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또 다시 TV 앞.
“건배 밤!”
이제 아주 별명으로 정착했다.
어쨌든 반응이 아주 좋다는 말이라 나는 자동으로 어깨가 으쓱해지는 것을 느꼈다.
자리에 모여 있는 GCW의 선수들은 프로레슬링이라면 지겨울 정도로 많이 보는 이들이었다.
허나 그런 이들도 인정할 정도로 시나와 에디의 ‘건배 밤’은 멋진 기술이었다.
‘너무 멋있어서 나와 러셀의 기술이 묻힐 정도긴 하지만.’
그래도 뭐, 우리에게는 우리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으니 됐다.
그렇게 건배 밤이 시전된 직후 화면이 전환되었다.
내가 칼리스타에게 니 킥을 먹이고, 러셀이 위에서 떨어져 슈팅스타 프레스를 후려갈겼다.
“크하! 예술인데!”
“환상적이야!”
“발로 밟았다 떼는 거 진짜 배드애스한데!”
선수들이 제각기 소리쳤다.
“…….”
내 어깨가 더 으쓱해졌다.
선수들은 무슨 처음 레슬링을 보는 소년처럼 환호했다. 그러자니 러셀이 커버를 한 시점에서 화면이 뚝 끊어졌다.
바쿠의 짓이었다.
훈련장에 찾아온 그는 조금 전 화면에 나온 우리 넷을 불러 이 비디오를 보여준 것이었다.
헌데, 다른 선수들도 다같이 영상을 시청하자 당황한 얼굴이었다.
“……너희들 연습 안 하냐?”
“예예, 갈게요.”
“저희도 저 멋진 기술을 다시 한 번 보고 싶었거든요.”
선수들이 훈련장으로 돌아갔다.
잠시 침묵하던 바쿠는 이어 우리 넷을 향해 본론을 꺼냈다.
“어떤 것 같으냐.”
“갑자기 이건 왜요?”
“신이 제안한 거다.”
러셀의 질문에 바쿠는 대신 말하라는 듯 날 바라보았다.
“이걸 편집해서 광고를 내보내는 건 어떨까 싶어서 말이야.”
“광고?”
“그래, TV 광고. 다음 주 쇼에서 태그 팀 토너먼트의 결승전이 있을 예정이니까.”
“회사로서도 이 대립은 좀 밀어줄 필요성이 있다고 느낀 거다.”
“그, 그래요?”
“너무 긴장하지 마. 시나. 사람들도 기대를 하고 있으니 그만큼만 보여주면 되는 거야.”
“어쨌든 그래. 일단 메인 컨셉은 이 기술 두 가지인데 나머지는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냐. 일단 너희 네 사람의 아이디어는 들어봐야겠다 싶어서 말이다.”
“그, 글쎄요.”
“내리꽂을 때 기술에 당하는 선수 시점에서 보여주는 카메라워크를 담는 건 어떨까요.”
“호오?”
내 말을 들은 바쿠가 흥미를 보였다. 나는 그대로 말을 이었다.
“어쨌든 기술이 박진감 넘치게 보이려면 그런 연출을 가미할 수도 있을 거 같아서요.”
러셀이 슈팅스타로 뛰어내리는 걸 바닥에서 찍는다던가.
아니면 파워밤에 당할 때 돌아가는 시야를 담아낸다던가 말이다.
“마지막은 저희 네 사람이 페이스 투 페이스 하는 걸 보여주고 로고를 딱 띄우면 좋겠죠.”
“나쁘지 않군. 영상팀에다가 이야기를 해보마.”
“감사합니다.”
“어쨌든 이걸로 다 알았겠지? 다음 주 경기는 확실히 홍보할 생각이니 네 사람 다 제대로 준비를 해줬으면 좋겠다.”
“예, 바쿠.”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이제 돌아가도 좋다. ……아, 신은 잠깐만 남고.”
“……?”
갑자기 불린 나는 의아한 기분을 느끼며 자리에 남았다.
러셀, 시나, 에디가 돌아가자 VTR에서 비디오를 꺼낸 바쿠가 날 바라보았다.
“그래서, 무슨 꿍꿍이냐?”
“예?”
“지금까지 네가 뭔 부탁이나 제안을 했을 때는 항상 이유가 있었지. 그리고 언제나 대박을 쳤고.”
“그랬던가요.”
“시치미 떼지 마라.”
그냥 넘어갈 수는 없을 듯했다.
‘이쪽으로서도 리스크가 큰 도전이라 딱히 이유는 말하지 않고 넘어갈 생각이었는데.’
역시 바쿠도 짬이 있군.
“3.5퍼센트 나왔잖아요.”
“뭐?”
“그렉이 출연했던 실시간 시청률이요. 3.5퍼센트나 나와버렸죠.”
“3.2 아니었나?”
“그건 프로모만 했을 때였고 그 다음 주에 링에 나왔을 때는 무려 3.5퍼센트까지 올랐단 말이죠.”
