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71화 (71/634)

71.

미친 여자가 말했다.

“……한 잔 더 할래요?”

내가 방까지 업어서 옮기는 동안 꿈쩍도 안하더니, 침대에 던지자마자 깨어나 술을 찾았다.

“어때요? 좋은 술이 있는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리를 꼰 티파니 맥센은 분명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내게 왜 이러는지는 몰라도 전생과 달리 남자로서의 자존감이 채워지는 것을 느끼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말했다.

“저기요.”

“응? 왜. 설마 사고 칠까봐 무서워서 마시기 싫다는 거예요?”

“그쪽 오줌 쌌거든요.”

“으응……?”

“일단 오늘 운동 안하면 근손실 올 것 같으니까 갈게요. 내일 연락하시죠.”

“야, 너도 겁쟁이야?”

무시하고 나왔다.

여전히 눈이 풀린 게 조금 걱정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문 앞의 경호원에게 대충 상황을 전한 뒤 호텔을 빠져나왔다.

버스도 끊긴 시각.

숙소 근처의 24시간 헬스장까지 걸어간 나는 운동을 시작했다.

사람이 거의 없어 조용한 와중, 쇠가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있자 자연히 생각이 깊어졌다.

‘정말 생각치도 못했군.’

그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하지만 이렇게 되는 게 자연스러운 현상이기는 했다. 단지 지금은 아무도 모르고 있을 뿐이지.

가족 단위의 시청자들 말이다.

지금껏 GCW에서는 이런 이들을 공략해 시청률을 끌어올렸다.

물론 상황이 잘 맞아떨어진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우리에게 호의적인 기사를 써줄 수 있는 기자와 그 가족을 권총강도로부터 구해냈으니 말이다.

‘시작은 그거였지.’

그렇게 해서 외부에 연줄을 만들고 그에 걸맞은 각본을 보여줘 시청률을 큰 폭으로 올렸다.

메인 쇼에서도 이와 같은 패러다임 시프트가 일어나기는 했다.

기존 시청자들로부터 어마어마한 욕을 먹었지만, 반대로 사업적으로는 대규모 확장이 일어났다.

하지만 그건 2005년의 이야기.

아직 좀 남았다.

현재는 락콜드의 시대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회사로서는 리스크를 피하고 싶겠지.

결국, 이번에 우리가 좋은 결과를 내더라도 메인에서까지 변화가 벌어지진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래도 괜찮았다.

이를 통해서 GCW의 규모가 커지고 네버 이스케이프의 티켓이 잘 팔린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리고 분명 그렇게 될 터였다.

* * *

다음 날.

운동 도중 전화를 받았다.

[어제 일은 잊어요.]

“…….”

[원래 그런 사람 아니니까 잊어요. 제기랄. 시카고는 날씨가 추워서 평소보다 빨리 취했다고.]

“저희 실내였는데.”

[자꾸 그렇게 물고 늘어지면 요청한 건 생각해보도록 하죠.]

“예, 예. 알겠습니다.”

피식 웃은 나는 땀을 닦았다.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일단 프레스 머신에서 빠져나왔다.

수분을 보충하고 있자니 침묵하던 티파니 맥센이 말을 이었다.

[어쨌든, 이야기는 해놨어요.]

“뭐라던가요?”

[당연히 통과됐죠. 오늘 밤부터 광고 내보낼 예정이에요.]

됐다.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티파니 맥센이 본사 회의에 참가해 의견을 내고 허락받은 것.

그건 바로 가족 단위 시청자들을 위한 티켓 할인 이벤트였다.

[이번 방송에서도 광고를 내보내기로 했어요. 이거라면 확실히 경기에 큰 도움이 되겠죠?]

“예, 동시에 관객 반응이 좋으면 GCW에 대한 홍보도 되겠죠.”

좋은 소식이었다.

티파니와 나는 정확한 일정에 대해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눴다.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한 쪽에 가까웠지만.

[각본 진행은 문제없죠?]

“예, 메인에서 아예 터치를 안 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다행이네요. 매일 그쪽 총괄팀장한테 전화한 보람이 있네.]

“……논타이틀 매치로 헌터를 이기는 각본을 제안해도 됩니까?”

[아하하, 개소리 마세요.]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 티파니.

장난이었는데 본전도 못 찾았다.

[어쨌든, 이대로 네버 이스케이프까지 잘 해봐요. 누가 귀찮게 굴면 바로 전화 주시고요.]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응?]

“혹시 링 사이드 자리의 티켓을 두 장만 구할 수 있을까요?”

[예, 이야기해두죠.]

내가 고민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던 에보니 모녀를 페이퍼뷰에 초대하고 싶었다.

시원한 대답에 나는 티파니와 한 배에 타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이거 완전히 손 안 대고 코 푸는 상황이로군.’

든든한 협력 관계였다.

티파니는 내게 없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나 역시도 그녀에게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

앞으로 메인 쇼에서는 그녀와의 관계가 중요해질 것 같았다.

