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57화 (57/634)

57.

일반적인 회사라면 인턴부터 회장까지 직급이 나뉘듯, 우리 업계에도 그러한 구분이 존재했다.

자버, 로우 카더, 미드 카더, 하이미드 카더, 메인 이벤터, 레전드, 아이콘까지 이르는 체계.

거의 모든 선수들은 자버에서 시작해 조금씩 위로 올라갔다.

불행히도 전생의 나는 내내 자버에서 벗어나지를 못했지만, 숀 시나는 차근차근 위로 올라가 결국 아이콘에까지 이르렀다.

WWF 역사상 단 네 명뿐이었다고 회자되는 아이콘 말이다.

한 시대의 주인공으로 그 시대를 최대로 흥행시켰던 선수들.

물론, 그렇게 되는 것은 정말 극소수에 불과했다. 메인 이벤터조차 정말 극소수로, 대부분의 선수들은 미드 카더에서 떨어져 나갔다.

나처럼 은퇴하고 트레이너가 되거나 다른 단체에 가기도 했다.

‘다 전생의 일이지만.’

나는 느긋하게 생각했다.

지금의 나는 비참했던 그때와는 달리 하이미드 카더에서 메인 이벤터 사이를 오가는 선수였다.

그것도 확실히 메인 이벤터로서의 포텐셜을 지녔다는 좋은 평가를 받기까지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가 메인 이벤터로 불리지 못하는 이유는 단 하나.

‘태그 팀’이기 때문이었다.

WWF에서 태그 팀은 주로 홀로 서기를 못하는 낮은 등급의 선수가 한다는 인식이 강했다.

아니면 메인 각본에 투입되지 못하는 선수 둘이 뭉치거나, 후배 하나를 키워주기 위해서라거나.

그런 식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슬슬 나와 러셀의 태그 팀이 해체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과거에 존 마이클스도 태그 팀 동료를 배신하고 홀로 섰듯이.

우리 역시도 슬슬 태그 팀을 해체하기에 좋은 때라고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문제는 바로 ‘태그 팀을 해체하는 방법’이었다.

윌리와의 약속을 깨가면서까지 내가 배신을 할 것이냐.

아니면 적당히 서로 악수를 하며 팀을 해체하게 될 것인가.

임팩트는 전자가 압도적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나는 천하의 둘도 없는 개자식이 될 터였다.

여기에 윌리라는, 진짜 현실의 문제도 포함되어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해야 하는 일이었다.

바로 나니까 해야 하는 일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니까.

나는 업계에서 최고가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무엇이든 해왔다.

신은 그런 내가 가진 성공에 대한 열망을 투영한 캐릭터였다.

위로 올라가기 위해 더 나은 성과를 내고, 팬들의 반응을 얻기 위해 무엇이든 하려는 내 마음가짐을 그대로 드러낸 남자였다.

그렇기 때문에 해야만 했다.

분명 엄청난 욕을 먹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윌리의 죽음을 그대로 묻어두고 싶지는 않았다.

회피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그걸 이용해 내 생각을 똑바로 이야기할 생각이었다.

현실과 가상이 모호한 각본.

현실의 문제가 포함된 각본.

그것이 내가 이 업계에 있으며 정답에 가깝다고 내린 길이었다.

여기서 한 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나는 러셀과 다시 한 번 대립을 해야만 했다.

문제는 그 방식이었다.

분명 우리는 처음에 만났을 땐 죽어라 싸웠고, 지금도 서로 자신이 더 나은 레슬러라 생각했다.

그렇기에 배신 자체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런 쇼크를 기대하는 사람도 있겠지.

‘문제는 개연성이지.’

제대로 된 각본이 필요했다.

뭔가, 사람들이 이거라면 내가 충분히 러셀을 배신할 수도 있겠다고 느낄 만한 각본 말이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고민에 빠져있던 내 앞에 답이 나타난 건 얼마 뒤의 일이었다.

쇼가 없는 날, 갑자기 바쿠가 한숨을 푹 쉬며 내 앞에 나타났다.

“……잠깐 얘기 좀 하자.”

“어, 무슨 일 있어요?”

“음, 상부에서 재촉이 들어와서 말이야. 빨리 널 콜 업 시킬 건지 말 건지 정하라고 하더구나.”

“헌터군요.”

“네 생각은 어떠냐? 돈…… 같은 걸 생각한다면 역시나 가는 게 옳다고 나는 생각하는데.”

“돈만이요?”

“……그래, 실력적으로도. 너는 확실히 이 자그마한 2,000석 규모의 쇼에 어울리는 레벨은 아니지.”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그, 그러냐?”

바쿠의 눈이 크게 뜨였다.

“마무리는 확실히 짓고 가야죠. 이번에는 좀 미뤄주세요.”

“네가 그렇게 해준다면야 우리로서는 정말 고마운 일이지.”

“그런데, 만약 이번에 제가 안 올라가면 누가 가게 되죠?”

“음, 상부에서는 현재 와이엇 패밀리를 원하는 것 같다.”

