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54화 (54/634)

54.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락콜드 스티비 스틴은 2003년 4월의 레슬 임페리움을 끝으로 완전히 선수 생활을 끝마쳤다.

치명적인 부상으로 인한 은퇴.

수많은 사람들이 아쉬움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이콘이 퇴장하고, 한 시대의 주인공이 사라졌다. 그런 상황에서 WWF는 소극적으로 굴었다.

제2의 락콜드를 찾으려 노력했고, 그 자리에 수많은 선수들이 도전했다. 그리고 전부 패배했다.

결국 새 술은 어디까지나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법이다.

‘이미 꺼진 불씨를 되살리려고 해봤자 그것은 헛된 짓일 뿐.’

하지만 우리는 달랐다.

내 의견을 채택한 GCW는 이후로 쇼의 수위를 점차 줄여나갔다.

성적인 농담이나 블러드잡을 제외하고 의자 같은 걸 사용하는 경기도 최대한 열지 않았다.

좀 더 가족 계열의 시청자들을 노린 쇼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지난번에 만났던 윌리의 부모님에게도 연락을 취해 그들의 의사를 물어보았다.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예, 요즘 상태가 괜찮아져서 아들도 꼭 가고 싶다고 하네요.]

[아,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에보니까지 함께 가도 괜찮을까요? 정말 감사합니다.]

역시, 예상한 대로였다.

병마와 사투를 벌이는 어린아이에게 이런 이벤트는 큰 힘이 되어줄 터였다.

무엇보다 자기 아이에게 좋은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어 하는 건, 어떤 부모든지 간절히 바라는 일이다.

기뻐하는 윌리의 얼굴을 떠올리니 나도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봉사활동은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 역시 윌리의 도움을 받게 되는 셈이었다.

비록 그 사실을 겉으로 드러낼 이유는 없었지만 말이다.

사실, 좀 복잡한 일이었다.

난치병 소년의 꿈을 이루어주면서, 동시에 그로 인한 홍보 효과를 노리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인가.

하지만 난 미래의 시나가 말했듯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그래도 윌리를 위한 우리의 행동과, 윌리가 우리를 만난 추억은 퇴색되지 않을 테니까.

어쨌든, 남은 건 WWF 메인에서 허락이 떨어지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답변이 오는 것을 기다리던 나는, 어느 날 바쿠의 부름을 받고 사무실로 가게 되었다.

날씨가 좋은 주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선 나는 그만 굳어지고 말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

“…….”

“왔냐. 신.”

“훤칠하군.”

화려한 금발 머리를 하나로 묶은 사내가 표정이 굳어진 바쿠와 할리의 옆에 서있었다.

헤라클레스 같은 거구의 몸집에 셔츠와 선글라스를 멋들어지게 쓴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그리스 신화의 영웅 같은 모습.

아마 누구든 한 번 본다면 뇌리에 각인되어 잊을 수 없으리라.

‘헌터가 왜 여기에?’

헌터 헤이스트 허큘리.

줄여서 트리플H.

WWF 최고의 악역 레슬러.

정말로 좋은 사람이었다.

그는 전생에 내게 친절하게 군 몇 없는 프로레슬러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짓밟을 가치가 없어서’였다.

실제로, 자신의 위치를 위협할 수 있는 ‘선수’에게는 그 누구보다 잔혹하게 굴었다.

암투暗鬪를 즐기는 왕정 시대의 귀족 같은 남자.

분명 우연이겠지만, 데뷔 초창기의 기믹도 그 성격에 걸맞은 프랑스 귀족이었다. 야성미 넘치는 외모와는 반대로 젠틀함을 표방하는.

그것은 실제로 그의 실제 성격과 거의 같은 기믹이었다.

처세에 능하다는 말이다.

물론, 나는 그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받은 적은 없다. 하지만 난 도저히 그를 좋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의 정치 행각으로 기회를 받지 못하고 스러진 선수들만 한 트럭이 넘었기 때문이다.

머지않은 미래에 바트 맥센의 딸, 티파니 맥센과 결혼해서 WWF의 회장까지 넘보는, 권력에 목마른 사자 같은 인간.

