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티파니 맥센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아틀란타에 찾아온 것은 바로 그다음 날의 일이었다.
그 행동력을 본 모두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나는 무덤덤하게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전생에서도 그랬으니까.
티파니는 리더십이 있는 사람이었고, 독선적인 아버지에 비해서 그나마 성격이 유한 편이었다.
그래도 맥센가의 성질머리가 어딜 가진 않아서 회사를 물려받은 뒤로는 곧잘 성질을 부렸지만.
‘나에게만 안 하면 되지.’
결국 그게 중요했다.
티파니는 관객석에서 GCW의 열광적인 반응을 직접 확인했다.
러셀과 나는 오늘로부터 이틀 뒤 텍사스 샌안토니오에서 벌어질 버닝콩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그렇기에 미리 그에 대한 복선을 깔아두는 게 오늘의 목포였다.
링 위에 올라선 나는 어마어마한 반응 속에서 입을 열었다.
“말했듯, 난 승리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인간이야.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지.”
난 벨트를 들어올렸다. 관객들이 증오로 얼룩진 챈트를 해댔다.
[F-ck you Sin! F-ck you Sin! F-ck you Sin! F-ck you Sin!]
현장의 반응을 몸소 체험한 티파니는 꽤나 감명을 받은 눈치였다.
쇼가 끝난 뒤, 날 찾아온 그녀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사람들의 반응이 정말 뜨거운데요? 메인 쇼에서도 이만한 반응을 보는 건 힘들었는데…….”
“차근차근 쌓아온 게 터져서 지금이 가장 주목받을 때죠.”
“대체 비결이 뭐에요?”
“흐음.”
“아, 알았어요. 제가 직접 지난 쇼를 보면 이야기해줄 거죠?”
“그때는 저희 둘이 나란히 앉아서 대화를 나눌 수 있겠죠.”
그런 내 말에 티파니는 곧바로 호텔로 돌아가 GCW의 지난 방송들을 몰아서 보기 시작했다.
그사이, 우리는 버닝콩에서 선보일 프로모와 각본을 준비했다.
영상팀에서는 나와 러셀을 소개할 영상을 준비했고, 각본팀에서는 기본이 될 서사를 작성했다.
그리고 그 내용을 티파니와 버닝콩의 각본팀에 각각 전달했다.
반응은 상반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를 걸어온 티파니는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이렇게 갈 거예요?!]
“물론이죠. 이렇게까지 해야 뭔가 임팩트가 있지 않겠습니까?”
[푸하하! 이거 헌터가 보면 난리가 날 텐데……?! 아, 쇼는 보고 있어요. 아주 충격적인 데뷔네요.]
“괜찮죠?”
[네. 제가 프로레슬링을 순수하게 즐길 수 있다니, 정말 놀랍군요.]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다.
반면, 메인의 각본팀은 우리에게 장문의 정중한 쌍욕을 보내왔다.
그 내용을 모조리 읽은 바쿠는 피식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개념이 없냐고 묻는데.”
“누가요?”
“헌터겠지.”
메인 각본진에게서 이야기를 들은 헌터가 길길이 날뛰는 광경이 어렵지 않게 상상되었다.
물론 철저하게 대비해둔 터라 딱히 무섭거나 하진 않았다.
* * *
샌안토니오 텍사스.
마초와 스테이크, 샷건과 황소의 도시. 미국 남부의 상징 그 자체.
나는 그곳에 도착했다.
아직 겨울이다.
공항 바깥에는 눈이 내렸다.
주변에는 ‘나 혼자 집에’ 같은 영화와 같은 정겨움이 감돌았다.
온갖 피부의 사람들이 촌스러운 옷을 입고 코를 훌쩍대는 느낌.
일행과 함께 짐을 찾아 밖으로 나온 나는 WWF에서 마중 나올 밴을 기다리고 있는 참이었다.
선글라스에 재킷 차림.
하지만 눈에 띄는 모양이다.
