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그리고 다음 주.
[이 자식……!]
[죽어, 인마!]
화면 속의 나와 러셀은 사무실 집기를 마구 헤집어가며 마구잡이로 서로에게 주먹질을 해댔다.
하지만 그 싸움은 이전에 했던 것처럼 마냥 격렬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각종 소품을 사용해 싸움에 코미디 요소를 가미했다.
내가 휙 던진 크림파이가 러셀의 얼굴에 처박혔다. 관객들 사이에서 크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얼굴을 닦아낸 러셀은 악에 받쳐 옆에서 무기를 집어 들었다.
……장난감 바나나였다.
안 보고 대충 집다가 생긴 참사였다. 내가 황당해 바라보자 바나나를 확인한 러셀이 깜짝 놀랐다.
정말로 어이가 없었던 내가 싸움을 멈추고 러셀에게 다가갔다.
[이게 왜 여기에 있지……?]
[머, 먹으려고 뒀겠지!]
[장난감 바나나를, 먹어?]
나와 러셀이 황당해 바라보자 뒤이어 우리의 파트너십 향상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은 전문가, ‘미스 셸비’가 안으로 들어왔다.
안경 쓴 정숙한 백인 여성.
그 모습을 본 남성 관객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왔던 그녀는 엉망이 된 방안을 보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이게 무슨 일이에요?]
[아, 아니…….]
[거기다 그, 그건! 이리 줘요!]
부끄러워하며 러셀의 손으로부터 바나나를 빼앗는 미스 셸비.
[이건 개인적인 물건이에요.]
그런 말을 들은 러셀과 나는 황당해 좀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성적인 요소까지 첨가한 재미있는 세그먼트였다. 관객 반응도 생각했던 것보다 더 좋게 나왔다.
‘역시 다들 나와 러셀이 한 팀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로군.’
싱긋 웃으며 나는 방금 막 나온 햄버거를 집어 들었다.
한입 크게 베어 물자마자 입 안에 퍼지는 풍미. 공산품에서는 절대 느낄 수 없는 육즙과 소스의 조합이 기가 막혔다.
고속도로 근처의 작은 카페.
2주일의 휴가를 받아서 나온 나는 마침 딱 나오고 있는 GCW의 쇼를 시청하는 중이었다.
프로레슬링에 관심이 없던 시청자들도 미스 셸비의 미모를 보고는 자그마한 TV에 집중했다.
그러자니 바로 옆에서 커피를 따르고 있던 뚱뚱한 가게 주인이 피식 웃으며 내게 말을 걸었다.
“저거 보려고 케이블을 깔았지.”
“그래요? 비쌌을 텐데.”
“그래도 뭐 어쩌겠나. 요새 저 두 명 때문에 난리도 아니야. 내가 주말마다 포커 치는 테이블에서도 항상 레슬링 이야기만 하지.”
“누구를 제일 좋아하세요?”
“물론 신이지. 말만으로 안 끝나는 놈이라는 게 좋아. 항상 굉장한 경기를 보여주니 말이야.”
왠지 모르게 머쓱해졌다.
지금 나는 선글라스에 모자까지 써서 정체를 감춘 상태였다. 그렇기에 아부성 발언은 아니리라.
내가 만들고 연기한 캐릭터가 이렇게 좋은 평가를 받고 팬까지 생기다니. 멋진 일이었다.
그렇게 쇼가 방영되는 가운데 햄버거를 다 먹어치운 나는 팁과 값을 지불하고 가게를 나왔다.
그 앞에 주차되어있던 렌터카에 올라탄 나는 고속도로를 타고 다시 마냥 달리기 시작했다.
석양이 지고 있는 도로.
눈앞에 보이는 건 저 멀리 거대한 산과 주변 풍경이 전부였다.
모텔을 예약해둔 다음 도시까지를 부지런히 가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액셀을 좀 더 세게 밟았다.
한 해가 지난 신년 초.
나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LA에 있는 본가.
조지아에서 LA까지 가기 위해서는 30시간 이상을 운전해야 했다.
때문에 비행기를 이용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겠지만 관뒀다.
좀 쉬고 싶었다.
그리고 생각하고 싶었다.
‘운전이 최고지.’
전생에 선수로서 미국 전역을 돌아다닐 일이 많았던 나는 일찌감치 운전에 취미를 붙였다.
정확히는 120km로 도로를 내달리며 음악을 듣는 취미였지만.
그래도 그 순간만큼은 온전히 집중할 수가 있어서 좋았다.
2003년에는 CD를 구워 음악을 듣는 게 가장 힙한 방식이었다.
회사에서 휴가를 준비하는 동안 고민 끝에 선택한 건 2003년에 유행한 팝 음악이었다.
하지만 옛날과 달리 온전히 음악이나 운전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머릿속에 계속 노래를 부르는 가수에 대한 정보가 떠올라서였다.
‘이 양반이 얼마 뒤에는 심장병으로 타계하지.’
