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66화 (66/634)

66.

스틸 케이지 매치.

범프 링 주변에 천장이 뚫린 철창을 설치해 벌이는 경기였다.

룰은 일반적인 경기와 똑같았지만 특수 룰이 하나 추가되었다.

케이지에서 탈출해 바닥에 양발이 먼저 닿는 사람이 승리한다.

물론 기본적인 핀 폴, 서브 미션 승리도 가능했지만……. 물론 그렇게 이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경기에서만 쓰이는 방식을 활용하는 게 다양성 측면에서 좋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러셀과 나는 일부러 그런 요소를 배재할 생각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케이지 매치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을 좀 더 드러낼 수 있겠지.”

“확실히 그렇겠어.”

러셀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지 매치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에서 근거하듯, ‘도망칠 수 없다’라는 이미지가 무척 강했다.

그렇기에 격렬한 대립을 끝내기 위해 사용되는 경기 방식이었다.

거기다 안에 들어간 러셀과 내가 서로 빠져나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계속해서 싸운다면?

‘좋은 그림이 나오겠지.’

그런 식으로 경기의 틀을 잡은 러셀과 나는 각본 회의에도 참가하면서 대립을 준비해나갔다.

허나 그로부터 며칠 뒤.

우리의 대립은 생각과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프로모 촬영일.

러셀과 한 시간이 넘게 눈을 마주치느라 지쳐있던 내 앞에 심각한 표정의 바쿠가 나타났다.

안 그래도 조명이 번쩍번쩍한 방에 있는데 험악한 그의 인상은 더 낯빛이 좋지 못했다.

“무슨 일 있어요?”

“……위에서 연락이 왔다.”

“대통령 표창이라도 준대요?”

내가 너무 잘해서 말이다.

“너와 러셀의 경기를 11월의 메인 페이퍼뷰에서 열자더군.”

“허.”

기가 차 웃음이 나왔다.

“완전히 묻어버리려는 거네요.”

“역시, 좋은 기회는 아니겠지.”

“그럼요. GCW에서 잘 하고 있는 저희 두 사람을 갑자기 메인으로 불러서 경기를 시키다니.”

이해가 가질 않는 일이었다.

분명 헌터의 짓이겠지.

그렇게 생각하자니 그가 어떤 식으로 말했는지가 대충 보였다.

[그 두 사람을 페이퍼뷰에 참가시키죠. 주목도도 있고 하니 판매량에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하지만 속으로는 분명 우리 둘의 대립을 어떻게든 조지고 싶어서 안달이 났을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갑자기 이런 제안을 해올 리가 만무했으니.

‘독이 든 성배다.’

나는 그런 결론을 내렸다.

메인 페이퍼뷰에서의 시합. 큰 리스크를 가지고 간다는 뜻이었다.

“일단, 무슨 페이퍼뷰죠?”

“네버 이스케이프다.”

“어째 저희 상황과 같네요.”

프로레슬러들에게 있어 꿈의 무대라고 할 수 있는 페이퍼뷰인 ‘레슬 임페리움’ 바로 전이었다.

‘분명 이 시점이 대충 트리플H의 집권기가 시작될 무렵이지.’

나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 뒤로 꾸준히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하는 시청률이 딱 비탈길 앞에 서있는 시점이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에 빠진 그때, 바쿠가 입을 열었다.

“헌터의 챔피언십 경기가 메인이라고 하던데 말이다. 괜찮을지.”

“그건 괜찮을 겁니다.”

“그래?”

“제가 더 잘하니까요.”

“짜식이…….”

사실이다.

난 최고다.

하지만.

“문제는 반응이죠.”

관객들의 과연 호의적일까?

WWF의 메인 쇼는 미국을 포함한 백여 국을 대상으로 삼았다.

개중에는 부모님의 고향인 한국 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거기 사람들이라면 나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외의 대부분은 동양인 하나가 챔피언이랍시고 나오면 ‘저게 뭐다냐?’ 할 게 분명했다.

러셀은 그 유명한 ‘하트 패밀리’의 일원이라 어느 정도 호의적인 반응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GCW에서 쌓아올렸던 서사는 쓸 수 없다는 말이다.

페이퍼뷰의 관객들은 우리를 알지 못할 테니 경기를 그저 평범한 챔피언전이라고 생각하겠지.

‘물론 우리도 나름대로 꾸준히 인지도를 쌓아올리긴 했는데.’

그게 관중의 대다수일까?

아니겠지.

하지만 내가 원하는 건 관객들이 미쳐 방방 뛰다가 바닥이 무너져 다 죽을 정도의 광란이었다.

하지만 헌터는 그것을 의도적으로 막을 속셈인 모양이었다.

‘받았으니 갚아주겠단 거군.’

그다운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왠지 헌터의 제안에 강렬한 유혹을 느끼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메인에 올라갈 테니까.

그렇기 때문에 일이 잘 풀린다면 그전에 GCW에 좀 더 도움을 주고 갈 수 있게 될 터였다.

그때쯤 하여 옷을 갈아입기 위해 잠시 방에 들어가 있던 러셀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쿠, 무슨 일이에요?”

