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어디 한번 따라와봐라.”
무슨 중국 무술 영화의 사부님처럼 이야기한 그렉 하트가 천천히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마치 경기를 시작한 직후와 같은 긴장감 있는 분위기였다.
가장 먼저 할 일은 간단했다.
체인 레슬링.
서로의 팔을 붙잡은 그렉과 나는 이내 헤드록에서부터 시작해 빠른 속도로 공방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몇 합 지나지 않았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그렉 하트의 실력을.
‘엄청나군.’
회귀하기 전의 현역 시절을 포함해, 나는 지금껏 수많은 슈퍼스타들의 연습 상대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단언할 수 있었다.
기술을 걸 때의 안정감 하나로만 따지자면 단연 압도적이었다.
그럼에도 각 동작 하나하나가 크고 퍼포먼스로써의 매력 또한 갖추었다. 그렉 하트의 경기는 언제나 격렬함과 강함이 느껴졌다.
그런데도 이런 부드러움이라니?
‘대체 어떻게……?’
잠시 고민에 빠졌던 나는 암 드래그를 당해 링 바닥에 쿵! 떨어짐으로써 그 이유를 깨달았다.
‘순간의 미학이군.’
기본적으로 조금 전 그렉 자신이 설명했던 것과 같은 원리였다.
기술을 시전하는 순간에만 빠르게 동작을 수행해, 후려치듯 임팩트를 강하게 하는 테크닉.
별것 아닌 듯 보여도, 마치 영화와 같은 연출이었다. 낙법을 치는 것 역시도 훨씬 손쉬웠다.
기술을 걸기 직전 아주 미묘한 딜레이 동작을 걺으로써 상대방에게 신호를 보내기 때문이었다.
‘대충 알겠군.’
그러한 비밀을 알아차린 나는 그렉이 하는 것처럼 기술 직전에 약간의 딜레이를 걸기 시작했다.
달려오는 그렉과 팔을 엮고 반대로 돌려 힘차게 넘기는 도중, 단 한순간 모든 동작을 정지.
그 직후 단숨에 힘을 주어 날려버렸다. 깔끔한 암 드래그였다.
낙법을 치는 반동으로 다시 일어난 그렉이 자리에 멈춰 섰다.
“…….”
“괜찮으세요?”
“그보다는 좀 더 짧아.”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 그렉.
“상대방이 느끼지 못할 정도가 되어야 해. 안 그러면 어색하지.”
“음, 근데 왜 전 낙법을 치기 쉽다고 느꼈던 거죠?”
“무의식의 영역이지.”
가까이 다가온 그렉은 내 팔을 잡고 그대로 로프 반동을 시켰다.
다시 한 번 암 드래그.
힘차게 낙법을 치고 일어난 나는 뭔가 좀 달라졌음을 느꼈다.
‘딜레이가 빠졌는데?’
“좀 아슬아슬했지?”
“그러네요.”
“이래서 중요한 거다. 낙법이란 게 의식하고 치면 늦는 거니까.”
“어떤 느낌인지 알겠네요.”
간단히 말해, 상대의 의식이 아니라 몸에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식으로 하려면 상대가 몸이 날면 알아서 낙법을 칠 정도의 실력은 있어야겠지만.”
거기까지 말한 그렉은 잠시 흥미롭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어디서 배웠나?”
“인디 출신입니다.”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 인디를 폄하하려는 건 아니지만…… 음, 이걸 재능이라고 하는 건가.”
그렇게 말하며 다가온 그렉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래서, 너라면 이렇게 한 뒤 링 아래의 레슬러들에게 무어라 조언을 해줄 건가?”
“예?”
“저 부족한 친구들이 지금 우리가 한 말을 이해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겠지?”
“음, 그건 그러네요.”
잠시 고민한 나는 바닥을 발로 쿵쿵 두드리며 대답했다.
“죽기 싫으면 링 바닥이 부서질 때까지 낙법해라. 저라면 그걸 강조할 것 같은데요.”
“그게 낫겠군.”
고개를 끄덕인 그렉이 학생(?)들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다들 알고 있겠지만, 이 바닥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낙법이다.”
비록 내가 오늘 배운 것만큼 쓸모가 있진 않았지만, 낙법은 백번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었다.
‘딜레이를 준다고.’
이것이 그렉 하트를 역대 경기력 1위로 올린 필살기인 걸까?
* * *
그렇게, 훈련장에서 ‘초짜’들을 좀 돌봐준 그렉 하트는 샤워를 끝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다들 퇴근 도장을 찍었다.
말인즉슨, 다들 편하게 옷을 벗고 보드카를 열었다는 의미다.
자리에 있던 할리는 안으로 들어오는 그렉을 보고 입을 열었다.
“다 끝났냐?”
“예, 좋은 선수들이더군요.”
