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아직 전 메인에 올라가기에는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
그렉 하트의 몸이 굳어졌다.
그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던 할리와 바쿠가 하이파이브를 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침부터 사무실에 부르더니 다짜고짜 이런 걸 물어볼 줄이야.
하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더라도 내 답은 당연히 거절이었다.
“왜지? 너라면 내 밑에서 금방 클 수 있을 텐데. 적어도 2선 챔피언까지는 바로…….”
“제 꿈은 월드 챔피언이거든요.”
나는 적당히 설명했다.
사실은 많은 이유가 있었지만, 그걸 지금 이 자리에서 모두 설명했다가는 ‘어째서 이렇게 업계와 WWF에 대해서 잘 아냐’며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을 게 뻔했다.
“때문에 더 성장해서, 미국 전역에 이름을 알린 뒤에 올라가고 싶습니다. 그렉 하트의 호의를 등에 업고서가 아니라요.”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나?”
“가능하게 만들어야죠. 여기에 있는 제 동료들과 말이죠.”
“……내가 생각이 짧았군.”
그렉은 쓰게 웃었다.
“확실히 넌 좋은 선수다. 열심히 한다면 반드시 대성할 거야.”
“감사합니다. 그렉. 제가 메인에 가면 한 수 더 가르쳐주세요.”
“그래, 그래. ……아니, 나 아직 가는 거 아니니까 프로모 찍을 때도 많이 가르쳐주마.”
그렉이 씨익 웃었다.
“배울 수 있다면 말이지.”
지난번과 같은 방식을 쓰겠다는 것이리라. 고개를 끄덕인 나는 뒤쪽의 할리를 돌아보았다.
“그럼, 프로모 촬영 때까지 운동이라도 하고 있겠습니다.”
“그래, 나가봐라.”
애써 무뚝뚝하게 대답하는 할리.
하지만 분명 그렉과 무슨 일이 있었던 모양인지, 그는 분명 신나는 기색을 애써 감추고 있었다.
‘좋은 선수를 잃지 않아도 되어서 기뻐하는 것도 있겠지.’
어쨌든.
아침부터 별일이었다.
사무실을 나온 나는 훈련장을 향해 걸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확실히, 순간적으로 너무나 기뻤고, 그 제안에 잠시 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깨달았다.
메인에 올라간다.
그건 내 목표가 아니었다.
내 목표는 어디까지나 이 업계에서 제대로 된 커리어를 쌓아 프로레슬러로서 성공하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나 자체로 상품성과 경력을 갖춰야만 했다.
나는 아직까지 GCW에서 보여줄 게 많았다. 메인에 올라가는 것은 그 이후가 되어야만 했다.
나의 상품성, 실력, 카리스마.
그 모든 게 증명된 후에 들어간다면 내가 선택할 수 있게 된다.
‘어떤 쪽에 붙을지가.’
WWF 메인에서는 각자 파벌이 나눠 살벌한 정치 싸움을 벌인다. 쇼가 시작되기 전에 모든 게 정해지므로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중에 그렉 하트를 포함한 캐나다 계통의 레슬러들과 붙는 건, 사실 현명하지 못한 선택이었다.
‘미안하지만 말이야.’
그들은 사내 정치 싸움에서 그렇게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지금 당장에는 도움이 된다고 쳐도, 그렉은 내후년쯤 은퇴를 할 텐데 그 이후가 막막해진다.
‘그러므로 이 건은 거절하는 게 당연한 일이지.’
귀중한 휴가를 써가면서까지 날 보러 와준 건 고마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위대한 프로레슬러에게 인정받았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마음속에 큰 자산이 되었다.
* * *
그렉 하트의 효과는 엄청났다.
자신이 WWF의 슈퍼스타라는 사실을 입증하듯, 그렉이 출연한 백스테이지 프로모는 전체 쇼에서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다.
무려 3.2퍼센트.
마의 벽을 넘었다.
이로서 GCW는 역사상 가장 높은 시청률을 갱신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을 들어도 딱히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우리만으로 넘겨야 했는데.’
이로써 벽이 더 높아진 듯했다.
이제 내 머릿속에서 시청률의 목표는 3.2퍼센트 이상이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다음 주였다.
그렉 하트가 직접 링 위에 등장한다는 광고가 나가자마자 5분 만에 모든 티켓이 매진되었다.
특히 혹시 몰라 내놓기만 하는 ‘입석’까지 매진되는 것은 GCW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것을 본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렉을 리스펙트 하는 한편 멋진 쇼가 될 것이라며 좋아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이건 위험한데.’
