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지금 어디야?”
[볼티모어에 있어.]
워싱턴 바로 옆이었다.
그러고 보니 신년을 기념해서 버닝콩과 랙다운이 합동 하우스 쇼를 개최한다고 했었던가?
‘필라델피아였지.’
메일로 받은 메인 쇼의 스케줄을 기억해낸 나는 말을 이었다.
“잠깐 나올 수 있어?”
[응? 어디를?]
“워싱턴과 볼티모어 사이니까 컬럼비아쯤이 낫겠지. 지금 그쪽으로 가고 있으니까 모레 저녁쯤에 그곳에서 만나자고.”
[아, 알았어. 나갈 수 있을 거야. 아마도…….]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응, 고마워.]
순순하게 대답하는 시나.
전화를 끊은 나는 엑셀을 밟았다. 중형 세단의 바퀴가 힘차게 회전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시나가 방출 위기라고?’
어이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가 누구인가.
숀 시나.
일반적인 레슬러도 아니고, 북미 프로레슬링 역사상 네 손가락 안에 꼽히는 아이콘인 그였다.
그런데 그렇게 될 녀석이 지금 방출 당할 위기에 처해있다니.
‘왜지?’
전생에서도 랙다운에 처음 콜업 된 이후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며 팬 페이보릿이 된 시나였는데.
이렇게 된 이유를 프로듀서라도 된 양 잠시 고민해보던 나는, 일단 차근차근 상황을 정리해보았다.
콜업은 비슷한 시기였다.
거기에 전생과 달리 시나는 러셀과 나에게 제대로 기본기를 배운 뒤에 위로 올라갔다.
‘실력은 더 나을 텐데.’
그렇다면 기믹 문제인가?
아니, 오히려 이쪽도 오히려 더 나았다. 와이엇 패밀리는 랙다운에서 잘 나가고 있었으니까.
‘아니.’
생각해보면 그 정보도 몇 달 전의 것이었다. 연말에 일이 바빠서 전혀 랙다운을 보지 못했지.
‘무슨 일이 있었나?’
한번 알아봐야겠다 싶어 난 다시 시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 여보세요?]
“어, 하나 더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전화했는데. 너 요새 쇼는 잘 출연하고 있는 거 맞지?”
[어? 음……. 아니.]
“뭐?”
[와이엇의 수하 자리에는 나 말고 다른 둘이 들어갔어. 에디까지 포함해서 이제는 총 넷이지.]
“너만 잘린 거야?”
[응, 에디는 잘하니까. ……나는 새 기믹을 받기로 했는데 딱히 이야기가 나온 건 없어.]
그 말을 듣자 이해가 간다.
시나는 자신감을 잃었다.
생각해보면 그럴 법했다.
시나는 신인 시절에 그다지 자신감 넘치는 선수는 아니었다.
‘예의 바르고, 묵묵히 노력하며 성장해 결국 최고에 이르렀지만.’
20대 초반에는 그저 근육을 좋아하는 평범한 청년에 불과했다.
때문에 혼자서 정글 속에 버려진 채로는 버티기 힘든 거겠지.
‘와이엇 패밀리의 일원으로 콜 업 된 게 도리어 독이 됐어. 이건 확실하게 해결을 해줘야겠군.’
행여나 시나가 프로레슬링은 관둬 역사가 바뀐다면 내가 가지고 있는 지식은 무용지물이 된다.
“시나, 일단 그쪽에서 보자고.”
[아, 알았어.]
“너무 쫄지 마. 잘 될 테니까.”
밝게 말하며 나는 잔뜩 주눅이 들어있는 시나를 격려해주었다.
* * *
그렇게 도착한 컬럼비아.
전생에서부터 줄곧 느껴오던 것이지만, 미국의 도시는 하나하나가 마치 동떨어진 섬 같았다.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늘어선 주홍빛 가로등이 어둠을 떨쳐내고 있었다. 나는 어딘지 약간 으스스한 감각에 휩싸였다.
어쨌거나 시나와 약속한 시간을 꽤 넘겼던 터라 계속 운전했다.
시내의 버거 하우스.
안으로 들어서자 창가 쪽 자리에 앉아있는 시나가 보였다.
배고팠는지 먼저 햄버거를 시켜 먹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문제는, 저 자식, 몸에 끔찍이 나쁜 마운틴 두를 마시고 있다.
그것도 칼로리가 두 배라 두 배로 나쁜 더블 마운틴 두를.
“신, 여기야.”
“……많이 힘든 것 같구나.”
“나? 아니야. 괜찮은데.”
자리에서 일어선 녀석이 손을 뻗었다. 거기에 기름이 번들거려 나는 설마 싶어 다시 보았다.
분명 보였다.
감자튀김의 흔적이.
“너 설마…… 감자튀김도?”
“여기 아주 맛있게 잘하던데. 해고되면 여기만 와야겠어.”
한숨을 내쉰 나는 시나와 함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일단 버거와 샐러드, 생수를 주문했다.
그런 내 모습을 본 시나는 씁쓸한 미소를 입에 머금었다.
“여전하구나.”
“프로로서 당연하지.”
“나도 너처럼 뭐든 잘할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왜 그래? GCW에서도 잘했고 네 몸은 아직도 멋져, 인마.”
상황이 정반대가 되었다.
