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62화 (62/634)

62.

챔피언.

그것은 그 시점에서 단체의 얼굴이 되는 선수를 뜻하는 말이다.

외부에서 인터뷰 제안이나 각종 광고, 대외 활동 따위에 가장 먼저 투입되는 것이 챔피언이었다.

그렇기에 나 역시도 얼마 지나지 않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을 소화하게 되었다.

하지만 프로레슬러의 대외 활동은 일반적인 스포츠 스타와는 사뭇 다른 것이 특징이었다.

제일 먼저 시구식.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야구장에 도착한 뒤 우리는 곧장 그쪽 관계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시구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나와 함께 온 바쿠는 밝은 미소로 관계자들을 상대했다. 평소 GCW에서의 쿨하던 모습과는 전혀 달라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알던 바쿠가 맞아요?”

“……시끄러워, 인마. 너도 좀 빠릿빠릿하게 인사해서 좋은 인상도 남기고 좀 그래. 그래야 다음에 시구할 때도 불러주고 그러지.”

“선수 관리하시면서 외부 활동도 도맡으시려면 힘들겠어요.”

“별수 있겠냐. 할리는 귀가 안 들려서 못 하겠다는데. 죽어가고 있는 영감탱이한테 뭘 더 바라겠냐.”

“어, 아직 정정하신 게…….”

“말이 그렇단 거다.”

나중에 슬쩍 말해줘야겠군.

사악한 생각을 떠올린 나는 그대로 시구를 한 뒤 환호하는 팬들에게 손을 흔들어 답해주었다.

이런 건 평범한 일정이었다.

TV에 한 번이라도 더 나와서 GCW를 홍보하려는 것이다.

반면, 프로레슬러를 ‘평범하지 않게’ 만드는 일정이 존재했다.

바로 토크쇼 출연이었다.

지역 방송국에서 방영되는 롱-나잇 쇼라는 이름의 프로그램.

거기에 호스트로 초대된 나는 ‘케이페이브’를 지켜도 좋다는 관계자들의 말에 따라 행동했다.

말하자면 그곳에는 프로레슬링 안의 ‘신’으로서 갔다는 뜻이었다.

……솔직히 링 밖에서까지 연기를 하는 건 좀 창피했지만 뭐 어쩌겠는가. 난 프로레슬러인 것을.

아늑하게 꾸며진 스튜디오.

롱-나잇 쇼의 진행자인 제이미가 던져오는 질문에, 나는 케이페이브를 지킨 채 대답을 이어나갔다.

“그래서 신, 프로레슬러로서 일하는 게 힘들진 않은가요?”

“물론 힘들긴 하죠. 하지만 즐거운 일이라서 버티고 있어요.”

“호오, 당신 같은 나쁜 남자에게도 노동의 가치는 소중한가요?”

“그럼요. 노동이란 숭고하죠. 그리고 저 같은 사람들이 해야 하는 노동은 바로 자기 자신의 가치를 계속해서 증명하는 것이고요.”

“가치를?”

“예, 밤마다 링 위로 나가 마음에 안 드는 개자식들을 두들겨 패는 게 바로 저의 노동이죠.”

“그게 노동인가요? 단순히 폭력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니죠. 제이미. GCW의 멍청이들은 저만 못하지만 그래도 매일같이 싸워서 이기기 위해 ‘쇠질’을 하는 멍청이들이라고요.”

“확실히, 프로레슬러들은 그리스 조각상 같은 몸을 가지고 있죠.”

“그런 놈들을 압도적으로 두들겨 패기 위해 만든 이 몸을 보세요.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고요.”

나는 관객석에서 표정이 굳어진 중년 여성을 손으로 가리켰다.

“거기, 예쁜이.”

아무래도 그녀는 이 모든 상황이 ‘진짜’라고 받아들이는 듯했다.

재밌으니 좀 더 놀려주자.

“나도 내가 섹시하단 건 알아. 하지만 옆에 있는 앵커도 그 예쁜 눈으로 한번 봐주지 그래?”

……그런데 왜 뺨이 붉어지는 걸까. 그리고 왜 갑자기 가방 안에서 파운데이션을 꺼내시는 거고.

순간 당황했던 나는 표정을 다시 거만하게 유지하며 앵커, 제이미를 돌아보았다.

“어쨌든, 심의가 있어 여기서는 공개할 수 없지만. 당신도 300달러 티켓을 산다면 이 멋진 근육을 마음껏 요리할 수 있을 거예요.”

“신, 조금 위험한 발언이…….”

“아, 물론. 눈으로만 요리하는 거죠. 만지는 건 추가금이 붙고.”

제이미가 한숨을 내쉬었다.

당연히 이 모든 건 연기였다.

우리는 쇼의 진행에 앞서 어떻게 대화를 주고받을지 각본을 짰다. 나만 이런 게 아니라, 롱-나잇 쇼 자체도 원래부터 각본에 따랐다.

결국 방송은 모두 가짜였다.

