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37화 (37/634)

37.

땡땡땡!

승리를 알리는 링 벨이 울렸다.

스트리트 타임즈 중 하나를 커버하고 있던 나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번쩍 들었다.

음악에 맞춰 관객들이 노래를 불렀다. 깔끔하게 승리를 따낸 나는 기쁨의 세레모니를 펼쳤다.

그사이, 링 아래에서 다른 한 선수를 상대하고 있던 러셀이 위로 올라와 내 앞에 섰다.

나는 거만하게 팔을 펼쳤다.

“할 말 있냐?”

“왜 태그를 안 한 거지?”

“글쎄, 왜인 것 같아?”

나는 피식 웃었다.

경기는 나와 러셀의 ‘불편한 관계’를 중점에 두고 진행되었다.

경기 자체는 압도적으로 이겼지만 다른 의미에서 고생을 했다.

나와 러셀은 경기 내내 부딪히며 계속해서 말다툼을 벌였다.

팔을 뻗어도 무시하고 태그를 안 한다거나. 억지로 태그를 당한 뒤 화가 나 멱살을 잡는다던가.

페이퍼뷰 이후로 와이엇 패밀리라는 공동의 적이 생겼지만, 아직 러셀과 나는 서로 앙숙이었다.

결국 계속된 도발을 참다못한 러셀이 내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크게 얻어맞은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러셀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난투극이 벌어졌다.

관객들은 그런 우리를 보고 신과 러셀의 이름을 번갈아 소리쳤다. 그들은 오늘 경기를 보고 하나의 로망을 느낀 것이었다.

서로 싫어하던 두 사람이 공동의 적에 맞서 힘을 합친다.

클래식 클리셰였다. 단순하지만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의 정석.

결국 링 위에서 난투극이 이어진 끝에 우리는 할리가 불러낸 보안 요원들에 의해 제압되었다.

관객들은 열광적인 환호성으로 우리의 스토리에 응답해주었다.

* * *

며칠 뒤 저녁, 숙소.

한 해가 넘어가는 것을 기념해 숙소에서 따로 파티가 벌어졌다.

커다란 바베큐 그릴 위에서 소고기와 각종 야채들이 익어갔다.

그 앞에서 옥수수를 뒤집은 나는 불판의 후끈한 열기를 느끼며 비타민 음료를 꿀꺽 들이켰다.

선배들이 한잔하라며 자꾸 권했지만 끝끝내 마시는 척만 했다. 술은 몸에 좋지 않은 법이니까.

다들 취해있어서 다행이었다.

내가 술을 마시는 척만 해도 잘 마셨다며 껄껄 웃어주었으니까.

힘든 격전을 마치고 온 전사들이 그간의 회포를 푸는 밤.

GCW에서는 올해 내내 고생이 많았던 선수진과 직원들을 위해 바베큐 파티를 준비해주었다.

너무 적은 대가라고?

아니다.

내 통장에는 페이퍼뷰 수당으로 1만 달러가 입금되었다. 거기에 티셔츠도 무지막지하게 팔렸다.

거기다 우리는 프로레슬러들이다. 먹는 것만큼은 그 어디에 가서도 지지 않는 자들이었다.

냉동 트럭 안에 가득 차있던 고기가 벌써 반 이상 사라졌다. 굽는 족족 불판이 비워졌다.

“크하하하! 먹어! 먹어!”

이미 거나하게 취한 바쿠는 마음의 짐을 덜어낸 듯 고기와 술을 마음껏 포식했다.

선수면 선수, 직원이면 직원, 모두가 자기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내 긴장이 풀어진 상태.

바베큐 파티를 즐기는 일원들을 보며 나는 조용히 고기를 구웠다.

딱히 뭐 끼어들기 어렵다거나 하는 이유로 이러는 건 아니었다.

‘과식하거든.’

회귀한 뒤의 나는 최적의 루틴을 정해두고 계속 지켜왔다. 그것을 깨뜨리고 싶지는 않았다.

때문에 술은 적당히. 고기의 섭취도 최대한 천천히 늦추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만족했다.

전생에 적당히 살았던 나는 잠깐의 말초적인 쾌락이 주는 기쁨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 가지 못한다. 전생의 기억으로 그것을 깊이 인식한 나는 ‘운동선수’로서의 자신을 계속 통제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은 명예와 돈, 그리고 몸이라는 큰 자산.

‘무엇과도 바꿀 수 없지.’

미소를 지은 나는 이쪽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이 정확히 두 사람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러셀 하트와 숀 시나.

두 사람 다 고기는 적당히 먹고 술도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 그렇게 하는 이유는 달랐다.

그렇게 눈이 마주치자 러셀이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야채 꼬치를 뒤집으며 입을 열었다.

“안 마셔?”

“내일도 훈련이 있으니까.”

“부지런하네.”

“그래도 너보다 먼저 훈련장에 나온 적은 없었지만 말이야.”

러셀이 눈썹을 찡그렸다.

“정말로 인디 씬에 있다 온 거야? 어디 유명한 프로레슬러에게서 사사받은 적은 없고?”

