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43화 (43/634)

43.

이후, 세 개의 싱글 경기가 이어지고 광고 시간이 찾아왔다.

쇼의 중반부. 적당히 몸을 풀고 나온 우리는 고릴라 포지션에서 링에 나갈 준비를 했다.

심호흡을 하던 그렉 하트가 이어 나와 러셀을 돌아보았다.

“둘 다, 너무 긴장하지 마라.”

“예, 삼촌.”

“저희 할 일만 한다면 나쁘지 않은 반응으로 끝낼 수 있겠죠.”

“그래, 잘해보자.”

짧은 격려를 마친 그렉이 이어서 모니터링 TV를 확인했다.

막 광고가 끝난 화면에 해설자 두 사람의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자, 드디어 모두가 기대하던 슈퍼스타의 등장이로군요.]

[기대돼서 참을 수가 없군요. 관객들도 그런 모양입니다.]

“그렉! 준비해주세요!”

“좋아, 다녀오마.”

고개를 끄덕인 그렉이 출격을 준비하는 전투기처럼 커튼 뒤에 섰다. 그러자 날카로운 기타 리프와 함께 환호성이 이어졌다.

‘마치 이 환호성까지도 노래의 일부 같다는 느낌이 드는군.’

이제 와서야 그 압도적인 존재감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다.

그렉 ‘킬러’ 하트.

암살자. 처형의 달인.

수많은 이명으로 불리는 하이퍼 베테랑.

그가 커튼을 걷고 앞으로 나가자 환호는 더욱 거세졌다.

사람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을 앞에 두고도 그렉은 전혀 짓눌리지 않고 링 위로 나아갔다.

‘저것이 일류.’

나는 감탄했다.

그 어떤 누구와도 차원이 달랐다. 메인이라면 관객수가 이보다 다섯 배는 많아지므로 환호 또한 그만큼 많아진다는 말이었다.

저런 양반에게 시비를 걸게 된다는 것은 이 경기장에 모인 수많은 관객들을 적으로 돌린다는 것.

‘젠장.’

좀 하고 싶다.

오히려 지금은 압도적인 야유를 끌어내는 게 더 재밌을 듯했다.

그런 욕망을 느끼던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해 마음을 다스렸다.

‘아니지. 아니야.’

지금 난 선역이다.

야유를 환호로 바꾸어 관객들의 인정을 받는 게 내 역할이었다.

그렉이 마이크를 잡았다.

[좋아. 좋아. 이게 바로 GCW 관객들의 스타일이로군.]

마치 그는 관객의 반응을 연주하는 것 같았다. 그렉이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환호가 다시 이어졌다.

[여기는 아주 좋은 곳이야. 못난 삼촌이 조카 걱정을 해서 왔는데 앞으로 기대를 해도 되겠군.]

그렉의 마이크워크는 GCW에 대한 칭찬의 연속이었다.

[선수들도 멋지고. 메인으로 올라와 붙어보고 싶은 놈들이 수두룩해. 바비 애슐리라던가.]

사람들이 환호했다.

[브로큰 와이엇.]

사람들이 야유했다.

이 모든 관객들이 그렉의 팬일 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GCW의 시청자기도 했다는 증거였다.

[내 조카, 러셀 하트는 어떤가.]

커다란 환호.

[아니면 신?]

사람들이 야유를 보냈다.

이게 어긋나는 지점이다.

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환호가 되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그렉의 등장이 모든 걸 바꿔버렸다.

사람들은 전설에게 까불대는 나를 아직 인정하지 않았다.

[멋진 관객들이군. 선수 보는 눈이 있어. 아무렴 사내라면 자신의 두 손으로 싸워야 하는 거지.]

그는 내 야유를 끌어내려는 듯 관객들의 앞으로 다가갔다.

[바로 그게 우리 남자들이 싸우는 방식이지! 안 그래?!]

[Grek! Grek! Grek! Grek! Grek! Grek! Grek! Grek!]

어마어마한 챈트.

그것을 고릴라 포지션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누구 하나 빠짐없이 어안이 벙벙해진 모습이었다.

혓바닥 하나로 사람들을 쥐락펴락하는 그렉의 모습에 다들 압도되고 만 것이었다.

러셀 역시도 그랬다.

나는 긴장해 입을 다물고 있는 녀석의 어깨를 툭 두드렸다.

“어깨 펴. 러셀.”

“……신.”