날 힐끔거리며 주변을 지나치는 사람들. 하지만 그 시선이 예전과는 조금 다른 것을 느꼈다.
‘운동한 보람이 있군.’
역시 인종보다 앞서는 게 외모인 모양이다. 더군다나 나는 키도 상당히 큰 편이었으니까.
러셀이나 바쿠 사이에 있어도 남성적인 매력이 있는 모양이다.
먹고 싶은 거 안 먹고 최대한 노력한 결과가 실감이 나는군.
“……안 받는데.”
그러자니 아까부터 전화를 걸고 있던 바쿠가 눈썹을 찡그렸다.
“메인팀에서요?”
“그래, 번호를 하나만 주기로 했을 때부터 좀 이상하긴 했는데.”
나는 피식 웃었다.
고전적인 방식이었다.
하지만 GCW와 달리 WWF 메인의 텃세는 상상을 초월했다. 이렇게 실제 피해가 있을 정도였다.
‘헌터가 손을 써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한숨을 내쉬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렌트카 빌려두길 잘했네요.”
“그러게 말이다.”
바쿠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곧바로 예약해둔 렌트카를 타고 경기장으로 움직였다.
버스나 지하철을 탈 수도 있지만, 귀찮아질 가능성도 있는데다가 짐이 많아서 이게 나았다.
앞으로 4주간 나와 바쿠, 러셀은 현장팀인 버닝콩과 함께 다니며 쇼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물론 이동은 따로 할 예정이었다. 프로레슬러는 어디까지나 개인사업자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숙소나 식사 같은 기본적인 일도 알아서 관리를 해야만 했다.
그래도 메인 이벤터쯤 되면 회사 측에서 어느 정도 사람을 붙여서 일정 관리를 도와주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회사에 돈이 되는 인물이 쇼를 펑크 내거나, 혹여 사고를 치거나 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였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메인팀이 가장 바라고 있는 건 우리가 오다가 갑작스러운 천재지변으로 죽는 거겠지.’
헌터 패거리를 빼고 보더라도 그들은 우리를 적대할 터였다.
왜냐고?
‘그따위 각본’을 제안했으니까.
실제로 그쪽에서 한 표현이었다. 티파니가 중재를 맡지 않아줬더라면 그대로 무시를 당했겠지.
하지만 이렇게 되었다.
우리는 이제부터 버닝콩에 출연함과 동시에 그쪽 현장팀이 부릴 텃세와 맞서 싸워야만 했다.
하지만 걱정은 없었다.
바쿠를 데려왔기 때문이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리자 거대한 경기장이 눈에 들어왔다.
2만석 규모.
확실히 체급 자체가 달랐다.
이 정도 규모의 경기장을 사용하는 프로레슬링 단체는 WWF가 유일했다. 이러니 바트 맥센이 혁명가라는 소리를 듣는 거겠지.
이 회사는 서커스 쇼의 단막극으로 시작된 프로레슬링을 세계적인 컨텐츠로 재창조해냈다.
그곳에 내가 다시 발을 들인다.
단순히 동양인 개그 자버가 필요했던 전생과 달리, 한 명의 어엿한 챔피언으로서 말이다.
경비를 서는 직원들을 통과한 우리는 쇼를 준비하고 있는 인부들을 지나쳐 안으로 들어섰다.
경기장의 지휘통제실이라고 할 수 있는 고릴라 포지션은 이미 ‘조립’이 끝나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현장팀을 이끄는 중심인물들이 모여 있었다.
바트가 없을 때를 대신하는 총괄 팀장과 각본, 방송, 시설, 경비, 판매 부서를 이끄는 각 팀장들.
마지막으로 선수 측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트리플H까지.
우리의 등장에 그들은 노골적으로 불편한 시선들을 보내왔다.
거기에 바쿠가 분위기를 풀고자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항상 이렇게 바빴지. 미국 전역을 이동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야. 안 그러냐, 헌터?”
“생각보다 빨리 오셨군요. 아직 마중을 보내기도 전인데.”
