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49화 (49/634)

49.

한발 앞서 경기장으로 입장한 셰무스가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는 적당히 중간 정도의 위상을 가지고 있는 미드 카더였다.

자버나 로우 카더에게는 손쉽게 승리하지만 그보다 위의 상대에게는 주로 패배하는 포지션.

때문에 오늘 경기는 나에게 있어 적당히 쉬어가는 정도……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었을 터였다.

우리는 그런 긴장감 없는 상황을 ‘옷’ 한 벌로 바꾸어냈다.

“신, 들어가세요.”

신호를 받은 나는 음악이 나오자 커튼을 걷고 밖으로 나갔다.

방금까지 성가 파트를 따라 부르던 이들이 내 등장에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입고 있는 옷은 러셀과 대립하던 때 ‘게이 코스튬’이라고 모욕했던 하트 가의 레슬링 복장이었다.

입장로 위에 잠시 멈춰선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사람들이 동정하듯이 박수를 보냈다.

나는 부끄러운 척 한숨을 내쉰 뒤 그대로 링 위로 올라갔다.

음악이 멈추자 사람들이 내게 열화와 같은 환호를 보냈다.

간간이 ‘게이 코스튬!’ 하는 소리도 있었지만 묻혔다. 다행히 관객들은 내가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놀리는 것에만 관심을 보였다.

나는 일부러 어기적거리며 걷거나 가랑이 사이의 천을 휙 당겼다 놓아 큰 웃음을 유도했다.

그렇게 경기가 시작되었다.

얼굴이 새빨갛게 물든 나는 호기롭게 달려든 셰무스에게 리드를 쉽게 빼앗겼다.

주도권을 잡기 위해 동작을 하다가도 어기적.

암 드래그로 넘겨져 쿵 떨어진 이후에도 어기적.

해머링에 실컷 얻어터지다가 빠져나온 뒤에도 어기적.

어기적어기적.

내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본 관객들이 큰 소리로 웃어재꼈다.

그러자니 가까이 다가온 셰무스는 헤드록을 거는 척 달라붙어서 내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야, 코믹 연기 좀 적당히 해라. 나도 웃기잖아……!”

“그냥 웃어버려요!”

“그, 그래도 돼?”

“뭐, 안 웃는 게 관객들이 보기에는 더 재밌을 것 같긴 한데.”

“그러면 내가 어떻게 웃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한 셰무스는 계속해서 공격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나는 아랫도리가 불편해서 아무런 반격도 하지 못했다.

‘실제로 그렇기도 하고.’

이래서야 마지막에 제대로 기술을 넣을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공세가 계속 이어지자 신이 난 셰무스가 포효했다. 녀석으로부터 드랍 수플렉스를 맞은 뒤 뻗어있던 나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한참을 깔깔거리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조용해졌다.

그들이 바라는 건 어찌되었건 나의 승리였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혹시 신이 지는 건가?’ 싶어 당황한 것이었다.

딱 그 타이밍이었다.

사람들이 순간 이 경기의 승패에 대해 의심을 갖는 그 순간.

힘차게 뛰어오른 나는 셰무스의 안면에 니 킥을 먹였다.

쫘악!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쓰러지는 셰무스. 관객들이 환호를 보냈고 나는 온몸에 힘이 빠진 척 그 위로 쓰러지며 핀 폴을 했다.

관객들이 함께 소리쳤다.

[1! 2! 3!]

땡땡땡!

핀 폴 승을 알리는 링 벨이 울렸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링 아래로 내려왔다.

그리고 다시 어기적거리며 입장로를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링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왁자지껄하게 웃으며 내게 소리쳤다.

“게이 코스튬 멋져요!”

“다음에는 러셀하고 커플로 입고 나와주세요!”

“섹시해요!”

이게 대체 뭔 반응들이야.

* * *

내가 백스테이지로 퇴장하는 것에 맞춰 프로모가 재생되었다.

실제 나는 뒤이어 돌아온 셰무스와 인사를 주고받았지만, 화면 속의 나는 어기적거리며 계속해서 불만을 쏟아대고 있었다.

[옷이 이게 무슨…….]

그 옆으로 러셀이 다가왔다.

내 선글라스에 내 탄환 재킷, 청바지를 입은 녀석이 싱긋 웃었다.

나는 표정이 일그러졌고 말이다.

[뭐야?]

[어때, 그 옷. 편하지.]

[……다리가 쫙쫙 찢어지던데.]

[몸의 근육을 단단하게 감싸주는 아주 좋은 레슬링 기어지. 현대의 갑옷 같은 거야.]

[그래서, 러셀. 대체 무슨 이유로 내 옷을 훔친 거지?]

[응? 나 아닌데.]

[네가 아니면 누구겠냐고!]