“우리가 나가면 링 안의 공기는 정반대가 될 거야. 우리가 만들어낸 결과물을 믿어보자고.”

러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나가는 건 녀석이었다.

[러셀, 아까 보니 좀처럼 납득하지 못하는 것 같던데. 할 말이 있다면 남자답게 링 위로 나와서 한번 이야기해봐라.]

“러셀, 준비해주세요.”

“이따 봐.”

러셀은 자신의 음악과 함께 링 위로 당당히 걸어 나갔다.

[삼촌, 죄송합니다. 역시 말씀하신 대로 할 수는 없겠어요.]

[그래, 왜지?]

[저는 삼촌과 다르니까요.]

사람들이 야유를 보냈다.

하지만 러셀은 개의치 않았다.

[전 제 가족을 사랑합니다. 긍지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제 신념을 정하지는 못해요.]

[신념? 무슨 신념이지?]

[제 파트너는 제가 정합니다.]

[파트너?]

[예, 저희는 GCW 태그 팀 챔피언이 될 생각입니다.]

[그런 놈하고?]

[배울 점이 있습니다.]

[비겁한 수단을?]

[거기에 대응하는 방법을.]

“신, 준비해주세요.”

세그먼트가 이어지던 중 직원이 신호를 보냈다. 나는 커튼 뒤에 서서 곧바로 나갈 준비를 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그리고 직후, 그렉의 말을 잘라내며 내 음악이 울려 퍼졌다.

[Booooooooooooo!]

‘데뷔했을 때 같군.’

그에 버금가는 야유였다.

커튼을 걷고 나가자 야유는 한층 더 커졌다. 하지만 나는 여유로운 태도로 링을 향해 움직였다.

그렉은 나를 더러운 것이라도 보듯 한심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러셀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야유 속에서 링 위로 올라 겁 없이 그렉 앞으로 다가갔다.

페이스 투 페이스.

어마어마한 야유가 쏟아졌다. 사람들은 내가 주제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무시한 채 마이크를 쥐고 말문을 열었다.

“요새 보모 알바가 얼마지?”

“뭐?”

“꽤나 짭짤한 것 같아서 말이야. 여기까지 내려와서 조카 행동을 컨트롤할 정도면 분명 좋겠지?”

[Boooooooooooo!]

“아니면 뭐야. 나이를 먹으니 후계자 생각도 나고 그러시나? 한 가지 확실히 해두자고, 그렉.”

거기까지 말한 나는 잠시 말을 끊었다. 나를 향한 야유가 마이크 소리를 묻었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는 도움이 필요한데.’

그렇게 생각하며 바라보자니 그 뜻을 이해한 그렉이 마이크를 들고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한번 들어보지.”

그 도움으로 마이크워크는 계속될 수 있었다. 뒤로 돌아선 나는 러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여기 이 외골수는 당신보다 더 위대해질 거야. 내 장담하지.”

한순간 어처구니없는 소리에 관객들은 아무 반응도 하지 못했다.

러셀 역시도 그게 무슨 황당한 소리냐는 듯한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그 앞에서 미소를 지은 나는 능청스럽게 러셀에게 농을 건넸다.

“쫄지 마~. 모르는 거지. 네가 여기 있는 모든 헤이터들을 네 팬으로 만들 수도 있는 거라고?”

“……너 바보냐?”

“패기 있다고 해줘.”

가볍게 윙크.

사람들 사이에서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분위기가 반전되었음을 느끼고 말을 이었다.

“확실히 그렉 하트는 위대한 레슬러야. 특히 여기 모인 너희들은 역사상 최고라고 생각하겠지.”

선역의 기본은 관객들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는 것.

그런 의미에서 내가 방금 한 말은 선역으로서 좋은 대사였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어마어마한 환호로 내 이야기에 답했다.

싱긋 웃은 나는 로프를 밟고 올라가 최대한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 조카 놈이 위대한 삼촌을 뛰어넘는 장면을 보고 싶나?! 삼촌의 페이지를 이어서 위대한 가문의 역사를 써내려가는 것을!!”

사람들은 완전히 내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러셀’ 챈트로 내 이야기에 반응을 보였다.

잠시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그렉이 이내 마이크를 들었다.

“재미있군.”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불가능한 일이지만.”

압도적인 자신감.

“나는 과거, 현재, 미래, 그 어떤 자리에 놓아도 최고니까.”

“아, 그러셔?”