“그렇군.”
“얼른 최대치를 갱신해줘야 그렉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요?”
“……가능할까?”
“해야죠. 그걸 위해서 지금까지 다 함께 준비를 해온 거고.”
“흐음…….”
“괜찮을 겁니다.”
“글쎄다. 그렉이 출연한 시절의 기록을 갱신하려면 거의 1퍼센트 가까이 올려야 할 텐데.”
“그렇게 하면 되죠.”
“좋아. 애송이.”
바쿠는 씨익 웃었다.
“필요한 게 더 있으면 말해라. 내 권한이 닿는 한에서는 최대한 도와줄 테니까.”
“다른 건 이제 됐고. 경기 시간이나 좀 많이 잡아주세요.”
“2시간이면 될까?”
“……우리 방송이 2시간인데.”
“아니, 이거 가만히 생각해보면 꽤 재미있을 것 같은 아이디언데.”
진심인가.
2시간이나 경기를 한다면 아무리 나라도 쓰러질 거다.
하지만 왠지 바쿠라면 거뜬히 2시간을 채울 것 같아 더 무서웠다.
아, 그리고 한 명 더.
‘우리 아버지도 만약 하라고 시키면 거뜬히 해내겠지.’
세상엔 무서운 사람이 참 많군.
* * *
내 목표를 이해한 바쿠는 윗선에 곧바로 의사를 타진했다.
수뇌부의 긴 회의가 이루어진 끝에 정해진 경기 시간은 30분.
무려 쇼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엄청나게 긴 경기 시간이었다.
‘이건 꽤 힘들겠는데.’
하지만 불가능할 것도 없었다.
단지 준비가 좀 빡세게 필요할 따름이었다. 나를 포함한 선수 네 사람은 긴 경기를 어떻게 풀어나갈지에 대해 회의를 거쳤다.
그리고 나온 첫 번째 결론.
‘폴스 카운트 애니웨어’ 매치.
일반적인 경기 룰에서는 선수가 링 밖으로 나간 후 10초가 지나면 실격패로 처리된다.
그 룰을 없애고 어디서나 경기를 하고 핀 폴이 가능한 게 바로 ‘폴스 카운트 애니웨어’였다.
그리고 두 번째.
브로큰 와이엇과 바비 애슐리가 경기의 중반부에 난입한다.
그렇게 정해진 포인트에 따라 우리는 경기를 짜기 시작했다.
그사이 GCW 측에서는 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으로 경기를 크게 홍보해주었다.
물론, 산하 단체라는 회사 자체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솔직히 그렉이 출연했을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즉, 우리는 그렉 하트와 똑같은 선에서 자신들의 능력을 시험받는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여기에서 한 가지 더 나은 점이 있었다.
WWF의 본 쇼인 월요일 밤의 버닝콩에 나온 그렉 하트가 직접 마이크워크 도중 우리의 시합에 대해 언급을 해준 것이었다.
‘대본에는 없었던 거겠지.’
그럼에도 우리를 도와주었다는 점이 그렉답다 싶은 행동이었다.
어쨌든 그 홍보 효과까지 더해져, 쇼의 당일이 되었다.
입장 관객수…….
“1,258명.”
나는 링에 들어가 직전 눈앞의 세 사람에게 말했다.
“무려 200명이나 입석으로 서있다는 말이야. 여기까지 왔는데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는 없지.”
내 말을 들은 세 사람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렉이 빠진 일반 쇼의 최고 시청률은 2.8퍼센트. 여기에 한번 1퍼센트를 더해보자고.”
자동으로 손이 모였고, 나머지 세 사람이 각자 한마디씩 했다.
“쫄지 말고 우리가 준비한 내용대로만 하자.”
러셀.
“열심히 따라갈게.”
시나.
“…….”
그래, 에디. 힘내자.
가볍게 기합을 넣은 우리는 곧바로 입장을 시작했다.
먼저 나간 것은 와이엇 패밀리의 두 사람이었다.
브로큰 와이엇은 없었다.
때문에 관객 반응 역시도 미적지근했지만 검은 양 가면을 쓴 시나와 에디는 그런 반응은 신경 쓰지 않고 링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오히려 이것이 우리들이 노린 바였다.
고요한 멜로디의 보컬 음악은 두 사람을 어딘가 위험한 사람처럼 느껴지도록 도와주었다.
반응이 없는 것조차도 사람들이 두 사람의 괴물 같은 모습에 압도당했기 때문인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다음은 우리였다.
경쾌한 기타 리프 음악과 함께 러셀이 먼저 입장했다. 그가 커튼을 걷고 나서자 관객들이 어마어마한 환호를 보내주었다.
하지만 러셀은 입장로 위를 걷는 대신 뒤를 돌아보았다.
“신, 모조리 죽여버려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바쿠의 격려(?)에 씨익 웃은 나는 음악과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경건한 동시에 파괴적이고 신나는 덥스텝 성가가 이어졌다.
