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티파니 맥센은 10대 중반에 프로레슬링계에 처음 데뷔를 했다.
그리고 이후 몇 년간 현장팀과 함께 하며 각종 역할로 쇼에 출연해 감초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사실, 이 업계의 특수성이었다.
바트 맥센은 현실에서 WWF의 회장이었다. 거기에 각본에서도 악역 회장으로의 역할을 수행했다.
락콜드에게 깨지고 얻어맞으며 쇼에서 오줌을 지리기도 하고.
그렇게 하며 아이콘을 키워냈다. 말하자면 그는 WWF 역사상 최고의 자버와도 같은 존재였다.
그러다가 트리플H 같은 악당을 자신의 팀에 영입해 키우기도 하고.
사람들은 그렇게 현실에서 따온 각본에 더 크게 열광했다.
티파니 맥센 역시 그러했다.
순진한 재벌 2세로 처음 등장하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자기 아버지를 배신한 뒤 표독스러운 악녀가 되기도 했다.
‘……엄청났지.’
그때 시청률은 어마어마했다.
상상해보라.
악덕 기업주가 자신의 딸에게 궁둥짝을 걷어차이고 토사물을 뒤집어쓰며 굴욕을 당하다니.
그보다 통쾌한 이야기가 있을까.
그걸 알았던 WWF의 로얄 패밀리(맥센 가문)는 계속 쇼에 출연하며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리고 그를 통해 현실에서는 어마어마한 재산을 축적해나갔다.
2002년에 세계 400대 부자에 선정된 바트는 이후로도 승승장구해 거의 100억 달러를 벌었다.
‘누군들 안 하겠어.’
나라도 100억 달러를 벌 수 있다면 그렇게 할 수 있다. TV쇼에 출연해 굴욕을 당해도 벤틀리 안에서 훌쩍댈 수 있을 테니까.
‘자본주의형形 인간이지.’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나는 자동차 밖으로 보이는 저택을 올려다보며 쓰게 웃었다.
수천 평 이상의 규모를 자랑하는 엄청난 저택. 캘리포니아 말리부에 위치한 맥센 저택이었다.
실제로 와보는 건 처음이다.
새삼 이 인간이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지 짐작이 갔다. 조수석의 바쿠도 놀란 표정이었다.
“만약에 바트가 미쳐서 나한테 이 저택을 준다면 말이다.”
“……예.”
“이 저택을 개박살 내서 10만 명 정도의 사람이 살 수 있는 아파트를 세우고 말 거다.”
“그렇군요.”
그게 효율적이긴 하겠다.
이 저택의 거주인은 단 4명뿐.
하지만 그 모두가 대부분의 시간을 저택 바깥에서 보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우리는 오늘 티파니 맥센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온 상태였다.
상세한 일정과 모든 계획이 정리된 노트북을 들고서 말이다.
2003년에 쓰는 노트북은 사람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무거웠다.
초인종을 누르자 안쪽에서 사용인이 대답하고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또 한참을 운전해 들어가자 각종 슈퍼 카들이 한가득 세워진 주차장이 나왔다. 우리는 고물뿐인데.
거기다 말끔하게 차려 입은 노년의 집사가 나와 우리를 반겼다.
여기가 2003년의 미국이 맞나?
무슨 빅토리아 시대 같은데.
“어서 오십시오. 두 분.”
그렇게 안내되어 안으로 향한 우리는 현대적인 느낌의 응접실에서 티파니를 기다리게 되었다.
“음료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커피 부탁드립니다.”
“보드카 됩니까?”
“없습니다.”
“그럼 맥주로.”
“아가씨를 뵙는 자리이니 주스로 준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바쿠의 의견은 묵살되었다.
그는 압도적인 집안 풍경을 보고는 술이라도 마시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만큼 뭐랄까.
‘재력’이 실감났다.
바트 맥센은 확실히 엄청난 돈을 가지고 있는 부자였다. 이 업계에서 가장 대단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그 딸.
티파니 맥센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서 와요. 두 분.”
바지 정장 차림의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우리와 악수를 나눴다.
“신입니다.”
“반가워요, 신.”
“바쿠입니다. 아가씨.”
“오랜만이에요, 바쿠. 여전히 그대로군요. 멋진 근육이에요.”
젠틀한 인사와 함께 자리에 앉은 티파니는 이내 내가 가져온 챔피언 벨트를 손으로 가리켰다.
“떼놓지 않는군요.”
“챔피언이니까요.”
“멋진 자부심이네요.”
이럴 거라고 생각했다.
