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53화 (53/634)

53.

WWF의 본사가 위치한 미국 코네티컷 주州의 스템포드.

어두운 공간에 모여 앉은 두 명의 사내가 빔 프로젝터가 벽에 쏘아내는 영상을 시청하고 있었다.

[커버! 1, 2, 3!]

쓰리 카운트가 이어지고 상대를 핀한 동양인 사내가 일어섰다.

[신이 오늘도 경기에서 승리합니다! 정말이지 엄청난 상승세가 아닐 수 없군요! 대단합니다!]

관객들의 환호가 어마어마했다.

턴버클을 밟고 올라선 레슬러가 벨트를 들고 자신을 어필했다.

영상을 확인한 두 사내 중 나이가 많은 쪽이 휘파람을 불었다.

“디카페리오 같군.”

그의 이름은 닉 플레어.

젊은 시절, WWF 바깥의 다른 단체에서 악역으로 아이콘에 등극했던 전설적인 프로레슬러였다.

올해 53세였지만 그는 세 번째 부인과의 위자료 문제로 아직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단체가 사라져 WWF에 오게 된 닉은 이런저런 수모를 겪은 뒤 슬슬 적응해나가는 중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사내와 협력 비슷한 관계를 맺으면서 말이다.

“……눈이 멀었어요?”

그렇게 대답한 것은 현재 WWF 월드 챔피언인 트리플H였다.

통칭, 헌터.

황금 사자와 같은 모습이 인상적인 악역 전문 프로레슬러였다.

거대한 근육질에 갈기처럼 기른 금발. 수염의 모양은 먼 옛날의 전설이었던 캡틴 로건과 같았다.

“디카페리오도 영화에서 ‘내가 이 세상의 왕이다!’라고 하잖나?”

“하지만 디카페리오는 그 영화에서 단지 밀항자일 뿐이죠.”

“그래, 그래. 아무리 그래도 이 회사 같은 거대한 배에서는 한낱 밀항자에 불과한 녀석이지.”

닉이 쓰게 웃었다.

헌터는 오만할 정도의 프라이드를 가진 사내였고, 그것을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런 야성을 냉정하게 감출 줄도 아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나쁘진 않군요. 확실히 받쳐주는 역할로는 좋겠어요.”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저런 캐릭터가 있으면 확실히 팀의 분위기도 살겠지. 얼굴도 잘생겼고.”

“그렇습니까?”

“뭐, 탑에 오를 만한 얼굴은 아니라고 생각되지만 확실히 함께 있을 때 자네를 받쳐주겠지.”

그렇게 대답한 닉은 이어지는 영상을 보다 눈썹을 찡그렸다.

“하지만 문제가 있군.”

러셀 하트와 태그 팀 매치를 치르고 있는 신의 모습이 나왔다.

“하트 패밀리의 막내가 저 ‘신’하고 함께 활동하고 있지.”

“닉…… 그게 뭐가 문젭니까?”

“그렉이 눈여겨보고 있을 거라는 말이네.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려면 우선 그를 어떻게든 해야겠지.”

“한물간 양반이에요. 오히려 저 녀석을 우리 라인에 태워주겠다고 하면 자기가 먼저 물러서겠지.”

“과연 그럴까.”

“안 된다고 하면 어쩌겠습니까? 자기는 이제 곧 은퇴하고, 그러면 이 바닥에 남아있는 건 조카뿐일 텐데.”

헌터가 씨익 웃어 보였다.

오랜 경력과 확고한 프로 의식을 가진 그는 WWF 회장, 바트 맥센의 총애를 받는 백스테이지의 정치꾼으로도 악명이 높았다.

현재, 버닝콩의 메인 각본에서 중심이 될 신新 스테이블의 멤버를 구성 중인 상황이었다.

리더가 트리플H, 거기에 전前 아이콘인 닉 플레어로 무게감을 더해 신인 두 명을 내세운다.

되도록 키워줄 가치가 있는 신인으로, 헌터는 산하 단체에서 빅 네임으로 활약하는 신을 점찍었다.

잠시 헌터의 말을 생각해보던 닉이 이내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저 친구, 지금 당장 올라올 수 있는 건 확실한가?”

“데려와야죠.”

“가능하겠나? 이번에는 할리가 꽉 잡을 것 같은데. 지난번에도 거의 억지로 데려온 거잖나.”

“이유가 있어요.”

헌터가 씨익 웃었다.

“그 친구 몸값이 산하 단체에서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거든요.”

“그래?”

“티셔츠 판매량이 역대급이라고 들었어요. 그런 선수를 산하 단체에서 썩게 할 이유는 없지.”

자신감 있게 대답한 헌터는 화면에 나오는 신을 다시 바라보았다.

확실히 잘만 이용한다면 그럭저럭 쓸 만할 것 같은 선수였다.

트리플H라는 위대한 선수의 커리어를 빛내는 용도로 말이다.

* * *

이제 러셀과 나의 듀오는 말하는 게 입 아플 정도가 되었다.

