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찍부터 나는 사무실에서 GCW의 수뇌부들과 함께 어제의 경기 영상을 확인해보고 있었다.
내 무릎에 맞은 시나는 단지 그에 대한 리액션으로 뒤로 넘어가며 셀링을 수행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위치를 잘못 계산한 녀석은 등 뒤에 로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시나의 몸이 로프에 부딪혔다.
100kg이 넘는 거체가 만들어낸 충격이 턴버클 위에 올라가 있던 러셀의 중심을 잃게 만들었다.
옆으로 미끄러지며 로프에 머리가 찍힌 러셀은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고, 낙법을 치지 못했다.
그 뒤로는 내가 보았던 상황이었다. 러셀은 각을 못 잡은 채 바닥에 떨어져 괴로움에 나뒹굴었다.
쇄골 골절, 그리고 뇌진탕.
쇄골 골절은 최소 3개월은 결장해야 하는 장기 부상.
거기에 뇌진탕은 선수 생명과 직결이 되어있을 정도로 위험했다.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사고였지만, 그럼에도 러셀의 이 부상은 우리의 각본을 완성시켜주었다.
‘아이러니하군.’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이어지는 경기를 계속 모니터링 했다.
[아, 러셀 선수. 순간 큰 충격을 입었는데 괜찮을지 걱정입니다.]
[심판이 경기 불능 선언을 하는군요. 의료진이 나와 러셀을 이송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러셀이 이송되었고, 그 뒤로는 내가 즉흥적으로 바꾼 경기였다.
나는 예정했던 것과 달리 두 사람에게 실컷 얻어터졌다. 하지만 아나운서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도 멋진 중계를 이어나갔다.
‘역시 프로들답군.’
두 사람은 메인에서 좌천되어 이곳에 와있는 것이었지만, 경력이 엄청나게 긴 베테랑들이었다.
[아, 신! 로-블로를 씁니다!]
[경기가 신의 반칙패로 끝납니다! 타이틀의 변동은 없습니다!]
[지금껏 당했던 분노가 쏟아집니다! 신이 시나와 에디에게 로-블로를 먹이고 짓밟습니다!]
무자비한 공격에 이은 체어샷.
두 사람의 아나운서는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감정을 말로 풀어 쉽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여기서 문제는, 지금 이 상황이 즉흥적인 연출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조차 완벽했다.
[의자를 씁니다! 신이 속 시원하게 두 사람을 두들겨 팹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심한 행동이 아닐까 싶은데요……?!]
[아~ 말리기 위해 나온 심판들이 다가가지 못하는군요!]
[정말로 무서운 것 같습니다! 꼬리를 만 치와와 같군요! 하하!]
[저라도 저런 신의 앞에서는 분명히 겁을 먹을 것 같습니다!]
‘멋지군.’
역시 프로 중의 프로들이다.
두 사람의 아나운서는 상황을 즉흥적으로 보고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을 확실히 말해주었다.
덕분에 이 쇼를 본 시청자들은 내가 왜 이렇게까지 폭력적으로 굴었는가. 궁금증을 느끼겠지.
그렇기에 분명히 다음 주의 쇼를 보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쇼가 광고 타임으로 넘어갔고, 바쿠가 정지 버튼을 눌렀다.
나는 제각각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수뇌부들을 돌아보았다.
흥미로움, 난감함, 당황함. 하지만 모두 호기심을 느끼는 듯했다.
내가 대체 무엇을 이유로 이런 행동을 한 것인가를 말이다.
할리가 운을 뗐다.
“자, 그래서.”
“예.”
“무엇을 이유로 이와 같은 행동을 한 것인가 설명해줄 수 있나?”
어제 설명을 대강 들었던 그였지만 아무래도 모두와 함께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 것 같았다.
“턴힐을 위한 포석이었습니다.”
“설명해봐라.”
“아마 와이엇의 콜 업에 관한 소문이 슬슬 퍼져나갈 겁니다.”
아무리 숨기려고 해도 소문은 퍼져나가기 마련이었다. WWF 본사에는 기자들과 거래하는 인물이 다수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기자들은 그 소문을 부풀려 기사로 만들어 돈을 벌었다.
“이번에는 그걸 역으로 이용해 하나의 각본으로 만드는 겁니다.”
“와이엇의 콜 업을……?”
“예, 제가 선수 생활 초창기에 와이엇을 만들었죠? 그리고 패배했습니다. 그리고 대립을 하긴 했는데 줄곧 한 수 아래라고 할 수 있는 부하들과 경기를 가졌죠.”
