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64화 (64/634)

64.

일반적인 인식으로 볼 때, 프로스포츠 선수는 20대 초중반에 데뷔 후 10년가량 커리어를 이어나간 뒤 은퇴한다고 여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시점이 한 인간의 운동 능력이 최대로 발휘되고 꺾이기 시작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생은 그보다 길다.

그에 비하자면 선수로 뛸 수 있는 기간은 극히 짧은 것이다.

아무리 대단한 선수라도 노쇠로 인한 능력의 하락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 스포츠의 세계였다.

하지만 프로레슬링은 달랐다.

물론, 우리는 일반적인 스포츠가 아닌 스포츠 엔터테인먼트다. 스포츠의 형식을 빌려와서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뿐이다.

그렇기에 다른 스포츠에 비교해서 선수 생활이 훨씬 더 길었다.

심지어 인디 단체에서는 60이 넘은 노인 선수가 있을 정도였다.

대부분은 노후 자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뛰는 그런 비참한 경우였지만.

어쨌거나.

할리의 경우에도 선수 시절 몸을 그렇게까지 혹사한 편은 아니라 한 경기 정도는 가능했다.

물론 내가 페이퍼뷰에서 했던 위험한 접수는 할 수 없겠지만.

‘할리가 경기에 나선다면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은 즐거워하겠지.’

오랜 옛날 은퇴한 전설이 자신의 명예를 위해 다시 일어선다. 누구든 좋아할 만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적절하게 쓸 만한 시기가 바로 지금이었다.

내가 세 사람으로부터 챔피언을 방어한지 며칠이 지난 오늘.

각본 상 ‘몸이 덜 회복된 상태’에서 링 위에 오른 나는 벨트를 높이 들며 이렇게 외쳤다.

“또 누가 있지?!”

야유와 환호가 뒤섞였다.

단순히 각본만으로 봤을 때 나는 이 쇼를 지배하는 악당이었다.

하지만 때로는 악인을 좋아하는 사람 또한 존재하는 법이었다. 나처럼 강한 악역은 더 그러했다.

거기에 나는 언더독이었다.

나와 같은 피부색을 가진, 혹은 자기 자신이 패배자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나에게 환호를 보냈다.

그런 상반된 양상이 충돌하며 내 반응은 점차 크게 상승했다.

메인 쇼의 웬만한 선수도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자신감이 넘치는 걸 느끼며 입을 열었다.

“또 누가 내게 도전할 텐가?!”

나는 고대 로마의 웅변가와도 같이 웅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가 이 벨트를 원하고 덤벼들었지만 누구도 가져가지 못했지! 나는 매주 덤벼오는 머저리들에게서 모조리 쓰리 카운트를 따냈어!”

관객들의 격렬한 반응을 보냈다. 나는 입장로 위를 돌아보았다.

“그래서 또 누가 있지?! 누구든 나와서 한번 덤벼보라고!”

하지만 나오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긴, 누가 나오겠어. 게다가, 아쉽지만 나도 오늘은 싸울 컨디션이 아니라서 말이야. 다들 표 값 써서 왔는데 미안하게 됐네. 내 얼굴이나 실컷 보라고.”

관객들이 야유를 보냈다.

대부분 챔피언의 경기를 기대하고 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일부러 그것을 낄낄대며 비웃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촌스러운(?) 음악이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너도 나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음악의 주인이자, 전설을 맞이하기 위해서였다.

할리 레이시.

자신의 음악에 맞춰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그가 나왔다.

몸은 한 달 전에 비해 그다지 나아진 게 없었다. 하지만 감각을 되살렸다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며 훈련에 매진한 할리는 이제 경기를 소화할 수 있을 정도였다.

나와 할리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무언의 인사를 나누었다.

그가 마이크를 쥐었다.

“이거 원, GCW 역사상 이렇게 거만한 챔피언은 처음이로군.”

“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오늘 오픈 챌린지에 참여할 선수를 말해주고 싶어서 말이야.”

“……방금 말하지 않았어?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쉴까 하는데.”

“평소 하던 강한 척과는 상반되는군. 그래서야 아무도 네가 챔피언임을 인정하지 않을 거다.”

“뭐……?”

“가장 어려운 순간에도 버텨내는 게 챔피언이지. 너처럼 역겨운 수를 써가면서 이기는 게 아니라.”

“역겹다고? 내가?”

“그래, 내 말이 틀렸나?”

“그렇다면 이런 나에게 패배한 놈들은 대체 뭐가 되는 거지?”

“그런 더러운 수를 써서 승리한 거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나?”

나는 대답하는 대신 깊은 도발을 담아 챔피언 벨트를 가리켰다. 할리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꼬마야. 그런 건 허상이다.”

“노인네. 그럼 뭐가 실상이지?”

“바로 이들이지.”