“비행기가 과속을 했어.”
“짐은 챙겨오셨습니까?”
“그래, 렌트카를 빌렸거든. ……회장님은 안 계시는 모양이로군?”
“사업 차 멕시코에 가셨습니다. 다음 주 쇼에는 돌아오시겠죠.”
“그래? 오랜만에 뵙나 싶었더니. 어쨌든, 인사들 해라. 이쪽은 신이고. 이 친구는 처음 보지?”
“알고 있습니다. 러셀 하트.”
헌터는 큰 덩치에 맞지 않는 새침한 표정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많이 본성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리가 당장 내일 실행될 각본은 그만큼 파격적이었으니까.
우리는 트리플H라는 사내를 나와 ‘동급’으로 놓을 생각이었다.
그게 필수적이었다.
* * *
그리고 다음 날.
1만8천여 명의 관객들 속에서 WWF 버닝콩이 시작되었다.
주간 쇼인 버닝콩은 현재 락콜드가 부상으로 빠지고 난 뒤 트리플H의 레볼루션 각본을 메인으로 내세워 진행되고 있었다.
악역 스테이블인 레볼루션의 멤버들이 다른 선역 선수들과 벨트를 놓고 싸운다는 이야기였다.
불과 얼마 전 ‘월드 챔피언십’ 벨트를 획득한 트리플H는 주가를 계속 올려나가는 중이었다.
쇼의 오프닝.
레볼루션의 테마가 울려 퍼졌다.
유명 밴드인 모털헤드의 메탈 음악과 함께 양복을 입고 등장한 트리플H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 옆에는 레볼루션의 멤버인 세 명의 선수가 함께였다.
숀 시나의 이전, 메인 이벤터 자리를 채웠던 게이브 바티스타.
숀 시나와 함께 그의 라이벌 중 하나로 크게 성장한 랜스 오튼.
마지막으로 80년대부터 활동했던 전설의 레슬러 닉 플레어까지.
레볼루션은 졸부와 이탈리안 마피아를 합친 것 같은 컨셉이었다.
양복을 빼입은 떡대들이 리더인 트리플H를 중심으로 모여 온갖 재수 없는 짓을 벌이는 게 기본.
오늘도 그러했다.
정확히는 처음에만 그랬다.
“참으로 멋진 날이군. 최고의 남자가 최고의 자리에서 최고의 순간을 이어나가고 있지.”
사람들의 반응은 격렬했다.
분명 락콜드나 시나 같은 아이콘 레벨은 아니었지만 트리플H는 아주 훌륭한 프로레슬러였다.
다소 고지식하고 정적이었지만 그것이 헌터가 가진 귀족적인 이미지를 더 높여주었다.
그것이 양복을 입은 양아치인 그에게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를 더해주었다.
그리스 신화의 영웅처럼 느껴지는 떡대 큰 몸과 더해서 말이다.
“나는 카인으로부터 벨트를 지켰고 지금껏 별 탈 없이 지배를 이어오고 있지. 여기는 내 구역이고 우리가 모든 걸 접수했어.”
자신만만한 마이크워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나는 그 모습을 고릴라 포지션에서 지켜보았다.
슬슬 나갈 때였다.
“신 선수, 준비해주세요.”
직원들은 대부분이 냉랭한 태도였다. 하지만 나는 딱히 신경 쓰지 않고 내 차례를 기다렸다.
“만약 불만이 있는 놈이 있다면 어디 한 번 나와서 이야기하라고!”
전형적인 예고였다.
사람들은 이 타이밍에 메인 쇼의 선역 선수들이 나오길 바라겠지. 방금 언급된 카인 같은 자들.
하지만 기대하며 돌아본 그들을 배신하듯 내 음악이 울려 퍼졌다.
성가와 덥스텝의 결합.
몇몇 매니아들은 내 존재를 알고 링이 떠나가라 함성을 내질렀다. 사실 멋진 광경이긴 했다.
