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이틀 뒤의 쇼.
러셀과 시나의 경기는 와이엇 패밀리의 난입으로 끝이 났다.
러셀을 응원하던 관객들이 야유를 퍼부었다. 하지만 와이엇 패밀리의 세 사람은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러셀을 마구 린치 했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던 나는 모니터링TV로 상황이 점차 무르익어가는 모습을 확인했다.
위기의 순간,
영웅이 등장할 때였다.
“신, 슬슬 준비하세요.”
“예, 준비됐습니다.”
직원과 소통한 나는 뺨을 두어 대 때려 정신을 차렸다.
나가서 할 일은 간단했다.
러셀을 구하고, 링을 정리한 뒤 광고 타임이 되면 따로 퇴장한다.
그 과정에서 관객들이 환호를 보내면 무시하고 나온다.
‘좋아.’
머릿속에 되새긴 직후, 내 음악의 절정 부분이 울려 퍼졌다.
관객들이 갑작스러운 등장에 환호를 내질렀다. 커튼을 밀며 나간 나는 링 위로 힘차게 달려갔다.
깜짝 놀라 린치를 중지한 와이엇 패밀리가 날 돌아보았다.
[SIN! SIN! SIN! SIN! SIN!]
사람들이 내 이름을 연호했다.
지금 이 순간, 날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엄청난 환호 속에서 손쉽게 링을 정리했다.
시나와 에디가 주먹 한 방에 나가떨어졌다. 나는 에디의 위에 올라타 마구 주먹을 휘둘렀다.
그러자니 뒤에서 다가온 와이엇이 챔피언 벨트로 내 뒤통수를 후려쳤다. 충격을 받은 나는 옆으로 데굴 구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Booooooooooooooooo!]
야유하는 사람들.
와이엇이 벨트를 들어 올리며 웃는 바로 그 순간, 정신을 차린 러셀이 일어나 녀석을 공격했다.
[Yeeeeeeeeaaaaaah!]
환호가 다시 이어졌다.
러셀과 나는 서로 협력해 적들을 쓰러뜨려나가기 시작했다.
앞서 나왔던 ‘우정 프로모’를 봤던 관객들은 점차 개선되어가는 녀석과 나의 관계에 환호했다.
휴가에서 돌아온 직후의 쇼.
나는 일주일의 공백이 무색할 정도로 멋지게 역할을 수행했다.
아니, 오히려 휴식을 취했기 때문인지 몸이 가벼워 날아다녔다.
평소보다 더 힘차게 뛰어 날린 드롭킥이 시나를 쓰러뜨렸다.
그렇게 격렬한 난투극 끝에 와이엇 패밀리를 몰아낸 나는 로프를 밟고 위로 올라가 포효했다.
[SIN! SIN! SIN! SIN! SIN!]
오늘도 완벽한 쇼였다.
* * *
그렇게 쇼는 다시금 3개월 뒤라는 큰 목표를 향해 노를 저었다.
나와 러셀의 코미디 프로모는 연일 최고 시청률을 갱신했다.
각본 상의 관계도 적당히 나아졌고, 예전과 달리 얼굴을 보자마자 주먹질을 해대지는 않았다.
쇼에 와주는 관객들의 영향, 그리고 미스 셸비와 함께 하는 관계 개선 프로그램의 영향.
그렇게 다시 몇 주가 지나는 동안 사람들은 내내 러셀과 내 아슬아슬한 관계의 진전을 보았다.
그렇게 한 달여 뒤.
방송에서 쓰일 프로모 촬영을 마친 나는 세트장 안에서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다들 고생했어요.”
“아, 신 선수. 고생 많았어요.”
좋은 코미디가 나왔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점차 융화되어간다는 건 언제나 좋은 소재였다. 거기에 미스 셸비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잘해주었다.
오히려 남자 시청자들은 그녀를 더 반길 때도 있었다. 순진하면서도 딱 부러지는 미스 셸비는 프로모의 조연으로서 우리가 프로그램을 이수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 역할을 맡은 배우는 우리와 동기로 훈련을 계속하고 있는 ‘레베카 왓슨’이었다.
“레비, 고생 많았어.”
“아, 너도 멋졌어. 신.”
연극배우 출신이라고 했던가?
어쨌든 영국 출신의 미인인 그녀는 상부에서도 눈여겨보고 있는 여성부의 인재였다.
연기력은 이미 나무랄 곳이 없었고 거기다 스스로 이 업계에서 성공하겠다는 야망이 있었다.
‘문제는 야망을 이루지 못했다는 거지만.’
쓰게 웃은 나는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는 레베카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부상이었다. 그것도 선수 생명을 앗아갈 정도로 큰 부상.
WWF 메인까지 빠른 속도로 올라갔던 레베카는 사실 기술을 구사하는 능력이 많이 서툴렀다.