미래에서 돌아온 이상 온전히 과거를 있는 그대로 즐길 수 없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느껴졌다.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2003년은 현재였다. 하지만 이미 그 일을 겪고 돌아온 내게는 지나간 과거였다.
그것을 마냥 추억으로 즐길 수만은 없다는 이야기였다.
만약 내가 이 양반이 죽을 날에 우연히 난입한 척 구해주면 미래는 어떤 식으로 변하게 될까?
그런 생각이 계속 떠올라서였다.
어쩌면 그러한 이유로 부모님과의 만남을 피한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겨우 결심했다.
‘잘 계시려나.’
전생에 부모님의 죽음까지 다 지켜보았던 나는 묘한 기분에 휩싸인 채로 차를 운전했다.
보통 사람이 그렇듯, 나도 인생에 후회되는 일은 얼마든지 있었다. 개중 하나가 이것이었다.
프로레슬링으로 인해 반쯤 의절하고 나왔던 어머니, 아버지.
80년대 미국으로 이민 오신 두 분은 고아라는 공통점으로 하나가 되었고, 머잖아 나를 낳으셨다.
그리고 으레 부모라는 존재가 그렇듯 내게 최선을 다해주셨다.
하지만 나는 성인이 되자마자 캠핑카를 이끌고 집을 나왔다.
걱정하며 만류하는 부모님께 내 길을 증명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자면 참으로 못난 짓이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 뒤로 나는 결국 제대로 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패배해 집으로 돌아갔을 때 부모님께서는 이미 노쇠하신 뒤였다.
두 분은 프로레슬러가 된 아들의 자료를 계속 수집해오셨고, 팬 투표가 있을 때면 언제나 전화를 걸어 30달러를 기꺼이 내셨다.
그리고 말하셨다.
‘쿵-퓨리요. 네.’
후보군에도 없는 이름을.
나는 그 일을 후회했다.
호강시켜 드리고 싶었고, 더 멋진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다.
전생에서는 불가능했지만.
‘그래도 지금이라면…….’
내가 전생부터 원하던 두 가지를 모두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부모님에 대한 효도와, 당신들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는 것.
나는 그것을 위해 일부러 휴가를 내고 귀성길에 오른 것이었다.
어머니와는 원래부터 꾸준히 연락은 했기 때문에 돌아간다고 말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문제는 아버지다.
‘한 대 맞으려나.’
아버지는 나보다 키가 컸다. 몸도 노동으로 단련하셔서 거의 무슨 로렌드 고릴라처럼 강했다.
그래도 나 역시 단련을 해왔고, 아버지도 나이를 어느 정도 잡수셨으니 괜찮지 않을까?
* * *
……하는 것은 내 착각이었다.
빠가악!!
“여보옷!!”
아버지는 아직도 전성기였다.
현관문 앞에서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던 나는 아버지의 주먹을 얻어맞고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하늘이 돌고 땅이 돌았다.
충격에 쿠당탕! 넘어져 우체통에 처박힌 나는 앓는 소리를 냈다.
바쿠의 주먹이 이러할까.
러셀도, 셰무스도, 와이엇과 그 외 누구도. 이 정도 위력의 돌주먹은 절대로 아니었다.
“여보!! 왜 애를 때려요!!”
“당신은 조용히 해.”
무뚝뚝하게 얘기한 아버지가 가까이 다가왔다. 나는 뺨을 움켜쥔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좋아하시는군.’
내 판단의 근거는, 아버지가 턱이 아닌 뺨을 때렸다는 사실로부터 기인했다.
이조차 적당히 봐준 펀치라는 것이다. 만약 아버지가 제대로 후려쳤다면 난 기절했겠지.
“……회사를 들어갔다고?”
“그, 그렇게 됐습니다. 세계 최고의 프로레슬링 기업인 WWF 산하의 GCW라는 단체에서…….”
“거기는 고기 안 주더냐?”
“예?”
“됐다. 바람이 차다.”
아버지는 되묻는 말을 쳐내고 뒤로 돌아섰다. 그러자니 뒤이어 어머니가 가까이 다가왔다.
“에구, 내 새끼 마른 것 좀 봐.”
“어, 엄마?”
“거기서는 뭐 밥 같은 거 안 주대? 순 햄버거만 먹지?”
“……아니거든요.”
단순히 살이 빠지고 근육량이 늘어난 것뿐이었다. 전반적으로 몸은 전보다 훨씬 더 좋아졌는데.
……근데 왜 눈물이 날 것 같은지 모르겠군.
* * *
한바탕 소란이 지나간 뒤.
2층에 있는 내 옛날 방에 짐을 정리해두고 내려오자 어째선지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뭐지?’
고개를 갸웃거린 나는 소리가 들려오는 주방으로 향했다. 과일을 씻고 있는 어머니가 보였다.
“엄마, 아버지는요?”
“응~? 잠깐 시내 좀 나갔어.”
“어, 왜요?”
“너 왜 이렇게 비쩍 곯았냐고 돼지고기 좀 사오겠다던데?”
“…….”
“그보다, 너는 엄마랑 과일이나 먹자. 요새 사과가 아주 맛있어.”