실제로 이후 그렇게 되었다.

티파니 맥센은 관계자들에게 우리에 대해서 확실히 이야기했다.

덕분에 정말 어이가 없을 정도로 쉽게, 우리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계속 해나갈 수가 있었다.

‘이 정도 힘이라니.’

하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회장이 회사 주식의 60% 이상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후계로 여겨지는 티파니에게 그 정도 힘이 있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바트는 현재 부상으로 빠진 상태였기에, 티파니 맥센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주간 쇼를 훌륭히 준비하고 소화해나갔다.

반응은 점차 올라왔고, 날 잘 모르던 관객들도 이내 입에 담기 힘든 욕설들을 해대기 시작했다.

반대로 그렉과 같은 편인 러셀에게서는 좋은 반응이 나타났다.

3주째의 쇼.

우리는 태그팀 경기를 가졌다.

나는 악역 미드 카더 잭 하디와 함께 그렉과 러셀을 상대했다.

사람들은 나와 러셀이 어떤 레슬링을 보여줄까 기대했고, 우리는 거기에 충분히 부응해주었다.

우리는 각종 기술들을 주고받으며 레슬링 실력을 보여주었다.

러셀의 화려한 기술.

그리고 나의 악랄한 반격.

환호성이 점점 커졌다.

하지만 물론, 그 끝은 내 비겁한 짓으로 김을 빼놓아야 경기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는 법이었다.

경기의 종반부.

심판이 쓰러진 사이 나는 또 다시 로우블로를 사용하려고 했다.

남자가 지닌 최대의 약점을 노리는 간단하고 잔혹한 기술.

무릎을 꿇은 나는 앞에 선 러셀의 다리 사이로 팔을 휘둘렀다.

“……?!”

하지만 러셀은 ‘지난주의 그렉’과 달리 그것을 쉽게 막아냈다.

놀란 내가 올려다보았고, 관객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더 이상 내 비겁한 수는 통하지 않았다.

고개를 내저은 러셀이 날 일으켜 세웠다. 팔을 잡힌 나는 당황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끄흑?!”

그리고 반대로 러셀이 내 가랑이 사이를 힘차게 걷어찼다.

충격을 줄이며 효과를 더하기 위해 나는 위로 살짝 점프했다.

넘어진 내 앞에 선 러셀.

사람들은 환호했지만, 러셀의 행동에 좀 놀란 눈치이기도 했다.

선역은 절대로 반칙을 쓰지 않는다. WWF의 오랜 통념이었다.

하지만 러셀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깨버렸다. 오늘 경기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정말로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선수는 선악의 역할을 넘어서서 자신이 누군지 이야기한다.

쉬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러셀과 나는 함께 활동해오며 만든 캐릭터가 있었다.

그것은 확실히 메인 쇼에서도 먹혔다. 사람들은 러셀의 다음 행동을 숨죽이며 바라보았다.

링 아래로 내려간 러셀은 철제의자를 가지고 올라왔다.

쩌억!

“끄흑?!”

……진짜로 아팠다.

의자에 등을 얻어맞은 나는 링 위를 데굴데굴 굴렀다. 러셀은 계속해서 내 등을 내리쳐댔다.

사람들이 환호를 보내자 나는 보란 듯이 크게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다 겨우 도망쳤다.

링 아래에서 올려다본 러셀은 확실히 자신이 레슬러로서 어떤 인간인지를 주장하고 있었다.

나는 등의 통증도 잊고 웃으며 그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만든 선역의 모습을.

* * *

그리고 대망의 4주차.

관객들은 그간 이어진 러셀과 나의 대립을 완전히 받아들였다.

반응은 확실히 나왔으며 전부 우리가 의도한 대로 이루어졌다.

덕분에 우리는 4주차 세그먼트를 자신감에 차 구성했다.

경기 전의 계약식.

링 중앙에 천을 덮은 긴 테이블과 의자가 놓인 가운데, 양복을 빼입은 직원이 상황을 설명했다.

러셀과 나는 음악에 맞춰 차례대로 입장했다. 환호와 야유가 번갈아 나왔고, 우리는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나는 보란 듯이 테이블 위에 두 다리를 올렸다.

러셀이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과는 반대로 말이다.

챔피언과 도전자.

여유로운 자와 진지한 자.

그 대비가 사람들에게 일목요연하게 보여졌다.

“일단, 두 분 이렇게 계약식에 참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건방진 악역 챔피언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야유를 보냈다.

나는 거기에서부터 바로 치고 나가 마이크워크를 시작했다.

“뭐야, 다들. 이번 주 일요일에 내 멋진 경기를 볼 텐데 감사할 줄을 모르는 인간들이로군.”

러셀이 피식 웃었다. 마이크에 대고 살짝 울리는 소리.

나는 기가 막혀 돌아보았다.

“왜, 질게 뻔한 싸움에 나서게 되어서 실성이라도 한 거냐?”