“스테이블 전체를요?”

“그래, 버닝콩에 스테이블이 생길 거니 랙다운 쪽에 보내서 균형을 맞출 생각이라던데.”

WWF 메인에는 두 개의 쇼가 존재했다. 월요일 밤의 버닝콩과 금요일 밤의 랙다운이 그랬다.

하지만 내가 흥미를 느낀 점은 와이엇 패밀리 전체가 랙다운으로 올라가게 된다는 부분이었다.

“와이엇은 지금 GCW 챔피언이잖아요. 그럼 어떻게 되는 거죠?”

“당연히 벨트는 넘겨야지.”

“누구에게요?”

“아마 너겠지. ……할리가 이 소식을 들으면 바로 널 고를 거다.”

“어떻게요.”

“그, 거야…… 고민해봐야지. 넌 뭔가 아이디어 같은 거 없냐?”

“일단 제가 러셀을 배신할 만한 상황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배신?”

“태그 팀을 해체하기 위해선 그게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잖아요?”

“하지만 너희들이 그랬다간 분명 사람들의 반발이 심할 텐데.”

“그러니까 해야죠.”

“으음, 확실히 잘만 한다면 멋진 스토리가 나올 것 같긴 한데.”

분명 내 배신은 충격적인 턴 힐이 될 테고, 반대로 러셀의 캐릭터를 끌어올려줄 수 있을 터였다.

사람들은 나를 욕하고 러셀을 응원하기 위해 방송을 보겠지.

그렇기에 해야만 했다.

……적어도 확실한 각본이 나올 때까지 고민해야겠지만 말이다.

“와이엇을 만든 것은 저니까 대립 자체에 이상할 건 없어요.”

“하지만 그게 러셀을 배신하고 태그 팀을 해체할 동기까지는 되지 못한다는 게 문제로구나.”

“으음…….”

“일단 각본진과 할리에게도 네 의사를 전달해두마.”

“부탁드립니다.”

여럿이서 머리를 쥐어짜면 금방 아이디어가 나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안타깝게도 각본진도 이 까다로운 상황에 좀처럼 답을 내지 못했다.

신과 러셀. 속칭 신-셀 듀오.

신이 러셀을 배신할 상황이 작위적으로 느껴지지 않을 무언가.

그리고 그 마지막 조각은 생각치도 못한 부분에서 이어졌다.

바로 다음 주.

러셀이 쇼에서 부상을 당했다.

그래, 얄궂게도 그 예기치 못한 악재가 도리어 기회가 되었다.

* * *

“으윽……!”

일이 벌어졌다.

2,000명 규모의 경기장에서 처음으로 시행된 GCW 주간 쇼.

신-셀 듀오 대 와이엇의 부하들이 벌이는 태그팀 챔피언전戰.

무려 2,000명 관객의 앞.

실시간으로 쇼가 이루어지는 프로레슬링에 있어서 제일 불편한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바닥에 쓰러진 나는 숨을 몰아쉬며 반대편에 누워 끙끙 앓고 있는 러셀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30초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경기 전.

2,000명 규모의 첫 쇼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보러오기 잘했다.’는 생각을 갖게 하도록 일부러 좀 더 빠른 템포로 경기를 치렀다.

초장부터 공중기가 난무하고 갑작스러운 피니시 무브를 피하며 긴장감 속에서 마구 싸웠다.

시나의 턱에 힘차게 니 킥을 먹인 나는 쓰러지는 놈의 거체를 밟고 움직이지 못하게 막았다.

쿵! 쿵!

그 소리가 두 번 이어졌을 때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들자 턴버클 위에서 떨어진 러셀의 모습이 보였다. 녀석이 괴로운 듯 신음을 흘렸다.

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뭐지?’

어떻게 된 거야?

천하의 러셀이 실수를?

수많은 의문이 머리를 스쳤다.

러셀은 좀처럼 일어나지 못했다. 지금껏 그 어떤 순간에도 정신을 붙잡고 일어서던 녀석이 말이다.

거기에서 알게 되었다.

러셀 하트가 부상을 당했다.

심판이 다가와 녀석의 상태를 체크했다. 그러더니 손을 머리 위로 들어 X자 표시를 취했다.

경기 불능.

러셀은 더 이상 싸울 수 없게 되었다. 잠시 굳어져 있던 나는 이내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분명 엿 같은 상황이다.

러셀의 부상.

정도는 모르지만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면 아마 심각한 거겠지.

하지만 이 불행한 사고는 내가 러셀 하트를 배신할 계기를 만들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떠올랐다.

그 방법이.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시나를 잡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시나. 잘 들어.”

“어, 어떻게 된 거야?”

“러셀이 부상을 당했어. 이제부터 경기 내용을 좀 바꿀 거야.”

“설마 나 때문이야……?!”

“경기 중이야. 입 다물어.”

나는 시나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짧게 내 의사를 전달할 방법을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너와 에디가 협력해서 날 두들겨 패. 남은 시간이 10분 정도니까 약 7분까지. 그 이후에 내가 의자로 너희를 공격할게.”