할리는 우리의 대화를 숨 죽여 듣고 있는 관객들을 가리켰다.

“이들이 없으면 우리도 없어. 이들의 존중만이 가치를 지니지.”

전형적인 선역의 마이크워크였다. 하지만 할리가 말하자 그것은 포스가 완전히 달랐다.

[halley! halley! halley! halley!]

노도와 같은 할리 챈트.

하지만 난 그 말을 비웃었다.

“당신 같은 사람이야 그렇게 생각하겠지. 남부 비주류를 자처하면서도 실상은 언제나 탑으로서 군림했던 당신이라면 말이야.”

그렇기에 그는 이 미국이라는 나라를 드림 랜드라고 표현했다.

자신이 원한다면 정정당당하게 싸워 꿈을 쟁취할 수 있는 나라.

내 생각과는 정반대였다.

표정이 굳어지는 걸 느꼈다.

나는 더듬거리며 입을 여는 할리를 노려보았다.

“……넌 언젠가 분명 벨트를 빼앗길 거다. 하지만 그 뒤에는 아무런 존중도 받지 못하게 되겠지.”

“사람 하나 경기시키려고 뭔 말이 그렇게 많나…… 싶기는 한데. 뭐, 좋아. 어울려주지, 할리.”

나는 위협하듯 다가섰다.

“누구야?”

할리는 로프 쪽으로 밀려났다. 아무리 그래도 현역 챔피언에게 당해낼 나이는 아니었다.

모두가 그런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와중 할리가 말했다.

“……전前 챔피언이다.”

“뭐?”

“30년 전이지만!”

버럭 소리친 할리가 내 얼굴을 세차게 후려쳤다. 나는 일부러 과장된 동작을 취하며 굴렀다.

순간 놀랐다는 듯 링 아래로 내려간 나는 링 위에서 어깨를 펼치고 있는 할리를 올려다보았다.

“바로 나다! 이 애송이 자식!”

관객들이 엄청난 환호를 보냈다.

역시 굉장한 카리스마였다.

* * *

오늘 쇼의 주인공은 할리였다.

무려 30년 만의 귀환.

까마득하게 먼 과거에 은퇴한 그가 하룻밤의 경기를 가지게 되었다.

건방진 챔피언에게 명예란 무엇인지 가르쳐주기 위해서였다.

노구를 이끌고 나선 그에게 사람들이 열광한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할리는 이어진 백스테이지 프로모에서 자신이 경기를 갖기로 한 이유를 확실히 밝혔다.

[늙은 건 견딜 수 있어.]

현역 시절처럼 어깨에 큰 수건을 두른 그는 이미 경기에 나설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이 짙게 패인 주름살은 오히려 노년의 가장 큰 친구지. 하지만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견딜 수 없는 게 한 가지 있어. 뭔지 아나?]

[글쎄요. 뭔가요?]

[모욕이다.]

할리는 이를 빠득 갈았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치가 있지. 바로 뺨을 맞았으면 되갚아줘야 한다는 거다!]

과장된 액션을 구사하는 게 좀 구시대적인 스타일이었지만 관객들의 반응은 무척이나 좋았다.

즉, 내게 완전한 야유가 쏟아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Booooooooooooo!]

예전에는 줄곧 무시했던 나도 지금은 일부러 야유에 격한 거부 반응을 보이며 입장했다.

지금 처한 경기가 꽤나 부담스럽다는 뜻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관객들은 그런 나를 놀려대는 의미에서 더 큰 야유로 화답했다.

그리고 다음.

할리의 음악이 경기장 안에 울려 퍼지자, 나는 마치 70년대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꼈다.

‘와, 이거…….’

순간 정신을 놓으면 박수를 칠 것만 같았다. 내가 그 시대의 인물은 아니었지만 감동적이었다.

그 시대의 검은 팬츠를 입고 나와 포효하는 할리.

배는 나오고 살이 늘어졌지만, 그래도…… 멋졌다.

관객들의 환호가 이어졌고, 할리는 옛 시절 자신의 시대를 다시 느끼며 링 위로 올라왔다.

경기는 금방 시작되었다.

나는 먼저 힘으로 밀어붙여 경기를 재빨리 끝내고자 했다.

어차피 힘없는 노인이다.

그런데 웬걸?

할리의 힘이 생각보다 강했다.

물론 연기였지만, 그 반전을 할리의 스타일대로 과장해 보여주자 관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You Still Got It!]

‘당신은 아직 가지고 있다.’

관객들이 보내는 찬사였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비겁하게 할리를 공격해 야유를 자아냈다.

그렇게 공격을 이어가던 나는 비틀거리며 로프에 기대어 섰다.

페이퍼뷰의 상처가 쑤셔서 한 행동이었고, 할리는 그걸 놓치지 않고 공세로 전환했다.