때문에 경기 도중 접수 실수를 해 목이 부러졌고, 선수 생활을 오래 이어나가지 못하고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아마 영국으로 돌아가 배우 생활을 했다고 했지.’
내가 아는 내용은 거기까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레베카에게도 요령을 좀 가르쳐줘야겠다.
야망이 있는 동료가 그런 식으로 부상 때문에 사라지는 것은 무척 슬픈 일이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중, 옆에 있던 직원이 말을 걸어왔다.
“저기, 신. 할리가 찾는데요.”
“할리가?”
“예, 사무실로 오라고 하네요. 러셀도 같이 부르던데.”
“러셀은…….”
그 녀석은 무슨 일이 있는지 촬영이 끝나자마자 사라졌다.
“한번 찾아봐야겠네요.”
“그래, 나는 바로 갈게.”
무슨 일인 걸까.
보통 일 처리를 할 때는 바쿠를 거쳤는데 말이다. 나는 의아한 기분을 느끼며 발길을 옮겼다.
그렇게 도착한 사무실.
“할리, 신입니다.”
가볍게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선 나는 러셀이 먼저 사무실에 도착해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딜 갔나 했더니.’
여기였던 건가?
뭔가 싶어 주변을 돌아본 나는 이내 사무실 사람들 외에 처음 보는 사람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왔나. 꼬마.”
아니,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많이 보기는 했다.
TV에서였지만.
“인사해라. WWF에서 현역 로스터로 활동 중인 그렉 하트다.”
“……어…….”
순간 말이 나오질 않았다.
왜 여기에? 처음에 든 의문은 그것이었는데, 인사를 해야겠다는 생각과 겹쳐 순간 오류가 났다.
하지만 나는 이내 환한 미소와 함께 그렉의 앞에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하트 씨. GCW 선수인 신이라고 합니다.”
“알고 있어.”
짧게 대답한 그렉 하트는 마치 내 경기복과 같은 모습이었다.
동그란 선글라스를 썼고, 가죽 재킷에 셔츠와 청바지를 입었다.
“여기서 제일가는 문제아라지.”
“위대한 프로레슬러에게 기억될 수 있어서 영광이군요.”
“너 같은 놈을 무시할 순 없지.”
선글라스를 벗은 그렉이 내 얼굴을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게이 코스튬이 무려 메인까지 전파되어서 몇 주 동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니까.”
“그으, 건……. 죄송합니다.”
“미안하면 악역이 아니지.”
그렉이 내 손을 붙잡았다.
“우리 조카를 잘 부탁하네.”
“오히려 제가 배우고 있습니다.”
“푸하하! 이거 이놈, 악역 하는 놈 맞아? 아주 타고 났구먼!”
환하게 웃은 그렉은 옆에 서있는 러셀이며 할리, 바쿠를 각각 돌아보며 내게 호감을 표시했다.
‘역시 프로페셔널이군.’
신참인 내가 자기 코스튬을 ‘게이 같다’고 비하했는데도 이렇게 쿨하게 넘기다니 말이다.
선후배 관계에 엄격한 이쪽의 업계인답지 않은 열린 마인드였다.
그 모습을 다소 황당하다는 듯 보던 할리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렉. 휴가까지 내고서 여기는 무슨 일로 온 거지?”
“그냥 휴가가 아니라 무려 한 달 휴가야. 각본으로는 부상으로 출연을 안 하는 걸로 되어있지.”
“윗선에서 뭐라고 할 텐데.”
“뭐 어쩔 텐가. 난 이미 커리어 황혼기고 잃을 것도 없는데.”
미소를 지은 그렉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재미있어 보이는 게 있어서 말이야. 큰 대립 하나 끝내자마자 부랴부랴 이곳으로 온 거지.”
“신?”
“그래, 이 녀석하고 함께 일하게 되면 재미있지 않을까?”
“예?”
“뭐?”
“……?”
다들 어처구니없어 했다.
하지만 그렉은 별일 아니라는 듯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러셀이 요새 좀 나쁜 길로 빠지는 거 같아서 꼰대인 삼촌이 와서 충고를 하는 거지. 그런데 신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거고.”
“……그래서?”
“뭐, 중간 과정은 생략하고. 내가 두 사람을 인정해준다면 이야기가 좀 더 멋지지 않겠어?”
“상부에는 말했나?”
“아니.”
“자네 위상은?”
“신경 안 쓴다니까.”
“회사는 신경 쓸 텐데.”
“신경 쓰지 마.”
“…….”
“뭐, 계약 조건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일부러 내 휴가 써서 더 일해주겠다는데. 적당히 통보 하면 알아서 패스시킬 거야.”
“끄응…….”
“네 생각은 어떠냐. 신.”
“멋지네요.”
“야야, 인마!”
“쇼의 흥행을 위해서는 이런 빅 네임이 필요한 법이잖아요.”