“의자로……?”

“DQ면 타이틀 변동은 없으니까 괜찮아. 내가 다 책임질게.”

그렇게 말한 나는 상황을 정리하고 돌아온 심판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전해줘요.”

그는 백스테이지와 연락할 수 있는 통신기기를 차고 있었다.

나는 일단 시나를 리드하며 경기장 밑으로 내려갔다. 쓰러져 있던 에디가 일어서 다가왔다.

그에게도 상황을 전하고, 우리는 경기 내용을 즉석에서 변경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와이엇의 존재로 인해 그 부하 둘의 위상도 꽤 높았으니까.

“크헉!”

나는 실감나는 연기와 함께 두 사람의 공격에 계속 당해주었다.

실려나간 러셀을 신경 쓰던 관객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의 연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온갖 기술을 맞아가며 나는 그렇게 때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Boooooooooooooo!]

정신없는 와중 계속된 시나와 에디의 더블 팀 공격에 관객들이 야유를 보냈다.

하지만 그들은 무시하고 공격을 계속 이어나갔다. 나는 커버를 계속 벗어나며 공격에 당해주었다.

그리고 관객들의 야유가 절정에 달한 순간, 난 에디에게 붙잡혀 일어나며 동시에 속삭였다.

“로-블로를 쓸 거야.”

눈빛으로 대답하는 에디.

나는 곧바로 녀석의 팔을 쳐내고 가랑이 사이로 킥을 날렸다.

물론 직전에 힘을 줄였다. 거시기를 맞는다는 건 남자의 내장을 짓이긴다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나는 동시에 스스로의 허벅지를 강하게 쳐 소리를 냈다.

쫘악!

관객들이 환호를 보냈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심판이 내 실격패를 알렸다. 공이 침과 동시에 나는 참았던 분노를 터뜨렸다.

이기기 위해선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되어 있는 것이 나였다.

그처럼 나는 일부러 실격을 당해 타이틀을 지켰다. 그럼에도 분노는 그치지 않고 나는 시나와 에디를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물론, 그 과정 하나하나를 두 사람에게 확실하게 설명했다.

“이제 의자를 쓴다.”

쓰러진 두 사람에게 말을 속삭인 나는 철제 의자를 가지고 올라와 무자비한 공격을 시작했다.

쩌억! 쫘악!

의자를 들고 두 사람의 등을 번갈아 후려쳤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점점 커졌다.

하지만 비겁한 승리와 뒤이은 무자비한 공격은 완벽한 악역의 움직임이었다. 지금 당장 관객들은 그 사실을 느끼지 못했지만.

보다 못했는지 스테이지 뒤쪽에서 심판들이 달려 나왔다. 그것을 발견한 나는 공격을 멈췄다.

쓰러진 시나와 에디의 사이에 의자를 펼치고 털썩 주저앉았다.

최대한 분위기를 잡고 숨을 몰아쉬며 관객들의 반응을 살폈다.

‘슬슬 예상한 대로군.’

처음에 속이 시원했던 관객들은 내 공격이 일정한 선을 넘자 너무 심하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선역의 선’이었다.

선역은 비겁하게 공격하지도, 잔혹하게 상대를 박살내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니었다. 그것이 가족 단위가 주가 된 관객들을 얼어붙게 만들고 말았다.

고통에 신음하며 바닥을 굴러다니는 시나와 에디, 그 사이에 앉은 나는 천천히 호흡을 정돈했다.

그리고 올라온 심판들이 두 사람의 상태를 살폈다. 그중 하나가 뒤이어 내게 다가왔다.

“슬슬 광고 시간이다.”

“그럼 그때까지 겁먹고 다가오지 못하는 시늉 좀 해주세요.”

“……그래.”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연기.

하지만 역시 GCW의 인간들은 대부분이 베테랑이었다. 심판은 내가 가만히 시선을 보내자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렇게 내게 주어진 시간을 다 쓴 나는 굳어진 관객들의 반응을 느끼며 백 스테이지로 돌아왔다.

좋아.

이거면 됐다.

커튼을 걷고 안으로 들어서자 기다렸다는 듯 이 팀의 리더인 할리와 바쿠가 내게 다가왔다.

“죄송합니다.”

나는 일단 사과를 했다.

지금 내가 즉흥적으로 DQ로 경기의 결과를 바꾼 건 프로레슬링에서 금기시되는 일이었다.

타이틀의 변동은 없었지만 사실 상의 월권행위나 다름없었다.

할리가 입을 열었다.

“왜 그런 거냐?”

“러셀이 나가자마자 각본이 완성될 수 있겠다고 느꼈습니다.”

“태그 팀의 해체 말이냐?”

“예.”

나는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의 두 사내는 화를 내기보다 호기심을 느끼는 듯했다.

이로서 확실해졌다.

신의 행동은 업계의 관계자들조차 이후의 진행을 궁금해 할 정도로 파격적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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