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모든 레슬러가 데뷔한 순간부터 마지막까지 일관성이 있는 기믹을 가지고 활동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원했다.
우리가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가짜처럼 보이는 것을 싫어했다.
똑같은 상황에 계속 당해주는 선역. 그렇게 나쁜 짓만 계속 반복하면서 어그로를 쌓는 악역.
그 모든 게 이야기의 클리셰와도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양념처럼 사용하는 것이 맞았다.
신념을 가진 악역.
분노를 드러내는 선역.
사람들은 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복잡한 면모가 있는 레슬러에게 환호를 보냈다.
‘락콜드도 그랬지.’
처음에 악역이었던 그는 누구든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스터너를 날리는 것으로 유명했다.
이후 선역으로 바뀐 후에도 그런 태도는 바뀌지 않았다. 심지어는 여자에게도 스터너를 날렸다.
사람들은 그런 일관성과 신념을 가진 락콜드를 좋아한 것이었다.
나 역시도 그랬다.
흥분한 내가 뒤로 돌아서 계약서에 사인을 했을 때 사람들의 양분된 반응은 절정에 달했다.
최고가 되겠다는 신념.
그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할 각오가 된 악당. 그게 나였다.
러셀이 마이크를 손에 쥐었다.
“그렇게 네가 저지른 악독한 짓을 정당화하려는 속셈이군.”
녀석 역시도 그랬다.
“넌 선을 넘었어. 네 옆에 서있는 나를 믿어주지 않았지.”
나에게 분노와 씁쓸함이 뒤섞인 말을 내뱉고 사인을 끝마쳤다.
“난 날 믿어주는 사람들을 위해서 싸우겠다. 신.”
그는 친구를 잃었고, 적수를 얻었다. 사람들은 고독한 선역에게 환호와 동경의 시선을 보냈다.
이제 남은 건 경기뿐이었다.
* * *
네버 이스케이프는 매사추세츠 주의 보스턴에서 개최되었다.
쇼는 일요일 저녁에 개최되었다.
미리 보스턴에 도착한 나는 조용한 호텔 방에 앉아 조지아 주의 아틀랜타로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은 금방 받았다.
[여보세요?]
“잘 지냈어요?”
[신? 오랜만이네요. 저야 잘 지냈죠. 그쪽은 좀 어때요?]
목소리에서 반가움이 묻어나왔다. 하지만 그것은 이내 날카로운 질문으로 변해 날 쿡 찔렀다.
[버닝콩은 왜 그래요?]
“……예?”
[아니, 지난주에 그…… ‘브라 앤 팬티’ 매치? 딸하고 보는데 민망해서 죽는 줄 알았어요.]
“그, 그렇군요.”
[물론 GCW에서도 그런 게 없지는 않았지만, 성적인 농담 정도였지 벗지는 않았다고요!]
괴로워하는 에보니.
[이래서야 계속 봐도 괜찮은 걸까 싶어진다고요, 버닝콩…….]
“계속 봐줄 거예요?”
나는 웃으며 물었다. 거기에 잠시 침묵하던 에보니는 미묘하게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했다.
[딸애가 보자면 봐야죠.]
“하하, 옆에서 시청 지도 좀 잘 해주세요. ……그래서 말인데.”
나는 잠시 헛기침을 했다.
“이번 일요일에 시간 있어요?”
[예? 있기야 한데…….]
“두 사람을 네버 이스케이프에 초대해도 될까 싶어서요.”
[저와 제시를요? 저야 감사하죠! 하하, 근데 이거 너무 특권 아닌가? 프로레슬러랑 친구라서 표까지 공짜로 받게 되다니.]
“부담 갖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렇다면 염치 불구하고 초대에 응할게요. 요새 제시가 어디 놀러가자고 성화였는데, 정말 고마워요.]
“별말씀을.”
은혜를 갚고 싶었다.
에보니와의 만남이 마음을 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됐으니 말이다.
