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48화 (48/634)

48.

콜로라도 덴버의 한 호텔 방.

그렉 하트는 내일 있을 WWF 주간 쇼를 위해 막 몸을 씻고 잠에 들려던 참이었다.

GCW와는 달리 WWF는 미국 전역을 포함해 일본이나 영국, 호주 같은 곳까지도 날아가 프로레슬링 쇼를 열었다.

전 세계에 팬을 가지고 있는 프로레슬링 대기업. 그것이 바로 WWF인 것이다.

그렇기에 어디를 가나 항상 팬이 따라붙었고 귀찮다는 점도 있지만,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선물할 수 있다는 건 싫지 않았다.

‘내일 쇼도 잘해봐야지.’

그렉은 이제 막 데뷔한 신인을 띄워주기로 되어 있었다.

승패 여부는 아직 듣지 못했지만 뭐 적당히 상대해주면 되겠지 싶었다. 그다지 기대도 안하고.

‘아마추어 레슬링 출신에 미식축구에서 실패하고 이곳으로 들어왔다고 했었지.’

이름이 아마 르브론 레즈너였던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내일 가서 물어봐야겠군.’

그렇게 생각한 그렉은 침대 옆에 켜두었던 조명을 툭 껐다.

그리고 다음 순간, 타이밍 좋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

아직 여덟 시라서 이해는 한다.

하지만 내일 새벽에 근력 운동을 해야 했으므로 그렉에게는 이것이 당연한 일상이었다.

그 루틴에 방해를 받았지만, 그렉은 싫은 내색 한 번 없이 일어나 방문을 열었다.

앞에 서있는 것은 보이였다.

“아, 하트 씨. 죄송합니다. 주무시려던 참이셨나요?”

“무슨 일로…….”

“정말 죄송합니다! 그, 팩스가 하나 왔는데 전화로 이걸 꼭 그렉 하트에게 지금 당장 전하라고 누군가가 말을 해서요.”

“누구…….”

“그, 신이라고 하던데요.”

“신?”

그 말을 들은 그렉은 보이의 손에서 종이를 낚아채 확인했다.

“……후.”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런 걸 신경 쓰고 있었을 줄은 몰랐다. 그는 미소를 지은 채 종이 위에 적힌 숫자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조지아 챔피언십 레슬링

3월 9일 – 최고 시청률 기록

방송 시작 1시 47분 후

4.1%

애송이들이 한 건 했다.

‘내가 WWF 쇼에서 홍보를 해준 덕을 톡톡히 봤군.’

그 덕분에 바트 맥센에게 잔뜩 잔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잘된 일이었다.

미소를 지은 그렉은 우물쭈물하며 서있는 보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런 일에 익숙한 그답게 나직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사인해드릴까요?”

“예, 예?”

“원하시는 것 같아서.”

“가, 감사합니다!”

보이가 셔츠를 잡고 뜯어내듯 열어젖히자 그 아래에서 그렉 하트의 번개 문양 티셔츠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에 사인을 해주고자, 마커 펜을 가지러 돌아선 순간이었다.

우당탕! 쿵! 쾅!

갑자기 옆방에서 어마어마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렉이 의아해 돌아보자 보이가 입을 열었다.

“어, 분명 옆방에는 트리플H 선수와 락 밴 댐 선수가 같이…….”

“아, 그러면 걱정 마세요. 으레 있는 일이거든요.”

“예?”

“뭐, 경기에서 누가 더 빛나 보여야 하는지로 싸움이 붙은 거죠.”

모든 선수들이 사이가 좋은 GCW와 달리, WWF는 하루하루가 살아남기 위한 경쟁이었다. 때문에 이렇게 물리적인 분쟁이 있는 경우도 많았다.

그렉 하트는 이제 일선에서 물러난 상태였지만 그런 상황을 무척 혐오했다.

그렇기에 아직 자신의 입김이 남았을 때 도와주고 싶은 것은, 그에게는 당연한 충동이었다.

‘더 늦기 전에 올라와라. 신.’

싱긋 웃으며 그렉은 하루 빨리 신과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 * *

4.1%

그야말로 경이로운 기록이었다.

조지아 주의 인구가 약 천만 명 정도이므로, 사십만 명 이상의 사람이 우리 GCW 주간 쇼를 시청했다는 의미다.

거기에 조지아 주 바깥에서 보는 사람까지는 집계에 포함되지 않았기에 그 숫자는 더 늘어날 터.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나는 그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엄마에게 연락했다.

전화를 받은 엄마는 다짜고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들, 슈팅스타가 뭐니?]

“예?”

[마이클이 슈팅스타를 맞고 다리가 부러졌다고 하는데.]

“……슬슬 가족과 학교가 나서야 할 것 같네요.”

회사에서는 따라하지 말라고 충분히 경고하고 있으니까.