다른 곳에서 최고의 악역 챔피언으로 군림하는 신이, 이곳에서 최고의 악역인 헌터의 부름에 나오다니.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나는 어깨에 멘 벨트를 번쩍 들며 그들에게 스스로를 과시했다.
어찌 보면 도박이다.
하지만 처음 데뷔할 때보다는 상황이 훨씬 더 나았다. 난 내가 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링에 올라가 당당하게 마이크를 쥔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이봐, 챔피언.”
짧은 한마디에 적대하는 시선이 쏟아졌다. 트리플H와 그 부하 두 사람이었다. 닉 플레어는 오히려 좀 흥미롭다는 눈이었다.
‘각본인지 현실인지 모르겠군.’
실제로 헌터의 파벌에 속한 두 사람은 날 죽도록 미워했다. 헌터는 말할 것도 없었고.
하지만 이미 익숙했다.
“나도 챔피언이야.”
뇌까리듯 말하며 웃었다.
사람들은 그런 내 모습이 당돌하다고 느꼈는지 반응을 보였다.
나는 일부러 GCW 챔피언 벨트를 헌터의 앞에서 높게 들었다.
페이스 투 페이스.
우리 둘은 동급이다.
아니, 오히려 팀이 있는 헌터보다 혼자서 당당하게 이곳까지 나온 내가 더 나을 수 있다.
그런 의기를 보여주듯 나는 여유롭게 말을 이어나갔다.
“조지아 챔피언십 레슬링.”
“……산하 단체 말이군.”
“내가 있는 이상 아니지.”
“네가 누군데?”
“신이다. 굉장히 나쁜 새끼지.”
나는 일부러 나 자신의 캐릭터를 크게 드러내는 말을 해나갔다.
“모르나? 소식이 늦군. 요새 힙스터들이 내 이야기만 들으면 환장해서 난리를 피우던데.”
“너 같은 양아치를?”
헌터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나 같은 양아치.’
그게 내가 요청한 마이크워크였다. 현실의 헌터는 그런 대사를 치기 싫어했지만 할 수밖에 없었다.
프로 의식은 철저했다.
“한판 붙자면서? 벨트 대 벨트를 걸어보는 건 어떨까?”
내가 그렇게 이야기하자 관객들은 깜짝 놀란 듯 반응을 보였다.
야유와 환호가 뒤섞였다.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이 동양인 챔피언이 과연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하고 있는 것이었다.
“……좋아.”
물론 여기에서 호락호락 당해줄 헌터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이빨을 날카롭게 드러냈다.
그 역시도 이 WWF 버닝콩에서 오랜 시간 살아남은 남자였다.
“한번 해보자고. 애송이.”
“오늘 밤? 메인이벤트?”
사람들이 환호했다.
챔피언 대 챔피언.
즐거운 소재거리였다.
내 도발적인 발언을 들은 오튼과 바티스타가 가까이 다가왔다.
거기에 피식 웃은 나는 벨트를 쥔 채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지지 않고 말했다.
“농담이야. 남자 넷에게 집단으로 당하는 건 취미에 없거든.”
그런 네 사람을 조롱하며 물러선 나는 마지막으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다른 할 일이 있어서야. 나중에 제대로 보자고. 헌터.”
거기까지 이야기한 뒤, 나는 마이크를 휙 던지고 퇴장했다.
‘나쁘지 않았어.’
스스로는 그렇게 판단했다.
하지만 고릴라 포지션으로 돌아오자 분위기는 좋지 못했다. 그런 와중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어땠나요?”
거기에 이미 고릴라 포지션에 도착해있던 한 사내가 대답했다.
헌터에 이어 우리의 각본에 참여할 두 번째 메인 스타.
“아주 좋았어.”
그렉 하트.
러셀의 삼촌이자 WWF에서 수많은 업적을 쌓아올린 레슬러.
신은 오늘 그를 습격해 러셀에게 경고를 보낼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렉은 정말 재미있겠다며 쿨하게 내 요청을 들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