[Yes! Yes! Yes! Yes! Yes!]

달려든 그가 주먹을 날릴 때마다 관객들이 힘차게 소리쳤다.

그것을 들은 나는 할리의 공격에 밀려나며 반격을 시도했다.

다시금 Boo!와 Yeah!가 번갈아 이어지며 분위기가 끓어올랐다.

우리는 계속 해머링을 주고받았다.

거기에서 나는 할리가 아직 ‘살아있음’을 말하기 위해 일부러 좀 더 크게 비틀거렸다.

신이 난 할리가 주먹을 휘둘렀다. 그것을 맞아준 나는 생각했다.

‘거 더럽게 아프네.’

할리는 진짜로 주먹을 날렸다.

물론 해머링인 만큼 끝을 긁는 정도에서 그쳤지만……. 그래도 한마디 해줄까 싶다가 관뒀다.

할리는 울기 직전이었다.

링 위에서 다시 한 번 경기를 뛰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보였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스포츠 선수에게 제2의 인생이 있다고는 해도, 가장 큰 꿈은 물론 지금 이 역할이었을 거다.

나도 그랬다.

백스테이지 팀에서 일하면서 어떻게든 업계에서 제2의 인생을 살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어딘가 계속 공허한 기분이 들었다.

할리 역시도 그럴 터였다.

아니, 그는 오히려 슈퍼스타였던 만큼 더 큰 갈증을 느꼈겠지.

오늘 이 하루가 그것을 채워줄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지금 이 각본은 반응도 어마어마하게 좋았으니 말이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시기적으로도 적절했고, 이후의 반응을 끌어올리기에도 좋았다.

나는 할리의 속도에 맞춰 경기를 계속해서 이끌어 나갔다.

그의 선수 시절 피니시 무브를 맞아주기도 하면서 관객들의 반응을 최고조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 순간, 내 무릎이 할리의 턱에 명중했다.

쩌억-

찰진 소리와 함께 쓰러지는 할리. 나는 곧바로 커버를 이었다.

1, 2, 3.

“고생 많았어요. 할리.”

짧은 귓속말과 함께 공이 세 번 울렸다. 나는 곧바로 안색을 굳히며 할리의 위에서 떨어졌다.

일부러 숨을 몰아쉬며 상대가 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할리에 대한 나름의 예의였다.

그리고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신, 3분 남았어.”

시간을 확인한 심판이 다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는 벨트를 건네받고 곧장 뒤로 돌아섰다.

생각보다 시간을 지체했다.

하지만 괜찮았다.

나는 일부러 짜증을 잔뜩 부리며 밑으로 내려왔다. 침을 뱉고, 심지어 관객들과 말싸움도 했다.

“네가 졌어! 신!”

“넌 쓰레기야!”

“닥쳐!”

그렇게 비참한 피로스의 승리를 맞이한 나는 관객들의 야유 속에서 퇴장하려다 이내 돌아섰다.

그리고 다시 링 위로 올라가 쓰러진 할리를 무참히 짓밟았다.

“어억! 크헉!”

……역시 좀 올드한 연기다.

하지만 관객들은 야유를 보냈다.

[Booooooooooooo!]

내 음악이 꺼지고 그만두라는 듯 링 벨이 세차게 울려 퍼졌다.

물론 분에 못 이긴 나는 그런 건 안중에도 없이 할리를 마구잡이로 패며 분풀이를 해댔다.

사람들의 야유는 점점 커졌다.

혼란스러운 와중, 나는 머릿속으로 숫자를 세며 최대한 계산에 맞춰 위치로 할리를 끌고 갔다.

30초가 지났다.

‘슬슬 해야겠군.’

그렇게 생각한 나는 할리를 링 포스트로 데려간 뒤 철제 기둥 앞에 양다리를 벌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링 아래로 내려가 두 다리를 잡고 당겨 사타구니를 철제 기둥에 부딪히게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윽……?!”

누군가 내 머리를 세차게 움켜쥐었다. 뒤를 돌아본 나는 그대로 끌려가 주먹에 얻어맞았다.

미지의 습격자.

후드를 뒤집어쓴 건장한 사내가 바리게이트를 넘어 무대로 들어왔다. 뒤로 물러선 나는 믿을 수 없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관객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안 되겠다 싶어 반격을 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다가온 사내의 매운 주먹에 얻어맞은 나는 몸을 피하기 위해 링 위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는 링 위까지 따라 올라왔다. 나는 겁에 질린 채 사내를 피해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입장로 쪽으로 도망치며 믿을 수 없단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벨트도 주섬주섬 주워들고.

숨을 몰아쉬던 사내가 후드를 벗은 순간, 열화와 같은 환호성이 남자를 향해서 내리꽂혔다.

러셀 하트.

그가 부상으로부터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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