“아니, 너답다 싶어서.”

“…….”

“정말로 너다운 말이로군. 신. 넌 언제나 그런 식이었지.”

“뭘 안다고 그래?”

“그야 잘 알지. 이들이 알듯, 우리는 팀이었으니까. 너의 배신으로 깨졌지만 말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이해하라고. 그 덕분에 너도 관객들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거 아냐?”

“네 덕에?”

“그래, 내 덕에.”

“넌 항상 그랬지. 오만할 정도로 자신만만하고 어떤 싸움에 나서도 기가 죽는 일이 없었어.”

“당연하지. 나는 최고니까.”

“하지만 난 아니야.”

러셀이 눈썹을 찡그렸다.

“난 아직도 그 아이와 한 약속을 기억해. 때문에 너와 얼굴을 마주하는 매순간이 괴롭군.”

나왔다.

드디어 이 이야기가 나왔다.

모두가 쉬쉬하고 피하려던 이야기. 소아암을 앓던 소년의 죽음.

그 일이 각본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시청률과 판매량, 대립의 몰입도를 위해 겁 없이 쓰였다.

윌리의 부모님으로부터 허락은 구했다. 하지만 누군가는 분명히 우리를 너무하다며 욕하겠지.

그럼에도 우리는 했다.

왜냐면 하늘에 있을 윌리는 그 누구보다 가슴을 졸이며 우리의 이야기를 지켜보고 있을 테니까.

나는 피식 웃었다.

“윌리?”

관객들이 웅성거렸다.

‘무슨 이야기지?’

혹은.

‘여기서 윌리의 이야기를 꺼내?’

나는 그중 이야기를 따라오지 못하는 관객들을 향해 ‘설명’했다.

“기억하지. 우리의 팀을 응원했던 꼬마. 얼마 전 사망했던. 우리는 그 꼬마에게 절대로 싸우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었지.”

“그래…….”

“하지만 그게 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러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한 가지 확실히 해두자고. 러셀. 꼬마의 죽음은 안타깝지. 그렇다고 해서 내 일은 변하지 않아.”

“날 배신하는 일?”

“그래, 그게 내 일이지.”

“네 일이라고?”

중요한 부분이라 강조했다.

어느덧 러셀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직원이 안절부절 못하는 가운데 난 관객석을 돌아보았다.

“그래, 이거.”

“이 사람들?”

“내가 널 배신할 정도로 큰일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 큰 무대에 서있을 수 있겠어?”

“그게 날 배신한 이유인가?”

“그렇지. 너와의 시간은 즐겁고 멋졌어. 하지만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이렇게 해야만 했다고.”

화제성.

회귀를 했다.

지식이 있다.

그렇기에 나는 미래에 사용될 다른 사람들의 멋진 아이디어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사용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탑에 오르고 싶었다. 내가 그렇게 저지른 죄는 모두 이 관객들이 원인이었다.

이놈들이 처음부터 날 제대로 봐줬다면 이러지 않았을 터였다.

때문에 나는 해야만 했다.

“지독한 배신 같은 짓을.”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주고 내게 귀를 기울여줄 만한 큰 사건.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나 같은 사람에게 관심이 없거든. 나 같은 사람? 그게 뭔지 알아?”

나는 한 손으로 얼굴을 훑었다.

“TV드라마에서 결코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자들이지.”

언더독.

동양인.

온갖 차별에 시달리는 자들. 미국인조차 되지 못하는 인간들.

“그래서 나는 SIN인 거야. 너희들의 무관심이 내가 자극적이고 악독한 짓을 하도록 부추기지.”

야유는 없었다.

고요했다.

내 말을 이해한 자도, 그러지 못한 자도 존재했다. 나는 그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열변을 토했다.

“왜냐고? 난 역대 최고거든! 하지만 너희의 그 음습한 관심이 없이는 그걸 증명할 수가 없다고! 난 너희가 만들어낸 존재인 거야!”

그제야 야유하는 사람들.

자신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내 모습은 충분히 역겨웠다.

또한 내 말이 완전히 틀리지 않았기에 더 듣기 불편할 터였다.

미국 매체에 등장하는 동양인 영웅은 없었다. 따라서 나는 이런 방식으로 싸울 수밖에 없다.

[Boooooooooooo…….]

그렇기에 야유는 이내 사라졌다.

사람들은 더 이상 나를 쇼에 등장해 각본을 수행하는 수많은 선수들 중 하나로 보지 않았다.

나는 여기서 완성되었다.

[SIN! SIN! SIN! SIN! SIN!]

누군가 내 이름을 소리쳤다.

[Booooooooooo……!]

그것을 묻어버리려는 듯 관객들이 야유를 보냈다. 그들은 현실에서 나를 두고 다투기 시작했다.

그게 내가 바라던 바였다.

내가 해오던 일이었다.

속이고 등치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모아서 결국 기회를 따낸다.

아이콘이 된다.

현실과 하나가 된 각본.

나는 전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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