“아, 그게 말이다.”

“메인에서 연락이 왔어. 네버 이스케이프에서 경기를 하라는데.”

내가 가로채며 한 설명을 들은 러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리 둘이?”

“그래.”

“챔피언십?”

“맞아, 네 생각은 어때?”

“엿이나 먹으라는 말이군.”

러셀의 반응은 좋지 못했다.

“그게 말이나 돼? 갑자기 나와서 경기를 하라고? 우리 이야기는 하나도 안 해주고 갑자기?”

“아, 그게 말이다.”

바쿠가 뺨을 긁적였다.

“네버 이스케이프까지 메인 쇼에서 대립을 시켜주겠다는구나.”

“그게 끝이에요?”

“그래. 설마 너…….”

“할 셈이야?”

“조건이 맞으면요.”

같은 한 달이라고 한다면 메인 쇼에서 대립을 진행해도 되겠지.

어차피 우리의 대립은 ‘시간’이 꽤 지난 일인 만큼, 관객들에게 다시 한 번 대립에 관해서 설명해나갈 예정이었다.

거기에 자기소개가 좀 곁들여지는 정도면 반응이 나오리라.

하트 패밀리의 도련님.

그리고 GCW 챔피언.

이전의 슈퍼 태그 팀.

이 두 조합이라면 말이다.

‘문제는 우리가 얌전히 대립을 진행할 수가 있겠냐는 건데.’

과연 세 시간의 메인 쇼에서 우리 시간을 얼마나 할당받을 수 있을까?

헌터가 직접 방해 공작을 지시하고 있는 것 같은데 말이다.

‘여기서는 일단 받아쳐볼까.’

나는 천천히 정리한 생각을 두 사람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일단 우리 각본에 개입하지 말 것. 세그먼트 시간은 매 쇼마다 최소 15분 이상 할애해줄 것.”

“과연 그 조건을…….”

“더 있어요.”

두 사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두 사람의 경기를 계속 ‘케이지 매치’로 유지해줄 것.”

그리고 마지막.

“메인에서 뛰고 있는 선수 몇몇이 우리의 대립을 도와줄 것.”

“……꽤나 많구나.”

“이렇게 네 개입니다.”

아마 이상의 조건들이 갖춰진다면 괜찮은 성과를 낼 수 있겠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그 말을 들은 바쿠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일단 그쪽에 우리 의사를 타진해보도록 하마.”

이제는 아예 무슨 이유로 이러는 건지도 물어보지도 않았다.

‘좋은 생각이라고 믿는 건가.’

아니면 너무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여기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한번 걸어볼 만했다.

정말로 메인 쇼에서 방해를 최소화한 채 경기를 펼칠 수 있다면, 분명 그만한 무대는 달리 없으니.

* * *

분명히 내가 메인 쇼에 요청한 조건은 비상식적인 수준이었다.

그쪽의 메인 이벤터면 몰라도 나 같은 산하 단체의 챔피언이 요구할 만한 사항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어쩌면 될 수도 있겠지.’

아니, 아마 내가 하는 예상 그대로 흘러간다면 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이야기하자 바쿠며 할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지만.

무릇 초콜릿 상자를 열어보기 전에는 내용물을 알 수 없는 법.

그리고 도착한 상자를 열었을 때, 그 안에는 희망이 들어있었다.

우리가 판도라는 아니지만.

메인 쇼에서는 우리가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였다. 그것을 본 모든 사람의 어안이 벙벙해졌다.

경악이 이어지는 와중,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러셀이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죠?”

“대체 왜……?”

“너 무슨 마법을 부린 거냐?”

“저 마법사 아니에요.”

할리가 의심스러운 눈으로 돌아보자 나는 쓰게 웃었다.

단지 미래에 벌어질 일을 약간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게 마법으로 보인다면 어쩔 수 없지만.

‘역시 그렇게 됐군.’

시기적으로 보자면 지금 메인의 권력자 중 우리에게 흥미를 가질 만한 사람이 한 명 존재했다.

바로 티파니 맥센이었다.

아마 그녀의 입김이 작용해 조건이 받아들여진 것이겠지.

* * *

스탬포드 코네티컷.

아침부터 WWF 본사의 대형 회의실에 모인 임원들은 커피며 각종 주스를 즐기는 중이었다.

프로레슬링 회사인 WWF는 크게 두 가지 팀으로 나뉘었다.

본사에서 근무하며 회사를 분석하고 방향을 정하는 사업팀과 전 세계를 돌며 계속해서 쇼를 진행하는 현장팀이 바로 그러했다.

이중 오늘 자리에 모인 것은 바로 사업팀의 수뇌부들이었다.

그들은 회사의 전반적인 방향을 결정하고 각종 ‘사업’을 벌였다.

그런 그들이 오늘 이곳에 모인 이유는 바로 GCW 때문이었다.

사업팀의 헤드라고 할 수 있는 CEO 존 로이타스의 제안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회의실의 문이 열리며 로이타스와 그 비서가 안으로 들어왔다.