“어쨌든 엄마, 용돈이라도 좀 보내드릴까 하는데 계좌번호 있으면 하나만 좀 불러주세요.”

[됐네요~. 네가 돈이 어디 있어~.]

“어, 저 돈 잘 벌어요!”

항의하듯 말한 직후, 누군가 전화를 바꿔 받았다.

[나다.]

아버지였다.

[네 돈은 네 가족을 위해 써라.]

“아니, 그러니까…….”

수화기 너머로 약간의 소란이 느껴졌다.

[에휴, 이 영감쟁이가 손주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뭐 그렇게 하나 몰라. 아들, 거기는 뭐 참한 처자 없니? 엄마는 누구든 괜찮다!]

“다음에 또 전화할게요.”

뚜- 뚜- 뚜-.

나는 당황해 전화를 끊었다.

‘무슨 결혼이야.’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으나, 지금이 2003년임을 감안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내 나이가 24세.

지난 생애에서도 50살까지 나름 열심히 살았으나 나는 결혼 같은 건 꿈조차 꿔보지 못했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지. 빌어먹을 미국 의료 시스템.’

부모님 병원비로 천문학적인 돈이 깨졌으니 말이다.

어쨌든 그로 인해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애 둘 낳고 기르기에 충분한 돈이 없으면 결혼은 꿈도 꾸지 말자! ……고 말이다.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일하자.

“후우.”

폴더폰을 두고 라커의 문을 닫은 나는 그대로 바깥으로 나왔다.

훈련장에서 한창 땀을 빼고 있는 선수들이 가득한 가운데, 나는 러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좀 어때.”

“아, 신.”

스쿼트를 하고 있던 녀석은 날 바라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 삼촌을 뛰어넘었기 때문인지 요새 좀 신나 보였다.

“상쾌한 기분이야.”

“다행이네.”

고개를 끄덕이는 러셀.

우리는 오늘부터 또 함께 다음 대립을 준비해나갈 예정이었다.

그 대상은…….

“지금 소개합니다! 체중 270kg! 샌안토니오 러시아 출신의 ‘악당 개자식!’ 씨이이이이인!”

지금 눈앞에 나타난 둘이었다.

J. 안젤로와 몬테즈 가스파드.

그 두 사람으로 구성된 태그 팀.

스트리트 타임즈.

특유의 ‘흥’을 가지고 있는 두 사람은 파티와 각종 놀이를 좋아하는 컨셉으로 인기를 끌었다.

현재 태그 팀 챔피언.

‘신-셀’의 다음 상대.

그 두 사람 중 안젤로가 갑자기 내 소개를 하며 나타난 것이었다.

몬테즈가 의아해 물었다.

“워워, 안젤로. 뭐하는 거야?”

“아니, 요새 들어 떠오르고 있는 슈퍼스타인 신을 보니 갑자기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가득해져서.”

이 두 사람은 좀 독특했다.

현실에서 프로레슬링을 하면서 살아가는 쪽이라고 할까? 가볍게 장난치며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꽤나 멋진 선배들이었다.

“하지만 우리 러셀도 가만히 둘 수는 없지! 명색이 GCW에서 유일하게! ‘슈팅스타 프레스’를 쓸 수 있는 선수인걸!”

“워워~ 그게 진짜야, 안젤로?”

“그렇다니까! 그럼, 크흠흠. 체중 350kg! 출신! 뉴욕 재팬……!”

“선배님들.”

나는 웃으며 말을 끊었다.

뉴욕 재팬은 뭔 소리야. 대체.

“이번 대립은 잘 부탁드립니다. 평소 선배님들하고 한번 제대로 대립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렇게 생각한 것과는 달리 나는 예의 바르게 둘을 대했다.

두 사람 역시 루차 킹즈처럼 오랫동안 메인에 있다가 자연히 이곳으로 내려온 선배들이었다.

게다가 이번에 벨트를 넘겨줄 상대였으므로 당연히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를?”

“왜?”

“선배님들은 WWF 역사상 가장 재미있는 프로모를 뽑아내실 수 있는 분들이니까요.”

두 사람이 침묵했다.

허나 그것도 잠시.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다.”

안젤로가 내 어깨에 툭 손을 올렸다. 한껏 진지해진 표정을 본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자신들의 ‘코미디 레슬링’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프로모와 세그먼트로 사람들을 웃길 줄 알았고, 레슬링을 통해서도 그런 결과물을 보여주었다.

그렇기에 이 부분에 대한 존경을 비추며 접근하는 게 마음의 벽을 허무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이내 안젤로는 껄껄 웃으며 내 어깨를 계속 주물럭거렸다.

“나 이 친구 마음에 들어.”

“나도 그래, 안젤로. 어이 러셀, 넌 우리 어떻게 생각해?”

“예? 아, 아아. 두 분 다 저도 참 존경하고 있습니다.”