우리의 각본은 그대로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 와중에 그렉이 끼어든 것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그 거대한 존재감이 우리를 먹어치운다면 문제가 됐다.
‘저번 주 방송을 생각하면 이번 주에도 그렉이 나오는 부분이 가장 높은 시청률을 기록할 텐데.’
그런 상황을 알고 있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그렉을 보기 위해 케이블을 돌렸던 시청자들을 우리의 팬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문제는 관객들이었다.
‘이번 주에 입장하는 관객들은 대부분이 그렉의 팬들이겠지.’
그들로서는 티켓 값도 메인에 비해 싸고, 가까운 곳에서 그렉을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이번 주 그렉이 링 위에 등장하는 이유는 단순히 쇼의 홍보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예정대로라면 그는 내가 시비를 걸어서 대응하고, 그걸 러셀이 말리기로 되어있었다.
이 세그먼트에서 나와 러셀의 사이에 우정 비슷한 기분 나쁜 무언가가 생겼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환호를 받을 테고 그렉이 여유 있게 대응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관객들이 그렉의 팬이라면 나는 분명 야유를 먹을 터.
‘우리가 원한 방향이 아니야.’
그렇게 되면 처음 보는 관객들은 저놈은 악역이구나, 하면서 방송을 시청할 게 분명했다.
우리가 지금껏 짜놓은 모든 게 어그러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를 어쩐다.’
하지만 방법이 있을 터였다.
내가 먹을 수 있는 야유를 최소화하면서 어떻게든 이야기를 원래 방향으로 이끄는 방법이.
* * *
“그건 안 돼.”
내 의견을 제시받은 할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렉도 황당하다는 얼굴이었다.
역시 좀 무리수였나.
나와 그렉이 경기를 뛴다는 건 말이다. 하긴, 그렉 정도의 사내가 이렇게 작은 경기장에서 경기를 하는 건 크나큰 손해겠지.
하지만 그렉은 내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는지 되물었다.
“왜 그런 제안을 하는 거지?”
“그야 물론, 그렉 당신하고 있으면 내가 야유를 받을 테니까요.”
“흠…….”
“그건 안 좋잖아요. 기껏 신규 시청자를 끌어들일 수 있는 기회인데 그 가장 중요한 장면에서 내 캐릭터가 사람들에게 악역으로 인식이 된다면 확실히 손해죠.”
“그건 그렇군.”
할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경기는 안 돼. 윗선의 지시다. 세그먼트와 프로모만 허락했고 경기는 쉬라고 했어.”
“뭐,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잠깐만요, 할리. 그래도 툭탁거리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요?”
“그렉…….”
“아니, 정말로. 원래 세그먼트 하다가 싸우는 거야 일반적인 일이고. 내가 이긴다면야 이미지에도 별달리 큰 무리는 없겠죠.”
“저도 선역 캐릭터로서 정체성만 지킬 수 있으면 좋습니다.”
“아니, 그런데 꼬마.”
할리가 눈썹을 찡그렸다.
“뭘 어쩌겠다는 거냐. 그렉이 너와 싸운다면 오히려 관객들은 너한테 더 큰 야유를 보낼 텐데.”
“그걸 마지막에 환호로 바꾼다면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요.”
“어떻게?”
“러셀이 합류하는 겁니다.”
“러셀이?”
“예, 애송이 둘이서 빅 가이 하나한테 덤비고 발린다. 하지만 빅 가이는 둘을 인정해준다. 괜찮은 그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 빅 가이가 삼촌이잖아. 각본도 없이 삼촌을 왜 패.”
“각본을 만들면 되죠.”
내 말에 그렉이 미소를 지었다.
같은 편이 생겼다. 나는 설득력이 높아진 것을 느끼며 한숨을 내쉬는 할리를 계속 몰아붙였다.
“쇼가 시작하면서 동시에 그렉의 프로모가 나오는 겁니다. 지난주에 영 나쁘게 끝났으니 신 같은 양아치와는 어울리지 말라고 러셀에게 충고하는 거죠.”
“러셀은 일단 예, 하고 대답하지만 삼촌이 하는 말이 일단 마음에 들지 않는 거지. 왜냐면 러셀은 이미 양아치한테 물들었으니까.”
“그게 러셀이죠. 대학교 들어가니까 머리를 농구선수 제니스 로드맨처럼 염색하고 오는 조카.”
“그래서 삼촌까지 걱정시키고. 근데 그게 다 성장통인 셈이지. 다들 겪는 일이고. 꽤나 공감을 해줄 거야.”
