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70화 (70/634)

70.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야유였다.

[Boooooooooooooooooo!]

관객들의 기대를 훌륭하게 배신한 나는 입장로 위에 서있었다.

경기의 시작과 끝이 판이했다.

링 위에 오를 때만 해도 반응은 그냥저냥 평범한 정도였다. 간간히 미묘한 야유가 이어지는 정도.

하지만 경기 한 번에 달라졌다.

경기 내내, 나는 그렉과 일전일퇴의 공방을 주고받으며 관객들의 기대감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바닥에 누운 내 다리를 그렉이 붙잡았다.

관객들은 샤프 슈터를 기대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지만 나는 그 기대를 비겁하게 배신했다.

그렉의 다리 사이를 걷어차 빠져나왔다. 반칙패가 선언되며 분노한 러셀이 링 위로 올라왔다.

녀석의 공격을 몇 대 맞아주던 나는 이내 링 아래로 도망쳤다.

그리고 지금 상황이었다.

[You Suck! You Suck! You Suck! You Suck! You Suck!]

무려 챈트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관객들의 기대감을 훌륭하게 배신했다는 뜻이었다.

즉, 이들은 나에게 기대를 했다.

충분히 입을 털었던 만큼 경기 내용 역시 좋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마지막의 배신이 더 통했다.

‘나쁘지 않군.’

그렇게 생각한 나는 링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렉을 부축해 일으켜 세우는 러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 두 사람을 한껏 조롱한 나는 이내 백스테이지로 퇴장했다.

* * *

그렇게 쇼가 끝난 뒤.

나와 일행은 또 다시 주 경계선을 넘어 다른 도시로 이동했다.

다음 주 버닝콩은 콜로라도 주에 위치한 덴버 시에서 열렸다.

‘1,100km쯤 달렸나.’

차에서 내린 나는 장거리 운전의 피로에 먹힌 자신을 느꼈다.

얼른 호텔에 가서 쉬고 싶었다.

안 그래도 운전을 대신해줄 사람이 러셀밖에 없는 상황이라 피로감이 평소의 두 배는 더했다.

아스팔트 바닥에 발을 디디고 심호흡을 하고 있자니 내내 뒷좌석에 있던 바쿠가 다가왔다.

“많이 힘드냐?”

“예에…….”

“그러게 나도 운전한다니까.”

“아, 아뇨. 괜찮습니다.”

나는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다.

바쿠는 다 좋은데 운전하다 자꾸 위스키를 들이켜서 문제였다.

덕분에 운전은 나와 러셀이 세 시간에 한 번씩 돌아가며 했다.

그래도 뭐, 나름 즐거웠다.

힘들긴 했지만 이렇게 운전으로 미국 전역을 돌아다닐 수 있는 건 나름대로 귀중한 경험이었다.

‘비행기가 더 낫기는 한데.’

그 정도는 전용기를 가지고 있는 맥센 정도나 가능한 일이었다.

생각해보라.

매주 꽤나 멀리 떨어진 도시에 가서 쇼를 진행하는데, 계속 비행기를 타는 건 어려웠다.

표 값도 만만찮았고 회사에서는 이에 대한 지원도 해주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선수들은 대부분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렌터카를 대여해 함께 이동하고는 했다.

하지만 전생의 나는 같이 여행을 다닐 만큼 선수들과 친목을 다지지도 못해 언제나 힘들었다.

애덤 그 녀석도 메인에 올라가더니 날 줄곧 무시하기까지 해서.

‘그 개자식, 바비 선배에게 지금 신나게 두들겨 맞고 있겠지.’

그래도 싼 녀석이다.

그렇게 문득 옛 기억을 떠올린 나는 그래도 이 상황이 마냥 좋은 것을 느끼고는 피식 웃었다.

그래, 그 말이 맞았다.

매년 수십만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삶이 기다리고 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물론, 지금까지의 내 커리어가 성공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렉의 도움 덕인지 사람들의 반응도 나왔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럽게 다음 쇼도 기대가 됐다.

그렇게 생각하며 호텔 방에 짐을 풀고 쉬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뜻밖의 연락을 받았다.

[지금 통화 가능해요?]

티파니였다.

“다 보셨어요?”

[뭐요? 아, 대립? 예, 물론 다 봤죠. 지금껏 얼마나 많은 커피를 마셨는지 모르겠네요.]

“밤 새셨던 만큼 재밌게 즐겨주셨다면 저로서는 기쁘겠는데요.”

[엄청 재미있었어요. 웃긴 것도 있고 진지하기도 했고, 멋진 드라마더군요. 당신이 러셀을 배신했을 때는 이래도 되나 싶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배신한 거죠.”

[하긴, 시청률을 위해서라면 뭐든 못하겠어요.]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니지만.

[어쨌든, 흥미로운 소식이 있어서 말해주려고 전화했어요.]

“뭔데요?”

[버닝콩 시청률이 올랐어요.]