우리는 시청률을 계속해서 상승시켰고, 이내 GCW에서 암표상을 단속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다른 도시에서 쇼를 보기 위해 찾아온 관광객의 수가 폭등해 지역 상권에 영향을 끼칠 정도였다.

물론, 그 모두가 마냥 우리에게 좋기만 한 관객은 아니었다.

한 남자가 내 얼굴이 그려진 자신의 티셔츠를 보이며 소리쳤다.

“시이이이인!!!”

“…….”

막 경기를 끝내고 퇴장하던 나는 움찔 놀라며 돌아보았다.

“내 자● 모양을 본뜬 비누를 만들어 보냈어!! 써줄 거지!! 신!!”

살집이 두툼하게 오른 남자가 윙크를 하며 날 향해 소리쳤다.

……이런 위험한 관객도 더러는 있는 법이었다. 다행히 그 이상의 짓은 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물론 선물은 모두 한 번 필터링을 거친 다음에 내게 전달되기 때문에 저 남자의 그걸 본뜬 비누를 받아본 기억은 없었다.

어쨌든 이런 사소한 부작용이 있기는 했지만, 그 외 대다수의 팬들은 평범하게 날 응원했다.

그렇게 나날이 지표가 올라가는 상황. 결국 아틀랜타의 레위시 경기장을 빌려 주간 쇼를 하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까지 나왔다.

‘레위시’는 2,000석 규모의 실내 경기장으로 지역 내의 농구 팀이 홈으로 사용하는 곳이다.

GCW의 수익이 최저점을 찍었을 때 페이퍼뷰 경기장으로 빌려 사용한 곳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석 달에 한 번 있는 페이퍼뷰.

주간 쇼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거기다 아틀랜타라는 대도시의 특성상 관객들의 편의성도 증대되어 더 많은 관객들이 올 터.

‘즉, 주간 쇼의 기대 수익은 지금과 비교했을 때 두 배 이상 뛰어오른다는 말이지.’

그렇게 되면 GCW 선수들의 몸값 역시 크게 높아질 것이다.

프로레슬러는 이름이 알려질수록 더 돈을 벌게 되니 말이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기존의 경기장을 쓰는 건 일단 유지비 외에는 돈이 들지 않는다.

그리고 이와는 반대로 레위시를 쓰기 위해서는 대여료가 필요했다.

하룻밤에 1만 달러.

2,000석 규모의 경기장치고는 나름대로 싼 대관료에 속했다.

레위시가 교통편이 좋은 아틀랜타의 중심부에 위치해있다는 사실을 감안하자면 더더욱.

하지만 대관료에 기타 비용까지 합쳐보면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의 액수는 아니다.

하지만 2,000석을 다 채웠다고 했을 때 티켓값으로만 간단히 상쇄되고도 크게 남음이 있다.

거기에 머천다이즈 수익까지 더해지면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거고.

결국은 선택이다.

기회비용을 지불하고 도전하는가. 아니면 그냥 이대로 산하 단체로서의 역할에 충실할 것인가.

그리고 GCW의 사람들은 모두가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리스크를 짊어지기를 원했다.

나 역시도 그랬다.

GCW에 있는 모두가 ‘콜 업’되어 WWF에서 슈퍼스타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판을 키우는 건 큰 도움이 될 터.

……그렇게 생각했지만.

“안 돼.”

할리는 냉정하게 말했다.

수뇌부가 모인 회의장에서였다.

이번에도 바쿠의 부름을 받아 회의에 참석한 나는 할리의 대답을 듣고 쓴웃음을 지었다.

‘당연한 이야기지.’

우리가 아무리 원한다고 한들, 회사로서는 굳이 큰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GCW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산하 단체로서 메인 쇼에 올라가 활약할 선수들을 육성하는 것.

그렇다면 그 역할에 충실하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GCW가 아무리 수익을 내봤자 WWF 메인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하니까.

내 생각과 같은 이야기를 꺼낸 할리의 말에 모두가 침묵했다.

“하, 하지만 할리. 너무 아깝지 않습니까? 이렇게 좋은 녀석들이 한자리에 모인 상황인데.”

“맞아요. 지금 메인 챔피언은 바비와 와이엇이 계속 이끌어 나가고 있고 2선의 셰무스도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는 상황이죠.”

“태그팀 디비전도 아주 좋습니다. 신-셀이 애덤과 크리스의 팀을 아주 재미있게 띄워줬어요.”

“놈들이 아주 어그로를 제대로 끌게 되서 당분간 밑에서 받쳐줄 선수는 부족하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새로 발매한 애덤&크리스의 티셔츠도 잘 팔리고 있고요.”

“……? 그걸 누가 사.”

“시청자들이요.”

“그러니까, 걔네 걸 왜.”

“아마 신이 세그먼트하면서 티셔츠를 엿 먹이고 싶은 상대에게 선물하라고 이야기했더니만.”

“매출이 300퍼센트 상승했죠.”

“……고작 그걸로.”