“그, 그러죠.”
일단 식탁에 앉았다. 어머니가 과도를 쥐려고 해 반쯤 억지로 가져와 내가 깎기 시작했다.
“우리 아들, 3년 만에 만났더니 이런 것도 배웠네.”
“엄마한테 깎아주려고요.”
나는 싱긋 웃었다.
이상하게 3년 만인데 금방 적응했다. 어머니가 일부러 그렇게 구는 것도 있겠지만, 나는 왠지 평범하게 말이 나오는 걸 느꼈다.
“레슬링은 잘 하고 있고?”
“예, 합격하자마자 선수 계약해서 쇼에 출연하기 시작했어요.”
“어디, 그 조지아라고 했지? 엄마도 너 나오는 거 봤어.”
“봤어요?”
“최 씨 아저씨 알지? 저쪽에 마트 경영하시는. 그분 아들이 네 팬이라고 하더라. 그래서 엄마도 우리 아들이 나오는 거 찾아봤지.”
어머니는 환하게 웃었다.
“멋졌어. 그래서 그 러셀이라는 친구와는 잘 지내는 거야?”
“그럼요. 잘 지내죠.”
어머니께 좋은 소식을 많이 전해드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우습게도 지금 컨셉에 종교적인 부분이 있어요.”
“어머나~. 그거 다행이네. 너 옛날에 교회 가기 싫다고 몸에 네 피로 역십자도 그렸었잖니.”
“……그, 그랬나?”
“그래! 그래서 네 아빠가 ‘진짜로 그렇게 만들어주마.’ 하면서 뒤집어서 나무에 매달았고.”
“…….”
기억났다.
“어쨌든 그랬던 네가 엄마한테 사과도 다 깎아주고. 많이 컸네.”
“앞으로 자주 올게요.”
“그래~ 엄마는 어딜 가더라도 네가 알아서 잘 하리라고 믿어.”
“정말로 잘하고 있어요.”
“어머, 그래?”
“네, 솔직히 제가 없으면 쇼가 돌아가지 않을 걸요?”
“푸하하! 말도 안 돼!”
“…….”
“아, 미안. 순간적으로 어처구니가 없어졌지 뭐니.”
아니, 믿는다면서요.
그런 말을 꿀꺽 삼킨 나는 이내 미소를 지었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언제나 이런 분이셨다.
적당히 소시민적이고 유쾌한, 동시에 긍정적인 멋진 우리 엄마.
그 앞에서 다시 어린애가 된 나는 그동안 있었던 일을 털어놓으며 자기 자랑을 시작했다.
엄마는 그 이야기를 반신반의하면서도 끝까지 무시하지 않고 들어주었다. 덕분에 속이 풀렸다.
‘돌아오길 잘했어.’
그렇게 생각한 나는 바깥에서 멈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
“아, 네 아빠 온 모양이다.”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따라 일어난 나는 아버지를 반기기 위해 함께 나갔다.
아무리 그래도 처음에 한 대 맞았으니 더 때리지는 않겠지.
……그렇게 낙관적으로 생각한 순간이었다.
“……?”
“어머, 여보.”
“어, 문 좀 열어봐.”
트럭 운전석에서 내린 아버지가 짐칸에서 뭔가 큰 것을 어깨에 짊어지고 돌아섰다.
죽은 돼지였다.
돼지고기를 사온 게 아니라 돼지 한 마리를 통째로 사오셨다.
“아, 아버지? 안 무거우세요?”
“혼자들 수 있으니 비켜라.”
“그거 200kg쯤 되지 않아요?”
“278kg이었지.”
“…….”
“여보, 이번에는 얼마 줬어요?”
“킬로 당 3달러.”
“뭘 그렇게 비싸게 샀어요?”
“자식 놈 먹일 거니 일부러 좀 좋은 고기로 달라고 했지.”
아버지!
“10kg은 찌워서 보내야겠어. 이거 원, 진짜로 뼈만 남았군.”
“호호, 그러게요. 아들~ 일주일 정도 머무른댔나? 그럼 이 돼지는 다 먹고 갈 수 있지? 찌개랑, 탕이랑, 찜이랑, 구이랑, 엄마가 맛있는 음식해줄 테니 다 먹어야 돼?”
……요새 먹을 복이 터졌군.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니 이쪽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부모님은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이거 또 박 씨네 정육점에서 산 거 맞죠?”
“그 친구 고기가 좋지.”
“어후, 잘했어요. 이번에 총 든 갱스터들한테 강도짓 당할 뻔해서 마음고생이 심할 텐데 이웃끼리 도와야죠.”
“……갱스터요?”
“그래, 두 놈이 돈을 뺏으려다 되레 당했지.”
“아, 그러고 보니 박 씨 아저씨, 아버지랑 같은 부대 출신이라고 하셨죠? 때마침 가게에 총이 있어서 참 다행이었네요.”
“아니, 도축용 칼로.”
“…….”
나는 깨달음을 얻었다.
아직 부모님은 전성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