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
그렇게 일주일 간, GCW에서는 신이 주인공인 각본의 방향성을 정하고 대략적인 틀을 잡았다.
러셀의 복귀까지 이어지는 초대형 각본이었다. 그때까지 신은 악역 챔피언으로 군림하게 된다.
그리고 그걸 위해서는 당연히 신이 러셀을 배신하고 턴 힐을 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GCW 주간 쇼.
1,873명의 관객이 입장한 가운데, 나는 락커룸에 앉아 다른 선수들과 함께 차례를 기다렸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으나, 이제는 내 영향인지 모든 선수들이 락커룸에서 쇼를 시청하게 되었다.
사실, 자기 일을 모니터링 하는 건 프로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실시간으로 나오는 관객들의 반응을 살피며 내 생각이 맞는지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었다.
먼저 하나.
쇼가 시작하자 미리 준비해둔 영상과 함께 러셀이 부상을 입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안타까운 소식입니다. 러셀 하트의 부상으로 태그 팀 챔피언이 오늘 벨트를 반납할 예정입니다.]
[정말 슬픈 일이군요. 두 사람의 태그가 이렇게 끝나다니요.]
[에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러셀이 회복하고 돌아오면 두 사람이 다시 함께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복선을 깔았다.
러셀과 나의 태그 팀 챔피언 반납식은 오늘의 메인이벤트였다.
2시간 남짓한 쇼에서 계속 홍보가 이어졌다. 그만큼 GCW도 오늘의 턴힐 직전 시청률을 최대한 끌어올리겠다는 심산이었다.
선수들 역시도 쇼의 중심을 꽉 잡아준 태그 팀의 해체에 저마다 기대를 하고 있는 눈치였다.
누군가 어깨를 꽉 쥐어 돌아보자 바비가 서있는 게 보였다.
“드디어 네 차례구나.”
“예, 선배.”
“잘해봐라. 이후에 대립하게 된다면 나도 좀 이끌어주고.”
“선배라면 제가 오히려 리드를 받아야 할 것 같은데요.”
“그럴 리가.”
싱긋 웃는 바비.
그 외의 다른 사람들도 모두 나에게 잘해보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거기에서 나는 새삼 지금 이 순간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메인 이벤터’.
단체의 얼굴이자 최고의 선수.
항상 우러러보기만 했던 그 왕좌에 이제는 내가 앉게 되었다.
당당하게 실력으로 따낸 결과인 만큼 나는 큰 자부심을 느꼈다.
GCW의 쇼는 앞으로 나의 존재를 중심으로 진행될 것이다. 오늘 같은 날이 계속된다는 뜻이다.
그처럼, 이제 곧 우리의 반납식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리자 관객들이 크게 환호성을 내질렀다.
‘슬슬 나가야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일어서자 락커룸의 문이 열리며 인터컴을 착용한 직원이 안으로 들어왔다.
“신 선수! 준비해주세요!”
“예, 갑니다.”
직원의 눈에는 날 존중하는 태도가 엿보였다. 나는 그와 함께 고릴라 포지션으로 이동했다.
“신, 멋진 모습 보여줘.”
“힘내요!”
“기대할게!”
날 발견하자 다들 한결같이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이게 쇼의 대미를 장식하는 메인 이벤터라는 건가.’
몇 번인가 메인에 서기는 했지만, 언제나 러셀과 함께였다.
하지만 이제는 혼자다.
정확히는 그렇게 될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며 고릴라 포지션에 이르자 각종 장비들 사이에 서있는 러셀과 바쿠가 보였다.
나는 러셀과 주먹을 맞댔다.
수술은 원활하게 끝났고, 그는 어렵지 않게 외출 허가를 받았다.
“신.”
“준비됐어?”
“반전을 보여주고 와라.”
바쿠의 격려를 들은 우리는 입장곡과 함께 링으로 올라섰다.
* * *
엄청난 환호가 쏟아졌다.
[Sin-sell! Sin-sell! Sin-sell! Sin-sell! Sin-sell! Sin-sell!]
사람들은 우리의 이름을 챈트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무대 위에 올라선 할리가 웃었다.
그가 마이크를 손에 들자 사람들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전설적인 프로레슬러에 대한 그들 나름의 예우였다.
“다들 난리도 아니군.”
짧은 한마디는 묵직하고 카리스마가 넘쳤다. 사람들은 우리를 보며 크게 환호를 보냈다.
러셀은 성원에 응답하듯 삼각건을 하지 않은 팔을 흔들어 보였다.
사람들이 그를 격려하기 위해 더 큰 환호성을 보냈다. 러셀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물기 어린 눈으로 아쉬움에 가득 찬 연기를 해나갔다.
물론, 실제로도 그랬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은 손쉬웠을 것이다.
부상을 당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옆에서 침묵하며 벨트를 들여다보았다.