“없어. 인디 시절에는 그 누구도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거든.”

“그건 왜…….”

“글쎄?”

아마 실력 때문이었겠지.

전생의 나는 기본기는 부족하고 위험한 범프나 실컷 해대는 그저 그런 애송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전혀 설득력이 없는 말이다.

때문에 좀 변명거리를 고민하고 있자니 러셀이 입을 다물었다.

어, 오해하나?

“인종 때문은 아니야.”

“그, 그래.”

당황하며 대답하는 러셀.

쓰게 웃은 나는 다 익은 고기를 꺼내 녀석의 접시에 올렸다.

“먹어라.”

“아, 아니. 오늘은 다 먹었는데.”

“사양 마. 이렇게 좋은 고기를 먹을 수 있는 날은 흔치 않다고.”

이어진 내 권유에 러셀은 피식 웃으며 고기를 집어 한입 먹었다.

그쯤해서 다가온 시나가 접시를 내 쪽으로 내밀었다.

“뭐야, 고기 더 줄까?”

“아니, 내가 구울 테니까 넌 이거 들고 더 먹으라고.”

“…….”

굳이 같은 접시를 써야 되니?

그렇게 생각하기는 했지만, 모처럼 권해준 것이었다. 집게를 넘기고 불판에서 떨어진 나는 열기에 숨이 막히던 게 서서히 가라앉는 걸 느꼈다.

좀 편해지고서야 육즙 가득한 고기를 냠냠 씹어대기 시작했다.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오늘 경기 어땠어, 시나?”

“솔직히 말해서 기억이 없어.”

“원래 그런 법이야. 그래도 보기에 나쁘지는 않았어. 베테랑인 루차 킹즈를 잘 따라갔잖아?”

근처에 있던 루차 킹즈의 두 사람이 그 말을 듣고 다가왔다.

“또 경기 이야기냐?”

“열심히 하는구먼. 꼬마들.”

“두 사람이 보기엔 어땠어요?”

“유연성을 길러, 시나. 자세가 뻣뻣하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

“예, 옙!”

“저희 경기는 어땠나요?”

“아미고(친구), 아미고. 뭘 당연한 사실을 물어보고 그래?”

“지금 GCW에서 가장 핫한 건 너희 두 사람이야. 둘이 합쳐져서 생기는 시너지가 장난이 아니라고.”

“그 말이 맞아.”

또 바비가 합류했다.

“와이엇이 악역으로 중심을 잡은 상태에서 확실하게 두 사람이 쇼의 기대감을 유지시켜주고 있어.”

어느덧 하나둘씩 합류한 선수들이 그릴 앞에서 각자 캐릭터에 관한 의견을 이야기했다.

‘물론 모든 과정은 각본팀과 그 윗선을 거쳐야만 하지만.’

그럼에도 프로레슬러로서 직접 디테일한 연기를 해야만 했기에 이런 연구는 무척이나 중요했다.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하며 함께 대화를 나누던 중, 이내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는 힐끔 고개를 돌렸다.

우리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바쿠와 할리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더니 이내 바쿠가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떠올랐는지 신이 나 할리에게 말을 걸었다.

‘뭐지?’

문득 그 내용이 궁금해졌다.

* * *

그리고 그 궁금증은 다음 날 낮이 되어 완벽하게 해소되었다.

“설문 조사를 하는 거야.”

“예?”

내 맞은편에 앉아 있던 러셀은 바쿠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나는 대강 이해했다.

“너희 둘에게 주어진 다음 주 각본이 뭔지는 기억하냐?”

“그야 물론…….”

“바비의 부탁을 받은 할리가 저희 둘의 팀워크가 향상될 만한 뭔가를 시키는 거였죠.”

“아, 그거였죠. 신은 왜 이런 걸 하냐면서 짜증을 내고, 저도 그러고. 분명히 이번 주에 개그 프로모를 찍기로 했었죠?”

“그래, 그래.”

“그 내용을 관객과 시청자들이 정하게 하자. 맞죠?”

“호오, 이해가 빠르군.”

바쿠가 씨익 웃어 보였다. 하지만 러셀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하게 하자고? 어떻게?”

“그야 ARS 전화겠지.”

“바로 그거야.”

“그거 받아줄 인력은 있어요? 전화 꽤 많이 올 것 같은데.”

“사람을 써야지.”

“아, 아니 잠깐만. 그렇다면 이번 주 프로모는 어떻게…….”

“뭐, 그야 할리가 다음에는 뭘 시킬지 고민한 다음에 ARS를 떠올리는 프로모를 하나 더 찍으면 되잖아.”

“……어째 아이디어를 입안한 나보다 더 앞서가는 것 같구나, 신.”

“후보군을 몇 개 추려서 번호 누르는 식으로 하면 집계가 편하겠죠. 좀 변태적인 아이디어도 넣어서 괜히 상상력 자극하고.”

“돈이 될 거다.”

“얼마 줄 건데요?”

“응?”

“보통 그렇게 하면 선수한테도 수당 떨어질 거 아니에요.”

“……어…….”

설마 이 양반 생각 안 했나.