어이가 없다는 듯 날 바라보는 할리. 나는 뭔가를 기대하듯 바라보는 그 시선을 피했다.

뭐, 사실.

‘윗선을 설득할 방법이야 하나 떠오르는 게 있기는 한데.’

이걸 언제 꺼내는가, 그리고 어떻게 이해시키는가를 잠시 생각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리고 아마 지금이 적기로 보였다.

“할리, 결국 정리하자면 윗선에서 GCW 관련 사업을 확장시킬 마음이 없다는 이야기죠?”

“그래. 뭐 걸리는 거라도 있나?”

“그렇다면 위쪽에서 여기에 바라고 있는 건 좋은 기믹을 가진 선수를 키워내는 산하 단체로써의 역할 뿐이라는 거잖아요.”

“그렇다고 볼 수 있겠지.”

일부러 재확인하듯 말했다.

지금 이들이 보기에 나는 피지컬로나, 마인드로나, 찬란히 빛나는 재능을 가진 프로레슬러였다.

하지만 그런 나라고 할지라도 WWF의 속사정을 알고서 대응책을 낸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그러니 마치 지금 할리의 말을 듣고 떠올린 것처럼 이야기하는 게 가장 어색하지 않은 흐름이리라.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응?”

“현 WWF에서 그 유효성을 검증하고 싶어 하는 것을 저희 쪽에서 먼저 시험하는 겁니다.”

“……? 그게 무슨 말이냐.”

“지금 메인에서는 아직까지도 성인을 대상으로 한 유혈 드라마가 유행하고 있잖습니까?”

“그래, ‘태도 불량 시대’지.”

프로레슬링 역사상 가장 자극적이던 시대. 그와 동시에 가장 많은 문제를 낳았던 시대.

성인 지향의 스토리. 배신과 유혈, 성性이 난무하는 프로레슬링.

그것이 ‘태도 불량 시대’였다.

하지만 그 시대는 락콜드의 은퇴 이후 오래 가지 못하고 과도기에 들어서 WWF가 하락세로 접어드는 결과를 낳았다.

그 하락세를 반등시키며 새로운 시청자를 끌어들인 것이 숀 시나.

전체이용가 시대.

악이 패배하고 선이 승리한다는 단순함. 어찌 보면 80년대, 캡틴 로건이 주도한 프로레슬링의 원전에 가장 가까운 시대였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현재 WWF에서 기부 사업을 벌이고 있죠. 그게 왜라고 생각하세요?”

“이미지 세탁이지.”

“그렇죠.”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WWF의 선정성은 도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자주 들었다.

회사에서도 그걸 신경 써서 괜히 트집이 잡히지 않도록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게 ‘돈’이 될 수 있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겁니다.”

“돈이 돼?”

“예, 캡틴 로건의 시대로 회귀해도 잘 된다는 걸 보여주는 거죠. 그렇다면 수뇌부로서도 저희가 내는 결과가 과연 어디까지 통용되는지 시험하고 싶어지겠죠?”

즉, 그것이 GCW의 확장으로 이어진다는 이야기였다.

“……꼬마.”

내 이야기를 들은 할리가 날카로운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주름진 안광이 빛났다.

“예, 할리.”

“너 혹시 메인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는 거냐?”

“……없는데요.”

“그렇다면 정말이지 미친 아이디어로군. 넌 정말 미친놈이야.”

그가 소리를 내 웃었다.

다른 사람들도 아직은 아리송하지만 감은 잡은 듯했다. 그런 상황에서 할리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을 이었다.

“아이디어를 내놔봐라. 캡틴 로건의 시대를 어떻게 다시 GCW에서 부활시킬지를 말이야.”

“간단합니다.”

“허! 거기까지 생각해낸 거냐?”

“얼마 전에 저와 러셀이 소아암 병동에 갔던 걸 기억하십니까?”

“그야 기억하지. 그때 기사 잘 뽑혀서 아주 반응이 괜찮았어.”

“그걸 확장시켜서 아예 ‘위시메이커’ 재단처럼 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그거라면 아마 윗선에서도 허가를 내려줄 것 같은데요.”

“위시메이커……?”

모두가 의아해했다.

위시메이커 재단.

난치병에 걸린 아이들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소원성취 전문기관이다.

‘~~가 되고 싶어요.’

‘~~가 하고 싶어요.’

혹은 ‘~~를 만나고 싶어요.’

“난치병에 걸린 아이 중 원하는 아이들을 쇼에 초청하는 겁니다. 각본하고는 아무 상관없이 말이죠. 좋은 드라마가 될 겁니다.”

“그거라면…….”

“예, 확실히 지금 메인에서 진행하고 있는 이미지 개선에 도움이 되겠죠. 거기다 각본도 어린아이나 가족이 볼 수 있도록 조금씩 변형해나가는 것으로 하고.”

마지막으로.

“초대를 받은 아이에게도 즐거운 추억을 만들어줄 수 있겠죠.”

내 말을 들은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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