‘신’은 어느 순간부터 거기에 대해 조급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런데다 갑자기 와이엇이 콜 업 되게 생겼다. 자신에게 기분 나쁜 패배를 안겨준 채로 말이다.
“그런데 러셀은 부상을 당했고, 마음이 복잡한 와중에 열이 받아서 홧김에 일을 저지른 거죠.”
“흐음…….”
“저는 신이 무적의 악역 챔피언으로 군림하면서 러셀의 복귀를 기다리는 그림을 생각했습니다.”
“러셀을……?”
“예, 제가 올라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확실하게 띄워주고 갈 상대는 러셀이 된다는 이야기죠.”
“선역으로서.”
“예, 아이콘으로서 말이죠.”
아이콘.
그 울림에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허황된 이야기라고 느끼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단순한 선‧악역의 스토리는 아닙니다. 러셀과 저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는 이야기인 거죠.”
“흐음…….”
데뷔 초창기부터 삐걱거렸던 신과 러셀. 이후 공동의 적을 상대로 함께 싸우며 팀이 되었다.
하지만 신의 가슴 속에는 야망이 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최고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고민하던 차에 러셀이 부상을 입자 내치는 거죠.”
“왜 내치는 거지?”
“러셀이 자기 안에 있는 연약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서겠죠.”
“솔직히 말하지.”
할리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윌리가 걸려. 세간의 비난이 있을 거다. 모두들 우리가 위선을 떨었다는 이야기를 하겠지.”
“하지만 시청률은 늘겠죠.”
“신…….”
“물론, 그것만을 바라고 이 각본을 쓰자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 뭐냐?”
“저는 이 각본을 통해 저희 세 사람의 이야기를 끝내고자 합니다. 커리어의 한 페이지인 거죠.”
“너와 러셀, 그리고…….”
“윌리 말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윌리의 존재는 분명 우리 두 사람의 커리어와 함께했다. 그렇기에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건 작위적이다.
윌리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네 의지가 그렇다면 믿으마.”
고개를 끄덕인 할리는 결론을 내린 듯 모두를 돌아보았다.
“문제는 그 과정을 세련되게 설명하는 거다. 이른 바 연출이지.”
“신이 링 세그먼트로 설명하면 임팩트 있게 풀 수 있지 않을까요. 만약 그렇게 되면 각본은 어떤 식으로 이어나가면 될까요?”
“바로 다음 주에 러셀을 배신하는 모습부터 보여줘야겠지?”
“아니, 하지만 러셀은 지금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말이죠.”
“다음 주에 세그먼트 소화하려면 하루 빨리 수술 날짜를 잡아야 할 것 같습니다.”
각 팀장들이 하나둘씩 의견을 말해 이후 조용하던 사무실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 각본이 사람들의 마음에 들었다는 증거였다.
본디 좋은 각본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상상과 기대를 하게 만들어야만 했다.
위로 올라가게 된 와이엇 패밀리.
야망을 가지고 있는 신.
부상을 당한 러셀.
그 일련의 과정이 합쳐지며 신의 폭발이 일어났다.
그렇게 내가 제시한 상황과 결과를 들은 사람들은 각자 저마다의 상상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좋은 현상이었다.
‘아무래도 징계 먹을 각오는 하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군.’
바쿠와 할리도 표정이 좋았다.
이제 남은 건 러셀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뿐이었다.
* * *
‘신의 턴힐 각본을 어떤 충격적인 방식으로 풀어나갈 것인가?’
그 화두를 던지고 나는 곧바로 차를 운전해 병원으로 향했다.
아틀란타에 위치한 종합 병원.
윌리가 입원해있던 병원과는 다른 곳이었다. 미리 이야기를 해둔 나는 간호사들의 안내를 받아 병실로 향할 수 있었다.
“저, 저기, 신 선수. 죄송한데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지난번과 달리 간호사들 몇몇에게 사인을 하는 정도로 끝났다.
“러셀이 부상을 당해서 참 안타깝네요. 쾌차를 빌게요.”
“두 사람 우정 보기 좋아요.”
“감사합니다.”
……이게 인기인가.
하지만 여기서 내가 러셀을 배신한다면 다들 날 미워하겠지.
현실과 각본의 경계를 넘어설 정도로 말이다. 그런 예감을 느낀 나는 쓰게 웃었다.
병실 안으로 들어서자 퀴퀴한 냄새와 함께 두 사람이 보였다.
침대 위에 앉은 러셀, 그리고 그 앞에는 시나가 함께였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환기 좀 해라.”
“어, 왔어?”
“그래, 인마. 시나 넌 왜 여기 있어? 아까 바쿠가 찾던데.”