티파니는 바트와 마찬가지로 프로레슬링에 대한 애정이 깊었다.
그 앞에서 이런 행동을 보이면 당연히 좋아하겠지. 경기장 밖에서도 쇼를 홍보하는 셈이니까.
“아, 일단 자료입니다.”
“고마워요. 바쿠.”
노트북을 받아든 티파니는 자료를 확인하지 않고 옆으로 치웠다. 바쿠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
“이건 나중에 읽도록 하죠. 사실 이야기를 좀 하고 싶었거든요.”
역시 그렇군.
나는 저도 모르게 웃었다.
티파니 맥센이 우리 두 사람을 여기에 부른 이유는 간단했다.
GCW가 자신에게 유용한 패가 되어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이 왕정 시대도 아니고, 설령 그때라고 해도 왕위를 이어받기 위해서는 ‘실적’이 필요했다.
‘GCW를 하나의 브랜드로 키워낼 수 있겠다고 생각한 거겠지.’
이해관계가 맞았다.
우리는 뒤를 봐줄 높으신 분이 필요했고, 티파니에게는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수단이 필요했다.
전생의 그녀는 대학을 졸업한 뒤 현장에 복귀해 안정적으로 실적을 쌓아 사업을 물려받았다.
그리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대학 생활은 지옥이었어요. 저는 항상 일이 하고 싶었죠.]
그렇기에 나는 티파니가 우리에게 흥미를 가질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들어맞았다.
“바쿠, 대체 어떻게 한 거죠?”
“예, 예?”
“엄청난 성과잖아요. 딱히 투자를 받은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렇게 쇼를 키울 수 있었던 거죠?”
“얘 때문에요.”
바쿠가 날 가리켰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는지 그는 말투가 무척 이상했다.
“신 선수요?”
“예, 다 이 친구가…….”
“대체 뭘 어떻게 한 건가요?”
“다…….”
“다?”
안쓰러워서 못 봐주겠군.
“저희 쇼를 보셨습니까?”
“예? 아뇨, 그건 아닌데…….”
“본인이 직접 보시고 스스로 생각해야지, 저희가 하는 말만 들으시면 판단력이 흐려지십니다.”
“……확실히 맞는 말이군요. 그럼, 다른 질문을 해보죠. 신.”
티파니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왜 콜 업을 거부한 거죠?”
“저보다는 와이엇 패밀리가 먼저 올라가는 편이 낫다고 GCW에서 판단을 내린 겁니다.”
“헌터는 그렇게 말 안 하던데.”
“…….”
“당신이 스테이블에 자리를 마련해주겠다는 걸 거절했다고 하던데요?”
“그렇게도 볼 수 있겠죠.”
“어째서?”
“할 일이 남았으니까요.”
“러셀 하트와의 대립인가요.”
“하고 싶은 말도 있고.”
“그건……?”
“……쇼를 보시면 알 겁니다.”
“이거 좀 무례하지 않나요?”
티파니가 쓰게 웃었다.
맞는 말이었다.
순전한 호기심으로 물어보는데 ‘쇼를 보라’는 말만 반복하다니.
하지만 무례한 건 그녀였다.
일에 관해 이야기하러 왔는데 기본 내용조차 숙지하지 않다니.
나는 동등한 관계를 원했다. 하나하나 원하는 대로 설명해주며 눈높이 교육을 하는 건 싫었다.
즉, 좀 짜증이 났다.
뭔가 건설적인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왔더니. TV쇼의 인터뷰어 같은 질문을 한다고?
역시 아직 대학생이다.
“예스맨을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만, 아가씨께서는 그걸 바라시는 게 아니실 테죠?”
“……그럴 수도 있죠?”
“만약 그렇다면 원하시는 건 절대로 얻으실 수 없을 텐데요.”
“제가 원하는 게 뭐라고 생각하시기에 이토록 당당한 거죠?”
“이 회사 아닙니까?”
내 말에 잠시 침묵하는 티파니.
하지만 이내 미소를 지었다.
“눈치가 빠르시군요.”
“그게 아니라면 저희의 뒤에 서주실 이유는 없을 것 같아서요.”
그녀는 단지 공주로 남는 게 아니라 왕위에 오르고 싶어 했다.
거기에 필요한 건 자신을 위해 전선에서 싸워줄 검투사였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저흴 부르신 건 까놓고 말해 민폐입니다.”
“……?”
“대학생이시죠? 방학이고. 오셔서 구경하면서 쇼도 확인하고, 그래야 뭔가 좀 되지 않겠습니까?”