“……나는 한마디도 안 했는데 대체 왜 이야기가 계속 진행되고 있는 건지 모르겠군.”
“당연한 일이죠. 할리.”
“멋진 스토리니까요.”
마음이 맞은 나와 그렉은 서로를 바라보며 씨익 웃었다.
* * *
쇼의 진행 방향이 수정되었다.
러셀도 그게 낫겠다며 동의해 쇼의 전반적인 진행 방향이 수정되었고, 프로모를 촬영했다.
재빠른 일처리에 감탄한 그렉은 나를 보며 이렇게 말했다.
“좀 변했군.”
“그래요?”
“그래, 할리가 말이야. 그 양반이 원래 이렇게 계획을 휙휙 변경하는 성격은 절대 아니었는데.”
그는 눈썹을 치켜떴다.
“꼬마, 무슨 짓을 한 거냐?”
“……이게 제 공입니까?”
“그게 아니면 뭐겠어. 내가 본 작년의 GCW는 전혀 이렇지 않았는데. 네가 뭔가를 한 거겠지.”
“뭐, 비전이 제시되면 사람은 노력을 하는 법이죠.”
“호오. 그 말, 기억해두마. 러셀 저 녀석도 표정이 부쩍 어른스러워졌고, 참 세상사 알 수가 없군.”
‘그야 뭐, 같은 거지.’
러셀 역시도 삼촌을 쫓기보다 자신의 방식으로 뛰어넘을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지 싶다.
결국 비전이다.
사람은 해야 할 일이 명확하고, 그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 것인지 기대하게 될 때 움직이는 법이니까.
나는 지금껏 그것을 사용해 사람들을 설득해왔다. 프로듀서로 일할 때 배운 테크닉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딱히 말하지 않아도 다들 날 믿어주는 것이지.’
하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당연해진 그것이, 그렉이 보기에는 신기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쇼의 준비는 착실하게 이루어졌고, 우리는 시간에 늦지 않게 모든 일을 끝마칠 수가 있었다.
GCW 주간 쇼 당일.
쇼가 시작하기 직전, 선수 몇몇이 라커룸에 모였다. 나 역시도 러셀과 함께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모니터링 TV를 통해 오프닝이 흘러나올 때쯤이었다.
그렉 하트가 안으로 들어왔고, 놀란 선수들이 벌떡 일어섰다.
“아, 다들 편하게 봐.”
대통령이라도 온 분위기다.
그렉도 그것을 알았는지 더 말하지 않고 우리 옆에 앉았다.
오프닝의 마지막을 GCW의 로고가 장식하고, 한순간 암전된 화면이 커지며 그렉이 나타났다.
그 직후 경기장에서 이어진 환호성은 거의 역대급이었다.
‘……대단하군.’
이것이 그렉 하트.
심각한 표정으로 서있던 그가 이내 옆으로 돌아섰다. 그러자 카메라가 따라가고 몸을 풀고 있던 러셀이 모습을 드러냈다.
환호성은 안타깝게도 전보다 비교해서 거의 들려오지 않았다.
[러셀. 몸은 좀 괜찮냐?]
[예, 그렉 삼촌.]
[그래, 지난주에 신 그 멍청한 놈이 엄청난 사고를 쳤지.]
[예, 그래도 그 자식이 카트로 와이엇 패밀리를 밀치는 건 엄청나게 재미있었다고요.]
[……그렇게 생각하냐?]
[속이 시원했죠.]
방금의 대화로 지난주에 있었던 일을 짤막하게 설명했다.
[그 녀석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구나.]
[예?]
[레슬러로서의 명예가 없어. 신의도 없고. 어떤 일을 하더라도 네가 하트 패밀리의 일원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라, 러셀.]
[예, 예에.]
[그렇기 때문에 그 자식은 좀 멀리해라. 삼촌으로서의 충고다.]
[…….]
침묵하는 러셀.
[알겠지?]
[알겠습니다.]
재촉하듯 되묻자 겨우 대답한다.
간단한 세그먼트.
하지만 스토리가 전해졌다.
그렉 하트가 화면 밖으로 나갔고, 카메라는 옆으로 돌아 심각한 얼굴로 서있는 러셀을 비췄다.
그리고 들려오는 건 작은 야유.
“흠.”
“허어.”
나와 그렉은 눈썹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오늘 온 관객들은 그렉에 대한 팬심이 큰 모양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적들의 힘이 강한 상황.
하지만 프로레슬러는 이런 반응조차 가져와야 하는 법.
‘……재미있겠는데.’
나는 심장이 뛰는 걸 느끼며 나갈 순간을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