거기다 내가 링 위에서 지금까지 만들어온 이야기의 결말을, 윌리와도 관계가 깊었던 그녀에게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기대해도 좋을 거예요.”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무렴. 우리의 경기가 네버 이스케이프의 메인이벤트였으니까.
* * *
사각의 링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3미터 높이의 철창이었다.
네버 이스케이프에 앞서 설치팀이 리허설을 하는 도중이었다.
링에 찾아온 나는 철창이 설치되고 해체되는 광경을 확인했다.
견고한 철창은 선수들이 긴 대립을 끝내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네버 이스케이프’라는 페이퍼뷰의 이름처럼 이곳에서는 빠져나갈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즉, 그만한 각오를 해야 했다.
마지막 경기였기에 격렬한 범프도 많이 정해뒀다. 우리는 관객들을 미치게 만들 생각이었다.
내가 항상 말하는 것처럼 누군가 이 경기를 보고 심장마비로 죽는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뭐, 실제로 그러진 않겠지만.’
일종의 비유다.
하지만 어쨌든, 아까부터 심장이 두근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내 첫 메인 페이퍼뷰에서의 경기가 무려 메인이벤트라니!
전생에는 꿈도 꾸지 못했다.
나는 항상 무시를 당했다.
인종적인 문제도 컸고, 그걸 이겨낼 만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나는 나 자신으로서 여기 올라와 사람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전생에 날 무시했던 이들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쿵푸나 하는 동양인’이 우뚝 선 셈이었다.
‘잘해보자고.’
날 믿고 기회를 준 많은 사람들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있자니, 옆에 선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러셀이었다.
“신.”
“왜?”
“내일은 잘 부탁한다.”
“……나야말로.”
녀석은 내게 벨트를 넘겨받을 예정이라서 자진해 위험한 범프를 많이 수행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걸 받아주는 건 나였다. 우리는 내일 하나처럼 협력해 일을 풀어나가야만 했다.
까딱하다가는 엄청난 부상을 입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리스크를 짊어져야 결과가 더욱 좋아지는 순간 역시 존재했다.
지금처럼.
만약 내일의 경기가 사람들에게 좋은 반응을 이끌어낸다면 우리 모두가 승리하게 되는 셈이었다.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우리는 이내 가볍게 주먹을 맞부딪혔다.
* * *
네버 이스케이프.
총 입장객 5만의 대형 쇼.
직원들이 분주하게 쇼를 진행하는 가운데, 대부분의 선수들은 긴장을 감추려 노력하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아무리 경력이 오래되어도 이렇게 많은 관객들의 사이에 서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쩌렁쩌렁한 소리에 다들 긴장했다. 이런 날은 모니터링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난 조금 달랐다.
회귀한 뒤로 끝없이 되뇌고 있는 자기 세뇌의 영향인 것일까.
‘나는 최고다.’ 이거 말이다.
물론 실제로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다. 세상에는 나 말고도 훌륭한 레슬러들이 많이 존재했다.
아직까지는 말이다.
나는 언젠가 그들을 넘어서 반드시 최고가 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일단 스스로 최고라는 의식을 지니는 게 중요하다……는 마음가짐인 것이다.
챔피언이 바뀔 때마다 사람들은 선악에 관계없이 선수들에게 커다란 성원을 보내주었다.
그렇게 경기가 하나하나 진행된 끝에, 세미 메인이벤트인 월드 챔피언십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앞서 태그 팀 챔피언을 따냈던 레볼루션의 멤버들이 나와 심판의 시선을 끌어주었다.
전형적인 악역의 승리 공식.
그저 그런 경기였다.
‘바뀌질 않는구먼.’
헌터는 올드스쿨한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 티파니 맥센과 결혼한 뒤 경영자가 되면서 변했지만.
어쨌든 더 볼 것도 없겠다 싶었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날 부르기 위해 온 직원을 따라 고릴라 포지션으로 이동했다.
