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69화 (69/634)

69.

그렉 하트는 현재 메인 전선에서 내려와 별다른 대립 없이 방송 출연을 이어나가던 중이었다.

그렇기에 우리의 제안을 들었을 때 그 누구보다도 반가워했다.

커리어의 황혼기를 적당히 보내고 있던 그는 자질이 보이는 신인을 최대한 띄워주고 싶어 했다.

백스테이지 구석의 휴게실.

나와 러셀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던 그렉이 입을 열었다.

“너희 둘이 이런 식으로 올라올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렉의 경기와 내 난입은 쇼의 중후반이었다. 즉, 앞으로 한 시간 반 정도는 대기 시간이었다.

“다시 만나니 반갑구나.”

“예,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평소와 같았지. 그래, 첫 메인 쇼 출연은 어떤 느낌이냐?”

“사람이 많네요.”

“전에 비하면 많이 줄었지. 락콜드와 내가 대립하던 때는 심심하면 3만에 근접하고는 했어.”

“그건 정말 환상적이었죠.”

사실 복잡한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일단은 동의해주기로 했다.

그렉은 실력만큼이나 레슬러로서의 자부심 역시 컸으니까.

베테랑인 그에게는 따르는 사람이 많았지만, 파벌은 만들지 않았다.

그래서 헌터와의 정치 싸움에서 밀려 지금은 이런 위치에 있었다.

좋은 사람이었지만 다소 까다롭고 딱히 득은 되지 않을 사람.

그것이 그렉에 대한 내 평가였다. 물론 득실만을 따지며 사람 가렸으면 여기에 있진 않았겠지.

“헌터 그놈 얼굴이 구겨지는 게 무척이나 볼만 했어. 항상 으스대길 좋아하는 놈이 말이야.”

“같은 챔피언이니까요. 제가 밀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하하! 그 말이 맞구나!”

한바탕 크게 웃음을 터뜨린 그렉은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 교활한 놈이 왜 자기 위상에 해가 되는 각본을 순순히 수행한 건지 모르겠군.”

“복잡한 이야기가 있죠.”

“복잡해?”

나는 상황을 설명했다.

트리플H의 시비와 티파니의 관심, 그에 대한 대응까지 말이다.

내 이야기를 들은 그렉은 기가 차다는 듯 웃으며 대답했다.

“헌터 놈이 제대로 엿을 먹었군. 그걸 받아친 너도 참 대단하고.”

“먼저 시비를 걸어오는데 호구처럼 당해줄 순 없잖습니까.”

그렉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긴, 나라도 이제 갓 메인에 올라온 신인이 이렇게 정치적으로 영리하게 굴면 깜짝 놀라겠지.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나는 메인 쇼에서 10년이 넘게 선수 생활을 했다. 따라서 사람들이 어떻게 굴지 예상이 갔다.

쇼는 계속해서 진행되었다.

나는 예정되었던 대로 그렉 하트를 습격하는 각본을 수행했다.

일대일 경기를 치르고 있던 그를 링 위에서 끌어내려 무자비하게 구타하고 마이크를 잡았다.

[Booooooooooooooooo!]

반응은 아까에 비해 훨씬 격렬했다. 나는 사람들이 즐기던 경기를 빼앗고 내 할 말을 꺼냈다.

“이유가 있어. 이유가. 행동에는 분명 이유가 있지. 내게 야유하는 건 그 뒤에 해도 늦지 않아.”

침착한 말에 사람들은 들어나 보자는 듯 야유를 멈췄다. 나는 그 앞에서 곧장 대사를 쳐나갔다.

“다들 GCW 소속인 내가 왜 여기 나왔나 궁금하겠지? 간단해.”

지금의 나는 낭떠러지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있는 것과 같았다.

이곳의 관객 대부분은 내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아예 관심을 꺼버리겠지.

나는 그것을 피하기 위해 헌터와 그렉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러셀, 보고 있냐?”

그렇게 말한 나는 쓰러진 그렉 앞에 선 채 씨익 웃어 보였다.

일단 나는 러셀과 내가 GCW에서 대립을 이어왔음을 설명했다.

사람들은 다행히 내가 하는 말에 적지 않은 반응을 보내주었다.

쇼의 오프닝에서 이미 존재감을 크게 어필했고, 거기에 그렉이라는 거물을 습격했기 때문이었다.

GCW만큼의 반응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면 그래도 합격점이었다.

‘확실히 2만 명은 다르군.’

내가 이 정도 사람들의 앞에서 반응을 끌어본 적이 있던가.

난 기껏해야 다른 선수의 기술을 받아주기 위해 존재하는 개그 캐릭터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어쨌든, 덕분에 자신이 붙었다.