“……흐음?”

[팀에서는 미식축구 경기가 없었던 걸 원인으로 두고 있지만, 당신의 출연 때문이 아닐까요?]

“글, 쎄요.”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였다.

한순간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지만,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할 문제라 딱히 입에 담지는 않았다.

다시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474만에서 485만.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치는 아니잖아요? 분명히 이유가 있겠다 싶어서.]

“아마, GCW의 시청자층이 버닝콩으로 유입된 게 아닐까요?”

[왜요?]

“…….”

[메인쇼 대신 GCW만을 보고 있는 시청자층이 있다는 건가요? 조금 이해가 되질 않는군요.]

“저희가 지향해온 시청자층이 메인 쇼와는 전혀 다르니까요.”

[아하, 확실히 그러네요. GCW는 주로 가족 단위의 시청자들을 타겟으로 삼았었죠?]

“그렇습니다. 아마 시간대별 시청률을 확인할 수 있다면 좀 더 확실해지지 않을까 싶은데요.”

[한번 체크해볼게요. 그리고 현장 반응도 확인하고 싶으니 나머지는 그쪽에 도착하면 이야기하죠.]

“예,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전화가 끊어졌다.

“흐음.”

흥미로운 상황이었다.

잠깐 핸드폰을 들고 서있자니 샤워를 마친 러셀이 나왔다.

“안 씻어?”

“생각할 게 좀 있어서.”

“무슨 일인데?”

“우리가 버닝콩에 출연한 이후로 시청자가 10만이 늘었다는데.”

“……우리 때문인 게 맞아?”

“좀 더 자료를 모아야겠지만 가능성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해.”

현재 WWF 메인 쇼의 시청 등급은 ‘TV-14’이었다. 유혈과 성적인 표현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 시청자들은 대부분 버닝콩을 보지 않았던 거지.’

하지만 나와 러셀이 쇼에 출연하면서 이야기가 달라진 것일까.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정말로 놀라운 결과였다.

우리가 GCW에서 쌓아온 각본이 이 정도의 반향을 낳을 거라고는 나조차도 생각하지 못했다.

* * *

그날 저녁.

티파니 맥센은 곧바로 자신의 전용기를 타고 덴버에 도착했다.

‘재벌가의 딸내미답군.’

우리는 고물 렌터카로 꼬박 하루를 써가며 왔는데 말이다. 새삼 재력의 차이가 실감이 갔다.

거기다 그녀가 날 부른 장소는 덴버 시내의 5성급 호텔이었다.

누구는 숙박비 지원도 없어 싸구려 호텔에서 벌레들과 자는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며 안으로 들어간 나는 로비에서 혼자 기다리고 있던 경호원과 만났다.

“오셨군요. 이쪽으로 오시죠.”

나는 그의 안내를 받아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향했다.

47층.

한 층이 통째로 바Bar였다.

“들어가십시오.”

“……여기를요?”

“예.”

제임스 본즈 같은 턱시도 차림의 남자들과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여자들이 한가득 있는 곳에?

우와, 벌써부터 질린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이내 안으로 걸음을 들여놓았다.

가죽재킷에 청바지.

확실히 여기에선 눈에 띄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틀리지 않는지, 직원 하나가 곁으로 다가왔다.

“저, 손님……?”

“예?”

“실례합니다. 혹시 방의 열쇠라던가 투숙객임을 확인할 수 있는 물품을 좀 볼 수 있을까요?”

“……없는데.”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이곳은 본 호텔의 투숙객들에게만 음료를 판매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안 보이는 것 같군.

뭐, 그러시겠지. 이해한다.

바로 그때였다.

“제 일행이에요.”

묘한 향기와 함께 술잔을 든 누군가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티파니 맥센.

“아, 그러십니까.”

“예, 걱정 말아요.”

능숙하게 직원들 돌려보낸 그녀는 킥킥 웃으며 날 바라보았다.

“링 위에서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것 같더니. 의외로 이런 곳을 꺼려하는 사람이었군요.”

“……사업에 대한 대화를 나누기에는 좀 화려한 장소가 아닐까요.”

“그래요? 평범한 것 같은데.”

“제 꼴을 보시죠.”

“아하, 그러고 보니 턱시도를 빌려주기도 하던데. 어때요? 그쪽 사이즈가 있을 진 모르겠지만.”

“됐습니다.”

“하긴, 넥타이를 좋아할 것 같은 스타일은 아니네요.”

마티니의 냄새가 났다.

나는 약간 느슨해지는 감각을 느끼며 티파니의 뒤를 따라갔다.

안쪽의 룸에 도착하자 테이블 위에 펼쳐진 노트북이 보였다.

“음료는 뭐로 할래요?”

“물이요.”

“……재미없네. 적당히 시킬게요.”

무시하고 데이터를 확인했다.

엑셀 문서.

WWF 버닝콩 02년 11월 2주차.