“내 말이 틀렸다고 말하려면 말로만 하지 말고 일단 덤벼봐라. 이곳은 바로 링 위니까.”

그가 재킷을 벗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사람들이 기대감에 차 환호성을 내질렀다. 당황한 러셀이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그렉은 마치 지금껏 이 상황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망설임 없이 내게로 달려들었다.

“윽?!”

연속된 해머링에 몸이 휘청거렸다. 나는 미리 계획했던 대로 순식간에 링 밖으로 넘겨졌다.

“덤벼! 러셀!”

돌아선 그렉이 도발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금방 몸을 추스르고 일어난 나는 카메라에 잘 띄지 않도록 숨어서 상황을 관전했다.

체인 레슬링으로부터 시작되어 두 사람이 기술을 주고받았다. 관객들이 격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물론, 닳고 닳은 베테랑인 그렉에게 신참에 불과한 러셀이 당해낼 수 있을 리 없었다.

한 사람의 베테랑이 애송이 두 명을 참교육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은 그렉 하트에게 맞서는 러셀과 나의 모습에서 흥미를 느낄 터였다.

러셀이 나가떨어졌고, 그때를 기다려 내가 링 위로 올라갔다.

빠르게 이어지는 주먹질에 그렉이 잠시 주춤했다. 나는 호기롭게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크헉?!”

그렉은 스냅 수플렉스로 반격했다. 몸이 반 바퀴 돌며 쿵 떨어진 나는 충격에 신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벌떡 일어선 그렉이 러셀보다 배는 빠른 속도로 내 다리를 잡고 꼬아 샤프슈터를 사용했다.

“끄으으으윽?!”

허리와 무릎이 동시에 조져지는 고통에 괴로워하던 그때. 링 위로 올라온 러셀이 그렉을 공격했다.

우리 둘은 그렇게 번갈아가며 그렉 하트에게 대적했다. 하지만 그는 우리를 손쉽게 요리했다.

결국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링 위에 대자로 뻗고 말았다.

하지만 링 위에 서있는 그렉도 완벽한 상태는 아니었다.

절뚝거리며 움직인 그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마이크를 들었다.

‘애드립을 치네?’

바닥에 쓰러져 있던 나는 다리를 절뚝이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사실 원래 각본대로라면 그렉은 러셀과 나를 멀쩡한 상태에서 개박살 내야만 했다. 하지만 그는 우리를 위해 셀링을 해주었다.

나름대로 신인인 우리 둘을 존중해 선배로서 이미지를 보호해주겠다는 의도가 느껴졌다.

그는 위대한 프로레슬러였다.

“나쁘지 않군. 하지만 순서가 틀렸어. 잘 들어둬라. 러셀, 신.”

그는 미소를 지으며 우리 두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뭔가 선언을 하려면 그만한 업적을 이뤄야지. 바로 다음 페이퍼뷰에서 태그 팀 챔피언이 되라.”

그 한마디는 나와 러셀의 향후 스토리를 암시하는 것이었다.

그래, 우리는 다음 페이퍼뷰에서 태그 팀 챔피언이 될 것이다.

* * *

쇼가 끝난 뒤, 그렉 하트는 곧바로 비행기 표를 끊어 WWF의 다음 쇼가 열리는 장소로 이동했다.

그는 정말로 우리 GCW를 위해 휴가 내내 끝까지 일해주고 간 것이다.

심지어 무급으로 말이다.

보통 성인聖人이 아닌 이상에야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우리는 그에게 정말 깊은 감사를 느꼈다

하지만 간 사람은 간 사람이고.

“우리는 일을 해야지.”

훈련복으로 갈아입은 나는 아침 해를 받으며 링 위로 올라섰다.

맑은 공기를 받으며 내 눈앞에 서있는 것은 두 사람이었다.

러셀, 그리고 시나.

그렉의 도움을 받아 제대로 된 태그 팀이 된 우리 두 사람에게는 이제 새로운 임무가 생겼다.

바로 태그 팀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태그 팀 무브’를 만드는 것이었다.

“준비는 됐어?”

“그래, 좋은 아이디어 있어?”

고개를 끄덕인 나는 어리둥절한 채 서있는 시나를 돌아보았다.

“부탁 좀 할게, 시나.”

“……나야 괜찮긴 한데, 뭘 시키려고?”

“일단은 아이디어 회의부터.”

나는 미소를 지었다.

시나는 오늘 ‘교보재’로서의 역할을 맡게 될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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