“우리 경기 뭐 좋아해.”

“어, 그게…….”

“뭐가 좋지? 신.”

“다 좋아합니다.”

“크하하! 그래? 하긴, 우리가 좀 철학적이긴 하지!”

“우리와 대립을 하는 모두가 우리의 방식을 존중하게 되지.”

……딱히 기억이 안 나서 넘겼는데 어찌어찌 잘 해결되었다.

“저도 그런 식으로 가고 싶습니다. 선배님들의 방식대로 대립을 이끌었으면 해요.”

“어, 그래?”

“예. 이번에 저희가 링 위에서 코미디를 좀 펼쳤는데 관객 반응이 아주 나쁘진 않더라고요.”

“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확실히 좀 무게감을 줄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러셀의 말이 맞았다.

우리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가벼운 대립은 해본 적이 없었다.

신 vs 러셀.

신&러셀 vs 와이엇 패밀리.

이 두 가지 대립의 특징은 그 모두가 나름대로 ‘엮일 구석’이 있다는 점이었다.

러셀과 나는 마치 아치 에너미처럼 서로 극과 극에 선 관계.

“브로큰 와이엇은 저와 러셀로 인해 만들어졌죠. 때문에 그 수하들과 대립할 때도 별다른 프로모가 없었지만 알아서 심각한 분위기가 형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건 딱히 ‘원한 관계’에 놓여 있는 대립이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까지 시도해본 적이 없는 대립을 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했다.

신-셀과 스트리트 타임즈는 코미디 대립으로 간다.

“한 달이나 있으니까 평소처럼 심리전을 거는 거죠. 선배님들 두 분께서 저희 둘이 어떤 놈들인지 파악하는 건 어떻습니까?”

“오, 홈즈와 왓슨처럼?”

“아니, 멀더와 스컬리가 나아.”

아이디어가 척척 나왔다.

“그럼 너희는 어쩌려고?”

“선배님들은 나름대로 태그 팀 매치에 잔뼈가 굵으신 분들이니까 저희가 약간 당하면서 진행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그거 재미있겠네!”

우리는 신나게 아이디어를 주고받으며 대립을 준비해나갔다.

* * *

그리고 다음 주.

모니터링 TV를 통해 지난 주 촬영된 프로모가 흘러나왔다.

신난 듯이 라커룸 근처를 지나가는 스트리트 타임즈의 두 멤버. 두 사람이 입고 있는 것은 홈즈와 왓슨을 패러디한 복장이었다.

[헤이, 안젤로. 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

[어허, 안젤로라니. ‘홈젤로’라고 불러야지.]

[음…… 왜 네가 홈즈야?]

[네가 ‘왓테즈’니까.]

[바꿔!]

[내가 지금 한 일을 본다면 그렇게 말하진 못할걸?]

[왜?]

[나는 요새 핫한 신-셀에서 신을 맡고 있는 신을 추적했지. 그리고 놀라운 결과를 도출했어.]

[뭐, 뭔데?]

[녀석은 자기가 당하는 것에 약해. 그것도 무척이나.]

[뭐? 그게 무슨…….]

[지금 증명해주지. 오늘 신이 경기가 있는 건 알고 있지?]

[물론이지. 아까 셰무스가 오늘은 이긴다며 단단히 벼르던데.]

[그래서 나는 지금 신을 ‘위기 상황’ 속으로 몰아넣고 나왔지.]

[정말 궁금한데!]

[확인해 보자고!]

카메라가 옆으로 돌았다.

두 사람이 서있는 곳은 라커룸 앞. 문이 조금 열리고 카메라는 라커룸 안쪽을 비추었다.

샤워를 마치고 타올 하나만 두르고 있는 내가 서있었다.

카메라는 얼굴부터 시작해 매끈한 근육질의 몸매를 비춘 뒤, 이윽고 라커룸의 긴 의자에 이르렀다.

[……이런, 제기랄.]

내가 신음했다.

라커룸 위에는 내 경기복 대신 ‘러셀의 경기복’이 있었다.

카메라가 옆으로 돌아 락커룸 앞에서 폭소를 참고 있는 스트리트 타임즈의 두 사람을 비추었다.

바깥의 관객들이 왁자지껄하게 웃어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강한 반응을 느끼고 싱긋 웃었다.

그러자니 옆에 서있던 러셀이 웃음을 참으며 물었다.

“……좀 어때?”

“고간이 꽉 껴.”

나는 그런 감상을 내뱉으며 입고 있는 옷을 내려다보았다.

러셀 선생께서 준비해준, 아마추어 레슬링 복장을 베이스로 한 하트 패밀리의 레슬링 기어였다.

사실 그렉 때는 풀지 못했지만.

‘꼭 회수해야 할 복선이었지.’

아무튼 고간이 꽉 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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