아마 눈치 빠른 관객들이라면 슬슬 이상함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럼에도 할리의 재빠른 진행으로 그것은 단지 의혹에 그쳤다.
“러셀, 신. 무려 10회가 넘는 방어전을 거치며 너희 둘의 콤비는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지.”
[We Love you! We Love you! We Love you! We Love you!]
“사람들의 말도 그렇군. 이런 불운이 아니었다면 너희 둘의 듀오는 영원히 지속됐을지도 모르지.”
가까이 다가온 할리가 러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힘든 시간이겠지, 꼬마야. 하지만 잘 이겨낼 거라고 믿는다.”
러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냐?”
마이크를 받은 러셀은 자신의 진심을 담아 말을 시작했다.
관객들과 가문에 감사를 하는 그는 확실한 베이비 페이스였다.
심드렁하게 듣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그의 노력을 알았고 러셀에게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우리는 다른 팀과 대립하며 수많은 이야기를 해왔다. 자신의 목표가 무엇인지, 자신은 누구인지. 그 사실을 계속해서 주장해왔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신인으로서 유례가 없을 정도의 큰 사랑을 받으며 GCW의 막강한 성장세를 주도하는 태그 팀이 되었다.
“……제가 여기에 오기까지 큰 도움을 준 친구가 있습니다.”
러셀이 날 돌아보았다.
사람들이 환호를 보냈다.
마치 지금 느끼는 일말의 불안감을 지워버리려는 듯이.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Sin!]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벗은 나는 벨트를 할리에게 건넸다.
그리고 손을 뻗어 러셀에게 악수를 청했다. 러셀이 웃으며 마찬가지로 벨트를 건네주었다.
우리가 악수를 하자 사람들의 환호가 더 커져 절정에 이르렀다.
경기장이 떠나갈듯, 우리 두 사람의 이야기를 봐온 수많은 관객들이 힘차게 박수를 보내왔다.
그렇기에 이 순간밖에 없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러셀의 손을 쳐낸 뒤 펀치를 냅다 질렀다.
빠악!
관객들 사이에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내 주먹에 맞은 러셀이 비틀거리며 물러나다 무릎을 꿇었다.
러셀 하트는 지금 진짜로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럼에 행동은 효과적이었다.
[……………….]
정적.
사람들은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2,000명 가까운 관중들이 한순간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 고요함을 느끼며,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감추고 뒤돌아섰다.
‘완벽하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완벽한 턴 힐이다. 그 많은 관객들 모두가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심지어는 할리까지도 그랬다.
그가 충격을 받은 부분은 이처럼 한순간에 경기장을 휘어잡은 내 행동 하나로 인해서였다.
그는 마치 전례가 없었던 일이라는 듯 멍하니 날 바라보았다.
난 링 위에서 천천히 내려왔다.
선글라스를 다시 쓰자 관객들 사이에서 서서히 웅성거림이 일었다. 그들은 내 행동을 믿지 못하고 심지어 야유조차 보내지 못했다.
“왜 그랬어! 신! 왜 그랬냐고!”
“러셀은 네 친구잖아!”
입장로 주변에 있던 관객들이 충격에 빠진 채 내게 소리쳤다.
하지만 난 그런 반응들에 철저한 무시로 일관한 채 입장로를 걸어 고릴라 포지션으로 돌아왔다.
그 모든 게 완벽한 연기였다.
나는 관객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모두가 나의 행동을 보고는 스토리에 깊이 이입해 얼이 빠졌다.
그렇게 안.
“……후우.”
참았던 숨을 내뱉은 나는 고릴라 포지션에 있던 모든 직원들의 시선을 느끼고는 웃었다.
“어땠어요?”
“……내가 프로레슬링을 꽤나 오래 해왔지만 이런 건 처음이다.”
“캡틴 로건이 턴 힐 했을 때도 이만한 반응은 아니었을 텐데.”
“이거, 자칫하다간 큰 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겠는데요?”
직원들 중 몇몇은 너무 몰입한 관객들의 반응을 걱정했다.
나는 곧바로 모니터링 TV를 통해 바깥의 상황을 확인했다.
[아, 이거. 안타까운 일입니다. 신이 부상당한 동료를 내치는 길을 선택할 줄은 몰랐는데요.]
[링 위의 러셀을 보십시오. 완전히 넋이 나간 모습입니다!]
[만인의 사랑을 받았던 팀이 이대로 끝이 나고 맙니다!]
해설자의 코멘터리와 함께 카메라가 관객들의 모습을 비추었다.
소년들이 눈물을 흘리고 경악에 빠진 사람들이 머리를 붙잡았다.
뒤를 이어 링 위에서 넋이 나간 러셀을 마지막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GCW의 로고와 함께, 주간 방송이 끝을 고했다.
경기장의 좋지 못한 분위기를 읽은 할리가 서둘러 러셀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바쿠, 빨리 다크 매치 진행해.”