“입에 발린 소리는 관둬라. 우리 사이에 무슨.”
“그럼 솔직하게 말하죠.”
미소를 지은 그렉은 할리 바로 옆으로 가서 앉았다.
사무실에서 술을 깐다니.
서로 끈끈한 신뢰 관계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야기였다.
선수를 키워 위로 올려 보내기 위한 ‘산하 단체’라는 정체성을 가진 GCW만의 특징이었다.
“다들 아직 멀었어요.”
“그렇지?”
“특히 그 와이엇이란 친구는 영 아니더군요. 살을 더 뺄 필요가 있을 것 같은데, 그랬다가는 저 이미지가 망가질 것 같고.”
“어쩔 수 없지.”
“물론 저였다면 체중이 200kg을 넘는다 하더라도 완벽한 경기력을 선보였을 겁니다.”
“……그렇군.”
할리는 피식 웃었다.
그대로였다.
오만할 정도로 넘치는 자신감.
부러질지언정 꺾이지는 않는다.
그것이 그렉 하트였다.
때문에 드문 일이었다.
“신, 그 친구는 정말 괜찮던데.”
그렉이 누군가를 인정하는 건.
“……?”
“제 은퇴 상대로 삼고 싶군요.”
“뭐?”
거기다 이런 극찬이라니.
은퇴하는 프로레슬러는 마지막 경기에서 패배하는 게 관례였다.
한 프로레슬러가 사라져도 프로레슬링은 계속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를 이어나가기 위해 베테랑의 은퇴전은 반드시 패배로 끝나야만 한다.
패배가 확정된 경기에서 마지막으로 띄워주기 위한 선수는 대부분 회사에서 선택했다.
하지만 베테랑은 그 나름대로 자신의 위상을 이어받을 후계자 격 인물을 바라는 법.
“오늘 처음 만난 것 아닌가?”
“뭐, 천재는 자신과 같은 천재를 알아보는 법이죠.”
거만한 말이었지만 그렉 하트가 하니 설득력이 있었다.
“그 정도인가?”
“예, 솔직히 지금 메인에 있는 어중이떠중이들보다 훨씬 나아요. 올라오면 어떤 식으로라도 꼭 대립을 해보고 싶을 정도군요.”
“……WWF 선수들을 그렇게 말하는 건 자네밖에 없을 걸세.”
“명백한 사실입니다.”
그렉은 단언했다.
지금의 WWF는 황혼기였다.
어스름한 하늘이 공기를 차갑게 가라앉히는 순간. 모두가 이제 그 너머로 사라질 준비를 하는 때.
자신 역시 거기에 섞여들어 사라질 수많은 별 중 하나였다.
“저와 마이클스의 시대는 이미 기억도 희미한 멋 옛날이죠. 그 후에 락콜드와 더 팍이 불길을 잘 이어 받나 했더니…….”
그렉은 한숨을 내쉬었다.
“팍은 스콜피온 영화를 찍고 영화계로 전향했고, 락콜드는 목 부상 후유증 때문에 올해 레슬 임페리움까지만 뛸 것 같아요.”
“……그렇게 심각한가?”
“예. 의사 말로는 당장 목을 잘 못 부딪히면 경추 손상으로 죽을 수도 있다고 하던데요.”
“끄응.”
“뭐, 저도 조만간 은퇴할 생각이고. 회사에서도 차기 아이콘을 찾고 싶어서 지금 난리에요.”
“……거기에 신이?”
“글쎄요. 과연 될까요.”
“으음.”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신에게는 극복할 수 없는 한 가지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
인종.
프로레슬링은 쇼다.
그러므로 이것은 인종차별과는 다른 문제였다.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사람들은 자기와 같은 인종의 사람에게 더 이입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곳은 백인 위주의 미국이다.
“악역이라면 몰라도요.”
“하지만 악역으로 아이콘은 닉 플레어 정도밖에 없지 않나?”
“그 사람도 수십 년 활동하면서 사람들의 리스펙트가 쌓여서 악역이라고 보기에는 좀 애매하죠.”
“그건 그렇군.”
“게다가 팬 페이보릿의 문제를 떠나서, 일단 저 친구는 바트를 넘어서는 게 문제에요.”
“바트? 맥센 말인가?”
“예. WWF 회장 바트 맥센.”
현재 65세의 백인, 뉴욕 출신.
그 모습을 떠올린 그렉은 머릿속으로 몇 가지 계산을 끝마쳤다.
그리고 단언했다.
“아마 바트가 신을 본다면 기믹도 바꿔버리고 그냥 자버로 몇 년 쓰다가 버릴 겁니다.”
“역시 그럴 것 같나……?”
“예, 그 양반은 뉴욕 출신 졸부에 꼰대라고요. 그게 인종차별이라는 발상조차 하지 못할 걸요.”
“……하긴, 그렇겠군.”