나는 꽤 괜찮은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겠다는 확신을 느꼈다.

* * *

나의 버닝콩 출연은 업계 전반에 신선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GCW의 챔피언이 버닝콩에 벨트를 들고 출연했다. 전례가 없던 일에 모두가 추측을 쏟아냈다.

이것을 통해서 GCW의 메인 쇼 침공 각본까지 이어질 거라던가.

아니면 GCW 전체가 메인 단체 중 하나로 승격될 것이라던가.

그 모두가 나로 인해서였다.

그간 GCW 소속이었던 선수들은 콜 업 될 때 누구 하나 빠짐없이 보유한 벨트를 넘기고 갔다.

와이엇이 그랬고, 그전의 챔피언들 역시도 모두 그렇게 했다.

하지만 나는 전례 없이 벨트를 보유한 채 버닝콩에 출연했다.

모두가 그에 대하여 궁금해하고 있을 때, 얼마 지나지 않아 뉴스레터에서 기사를 내놓았다.

그리고 그에 관해 라디오에서 제멋대로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소식통에 의하면, 티파니 맥센이 GCW를 눈여겨본다더군.]

[티파니? 아직 대학생 아니야?]

[하지만 차기 후계자지. 현재 상승세가 엄청난 GCW라면 경력을 쌓는데 도움이 될 테고.]

[그렇다면…….]

[GCW가 신인을 발굴하는 산하 단체에서 그 이상으로 커지겠지.]

[전국 방송으로 확장되려나.]

[방영을 원하는 방송국이 있다면 그렇게 되지 않겠어?]

정보가 새어나갔군.

알음알음 있는 일이었다. 메인 은 덩치가 크기 때문에 누군가는 정보를 빼돌리기 마련이었다.

[어쨌든, 신이 트리플H와 마주 섰을 때 전율이 느껴졌어. 확실히 메인에서도 자리 잡을 선수야.]

[이번에는 러셀과의 대립을 네버 이스케이프에서 마무리 짓기 위해서 올라온 거라고 하지?]

[사실이야. 확실히 주간 쇼에서 마무리 짓기에는 대립의 퀄리티나 중요성이 너무 커지긴 했지.]

[그렇다면 벨트를 넘기고 난 뒤에는 메인 쇼에 정착하겠군.]

[아마 그렇게 될 거야. 문제는 이 대립을 메인 쇼의 관객들이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건데.]

뉴스레터의 기자들은 그렇게 내 데뷔에 대한 감상을 쏟아냈다.

나는 쓰게 웃었다.

‘달라진 게 없군.’

GCW에서도 그러더니 쇼 전체의 이야기를 하는 시간에 왜 내 이름만 언급되는지 모르겠다.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기대해주는 건 좋은 일이었지만, 메인 쇼의 반응은 그렇지 않겠지.

그로부터 며칠 뒤.

나와 일행은 열두 시간가량을 차로 달려 다음 버닝콩이 개최될 예정인 캔자스시티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곳의 쇼에서 러셀과 나의 2주째 대립이 진행되었다.

1주째 쇼의 목표는 내 캐릭터와 이곳에 등장한 목적을 관객들에게 충분히 이해시키는 것이었다.

‘GCW 챔피언이 그렉 하트를 습격하기 위해 버닝콩에 난입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러셀과의 대립을 이어나가기 위함이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관객들은 나에 대해서 알았고 이번 쇼에서도 뭔가 벌어질 것임을 기대하며 경기장을 찾았다.

그리고 2주째.

오늘의 목표는 두 개였다.

하나는 관객들이 러셀의 캐릭터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

두 번째는 우리의 대립이 무척 감정적인 것임을 알리는 것.

그를 위해 우리는 주어진 15분의 시간을 최대한 활용했다.

일단 쇼의 오프닝.

지난주 내 습격이 화려한 편집 영상으로 나왔다. 이로써 사람들의 기억을 한 번 상기시켰다.

그다음.

락커룸에 있는 그렉 하트의 모습이 스크린에 나타나자 관객들이 크게 환호했다.

[후우.]

그는 지난 주 습격의 영향으로 이마에 밴드를 붙인 상태였다.

마음이 무거운지 연신 한숨을 내쉬는 그렉의 앞에 금발의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러셀 하트였다.

[삼촌, 괜찮아요?]

[그래, 와줘서 고맙다. 러셀.]

그런 식으로 이름과 관계를 상기시킨 뒤, 대사가 이어졌다.

[신, 그 자식이 또 나타날지도 몰라요. 제가 오늘 경기하실 때 옆에서 지켜드리겠습니다.]

[그래, 마음이 든든하구나. 그런데 그 녀석 네 태그 팀 파트너 아니었냐? 왜 이렇게 된 거냐?]