성큼 앞으로 나선 그는 서글서글한 웃음과 함께 내게 악수를 청했다.

“반갑네. 내 이름은…….”

“트리플H라는 위대한 이름을 모르는 인간은 이 업계에 없죠.”

“호오.”

헌터처럼 양가죽을 뒤집어쓴 나는 그대로 그의 손을 맞잡았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래, 신. 나도 자네 같은 기대주와 만나게 되어서 영광이네.”

그가 미소를 지었다.

속으로는 날 철저히 평가하고 있을 터였다. 과연 자신의 ‘부하’가 될지 ‘적’이 될지를 말이다.

우리가 서로 인사를 나누자 지켜보고 있던 할리가 입을 열었다.

“메인 쇼에서 자네 같은 사람을 보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군. 언제 전서구로 직업을 바꿨나?”

“하하, 현역 때처럼 전혀 녹슬지 않은 말솜씨군요. 할리.”

쾌활하게 웃은 헌터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나 역시도 떨떠름함을 감추며 바쿠의 옆에 앉았다.

‘왜 온 거야?’

보아하니 우리가 올린 보고서에 대한 답을 전해주러 온 것 같긴 한데. 그가 굳이 올 필요가 있나?

2003년이라 아직 전화가 없나?

아니, 이건 헛소리고.

내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여유를 부리던 헌터가 이내 입을 열었다.

“……뭐, 제 나름대로 따로 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어서 말입니다.”

“이야기?”

“그건 차치해두고. 일단은 보내셨던 요청에 관해서 말씀드리죠.”

그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오케이랍니다. 로이가 나중에 정식으로 보고서 달라는군요.”

로이라면 WWF의 2인자인 존 로이타스를 말하는 것이었다.

원하던 소식이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마찬가지로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할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렇다면 경기장은…….”

“아, 그건 시청률 10퍼센트는 달성하고 이야기하라던데요.”

“10퍼센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조금 전에는 보고서 넘기라며?”

“지금 우리가 기록하고 있는 6퍼센트도 역대 신기록이라고. 우리 의도는 분명히…….”

“악마는 디테일에 있는 법이죠. 로이가 말한 건 각본이었습니다. 그…… 캡틴 로건 시대의.”

헌터가 일축했다.

“만약 불만이 있으시다면 본인한테 직접 항의하시던가요. 전화를 받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헌터는 여유롭게 웃었다.

바쿠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나는 잠시 헌터의 호두가 그 안에 쥐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10퍼센트 시청률이라.

말도 안 되는 소리……까지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억지였다.

괜히 귀찮게 일처리하기 싫다는 표시였다. 그렇다면 아마 허가를 내린 각본 건도 실패한다면 모른 척 우리 탓으로 돌리겠지.

‘로이의 호두가 바쿠의 손에 쥐어져 있다면 좋을 텐데.’

다시금 그런 생각을 하는 내 앞에서 헌터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열정을 보여 달라는 거겠죠. 로이도 진짜로 10퍼센트를 달성하리라는 생각은 안 할 거예요.”

어떻게 GCW 따위가 그걸 해내겠냐고 생각하는 게 팍팍 느껴졌다.

“일단 전하는 건 여기까집니다. 이제 제가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말씀드려도 될까요?”

“……어디 해봐라.”

“저 친구. 이번에 올려주십쇼.”

“신을?”

“예, 따로 조용히 그 말씀이 드리고 싶어서 여기에 온 겁니다.”

헌터의 표정은 진지했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오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아야만 했다.

‘뭔지 알겠군.’

그 말을 듣자마자 이해가 갔다.

‘스테이블이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헌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

‘레볼루션.’

락콜드의 시대가 끝난 뒤 헌터가 그 불씨를 이어나가기 위해 만든, WWF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스테이블.

4명의 멤버로 구성되었으며, 헌터가 향후 10회 월드 챔피언의 커리어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그걸 위해서 헌터는 자신의 백스테이지 내에서의 권력을 휘둘렀다……는 게 세간의 평가.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시청률의 저하를 남 탓으로 돌리며 숀 시나의 시대가 올 때까지 2년간의 집권기를 가졌다.