[아, 아니 진짜야. 나도 샤워 끝나고 나왔더니 네 옷밖에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입은 거라고.]

[그럼 대체 누가…….]

내가 의아해하고 있던 그때, 옆에 있던 심판 하나가 다가왔다.

[신, 러셀. 할 말이 있는데요.]

[무슨 일이야?]

[제가 우연히 두 사람의 옷을 바꾼 사람을 보게 되었는데요.]

[뭐? 그게 누군데?]

심판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우리에게 말을 속삭였다.

그 이야기를 들은 내 표정이 다른 의미로 일그러졌다.

프로모는 거기까지.

나머지는 다음 주를 기대하시라.

* * *

우리가 GCW의 ‘심판’을 프로모에 나오게 한 이유는 간단했다.

심판조차도 우리 각본의 일부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화가 난 내가 시합을 신청해 바로 다음 주, 나와 J. 안젤로의 싱글 매치가 이루어졌다.

안젤로와 나는 지난주에 진실을 말해주었던 녀석을 심판으로 두고 경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철저하게 ‘코미디’를 의식해 이루어졌다.

“윽?!”

안젤로가 밀어낸 심판을 안아서 받아낸 나는 도망치는 녀석을 당황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런 놈은 처음이라는 듯.

하지만 이렇게 심판을 시합에 끌어들여서 하자는 제안은 내가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

지금으로부터 한 5년쯤 뒤. 일본 쪽 프로레슬링에 이전과 전혀 다른 스타일의 선수가 나온다.

노야 토루.

일반적인 형태의 경기를 하지 않고 상대와 심판을 속여 승리를 따내는 미워할 수 없는 악역.

그가 경기 중 자주 사용하는 기술이 바로 ‘심판 밀기’였다.

얼핏 듣기에는 이게 뭐지 싶은 기술이지만 간단한 원리였다.

말 그대로 심판을 상대 선수에게 밀어 공격을 차단하는 거다.

지금 안젤로가 하듯이 말이다.

우리는 마치 찰리 채플린 영화의 배우들처럼 연기했다.

처음에 안젤로의 심리전에 밀려 당황하던 나는 이내 에라 모르겠다 싶어 심판을 밀쳐버렸다.

덩치가 작은 심판이 괴로워하는 가운데 우리는 심판을 던지고 받으며 한동안 시합을 진행했다.

사람들은 처음 보는 우스꽝스러운 광경에 웃음을 터뜨렸다.

‘그나마 안젤로의 기믹이 이런 짓을 해도 크게 위화감이 들지 않아서 다행이군.’

나는 다시 한 번 심판을 밀어내며 안젤로를 향해서 훌쩍 다가갔다.

심판을 받은 안젤로가 반대로 떠넘겼다. 하지만 거리를 좁힌 나는 무시하고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그사이 아래로 빠진 안젤로는 내 뒤로 돌아들어와 다리 사이로 로-블로를 먹였다.

말은 거창했지만, 간단하게 말해서 ‘알까기’였다.

물론 여기는 살살 때려도 아파서 절대 진짜 때리지는 않는다.

그럼에 나는 숨을 참고 얼굴을 부풀려 괴로움을 연기했다.

“그어어어어어억!!”

그 상태에서 나를 뒤로 넘기며 롤 업을 시도하는 안젤로.

심판이 카운트를 셌다.

1! 2! 3!

3을 세는 타이밍에 맞춰 빠져나왔다. 하지만 이미 시합의 끝을 알리는 벨이 울린 뒤였다.

땡땡땡!

안젤로의 승리.

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머리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이미 링을 빠져나간 안젤로는 승리를 자축하며 경기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는 노야 토루와 같이 나에게서 승리를 훔쳐간 것이었다.

어이가 없었던 나는 철제 계단을 걷어차 화풀이를 하고는 백스테이지로 돌아왔다.

먼저 들어와있던 안젤로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표정을 풀고 활짝 웃으며 그와 하이파이브를 했다.

“멋졌어요. 선배.”

“야, 이 아이디어 진짜 괜찮은데? 어떻게 이런 걸 생각한 거야?”

“뭐, 여기저기서.”

적당히 넘기고 있을 즈음, 경기를 봐준 심판이 들어왔다. 우리는 그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비록 심판이지만 프로레슬링 훈련을 거쳤던 그였기에 사용할 수 있었던 테크닉이었다.

어쨌든 좋은 경기였다.

경기 시간은 1분 남짓으로 굉장히 짧았다. 그럼에 경기 내용은 알차고,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는 목적에 충실할 수가 있었다.

‘거기다 3주 연속으로 시합한 내 체력도 보존하고 말이지.’

매 시합마다 죽어라 싸울 필요는 없다는 것이 내 지론이었다.