대놓고 이런 말은 좀 그런가?

모두 짜고 치는 일종의 연극이었다.

걸을 때 왼발부터냐 오른발부터냐, 그것마저 정해놓는 것이 미국 방송계였다. 단지 시청자들이 보고 싶어 하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현재는 보여주려는 것이 ‘신을 연기하는 김준호’라는 남자가 아닐 뿐이다. 나는 그 니즈에 맞춰주어 그들 앞에서 ‘신’을 연기했다.

이런 현상은 06년에서 07년까지는 지속됐다. 이후 프로레슬링의 캐릭터는 과장을 줄이고 선수를 담는 방향으로 발전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케이페이브는 점점 희미해져갔다.

그렇게 롱-나잇 쇼에서 한껏 자기 자신에게 취한 악역 캐릭터를 보여주고 회사로 돌아왔다.

일이 끝났음을 보고하기 위해 할리에게 갔더니, 무척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뭔가 싶어 물었더니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대답했다.

“방송국에 시청자 항의가 엄청 왔다고 하더라. 어떻게 그딴 거만한 놈을 섭외할 수 있냐면서.”

이로써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게 증명되었다.

봐봐. 믿잖아?

* * *

나는 GCW 챔피언으로서 수많은 대외적 활동을 하며 단체에 대한 홍보를 이어나갔다.

그 과정에서 따로 받는 돈도 많아졌고, 딱히 쓸 곳도 없어 그냥 부모님께 보내두고자 했다.

그래서 일단 오래간만에 소식이라도 알려드릴 겸 훈련장에 들어가기 전에 핸드폰을 들었다.

뚜루루, 뚜루루.

정겨운 통화 연결음과 함께 철컥, 하고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연락 마라.]

아니, 아버지였다.

“……? 아버지?”

[요새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냐. 네 이야기가 어떻게 여기까지 들려올 수가 있지?]

‘뭐지?’

잠시 당황해 말을 잇질 못했다.

그러자니 반대편에서 툭탁툭탁 다투는 소리가 잠깐 이어지더니 다른 사람이 전화를 받았다.

[아드을~.]

“어, 엄마. 내가 두 분 좋은 거 좀 드시라고 용돈이나…….”

[요새 뭐 안 좋은 일 있어?]

“아, 아니? 없는데.”

오히려 좋은 일이 많이 생겼다.

[우리 아들, 엄마가 바깥에서 나쁜 짓 하지 말라고 했지? 총도 먼저 쏘는 게 아니라 맞고 난 다음에 쏴야 된다고 했잖아~.]

“…….”

그럼 죽지 않나.

[러셀인가 걔는 왜 때렸어?]

“예?”

[이씨네 아들 상원이 알지? 그 좀 모자란 애. 걔가 와서 막 울더라고. 왜 러셀을 배신했냐고.]

“……아니, 엄마.”

[그 친구랑 싸웠으면 화해해야지. 힘들면 엄마가 같이 가줄까? 걔네 엄마도 나올 수 있대?]

캐나다를 가시려고요?

나는 황망해져 잠시 엄마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듣기만 했다.

그러다가 보니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아무리 그래도 엄마의 걱정을 받게 되다니. 아버지 역시 딱히 말씀은 없으셔도 내가 바깥에서 허튼 짓하고 다니지 않나 고민하셨겠지.

‘돈은 나중에 몰래 보내야겠군.’

그렇게 생각한 나는 적당히 엄마의 말을 들어준 뒤, 대답했다.

“걱정 마세요. 엄마. 어디 가서 엄마 아들로서 부끄럽지 않을 행동을 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통화를 마친 나는 셔츠를 챙겨 입고 훈련장으로 향했다.

링 위와 주변에서 연습에 매진하던 선수들이 날 돌아보았다.

“어, 왔냐.”

“신!”

“미안한데 이것 좀 도와주라!”

선수들의 환영을 받으며 훈련을 시작한 나는 셰무스와 파트너가 되어 가볍게 몸을 풀었다.

프로레슬링은 한 번의 실수로 죽거나 불구가 될 수도 있는 위험한 스포츠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감각이 느슨해지지 않게 갈아주는 것이 중요했다.

우리는 매일 각종 기초를 연습하고 기술을 연마했다.

그렇게 약 한 시간.

“후우, 좀 쉴까?”

“그러시죠.”

적당히 땀을 뺀 셰무스와 나는 의자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러자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쿠가 훈련장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지?”

“글쎄요.”

“또 너한테 어떻게 하고 싶은지 물어보러 온 거 아니야?”

“……설마 그러겠어요.”

그리고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바쿠가 날 발견하고는 웃으며 다가왔다.

의견을 내고 싶었던 건 사실이었지만 바쿠가 당연하다는 듯 날 찾아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선수가 각본에 끼어드는 건 어쨌든 월권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최대한 조심해서 회의에 참석했던 건데.’

이제는 다 알고 있군.

그런데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사실이 뭔가 좀 신기했다.