‘나를 거기에 넣겠다고?’

그게 아니라면 헌터가 이렇게 직접 콜 업을 제안할 리가 없었다.

나는 기존의 역사와 달리 헌터의 예리한 눈에 걸려든 것이었다.

할리가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선수 많잖나? 안 그래도 이 자식은 좀 더 데리고 있고 싶은데.”

“아뇨, 쭉정이들만 있어서 말이죠. 이제 베테랑들도 다 은퇴할 테고. 새로운 얼굴을 발굴해서 키우는 게 좋을 것 같거든요.”

“지난번에 올려준 쟈니라던가. 그런 놈들은 어디다 팔아먹고?”

“다 쇼에도 못 나오고 있죠.”

헌터가 우습다는 듯 말했다.

“자신만의 카리스마가 없는데 어떻게 뜨겠습니까.”

“쟈니는 우리 탑 페이스였다.”

“그래도 메인에서는 써먹기 어려운 쭉정이였다는 거죠.”

“………….”

우지지직!

침묵을 지키던 바쿠가 손에 쥐고 있던 나무 테이블을 부쉈다.

삽시간에 공기가 얼어붙었고, 바쿠는 고요히 입을 열었다.

“입 조심해라. 헌터.”

“여전히 힘 좋네요.”

“설령 선수가 똥이라도, 빛나는 똥으로 포장하기 위해서 단체가 있는 거다. 다시 한 번 내가 키운 선수를 폄하하면 눈알 하나 뽑혀서 돌아가게 될 줄 알아라.”

“예예, 죄송합니다.”

헌터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아무리 그라도 바쿠의 초인적인 힘에는 한 발 물러서는 듯했다.

“하지만 말이죠. 이 친구 내년 연봉은 맞춰줄 수 있습니까?”

“음…….”

“이봐 신, 그거 알아? 너 여기서 머천다이즈로 수익 내는 거. 메인의 미드 카더랑 비슷한 수준이야. 걔네들 연봉이 얼마인 줄 알아?”

물론 안다.

왜 저렇게 ‘이건 몰랐지? 억울하지?’ 하듯이 말하는 걸까.

“자그마치 백만 달러다.”

뭐, 그쯤 되겠지.

“어때. 여기서 고작 5만 달러 받는 게 억울하지도 않나? 너에게는 확실한 잠재력이 있다고.”

“영광입니다.”

“아니, 진지하게.”

헌터는 책상 위로 자신의 거대한 팔뚝을 올려놓았다. 웬만한 마른 사람의 허리 같은 팔이었다.

“솔직히 말하지. 약간 ‘얇아서’ 얕봤는데 멋들어진 근육이야.”

그는 진지하게 날 바라보았다.

“…….”

“일류는 일류를 알아보지. 그것만으로 네가 얼마나 강한 프로 의식을 갖추고 있는지 알겠다.”

“그렇습니까.”

“널 알아봐줄 수 있는 사람을 택해. 그래야만 위로 올라갈 수 있는 업계다. GCW를 폄하하려는 마음은 없지만, 여기는 이제 네게 맞는 장소가 아니야.”

“헌터, 너…….”

“하나 물어보죠. 바쿠. 이 친구에게 뭘 가르친 적이 있습니까?”

바쿠의 입이 다물어졌다.

“없죠? 러셀하고 한 첫 번째 경기를 보니 알겠더군요. 이 친구는 들어오기 전부터 완성되어 있었던 겁니다.”

헌터의 눈은 예리했다.

그는 내 경기들을 보고 실력을 아주 정확하게 평가하고 있었다.

“나는 현재 이 업계의 넘버원이다. 신. 그런 내 옆에 서라.”

조금 솔깃……한 것도 사실.

허나 나는 조심스러웠다.

그런 내 표정을 읽었는지 헌터는 더 말하지 않고 일어섰다.

“……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이 이상 손을 뻗지는 않았다.

그것이 사자심왕과도 같은 자신의 품격에 해를 끼치기 때문일까.