오히려 그건 관객의 피로도를 높이는 짓이다. 코미디, 드라마, 액션, 폭력 등, 다양한 방식을 써야 캐릭터의 수명이 늘어난다.

그렇기에 이번 대립은 코미디 위주로 가기로 정한 것이었다.

“덕분에 재미있었다. 관객 반응도 좋고 아주 멋졌어.”

“예, 선배님들하고 대립할 때 꼭 써보고 싶었던 방법이었어요.”

미소를 지은 나는 고개를 돌려 모니터링 TV를 확인했다.

여기에서 이제 우리 이야기의 개연성을 높이기 위해 프로모가 나갈 차례였다.

* * *

경기를 마친 뒤 환하게 웃으며 백스테이지로 돌아온 J. 안젤로.

마치 월드 챔피언이라도 딴 것처럼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

그 옆으로 기다렸다는 듯 인터뷰어가 다가갔다.

[실례합니다. 안젤로. 방금 요새 들어 기세가 등등한 신을 상대로 승리했는데요. 어떠십니까?]

[최고야!]

[전과는 달리 조금 독특한 방법을 써서 경기를 이끌어 가시던데. 뭔가 이유라도 있으신가요?]

[승리를 위해서지!]

질문에 대답한 것은 다른 사람이었다. 인터뷰어가 뒤로 돌아서자 카메라가 옆으로 움직이며 갑자기 나타난 몬테즈의 모습을 비췄다.

그는 놀랍게도 대도大盜, 아르셴 루팡으로 분장한 상태였다.

[확실히 신-셀 태그 팀은 떠오르는 신성이에요, 숀디. 하지만 강한 만큼 약점도 확실하죠.]

[뭐, 뭐죠?]

[이런 싸움에 약해.]

[이런 싸움? 다음 주에는 당신과 러셀의 대결이 예정되어 있는데, 그때도 뭔가 특별한 수단을 마련해두셨다고 봐도 될까요?]

[그야 물……!]

[워워워! 몬티, 몬티! 여기서 그걸 말하면 안 되지!]

[아, 그러게. 크흠흠……. 부인, 실례하겠소.]

19세기의 귀족처럼 우아한 태도로 말하는 몬테즈. 이어 두 사람이 카메라 밖으로 빠져나갔다.

[…….]

멍하니 서있던 인터뷰어는 이내 누군가를 발견하고 돌아섰다.

카메라가 돌아 멀리서 막 백스테이지로 돌아온 내 모습을 비췄다. 그 앞으로 러셀이 다가왔다.

[아, 저기!]

인터뷰어가 카메라맨을 이끌고 우리에게 다가갔다. 나는 불쾌한 얼굴로 카메라를 돌아보았다.

[……뭐야?]

[신 선수, 오늘 안젤로 선수와의 경기에서 아쉽게 패배하셨는데요. 지금 기분이 어떠신가요?]

[지금 장난해? 내가 어떤 기분일 것 같아?]

[어, 음…….]

[워워, 왜 엄한 사람한테 화풀이야? 미안해요, 숀디. 제 친구 녀석이 좀 흥분을 했군요.]

[아니에요. 러셀.]

부드럽고 젠틀한 러셀의 모습에 미소를 짓는 인터뷰어 숀디.

하지만 나는 분을 식히지 못하고 물통을 집어던졌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숀디가 과장된 비명을 내질렀다.

한숨을 내쉬며 돌아선 러셀이 나를 달래기 시작했다.

[걱정 마. 신 다음 주에 내가 반드시 복수해줄 테니까.]

[뭔가 또 비겁한 수를 준비해올 게 뻔한데 네가 어떻게 해!]

[비겁한 거라면 네가 최고지.]

[…….]

[넌 내가 아는 최고로 비겁한 놈이야. 남을 속이고 조롱하고 욕하는 일에는 도가 튼 놈이라고!]

[그, 그래?]

그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이는 날 보고 관객들이 폭소했다.

[그래!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몬테즈가 다음 주에 그 어떤 수를 준비해와도 난 끄덕도 안할 거야. 아무리 그래도 네가 한 짓보다 심하진 않을 테니까!]

[그렇다면 널 믿겠어. 러셀.]

[그래, 신. 두 놈이 어떤 짓을 하더라도…… 난 괜찮을 거야.]

싱긋 웃은 러셀은 다소 진정한 내 어깨를 툭 때렸다.

다음 주에는 스트리트 타임즈가 또 어떤 비겁한 수법을 써서 승리를 도둑질해갈 것인가.

그리고 신에게 당하며 임기응변 능력을 키워온 러셀이 과연 그들의 술수를 벗어날 수 있을까?

그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결국 또 ‘다음 주를 기대하시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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