[……이제는 아닙니다.]

[그래, 일이 있었던 모양이군.]

그렉이 러셀의 어깨를 툭 쳤다.

그게 1분.

나머지 14분은 경기였다.

다른 대립과 경기로 전, 중반부가 지나간 뒤, 후반부의 1시간.

광고가 끝난 후의 경기장에 그렉 하트의 테마가 울려 퍼졌다.

날카로운 기타 연주에 환호하는 관객들. 경기장의 분위기를 다시 달구어내듯 그렉이 나타났다.

그 옆에는 러셀이 함께였다.

오늘 그는 악역 레슬러인 크리스 젠코와 경기가 예정되었다.

별다른 각본 없이 경기력을 보여주는 무대.

그렇기 때문인지 젠코도 우리의 각본에 순순히 협조해주었다.

그렉이 링 위에 오르고 뒤이어 크리스 젠코가 나올 차례였다.

쇼 중간에 예고를 해둔 만큼 사람들은 그의 등장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젠코의 음악은 울려 퍼지지 않았다. 사람들과 링 위의 그렉이 의아해했다.

오직 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러셀만이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는 눈썹을 찡그렸다.

‘괜찮은 연기로군.’

고릴라 포지션에 서서 방송 영상을 보고 있던 나는 메인다운 훌륭한 연출이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입장로 위의 대형 스크린에서 며칠 전 미리 촬영해둔 영상이 하나 흘러나왔다.

[아아, 잘 들리나?]

나였다.

백 스테이지.

화면이 다시 돌아 놀란 그렉의 얼굴을 비췄다. 벨트를 어깨에 맨 나는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지난주는 챔피언으로서 비겁한 행동이었지. 이해해. 하지만 알아달라고. 내가 그렉 하트 같은 노땅이 무서워 이런 건 아니야.]

[Boooooo~!!]

관객들의 야유.

[그래서 말인데. 오늘 한번 붙어보는 건 어때? 누가 더 강한지 사람들에게 확실히 보여주자고.]

영상은 거기에서 잠시 멈췄다.

화면은 대답을 요구하듯 그렉의 모습을 비추었다. 그는 피식 웃은 뒤 마이크를 받아 입을 열었다.

[나도 겁 없는 네 엉덩이를 걷어 차주고 싶긴 한데. 오늘은 예정된 경기가 있어서 말이다.]

화면이 다시 전환되었다.

경기복 차림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크리스 젠코. 나는 그 앞에 철제의자를 들고 나타났다.

[이렇게 되었는데도?]

관객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모두들 젠코가 내게 당한 것을 보고 놀란 것이었다.

[어떻게 할래, 노땅?]

그 말을 들은 러셀이 링 위로 올라왔다. 그는 삼촌을 말리려는 듯 손을 펼치고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그렉은 그런 그를 진정시킨 뒤 로프 앞으로 다가갔다.

[러셀, 네가 걱정하는 것도 안다. 확실히 너나 저 녀석에 비하면 난 꽤 나이를 먹은 입장이지.]

관객들이 야유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는 신호였다. 하지만 그렉은 거기에서 피식 웃은 후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당신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군.]

자연스러운 소통이었다.

역시 그는 위대한 레슬러였다. 그는 관객들의 환호 속에서 러셀에게 한 가지 가치를 전했다.

[알아둬라. 러셀. 이들의 환호가 있는 이상 도망치면 안 돼.]

크으.

멋지다.

절로 박수가 나오는 말이었다.

그는 대부분 커리어를 선역으로 사람들과 소통하며 지내왔다.

단어 하나하나에서 그렉 하트가 20년의 선수 생활동안 지켜온 신념이 느껴졌다.

‘말 참 잘한단 말이야.’

그렉은 방금 한마디를 통해서 러셀에게 자기 후계자로서의 이미지마저 부여한 것이다.

분명히 원래 각본에서는 이런 대사가 아니었는데 말이다.

[들었지? 신! 한번 붙어보자!]

버럭 소리친 그가 마이크를 내던졌다. 관객들이 환호를 보냈다.

그걸 지켜보던 내게 이어서 직원 중 하나가 신호를 주었다.

“신 선수, 입장해주세요.”

심드렁한 목소리였다.

‘GCW와는 하늘과 땅차이군.’

그럴 수밖에 없다는 건 이해했다. 자기가 관여하지도 않은 일의 성공을 바라기는 힘들겠지.

하지만 이걸 어쩌나.

그렉의 방금 그 한마디가 각본을 더 풍성하게 만들어줬는데.

한 가지 예감이 들었다.

오늘 경기의 결말은 날 정말 둘도 없는 쓰레기로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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