할리는 드물게 당황한 모습으로 지시를 내렸다.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비방용 다크 매치를 빠르게 진행시키려는 것 같았다.
그사이, 나는 러셀과 이야기를 나눴다.
“괜찮냐?”
“좀 더 세게 때리지 그랬냐.”
“환자한테 어떻게 그래.”
“나보다는 네 걱정이나 해. 자칫하다가는 퇴근하다 주차장에서 총이라도 맞게 생겼는데?”
“……뭐어, 그렇게 되면 어느 의미에서는 전설로 남겠지.”
쓰게 웃은 나는 좀 대기하다가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리 그래도 정말 과몰입한 관중의 총에 맞아 죽는 건 싫었으니 말이다.
* * *
반응은 말할 것도 없었다.
나의 턴 힐 소식은 인터넷과 각종 매체를 뜨겁게 달궈놓았다.
물론, 프로레슬링에 대한 전문 소식을 전하는 뉴스레터에서도 곧바로 반응을 내보냈다.
[와, 이걸 배신을 때려?]
[정말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야?]
[이건 나도 예상이 안 가는데.]
[그쪽에서 소식 나온 거 없어?]
[없어. 말 안 해준다던데.]
[아니, 왜?]
[그만큼 지금 GCW가 잘 뭉쳐있다는 거겠지. 거기 지금 좀 이상해. 어떤 거대한 목표를 가지고 움직이는 하나의 생물체처럼 느껴져.]
[……그런 녀석들이 고심 끝에 내놓은 각본이 바로 이거다?]
[그렇지. 신의 배신.]
[반응이 엄청나던데.]
[주사위를 던진 셈이지.]
[아마 꽝이 나오지 않았나 싶은데. 대부분 신-셀 태그 팀은 이런 방식으로 찢어지는 게 오히려 독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
[전형적이긴 하지. 한 명의 배신으로 끝나는 태그 팀은.]
[……분명히 저번에 배신으로 끝나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
[근데 막상 보니 그러네. 충격적이긴 한데 이걸 어떻게 이끌고 나갈까가 좀 걱정이야. 짊어지지 않아도 됐을 리스크가 아닐까.]
거기까지 라디오를 들은 나는 그만 기가 차서 웃고 말았다.
그러자니 러셀이 라디오를 껐다. 나는 녀석을 잠시 돌아보았다.
“왜 잘 듣던 걸 꺼?”
“여기에나 집중해.”
“자, 다 됐어.”
시나가 뭔가를 가져왔다.
닭가슴살 샐러드였다.
애석하게도 프로 의식이 투철한 우리 셋은 이런 순간에도 이런 음식이나 먹어야 하는 것이었다.
아니, 시나는 아직까진 단순히 근육이 좋아 이러는 것 같지만.
어쨌든 우리는 방 안에 둘러 앉아 마지막 파티를 시작했다.
내가 챔피언이 된 뒤, 시나는 와이엇 패밀리의 일원으로 메인 쇼에 참여할 예정이다.
그리고 러셀의 재활은 캐나다 캘거리 앨버타에 위치한 ‘하트 던전’에서 이루어진다.
즉, 내내 사이가 좋았던 우리 셋은 이제 곧 있으면 당분간 떨어지게 된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이런 때도 필요한 법.
나는 오늘 밤을 이들과의 역겨운 우정을 다지는 데 쓰기로 했다.
서로의 육체를 보듬어주고 후려치는 역겨운 우정 말이다.
“자자, 이날을 위해서 몸에 좋은 비타민 음료도 사왔어. 먹자고.”
미래에 WWF 역사상 최고라 불리는 남자, 숀 시나.
“으, 난 그거 별로던데. 그냥 물이나 마실 테니까 좀 봐줘.”
재능은 있었으나 정치에 밀려 불운한 커리어를 보낸 러셀 하트.
이 둘과 함께 위로 올라간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나에게는 아직 몇 가지 패가 더 존재했고, 그걸 쓴다면 WWF 메인에서도 성공할 수 있을 터였다.
“시나, 메인 가서 쫄지 말고 여기서 배운 대로만 해.”
“……내가 뭘 배웠지?”
“프로레슬링.”
사실 시나는 아직도 좀 몸이 뻣뻣한 축에 속했다.
그럼에도 그는 기술의 모자람을 다른 개성으로 채웠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 센스 넘치는 마이크워크.
걱정할 필요는 없으리라.
“러셀도 재활 잘하고.”
“돌아오면 잘 부탁한다. 신.”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술……이라고 생각하며 비타민 음료를 마셨다. 참 더럽게도 맛이 없었다.
이들과의 ‘역겨운 우정’ 같다는 느낌이 드는 맛이었다.
러셀이 갑자기 여자 이야기를 시작해 나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갑자기 놈이 에보니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는 좀 당황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