“잘 알고 있군.”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막무가내로 진행하는 법이 어디 있어?”
“뭐, 문제될 거 있나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상이야 적당히 이마에 밴드 붙이고 출연하면 되는 거고. 일단 상부에 알려서 허락을 받는 정도라면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어쩌죠, 할리.”
“난 모르겠다.”
“그렇다면 선수 본인 의견을 참고하는 걸로 하죠. 러셀?”
“저, 저요?”
“그래, 네 생각은 어때?”
“……재밌긴 하겠네요.”
러셀은 부드럽게 웃었다.
‘정해졌군.’
이거 원, 생각치도 못한 케이크가 굴러들어왔다.
* * *
그렉 하트.
1975년, 캐나다의 전설적인 ‘하트 던전’에서 훈련을 마친 뒤 일본 프로레슬링을 통해 데뷔.
이후 순조롭게 세계 최고의 회사인 WWF에 진출한 테크니션.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회사를 든든히 책임진 메인 이벤터. 그것이 그렉 하트였다.
‘존 마이클스와 같은 시대였지.’
하지만 이후 치명적인 등 부상으로 마이클스가 은퇴하고, 그는 시대의 원탑으로 자리매김했다.
비록 자신의 시대를 흥행시키지는 못했지만, 그 역시 아이콘 중 하나라고 불리는 사내였다.
단지 당시 회사가 내외적으로 소란스러운 상태라서 자신의 재능을 널리 떨치지 못했을 뿐.
그 역시도 다른 아이콘에 절대 뒤지지 않을 재능의 소유자였다.
이렇게 보자면 아이콘에 등극하는 것도 운의 영역 같았다.
‘근데 참 묘하단 말이지.’
나는 링 위에 그렉 하트와 함께 서있는 시나를 보며 생각했다.
지금 보기에 시나는 딱히 재능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실제로 그렉이 기술 몇 가지를 걸 때도 영 따라가지를 못했다.
“넌 유연성을 좀 길러야겠다.”
“죄, 죄송합니다.”
그런데도 지금 이렇게 조언을 해주는 슈퍼스타, 그렉 하트를 뛰어넘는 위대한 아이콘이 되다니.
‘사람 일이란 알 수 없군.’
나는 쓰게 웃었다.
그래서 결국, 왜 지금 저 두 사람이 링 위에 대치하고 서있는가.
간단한 이유였다.
“다들 알겠지? 힘을 정확한 순간에 배분하면 낭비할 필요가 없다. 타이밍을 계속 생각해라!”
““옙!””
천재에 더해 경험치 덩어리인 테크니션, 그렉 하트의 강좌였다.
선수들은 바쿠가 할 때와 달리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싶다는 듯 그렉에게 집중했다.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기회였다.
‘저 양반이 레슬링 능력만으로는 역대 원탑이라고 볼 수 있지.’
링 사이콜로지, 기술 시전, 강약 조절, 상대방을 다치지 않게 하는 능력까지,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
“예를 들자면 ‘백 바디 드롭’을 생각해보자. 간단하고, 쉽고, 시선을 끌기 괜찮은 멋진 기술이지.”
그렉은 기껏 휴가까지 냈는데도 이런 곳에서 후배들을 양성하는 데 힘을 보태주고 있었다.
시나를 로프 반동하게 만든 그가 백 바디 드롭을 사용했다.
허리를 숙이고, 마치 투우 소처럼 달려온 시나의 가랑이 사이에 머리를 들고 힘껏 들어올렸다.
공중으로 떠오른 시나가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키며 낙법을 쳤다.
쿵!
“자, 이런 식으로. 내가 어디서 힘을 줬다고 생각하지?”
거기에 선수들이 하나둘씩 대답했다. ……왠지 모르게 다들 그렉을 앞에 두니 젖먹이가 된 것 같아서 뭔가 또 참 묘했다.
그러자니, 여러 대답들을 들은 그렉이 이내 날 돌아보았다.
“신, 넌 어떻게 생각하지?”
단숨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자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선수들 대부분은 등을 들어 올릴 때라고 말했지만, 아니었다.
“쳐낼 때죠.”
“바로 그거야.”
사실 매순간 전력을 다하면 순식간에 지치고 만다. 때문에 강약을 잘 쓰는 게 중요했다.
백 바디 드롭 같은 경우에는 마지막에 등을 번쩍 들어 상대방이 낙법을 치기 쉽게 만들어주는 것.
내 대답을 들은 그렉은 흥미롭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잠깐 올라와보겠나?”
그러자니 제안을 해왔다.
‘결국 이렇게 되었군.’
나는 약간 긴장이 되는 것을 애써 감추며 링 위로 올라갔다.
경기력 면에서 전설이라고 불리는 그렉 하트인 만큼, 내 실력이 어떻게 평가될지 궁금했다.
‘그래서 몸도 미리 풀어뒀고.’
나는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링 위로 올라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