“이, 일단 그건 나중에…….”

“0.5퍼센트씩만 주세요. 준비는 그쪽에서 다 해야 하니까. 그게 업계 평균 아니었나요?”

“그건 어디서 알아낸 거냐?”

“뭐, 적당히.”

나는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어쨌든.

우리를 써서 돈을 버는 것이니 그 수익은 마땅히 우리에게도 떨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ARS전화가 한 통화에 3달러 정도 드니까, 어쨌든 꽤 짭짤한 수익이 될 것은 분명해 보였다.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였다.

좀 미래의 이야기였지만 WWF에서도 이런 ‘투표 집계’를 포함한 각본을 여럿 만들고는 했다.

‘다 반응이 좋았지.’

아무래도 프로레슬링은 관객 참여형 쇼인 만큼, 대회장 밖에서도 직접 참여할 수 있게 하면 다들 좋아할 수밖에 없는 법이다.

3달러 정도야 맥주를 마신 뒤의 기분으로 적당히 쓸 수 있는 정도의 금액이니까.

“그렇다면 일단 관객들이 투표할 만한 아이디어가 필요하겠네요.”

씨익 웃은 나는 어안이 벙벙한 바쿠와 러셀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미래에 쓰였던 각본에서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몇 가지 떠올렸다.

“웃기는 걸로 가려면 교우 관계 개선 프로그램을 참여한다던가?”

“교우 관계, 뭐?”

“우리 둘이서 상담을 받는 거죠. 정신과 상담 비슷한 걸로. 웃길 수 있는 요소가 상당할 걸요.”

“호오…….”

“이런 건 어때요. 신이 자신이 게이 코스튬이라고 욕했던 옷을 입고 경기를 치루는 거죠.”

“러셀은 신의 경기복을 입고?”

“그거죠.”

“아니, 하지만 굳이 게이 코스튬에 관한 건 언급을…….”

“계속 그렇게 가다간 관객들이 자기 반응을 회사에서 멋대로 조종하려는 느낌을 받을걸요?”

“그렇다면 문제가 되겠군.”

“오히려 관객들에게 그걸 보여주고 반응을 바꾸는 게 현명한 해결책이라고 생각해요.”

“확실히 맞는 말이다.”

고개를 끄덕이는 바쿠. 그러자니 계속된 질문에 민망한 듯 러셀이 부끄러워하며 손을 들었다.

“저, 저기 잠깐만요?”

“뭐냐.”

“방금까지 ARS 전화로 정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근데 왜 멤버십 트레이닝으로 결과가 정해진 건지 싶어서…….”

“응? 그야 간단하지.”

별걸 다 묻는군.

바쿠도 같은 얼굴이었다.

“투표 결과를 우리가 편한 걸로 조작할 생각이니까.”

그게 어느 업계든 기본이다.

그 말을 들은 러셀은 무척 충격을 받은 얼굴이 되어 대답했다.

“아, 아니, 잠깐만요! 그건 관객에 대한 기만이잖아요! 신, 너도 관객 반응을 마음대로 바꾸려고 하면 안 된다고 했으면서……!”

얘가 뭘 모르네.

모르면 그만인데.

* * *

시간의 효율을 생각한 GCW에서는 몇 개의 프로모를 몰아서 촬영하기로 했다.

물론 그 과정에는 철저하게 ‘믿을 수 있는 사람’들만 참여했다.

행여나 결과가 조작된다는 것이 밝혀지면 반응은 최악이 될 테니 말이다.

그래도 걱정은 없었다.

촬영에 참여한 건 모두 팀장 이상의 인사들이었다. 이 업계에서 오랫동안 일하며 신뢰도가 쌓인 이들인 것이다.

문제는 러셀 하트가 꽤나 전전긍긍해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괘, 괜찮겠지?”

“그야 물론이지.”

프로모를 찍기 위해 준비된 세트장. 재킷을 입은 나는 물을 홀짝이며 촬영이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옆에 앉은 러셀은 꽤나 긴장한 눈치로 촬영장 안에 있는 스탭들의 얼굴을 확인하고 있었다.

“굳이 이럴 필요가 있을까? 관객들 투표대로 진행하는 게…….”

“물론 필요하지.”

“왜?”

“그래야 우리도 시간이 남아서 좀 쉬다올 수 있지 않겠어?”

“휴가 다녀오려고?”

“그래, 한 해 열심히 일했으니까 한 달 정도는 쉬어야지.”

“……신?”

“왜 또.”

“나 열심히 할게.”

휴가라는 한마디를 듣자 러셀의 의욕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나 역시도 그랬다.

회귀한 뒤 바쁘다는 이유로 줄곧 뒤로 미뤄놓았던 문제를 슬슬 해결할 마음이 생겼다.

부모님.

전생에서 제대로 호강 한 번 못 시켜드린 두 분께 찾아가 내 지금 상황을 말씀드리고 싶었다.

아들이 지금 프로레슬러로서 잘 나가고 있다고…… 말이다.

‘괜찮겠지?’

어쩐지 링 위에 올라갈 때보다 더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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