“두 사람도 그에게 뭐가 더 좋은 길인지를 알아줬으면 하는군요.”

트리플H는 그렇게 우리에게 고민거리를 하나 던지고 떠났다.

* * *

그 일은 거기에 잠시 묻혔다.

트리플H가 떠난 뒤, 몇몇 선수들이 내게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할리와 바쿠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사람들이 날 대하는 시선은 예전과 다름이 없었다.

‘날 배려해준 거군.’

거기다 큰 행사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분위기를 뒤숭숭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나 역시도 헌터의 제안은 잠시 뒤쪽으로 미뤄뒀다.

다들 넘치는 의욕으로 쇼를 준비했으며, 훈련에도 열심히 매진했다.

그리고 나는 자연스럽게 그런 GCW의 중심이 되어 행동했다.

어쨌든 일련의 작전을 제안한 사람이다. 그렇기에 모두들 내게 많이 의지하고 물어봤다.

그렇게 모두가 하나가 되어 목표를 향해서 힘차게 노를 저어나갔다.

그리고 결전의 날이 밝았다.

소아암 환자인 윌리를 쇼에 초대해 멋진 하루를 선물하는 날.

계획이 좀 더 적극적으로 잡혔다. 오늘 TV에는 윌리의 모습이 비추고 해설자들이 그에 대해서 코멘트까지 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쇼가 끝난 뒤 TV에는 나가지 않는 무대에서 관객들과 함께 윌리를 응원해줄 생각이었다.

또한 그 내용은 지역 뉴스와 신문을 통해 홍보될 예정이었다.

‘일단 목표는 시청률 10%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아침을 먹은 나는 러셀과 함께 윌리를 맞이하기 위해 정문으로 나갔다.

나보다 더 윌리와 많이 대화를 해본 러셀 역시도 이런 상황에선 긴장이 되는 모양이었다.

사실 그럴 만했다.

차라리 3층에서 뛰어내리는 게 프로레슬러들에게는 더 마음이 편한 일일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프로레슬링 쇼를 좋아하는 어린 꼬마를 위해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정문 앞에 도착해 윌리를 기다리는 동안 러셀이 불안해졌는지 입을 열었다.

“오늘 일정이 어떻게 되지?”

“시설 구경 시켜준 다음에 축하 파티 열고. 챔피언 벨트를 든 윌리의 프로필 사진 찍어주고. 그다음에 쇼에 참여하는 거야.”

“……용케 다 기억하네.”

“에보니랑 거의 며칠 밤을 새가면서 모든 계획을 짜뒀으니까.”

“에보니면 그 간호사?”

“그래, 고생 좀 했지.”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사실 제일 어려운 부분이었다.

그래도 필수적인 일이었기에 우리는 최선을 다해 요청을 들어주었다.

병원에서 권장한 소독약을 써서 GCW 전체를 청소해 아이에게 좋은 환경을 조성하고자 했다.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일일이 신경 쓰는 에보니 또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쉽지 않은 일일 텐데.

나라면 아마 그만뒀을 거다.

내가 이 일을 하는 이유는 좋아해서도 있지만, 성공했을 때 부와 명예가 따라온다는 점도 있었다.

내 생각이 통했을 때 남들이 반응을 보내는 것도 좋고 말이다.

연극, 영화, 스포츠, 그 어디에서도 맛보기 힘든 특징이었다.

하지만 간호사는?

잘은 모르지만 아마 굉장한 헌신을 필요로 하는 직업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참 에보니가 대단하다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저 멀리서 흰색 세단 한 대가 안으로 들어섰다.

나와 러셀이 다가가자 앞에서 차가 천천히 멈춰 섰다.

창문이 내려가고 그 안에서 윌리의 아버지가 고개를 내밀었다.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러셀! 신!”

차량의 뒤쪽에 타있던 마스크를 쓴 꼬마가 손을 열심히 흔들었다.

앞좌석에는 부모님, 뒷좌석에는 에보니와 윌리가 타고 있었다.

러셀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잘 왔어, 윌리.”

그 함박웃음을 보자니 진심으로 최고의 하루를 선물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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