그 말에 납득한 할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쿵푸 잘하는 캐릭터, 닌자나 사무라이 같은 캐릭터를 주겠죠.”
“제기랄.”
그 말이 맞았다.
바솔로뮤 케이브 맥센.
아버지로부터 WWF 컴퍼니를 물려받아 20년 만에 전국적인 기업으로 성장시킨 천재 사업가.
그와 동시에 비겁하고 더러운 수단을 거리낌 없이 사용해 업계를 차지한 사이코패스.
동시에 락콜드를 상대하며 그를 아이콘으로 키운 것도 바트 맥센이다.
뉴욕증권거래소에도 상장된 거대기업의 회장이 온갖 굴욕을 당하며 스타를 띄워준 것이다.
“종잡을 수 없는 인간이죠. 순수하기도 해요. 그 인간은 그 누구보다도 프로레슬링을 사랑하니까.”
“그래, 프로레슬링을 사랑해왔기 때문에 확실히 그럴 것 같군.”
할리는 보드카를 쭉 들이켰다.
그가 사랑하는 것은 80년대 프로레슬링이었다.
바트 맥센의 세계에서 다른 인종은 위대한 미국인, 그리고 백인종에게 패배하는 역할에 불과했다.
물론 그게 80년대에는 먹혔다.
당시 베트남전의 패전으로 인해 히피들의 반전주의가 팽배한 상태에서, 그와 같은 바트 맥센의 시나리오는 큰 인기를 끌었다.
“그렉, 이건 그저 비즈니스야. 나 역시도 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각본으로 할 각오가 있지.”
“하지만 바트 맥센의 시나리오는 어디까지나…….”
“그래, 비즈니스가 아니라 ‘자기만족’이지. 그래서 문제인 거고.”
코드가 묘하게 어긋났다.
정말로 바트 맥센이 주장하는 ‘미국을 위대하게!’를 믿는 사람은 이제 극히 소수였다.
지금의 사람들은 과거에 프로레슬러로 활동한 외국인 선수들에게도 큰 존경심을 보였다.
“하지만 바트 맥센이 그런 사람들을 부르면 쇼에서 또 이라크 깃발이나 흔들고 앉아있으니.”
“신이 쿵푸 음악에 맞춰 중국 깃발을 흔드는 게 상상되는군.”
“당연히 그렇겠지.”
그렉의 말을 들은 할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다시 물었다.
“그 이야기를 하고자 온 건가? 지금 우리가 키우는 애가 메인에서는 확 망해버릴 거라고?”
“본론은 지금부터입니다.”
“뭔가?”
“이번 태그 팀 각본 끝나면, 저 친구 제가 데려가도 됩니까?”
“뭐?”
그 말을 들은 주변의 사람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술을 홀짝이며 그렉과 할리의 업계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들은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술이 화들짝 깨는 것을 느꼈다.
그 앞에서 그렉은 자신만만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사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저 친구 보려고 온 겁니다.”
“러셀이 아니라?”
“아, 그것도 있군요.”
“허…….”
“이대로 두기에는 저 재능과 능력이 너무 아까워요. 메인에서 제가 잘 이끌어주면서 스타로 키워보겠습니다.”
“아, 아니, 잠깐만…….”
너무도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할리는 순간 뇌가 정지해버렸다.
하지만 그렉은 진심이었다.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신을 크게 키워놓고 은퇴할 수만 있다면 더는 후회가 없을 것 같았다.
“만약 그냥 보내면 러셀이 붕 뜰 텐데? 자네 조카를 생각해서라도 놔두는 게 낫지 않겠나?”
“신이 없다고 여기서 그저 그런 선수로 남는다면, 제 조카는 그 정도 재능밖에 없다는 겁니다.”
“제기랄.”
이렇게 말했는데도 반응이 이렇다면 마음이 굳어졌다는 뜻이었다.
거기다 신에게 있어 너무도 좋은 기회인 만큼, 할리는 여기서 안 된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WWF 메인은 정치꾼들로 가득했다. 거기에서 그렉 같은 베테랑을 백으로 둘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상황은 없으리라.
선수를 위해서는 여기서 순순히 메인으로 보내줘야 할 때였다.
하지만 너무 안타까웠다.
GCW의 수준은 나날이 수직 상승 중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영역에는 신이 개입하고 있었다.
러셀과의 대립부터 시작해 태그 팀을 지나 챔피언 등극까지. 적어도 1년은 이어질 수 있는 길고 멋진 이야기가 되리라 생각했는데!
할리는 대답하지 못하고 그저 보드카만 들이켰다. 그 앞에서 쓰게 웃은 그렉은 역시나 너무 갑작스럽다고 생각하며 일어섰다.
“……뭐, 본인의 의사부터 물어봐야죠.”
자세한 이야기는 그 이후에 해도 늦지 않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