같은 상황에서 트리플H가 이랬다면 아마 그렉 하트 같은 사람이 가만히 있지 않았을 텐데.

다들 날 믿어주고 있다는 반증 같아서 좀 책임감을 느꼈다.

“신, 안 오고 뭐하냐.”

“……어디를요?”

“당연히 회의지.”

바쿠 역시도 당연하다는 태도였다. 나는 슬그머니 선수들의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을 갈아입고 사무실로 향하는 동안 대체 뭔가 싶어 물었다.

“이야기가 막히기라도 했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다른 선수들 앞에서 노골적으로…….”

“뭐, 이제 반쯤 널 대장으로 인정하는 분위기니 괜찮을 거다.”

“대장은 바비 선배죠.”

“그 바비가 너에 대해 칭찬하는 걸 들으면 생각이 달라질 거다.”

“뭐라고 하시는데요?”

“여자였으면 어떻게든 속여서 결혼했을 거라고 하던데.”

“……위험한 발언이군요.”

“결혼은 결국 속고 속이는 거니까 그런 말을 한 거겠지.”

“끄응.”

이거 참, 그냥 납득하고 넘어가야 하나. 여러모로 당황스럽다.

챔피언이 된 이후로 다들 날 이곳의 왕으로 인정한 것 같았다.

좀 부끄러웠지만, 기분이 좋은 것 또한 사실이기는 했다.

“그래서, 회의는 어떻습니까?”

“……괜찮은 아이디어는 여러 개 나왔는데. 아무래도 본인 의견을 수용하는 게 가장 좋겠다는 의견이 대세라서 말이다.”

“제 의견이요?”

“다음 대립 상대에 관해서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와이엇과의 경기에서 몸을 험하게 써서 요 몇 주간 경기는 갖지 않고 세그먼트만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냐?”

“……결과는요?”

“물론 네가 지키지.”

“러셀이 돌아올 때는요?”

“다다음 페이퍼뷰쯤에는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다더구나.”

“12월 페이퍼뷰군요.”

“뭔가 좀 떠올랐냐?

“예, 뭐…… 이게 과연 통할까, 사실 잘 모르겠습니다만.”

“통할 거다. 네가 지금껏 내놓은 아이디어가 안 먹힌 게 있었냐?”

“없었죠.”

“그래, 이번에도 좋은 아이디어를 내주리라고 믿는다.”

그렇게 말한 바쿠는 나를 데리고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러자 상석에 있던 할리가 날 반겨주었다.

“왔군.”

“찾으셨다고요.”

“그래. 네 대립 상대에 관해서 말인데, 일단 화이트보드에 써놓은 아이디어를 한번 봐주겠나?”

그 말에 고개를 돌린 나는 보드판 위의 이름들을 확인했다.

바비 애슐리.

셰무스.

칼리스타.

이렇게 세 사람이었다.

그러자니 할리부터 시작해 팀장 몇몇이 설명을 시작했다.

“바비는 너도 알다시피 우리 메인 이벤터지. 러셀을 배신한 걸 빌미로 대립하면 어떨까 싶다.”

“셰무스는 당신하고 비슷한 상황이죠. 와이엇에게 당하기 전에 당신에게 당했고, 그 복수를 하고 싶어 한다는 건 어떨까요?”

“칼리스타는 태그 팀이지만 솔로 경기력도 좋고 너와 합도 잘 맞을 것 같아서 뽑아봤다.”

모두들 괜찮은 대립을 뽑을 수 있을 것 같은 선수들이었다.

자연스레 그림이 그려졌다.

바비는 힘으로 날 압도할 테고, 셰무스 역시도 그렇겠지. 칼리스타와는 기술을 겨룰 테고 말이다.

“물론, 각자 약점 역시 명백한 만큼 네가 잘 이끌어줬으면 한다.”

“약점이요?”

“바비는 캐릭터가 좀 밋밋하고, 셰무스는 아무래도 요새 반응이 좀 죽었지. 칼리스타는 마이크워크가 좀 부족하고 말이다.”

“…….”

너무 맞는 말이라서 차마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고민하며 서있는 날 보고 할리는 재촉하듯 물었다.

“그래서, 네 생각은 어떠냐?”

“어…….”

사실 이걸 보자마자 아이디어가 두 개가 되었다.

“두 명을 꼽겠다고?”

“예, 이중에 둘은 아니고요. 다른 사람을 지목하고 싶은데.”

“허어, 봐둔 선수가 있다고?”

“누구냐? 그게.”

“분명, 이 프로레슬링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겠죠.”

내 말에 바쿠가 깜짝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할리 레이시입니다.”

하지만 이어 시무룩해졌다.

“……뭐?”

그와는 별개로 할리를 비롯한 사람들은 모두가 경악해 말을 잇지 못했지만 말이다.

할리 레이시.

슬슬 실버타운에서 영입(?)을 고려하고 있는 노년의 사나이.

그와의 대결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첫 번째 아이디어였다.

그래, 맞다.

60대의 노인과의 대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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