금발을 깔끔하게 빗어 넘긴 그 역시 프로레슬러 출신으로 이곳까지 올라온 입지전적인 사내였다.

그렉 하트보다 윗세대에서 활동했던 선수 시절에는 별 볼 일 없었지만, 그 때문에 일찍 은퇴했던 것이 전화위복으로 작용했다.

이제는 자신이 선수 시절 그토록 욕했던 ‘양복쟁이’가 된 그가 긴 테이블을 바라보며 앉았다.

“그 머저리들이 뭐랬다고?”

“……여기 제안서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거친 선수 시절을 보낸 그였다. 도무지 평범한 CEO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테이블 위로 파워 밤을 날린다던가 하는 행동은 물론 하지 않았지만.

불쾌함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종이뭉치를 건네받은 그는 보고받은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각본에는 개입하지 말 것.

15분 이상의 세그먼트 보장.

메인 스타 두 명의 각본 참가.

케이지 매치를 유지해줄 것.

그런 ‘건방진’ 요구를 읽어 내려간 로이타스는 이내 참지 못하고 종이뭉치를 번쩍 내던졌다.

“주제도 모르는 것들이……!”

회장인 바트 맥센과 그 일가를 제외하면 절대적인 파워를 가지고 있는 로이타스였다.

거기다 출신이 출신인 만큼 덩치도 좋은 그가 화를 내면 몇몇 임원들은 잔뜩 쫄게 되었다.

“당장 그 개자식들 전부 본사로 쳐오라고 해! 어딜 GCW 따위가 우리에게 요구를 하게 되었나!”

“그, 그게…….”

“뭐야?!”

“이들이 하는 요구 자체는 타당하지 않나 싶습니다만…….”

“뭐?!”

“최근 실적이 좋아서 한번 믿고 맡겨봄이 어떨까 싶습니다.”

“그쪽에서 오랜 시간 공들여온 각본을 빼다 쓰는 거지 않습니까? 어느 정도는 타협해야죠.”

“듣자니 그쪽 챔피언이 이 일로 굉장히 분개했다는데요?”

“챔피언? 그 신이라는 애송이?”

“예, 어떻게 메인 쇼에서 각본을 강탈해갈 수 있냐면서 말이죠.”

“강탈?”

로이는 황당한 듯 되물었다.

“메인 쇼에서 경기를 뛰게 해주는 것만 해도 감사하게 여겨야지. 어딜 산하 단체의 애송이가!”

분노한 그에게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임원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렇기에 그의 모순된 행보를 지적할 수 있는 이 또한 자리에 없었다.

존 로이타스가 네버 이스케이프에서 GCW 챔피언전을 벌이도록 주도한 이유는 실적 발표를 위함이었다.

WWF에서는 분기마다 한 번씩 주주총회를 가졌다. 허나 아직 원래 목표로 삼았던 수치에는 도달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것을 타파하기 위해 로이타스가 낸 아이디어가 이것이었다.

즉, 로이타스는 GCW 챔피언전이 확실히 실적에 도움이 되겠다고 여긴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비전 있는 요구를 하자 묵살하려고 들다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야 당연했다.

로이타스의 행동은 사실, 단순히 트리플H의 사주를 받은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 대가로 그는 현장팀에 있는 헌터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총애하는 선수들을 키우고 있었다.

이번에 헌터의 스테이블에 들어간 이들도 그의 레슬러들이었다.

문제는 그가 헌터의 의도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데서 기인했다.

그렇기에 그는 GCW의 이런 요구를 자기 선에서 쳐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로이. 이거 좀 놀라운데요?”

신이 예상하고 있던 사람이 흥미를 가지는 결과를 낳았다.

“뭐, 뭐?”

“시청률이 1년 만에 10프로가 넘게 올라? 아니, 20프로 가까이 됐네? 대체 무슨 마법을 부렸대요?”

“아니, 그…….”

“사업을 꽤나 적극적으로 벌였군요. 그런데 이거 하나하나가 다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어요.”

자료를 뒤적거리는 것은 이제 고작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금발을 하나로 묶은 그녀는 회의 자료로 나온 GCW의 실적 자료를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여성을 바라보는 로이타스의 표정이 비굴해졌다.

“아, 아가씨. 산하 단체일 뿐입니다. 딱히 신경 쓰실 건…….”

“그래도 이만한 성과를 메인에서 냈다고 가정하면 곧바로 주식이 수십 배는 뛰겠는데요.”

정론을 말하는 여성.

로이타스가 자신을 ‘아가씨’라는 이상한 단어로 언급하는데도 전혀 거리낌이 없는 모습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렇게 듣고 자랐기 때문에 당연했다. 그녀는 이 거대한 레슬링 왕국의 공주였으니까.

티파니 맥센.

슬하에 1남1녀를 둔 바트 맥센의 장녀이자, 오빠인 케인 맥센을 제치고 후계자에 근접했다고 여겨지는 인물.

아직 20대 초반의 대학생인 그녀는 이곳에서 로이타스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진 존재였다.

비록 실권은 없더라도 모두가 그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미래의 회장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개입으로 인해, 상황은 묘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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