사람들이 노래를 했다. 밖으로 나간 나는 그들의 합창을 지휘하며 러셀과 함께 링 위로 향했다.
모든 사람이 사랑하는 베이비페이스 팀, 러셀 하트와 신.
일명 신-셀 팀.
그리고 반대편에는 사이비종교의 지도자인 브로큰 와이엇을 따르는 시나와 에디.
우리 네 사람은 각자 맡은 상대방을 링 위에서 노려보았다.
나는 시나.
러셀은 에디.
심판이 떨어뜨려놓기 위해 끼어들었지만 통하지 않았다. 관객들은 경기 직전의 긴장감에 노래가 끝난 뒤에도 환호를 이어나갔다.
“두 팀 다 매너 있게 경기하고, 어…… 룰을 지켜주길 바랍니다.”
심판이 긴장한 듯 에디와 시나 쪽을 힐끔거렸다. 두 사람은 아직 검은 양 가면을 벗지도 않았다.
그리고 반대편에 있던 러셀과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가위바위보를 하기 시작했다.
거기에서 승리한 건 러셀.
나는 추욱 쳐졌고 러셀은 신이 나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곳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 둘만큼은 와이엇 패밀리의 두 괴물들을 보고도 전혀 겁을 먹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오히려 서로 싸우고 싶어 안달 난 모습을 연출했다.
못내 아쉬운 척 로프 밖으로 나간 나는 코너에 팔을 대고 서서 러셀을 향해 작게 말했다.
“러셀, 잘 해라.”
대답 대신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러셀. 반대편에서 준비를 끝마친 에디가 앞으로 나왔다.
공이 울리고 경기가 시작되었다.
자이언트 계열 레슬러와의 대결은 일반적인 체인 레슬링으로 시작되지 않는 것이 특징이었다.
러셀이 다가가자 순간적으로 공격한 에디는 이내 주먹질을 하며 러셀을 반대로 밀어붙였다.
코너까지 몰아붙여진 러셀의 가슴에 날카롭게 찹이 꽂혔다.
쫘악!
그 소리가 관객들을 집중하게 만들었다. 나는 아끼지 않고 셀링을 하는 러셀을 보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가리고 탄식했다.
이런 디테일한 연기가 중요했다.
카메라는 링 위 전체를 비출 때도 있다. 시청자의 시선이 날 볼 때도 있다. 따라서 나는 링 위에서 계속 신으로서 행동해야만 했다.
그런 디테일이 몰입을 낳고 시청률을 상승시키는 것이었다.
다행히 두 사람은 잘해주었다.
쫘악! 쫙!
“크헉! 컥!”
러셀의 셀링은 간결하고 효율적이었다. 정말로 맞은 것처럼 아파하면서도 오버를 떨진 않았다.
때문에 보다 현실감이 넘쳐, 보는 이들로 하여금 응원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그 성원에 맞춰 러셀은 적당한 타이밍에 빠져 나왔다. 에디가 돌아보자 러셀은 그 무릎을 노리고 로우킥을 후려갈겼다.
휘청거리는 에디의 몸.
관객들이 러셀의 이름을 외쳤다. 환호가 이어지는 가운데 러셀은 에디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나와 태그 팀을 맺은 이후로 러셀의 스타일은 크게 변화했다.
그는 삼촌인 그렉보다 더 화려하고 효율적으로 움직였다.
“좋아~! 잘한다!”
무릎을 차고 넘어뜨리고 꺾고.
일명 ‘다리 지옥’이라고 불리는 운영이었다. 에디의 몸이 크게 휘청거리며 존재감을 자아냈다.
물론 그 역시 호락호락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뻐억!
한순간 이어진 반격기에 큰 충격을 받은 러셀이 쓰러졌다.
비틀거리며 나아간 에디는 태그를 해 시나를 링 위로 불러냈다.
야유 속에서 나온 시나는 쓰러진 러셀을 연이어 공격했다.
“러셀! 일어나!”
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는 러셀을 향해 크게 소리쳤다.
허나 러셀은 두 사람의 태그 팀 플레이에 말려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들은 각종 반칙을 일삼으며 러셀을 계속 공격했다.
물론 러셀 역시도 가만히만 있지는 않았다. 태그하기 위해 몇 번이고 내 쪽으로 움직였지만 아쉽게도 그것은 성사되지 못했다.
태그를 하려다 끌려가고, 반칙에 당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관객들의 속을 태우며 계속해서 경기가 이어지던 중이었다.
빠악!
로프 반동 직후 러셀과 시나가 동시에 서로를 공격했다. 두 사람은 링 위에 동시에 쓰러졌다.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Russell!]
관객들이 태그하기에 좋은 순간임을 느끼고는 챈트를 외쳐댔다.
나 역시도 앞으로 손을 뻗으며 턴버클을 마구 두들겨댔다.
핫 태그를 할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