“앞으로 여기서 먹고 잘 거야.”
“……언제까지?”
“러셀이 나을 때까지.”
“…….”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사고였지만 시나는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 큰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근육질의 순수한 청년이 이렇게 청승맞은 모습으로 있는 걸 계속 보자니 뭔가 좀 불편했다.
러셀이 쓰게 웃었다.
“괜찮아. 시나. 병원비는 집안에서 보험 가입해둔 거 있으니까.”
“그래도 오줌통 비워줄 사람 정도는 필요할 거 아니야.”
“하필 비유를 해도…….”
이마를 턱, 짚은 나는 러셀의 옆에 가져온 통조림을 내려놓았다.
“오다 주웠다.”
“……콩?”
“과일 통조림은 없더라고.”
나름의 유머였다.
의외로 기운은 있는지 러셀은 큭큭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나 때문에 괜히 각본이 꼬이게 되서.”
“불행한 사고지.”
옆에서 시나가 ‘내가 미안해.’ 하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따가 갈 때 저 녀석도 묶어서 같이 데려가야겠군.
그렇게 생각한 나는 러셀의 앞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혹시 쇼는 봤어?”
“어, 의자 쓰고 배드애스하게 걸터앉는 것까지 봤는데.”
옆에서 시나가 ‘정말 아팠어.’ 하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턴 힐 각을 보는 건가?”
“그래, 그럴 생각이야.”
“역시.”
“느꼈어?”
“어느 정도는. 네가 허투루 그런 행동을 할 사람은 아니니까.”
“날 믿었군.”
“널 믿었지.”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나 역시도 러셀을 믿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들어맞았다.
역시 이 녀석은 출중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내 행동으로 이후의 흐름을 읽어 내다니 말이다.
전생에는 WWF의 메인으로 올라간 이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업계를 떠난 러셀이었다.
하지만 그는 출중한 재능을 지녔다. 나와의 궁합도 잘 맞았고, 주변 사람과의 관계도 좋았다.
만약 트리플H의 정치질이 아니었다면 그는 그렉 하트의 뒤를 이어 슈퍼스타가 되었을 터였다.
아니, 분명 그랬을 것이다.
러셀의 캐릭터는 나와 함께하며 분명 좋은 방향으로 발전했다. ‘전체 이용가 시대’에 알맞았다.
아마 그는 좋은 각본만 주어진다면 시나와 함께 시대를 이끌어나갈 주역이 될 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걸 위해서는 분명히 선결되어야 할 작업이 존재했다.
트리플H에게 맞서기 위해 그의 상품성을 키워두는 것이다.
‘그렇게 해두면 향후 시나와 나, 러셀까지, 우리 세 사람이 함께 시대를 이끌 수 있겠지.’
그것은 또한 내가 트리플H와 같은 자들에게 맞서기 위한 수단이었다. 미리 스타가 될 사람들을 내 편으로 포섭해두는 것이다.
물론, 그를 위해서도 있고.
진심으로 러셀을 좋은 동료라고 생각하기에 나는 그에게 져줄 준비가 되어있었다.
“러셀, 잘 들어.”
“내 역할이 있는 모양인데.”
“물론 그렇지. 너와 나는 GCW 최고의 커플이니까. 이 각본을 완결 짓기 위해서는 서로의 존재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라고.”
“…….”
“아, 미안. 나도 소름 돋네.”
“아냐…….”
우리는 잠시 역겨워했다.
어쨌든.
“수술이 끝나면 잠깐 돌아와서 링 세그먼트 하나만 소화해. 그리고 최대한 빨리 돌아와.”
“네가 날 배신하는 거냐?”
시나가 옆에서 ‘……친구끼리 배신은 안 돼.’라고 말했지만 무시하고 넘어갔다.
“그래, 그렇게 해서 나는 네가 돌아올 때까지 무적의 GCW 챔피언으로 군림할 생각이다.”
“엄청나게 욕을 먹겠군.”
“하지만 그런 만큼, 사람들은 네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겠지.”
날 쓰러뜨리고 챔피언이 되는 러셀 하트를 보기 위해서.
“그 기대에 배신하지 마. 벌크를 더 키우고 연기력을 늘려. 사람들에게 진화한 러셀 하트의 모습을 보여주란 말이야.”
“……알겠어.”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처량하게 어깨를 움츠린 시나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그 역시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목표를 앞에 두었다.
“그날 밤, 우리 셋이서 각자 목표를 잘 이루길 기원하며 마지막으로 한잔하자고.”
“술?”
“아니, 물이지.”
술 먹으면 근손실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