄 웃으며 나와 러셀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너희 둘, 오늘 태그 팀 매치.]

[예?]

[아니, 왜……?]

[그게 사람들이 원하는 거니까.]

러셀이 화면을 바라보며 이야기하자 관객들이 그에 응답하듯 커다랗게 Yes! 챈트를 시작했다.

화면 속의 나와 러셀이 벙찐 모습을 한 채로 프로모가 끝났다. 그리고 해설자들의 코멘터리가 이어졌다.

[그렇다면 오늘 태그 팀 경기가 두 개나 되는 건가요? 릭.]

[그러게 말입니다! 러셀 하트와 신의 상대는 매치 카드가 잡히는 대로 보여드리겠습니다!]

[그에 앞서 와이엇 패밀리와 루차 킹즈의 태그 팀 매치가 진행될 예정이니 기대해주십시오!]

거기까지 들은 와이엇과 부하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잔뜩 긴장한 시나의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툭 쳐주었다.

“데뷔전, 잘해라.”

“여, 열심히 할게!”

“리드에 맞춰 따라가기만 하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고.”

러셀 역시 다가와 데뷔전을 치르게 된 시나를 응원했다. 나는 그 옆의 에디도 격려를 해주었다.

“에디, 너도 힘내라.”

“…….”

무뚝뚝한 채 고개를 끄덕이는 에디 모리스. 녀석은 시나와 반대로 아무런 티를 내지 않았다.

오늘 두 사람이 상대할 태그 팀은 10년이 넘는 경력으로 잔뼈가 굵은 루차 킹즈라는 팀이었다.

메인에서 자신들의 활용도가 많이 떨어진다고 여겨, 후배들을 가르쳐주기 위해 자진해서 일부러 GCW로 내려온 두 사람.

딱히 위상이 높은 건 아니었지만 실제로는 어마어마한 실력을 가진 진짜배기 레슬러들이었다.

그 두 사람이 끌어준다면 경기는 아무 문제없이 끝날 터였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세 사람을 배웅한 뒤 모니터링을 계속했다.

사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생방송이니까.’

나와 러셀이 이런 쪽으로 너무 익숙한 게 도리어 이상한 것이다. 실제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에디 역시도 무척 긴장했으리라.

하지만 그런 초짜 두 사람을 돌보기 위해 루차 킹즈가 나섰다.

생각한 대로 가면을 쓴 두 선배는 훌륭하게 초짜들을 이끌었다.

기술을 거는 것은 시나와 에디였지만, 업계인의 입장에서 보자니 루차 킹즈의 노련함이 느껴졌다.

‘멕시코의 위대함이군.’

멕시코 프로레슬링은 선수들이 가면을 쓰고 공중기를 중시해 ‘루차도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루차 킹즈는 미리 합의했던 각본대로 와이엇 패밀리의 두 사람에게 철저하게 짓밟혀주었다.

근육질의 시나와 거대한 에디는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그럼에 말이 안 되는 그림은 절대 아니었다.

경기가 끝난 뒤 지켜보던 와이엇이 링 위에 올라왔고 와이엇 패밀리는 루차 킹즈를 린치했다.

[Booooooooooooooo!!]

와이엇 패밀리는 야유 속에서 자신들의 승리를 자축했다.

앞으로 GCW의 악역으로서 업계를 이끌 스테이블의 신인들이 훌륭하게 첫 매치를 끝마쳤다.

* * *

그 뒤로 페이퍼뷰에 나가지 않은 선수들의 경기가 이어졌다.

페이퍼뷰에 나갔던 선수들을 쉬게 하는 한편, 신인들의 경험을 쌓도록 하는 의도였다.

물론 러셀과 나는 그러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무척 간단했다.

‘짬순이지.’

밀린 것이었다.

우리를 상대하기로 된 것은 ‘스트리트 타임즈’라는 팀이었다.

탄력 좋은 흑인 선수 두 사람으로 이루어진 태그 팀. 그들이 환호를 받으며 경기장으로 입장했다.

뒤이어 입장 준비를 하고 있던 나는 가볍게 호흡을 정돈했다.

“신부터 먼저 갈게요!”

그리고 직원의 신호가 떨어지자 커튼을 걷고 바깥으로 나갔다.

사람들이 내 테마 음악을 따라 불렀다. 나는 그게 나쁘지 않다는 듯 그들에게 반응을 해주었다.

가볍게 슬쩍 돌아보거나.

아니면 바리게이트 바로 뒤쪽에서 노래하는 관객들에게 다가가 싱긋 미소를 지어준다던가.

사람들의 합창이 나의 존재감을 더해주었다. 스트리트 타임즈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람들이 내게 보내는 반응은 생각한 것을 훨씬 뛰어넘었다.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전례가 없을 합창이었다.

스트리트 타임즈를 무시하고 지나친 나는 링 포스트를 밟고 올라가 힘차게 팔을 좌우로 펼쳤다.

반응은 한층 더 끓어올랐다.

나는 새로이 시작될 선역 전환 스토리가 잘 먹힐 것을 예감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