메인 쇼의 직원들이 분주하게 쇼를 진행하고 있는 와중, 반가운 얼굴이 하나 눈에 들어왔다.
바쿠였다.
“왔냐? 챔피언.”
“뭐에요. 계속 안 보이더니.”
“아, 뭣 좀 확인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뭘요?”
“네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바쿠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객석의 위치가 그려진 지도. 바쿠는 그중 한 구역에 동그랗게 펜으로 표시를 해둔 채였다.
“너희를 보러 온 가족 관객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반응을 끌어내고 싶으면 이쪽을 사용해라.”
“……바쿠.”
“너와 함께할 수 있는 것도 마지막이잖냐. 이제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 정도밖에 없다.”
“감사합니다.”
나는 객석의 위치를 확인한 뒤 바쿠와 가볍게 어깨를 부딪쳤다.
그는 GCW 생활에 있어서 거의 대부분을 함께했고, 내게 언제나 큰 도움을 준 사람이었다.
“후회 없이 해라.”
“예, 바쿠.”
내 대답을 들은 그가 반대편에 서있는 러셀을 향해 다가갔다.
나는 일부러 러셀을 무시했다.
그 역시도 그랬다.
중요한 시합인 만큼 감정을 다잡은 채 올라가고 싶었다.
때문에 딱히 대화는 없이, 얼마 지나지 않아 경기가 끝났다.
링 위에서 벨트를 치켜드는 헌터. 부커-리가 먼저 링을 떠나 고릴라 포지션 안으로 들어왔다.
“허억, 허억…….”
20분간의 사투를 마친 그에게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내가 느끼기에는 형식적이었다.
그것을 아는지 부커-리는 대강 손을 들어 보이고는 곧바로 백스테이지로 휙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헌터!”
“최고였습니다!”
트리플H와 레볼루션 멤버들이 들어오자 사람들은 거의 대통령 당선인이라도 보듯 소리쳤다.
‘헐겠다, 헐겠어.’
나는 혀를 차며 생각했다.
현재 이곳의 직원 대부분은 헌터의 파벌에 속한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이와 같은 반응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헌터는 무슨 왕이라도 된 듯 경배 받았다.
벨트를 어깨에 멘 그는 이윽고 내 앞으로 다가왔다. 메인이벤트를 빼앗겨선지 표정이 안 좋았다.
“……네 차례다.”
“그렇군요.”
“뭔가 보여주겠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적당히 대답했다.
굳이 대놓고 척을 질 마음은 없었다. 단지 그가 이를 드러낸다면 거기에 맞서 싸울 생각일 뿐.
내 대답에 지그시 시선을 보내던 헌터가 이내 돌아섰다. 그 뒤를 레볼루션 멤버들이 뒤따라갔다.
광고가 이어지는 동안, 경기장 주변에 철장이 설치되었다.
별건 아니었다.
천장에 분리된 채 매달려 있던 철장이 내려왔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시설팀 직원들이 그것을 각각 링 사이드에 고정했다.
그로서 만들어진 철장.
지켜보던 관객들이 그 광경만으로도 크게 환호를 보냈다. 나는 광고가 끝나는 것을 확인했다.
카메라가 페이퍼뷰가 이루어지고 있는 경기장의 모습을 비췄다.
무려 5만의 관객.
압도적인 광경 속에서 링 벨이 세 번 울렸다. 그리고 장내 아나운서가 메인이벤트를 소개했다.
[다음에 진행될 경기는 GCW 챔피언십, 케이지 매치입니다! 핀 폴, 서브미션이나 경기장 밖으로 탈출하는 선수가 승리합니다!]
“러셀, 준비해주세요.”
지시를 들은 러셀이 앞으로 나섰다. 그 뒤에 선 바쿠가 등을 두드리며 러셀을 격려해주었다.
날카로운 기타 리프와 함께 러셀의 테마가 연주되기 시작했다.
커튼을 걷고 나선 그가 링 위로 올라갔다. 그다음으로 챔피언인 내가 입장을 준비했다.