티파니는 입을 꾹 다물었다.
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바쿠는 아까부터 내 파격적인 발언들에 견디지 못하고 반쯤 정신을 놓았다.
티파니 역시 그렇다고 느꼈는지 살짝 언짢은 기색을 드러냈다.
“협상 테이블에서 갑자기 총을 꺼내는 분일 줄은 몰랐네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협상 테이블에 앉으려고 하셨습니까?”
“뭐, 틀린 말은 아니군요.”
하지만 꽉 막히지는 않았다.
“제가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일단 반응을 보시죠.”
“당신이 요청해서 GCW가 이번에 어떤 성과를 낼 수 있는지?”
“예, 증명해보겠습니다.”
“재미있군요. 그럼 저로서는 방해가 없도록 도와드려야겠군요.”
“그거 좋죠.”
머리 회전은 빠르군.
“후후, 아까 예스맨은 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요.”
미소를 지은 티파니는 내가 마음에 들었다는 듯 손을 뻗었다.
우리는 다시 악수를 했다.
* * *
돌아가는 비행기 안.
티파니와 내 대화를 들은 이후로 줄곧 멍한 채였던 바쿠는 비행기가 뜨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는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날 바라보며 이렇게 말을 꺼냈다.
“너 미친놈이냐?!”
“예?”
“티파니 맥센에게 그딴 식으로 말하는 인간이 대체 어디 있어?!”
“여기요.”
“바트가 널 죽일 거다.”
“티파니가 말하면 그렇겠죠.”
“그 인간은 자기 딸을 끔찍하게 아끼니 말이다. 분명 그러겠지.”
“……아니죠. 바쿠.”
바트에 대해 잘 모르는군.
“그 인간은 자기 딸을 끔찍하게 아끼는 게 아니라 ‘맥센’이란 이름을 끔찍하게 아끼는 거잖아요?”
“어…… 하긴, 그게 그렇겠군.”
“자기 딸을 아끼면 ‘탕녀’라고 불리는 각본을 쓰거나 프로레슬링 기술을 맞도록 놔두겠어요?”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
“음…….”
“바트를 만난 적도 없으면서.”
“할리가 말해줬어요.”
“아, 할리가 요새 들어 너를 양자로 들일 기세긴 하더구나.”
“부모님 살아계시는데.”
“아버지가 둘인 거지.”
“실없는 농담을 하시려면 좀 사회적 통념에 맞게 해주세요.”
내가 눈을 가늘게 뜨자 바쿠는 낄낄 웃으며 보드카를 주문했다.
“그래서, 뭐 어떻게 된 거냐?”
“뭐가요?”
“‘아가씨’하고 말이다. 중간부터 아예 듣는 걸 포기했거든.”
“그냥 뭐, 되도 않는 헛소리를 해서 저희 쇼를 본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자고 말한 거죠.”
“왜?”
“뭐가요.”
“그렇다면 그냥 설명해주면 될 것을 굳이 그럴 필요가…….”
“앞으로 협력할 상대가 그렇게 멍청하게 굴면 피곤할 테니까요.”
적어도 내가 하는 말 정도는 이해해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아니면 아예 전폭적으로 지원만 해주던가.
하지만 내가 아는 한 티파니는 그런 인간은 아니었다.
그녀 역시 ‘맥센’이었으니까.
프로레슬링계의 혁명가이자 악마인 바트의 피를 타고난 데다, 향후 차기 회장까지 해먹는 인물.
즉, 적당히 서로 협력할 수 있는 위치에 놔두는 게 편할 터였다.
하지만 나는 그 사실은 모두 빼고 티파니의 의도만 이야기했다
“아가씨가 GCW를……?”
“예, 자기도 그래야만 하는 동기가 있으니 아마 말을 듣겠죠.”
바쿠는 황당한 얼굴이었다.
내가 그와 같은 계산을 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다.
바쿠가 알고 있는 나는 인디 출신의 재능 있는 프로레슬러.
고작 그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거기에 대해 꼬치꼬치 묻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너처럼 철저하게 준비하고 메인에 올라가는 놈도 없을 거다.”
“누가 그러지 않았습니까? 메인 쇼는 정글과 같은 곳이라고요.”
나는 단지 그 양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철저하게 준비하고 있을 뿐이었다.
전생의 경험으로 뼈저리게 깨달았다. 어설픈 준비로는 살아남지 못하는 것이 메인 쇼였다.
내가 하고 싶은 프로레슬링을 위해서는 그만큼 ‘정교하게’ 굴 필요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