오클라호마시티 애슬리트 센터 어쩌고저쩌고. 이건 넘긴다.

내가 관심이 있는 건 오직 시간대별 시청률이었다.

쇼의 오프닝.

483만.

거기에서 20분 단위로 쪼개진 시청률 그래프가 눈에 들어왔다.

치솟다가 순간 떨어지고.

그리고 나와 그렉의 경기에서 시청률이 480만을 마크했다.

그리고 그게 끝난 후에 급격히 떨어져 475만까지 내려갔다.

최종 스코어는 485만.

각 가구별로 20분 이상 버닝콩을 본 시청자들을 전부 집계했다.

‘이건 꽤…….’

놀라운 결과였다.

“어때요?”

“그쪽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아, 여기 술.”

“…….”

물 달라니까.

이쪽은 이야기하고 들어가서 쇠질이나 하고 잘 생각이었는데.

“아까 말한 대로 GCW의 시청자층이 유입된 것 같은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확실히 저희 경기가 끝나고 시청자층이 빠지고 있잖습니까?”

“예, 낙관적으로 보자면 적어도 5만은 당신과 러셀의 대립을 위해 버닝콩을 본 셈이겠네요.”

“그렇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확실히 그럴 터였다.

왜냐고?

나는 전생에 이와 같은 일을 겪었다. 패러다임이 변하는 순간을.

하지만 이번에는 GCW에서 그랬던 것과 달리, 딱히 의도하지 않았는데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시청자층이 바뀌고 있다.’

숀 시나가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GCW에서 노렸던 가족 단위의 팬들이 WWF에까지 쫓아와 쇼를 시청해주고 있었다.

물론, 러셀과 나의 각본이 연장되면서 일어난 현상이었지만.

‘이건 도움이 되겠어.’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티파니.”

“응? 왜요.”

“혹시 지금 네버 이스케이프의 표가 몇 장 남았는지 알아요?”

“……글쎄요.”

“좀 알아봐주세요.”

“너무 사람을 막 다루는데.”

잠시 어이없어하던 티파니는 이내 군말 없이 전화를 걸었다.

“어, 난데. 혹시 지금 네버 이스케이프 표 몇 장이나 남았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그녀는 마티니를 들이키며 물었다.

그래도 아직 내가 하는 말은 알아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로군.

“뭐? 지금 퇴근했다고? 그럼 다시 들어가서 알아보면 되잖아?”

“…….”

아닌가.

“……응, 어. 그래. 기다릴 테니까 전화 끊지 말고 다시 돌아가.”

그렇게 말한 티파니는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며 웃었다.

“다시 간다고 하네요.”

이 혈통에 의한 갑질에 내가 당하지 않아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그보다, 헌터는 별말 없어요?”

“당신 이야기를 하니까 신기할 정도로 꼬리를 내리던데요. 분명히 한 번 갈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자식은 그럴 배짱도 없어요. 불●도 없는 놈이니까요.”

“……불, 뭐요?”

“하여간, 사내놈이 알랑거릴 줄만 알지 매력이 없단 말이야.”

“……그러고 보니 둘이 사귀었죠.”

“어? 어떻게 알았어요? 아주 잠깐의 비밀 연애였는데.”

“……조금 전의 대화를 통해서 유추했습니다.”

순간 어이가 없어져 미래의 정보를 입에 담고 말았다.

티파니 맥센은 향후 트리플H와 결혼하지만, 그건 거의 10년 가까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어쨌든, 남자라면 패기가 있어야죠. 적어도 당신만큼은요.”

“많이 취했군.”

“실제로 그렇잖아요? GCW의 신인이 메인에 그런 패기를 가지고 문서를 보낸 건 처음이야.”

티파니가 배시시 웃었다.

미인이라서 좋아 보여야 정상인데, 눈이 풀어져 무서웠다.

“좋아요. 우리 사업 파트너로서 서로 잘해보자고요. 나는 당신네 GCW를 총괄하고, 당신은 메인에서 앞으로 챔피언도 되고~.”

무시하기로 했다.

테이블 위의 핸드폰에서 누군가 소리를 질러댔기 때문이었다.

[아가씨, 네버 이스케이프 티켓 아직 2만 장 정도 남았습니다!]

“수고했어요.”

[예, 아가씨!]

아니, 내가 대답했는데.

“그 정도면 많이 남은 거죠?”

[물론이죠! 병원에 계신 회장님이 다 못 팔면 다 죽여 버린다는데요!]

“들어가서 쉬어요.”

[감사합니다! 아가씨!]

나라고.

눈을 가늘게 뜬 나는 그대로 전화를 끊었다.

어쨌든 좋은 정보였다.

‘이 표를 다 팔아치운다면 확실히 반응 걱정은 없겠어.’

문제는 그 방법이었고.

“당신은 불● 있죠?”

갑자기 휙 가버린 이 미친 여자와 그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이를 어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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