“신, 행운을 빈다.”
바쿠는 나에게도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싱긋 웃은 나는 성스러운 덥스텝에 맞춰 밖으로 나갔다.
암막 커튼 한 장의 틈.
그 너머로 나서자 분위기가 순식간에 180도 가량 뒤바뀌었다.
야유와 환호가 열기와 함께 뒤섞인 이 경기장 특유의 냄새.
사람들의 반응은 마치 거센 파도처럼 내 안을 뒤흔들어놓았다.
긴 입장로의 끝에는 철장 안의 러셀이 날 노려보며 서있었다.
새삼 벨트의 무게감을 느꼈다.
시청자 수는 실시간 송출이 이루어지는 미국과 캐나다, 유럽을 합쳐 500만이 넘었다고 들었다.
거기에 나중에 방영될 아시아나 남아메리카, 중동 같은 국가를 포함한다면 훨씬 커질 것이다.
규모 자체가 달라졌다.
러셀과 나의 스토리를 종결짓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장소였다.
그렇게 앞으로 걸어가자 링 바로 앞의 자리에서 환호하고 있는 에보니 모녀의 모습이 보였다.
에보니가 날 보며 소리쳤다.
“꼭 이겨요! 신!”
“……악당을 응원하는 거야?”
실제로 에보니의 딸인 제시는 날 보는 표정이 영 뾰로통했다.
쓰게 웃은 나는 그대로 모녀를 지나쳐 링에 올랐다.
나를 노려보고 있는 러셀.
그 앞에서 벨트를 하늘 높이 들어 올리며 도발을 감행했다.
경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러셀과 나는 초장부터 치고받으며 서로에게 엄니를 드러냈다.
레슬링이라기보다는 싸움에 가까웠다. 거친 공격에 심판이 끼어들어 몇 번이고 경고를 주었다.
“주먹 쓰지 말라고!”
“이게 무슨 주먹이야!”
버럭 소리를 지르며 항의한 나는 링 포스트까지 밀어붙인 러셀을 향해 다시 주먹을 휘둘렀다.
하지만 공격은 쉽게 막혔다.
공수가 눈 깜빡할 사이에 전환되었다. 우리는 그런 식으로 서로에 대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사전에 머리를 굴려가며 만든 각본이었다.
어쨌든 경기가 시작되면 몸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런 면에 있어서 러셀과 나는 이미 충분히 합을 맞춰보았다.
“바디 슬램.”
맞아주고.
“킥.”
공격했다.
사람들은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열광했다. 둘 다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공방이 이어졌다.
그리고 끝내 첫 번째 주도권은 챔피언인 내가 가져가게 되었다.
짧고 호쾌하게 내려찍는 스파인 버스터. 이후 이어진 엘보 드롭.
고통에 몸부림치는 러셀의 안면을 쓰러진 상태에서 후려쳤다.
사람들이 야유를 보냈고, 잔혹한 공격을 이어나간 나는 이어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갑자기 공격을 멈추고 일어서자 관객들이 의아해했다.
말했듯 철장 경기에는 탈출도 승리로 인정한다는 룰이 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철장을 붙잡고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Boooooooooooooooooo!]
격렬한 싸움을 기대했던 관객들은 나를 향해 큰 야유를 보냈다.
확실히 그럴 만했다. 나는 대립하는 내내 철장 안에서 러셀을 박살 내겠다고 공언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늘은 러셀이 주인공이었다.
“어딜, 가?”
바지를 턱 붙잡혀 돌아보자 러셀이 숨을 몰아쉬며 서있었다.
당황해 눈을 동그랗게 뜬 내 다리 사이로 러셀이 머리를 넣었다.
파워 밤.
몸이 번쩍 들린 나는 그대로 널찍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콰앙!
범프 링이 울리며 난 시원한 소리에 관객들이 환호를 보냈다.
[Russell! Russell! Russell!]
어마어마한 통증 속에서 나는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