미래의 아이콘께 이런 말을 듣자 어딘가 좀 부끄러웠다.
“……벽에 부딪힌 기분이야.”
“그래?”
“응, 너희랑 할 때처럼 하면 잘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어.”
“사는 게 그렇지.”
“이 일을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나봐. 메인 선배들은 GCW 때와 달리 전혀 친절하지도 않고.”
“……뭔가 착각하는데. GCW 인간들이 친절했던 건 착각이야. 그리고 그게 대체 뭐가 중요해?”
나는 따끔하게 이야기했다.
“러셀과 내가 이야기했잖아. 너 괜찮게 한다니까? 선배들이 뭐라고 하건 신경 끄고 널 믿어.”
“으, 으응…….”
“기믹은 생각해둔 거 있어?”
“악역을 하라고 해서 일단 나쁜 사람들을 생각해봤는데.”
“어, 말해봐.”
“세금징수원.”
“썼어.”
“변호사.”
“애매해.”
“타락한 기업가.”
“구려.”
그보다 그런 놈이 대체 뭐가 아쉬워서 레슬링을 한단 말인가?
안 되겠다.
이렇게 시나의 말만 듣고 있다가는 이쪽이 속이 답답해 죽을 것 같았다. 어서 답을 알려줘야지.
“일단 락커룸 선배들하고 좀 친해져보자. 너 혹시 노래나 악기 연주 같은 건 할 줄 아냐?”
“저, 전혀.”
“랩은?”
“해본 적 없는데.”
“……없다고?”
“응.”
“해봐.”
설마 천재 쪽인가?
랩을 해본 적이 없는데 단 한 번에 사람들 눈에 ‘이 녀석 기믹으로 삼아야겠다.’인 수준인 거야?
“어, 지금?”
“그래, 해봐.”
내 말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가볍게 헛기침을 하는 시나.
그리고 랩이 이어졌다.
“어, 음. H-신 정말 잘생겼고 그리고 랩도 잘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해. 그게 바로 펄펙. 그게 바로 인생의 진리지.”
“…….”
“미, 미안.”
뭐지?
시나가 이 정도로 랩을 못한다고? 아닌데? 분명히 시기상으로 따지면 랩퍼 기믹을 쓸…….
“선배들이 락커룸에서 뭐 좀 할 줄 아는 거 없냐고 해서 나도 가사를 써볼까 하긴 했는데.”
“가사를 써?”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그래서였나.
전생에도 그랬다. 시나는 언제나 펜과 종이를 가지고 다니며 가사를 적고는 했지.
‘그런 건가.’
프리스타일이 아니라 가사를 써둔 다음에 랩을 한 거다. 이 역시도 무던히 노력했던 것이었군.
결론이 나왔다.
‘일단 시나가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도록 좀 도와줘야겠군.’
그 방법은 결국 랩이었다.
나는 고민에 빠져 있는 시나를 향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시나, 일단 가사를 쓰자.”
“랩을 하란 말이야?”
“그래, 내가 봐줄 테니까 가사 쓴 거 있을 때마다 보내봐.”
그 말에 나를 믿는다는 듯 시나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잘 될 것이다.
* * *
워싱턴 D.C.의 한 작은 호텔.
방으로 돌아오자 얼마 지나지 않아 시나로부터 문자가 왔다.
침대 위에 누워 그 내용을 확인한 나는 눈썹을 치켜떴다.
‘좋은데?’
역시 이쪽이었구나.
생각해보면 이게 더 타당했다.
시나가 뭐 전문적으로 스킬을 갈고닦은 래퍼도 아니고, 갑자기 프리스타일을 하긴 어렵겠지.
어쨌든, 재능이 있다는 걸 알자 좀 안심이 됐다. 누군가 얼마 지나지 않아 진가를 알아보겠지.
그리고 시나는 원래 역사대로 래퍼 기믹으로 데뷔를 하는 거다.
문제는 그 방식이다.
과거, 80년대와 현재 00년대의 레슬링 기믹 차이를 녀석이 이해하고 써먹을 줄 알아야 했다.
래퍼 기믹을 80년대에 썼다면 진짜 활동하는 래퍼가 나와서 레슬링을 한다는 컨셉이었겠지.
그처럼 80년대에는 만화적인 기믹이 많았다. 치과의사나 세금징수원, 정말 1차원인 캐릭터들.
하지만 00년대에는 좀 다른 방식으로 이에 접근해야만 했다.
80년대 스타일의 기믹이 ‘프로레슬링을 하는 랩퍼’였다면. 00년대의 방식은 바로 ‘랩을 좋아하는 프로레슬러’가 되어야만 했다.
‘시나는 그걸 좀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나중에 전화나 문자로 확실히 설명을 해둬야겠지 싶었다.
그렇게 생각한 나는 멋진 가사라며 시나에게 칭찬하는 문자를 보낸 뒤 곧바로 잠을 청했다.
그쪽은 그쪽이고, 나는 나대로 내일 첫 출근을 해야만 했다.
* * *
다음 날 아침.
경기장에 도착한 나는 일단 가장 먼저 선수 계약을 진행했다.
원래대로라면 계약은 본사에서 정식으로 진행해야겠지만, 나는 미리 내용을 받아보고 현장팀에서 직접 계약을 진행하기로 했다.
말인즉슨, 현장팀에서 날 곧바로 쓰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계약서의 주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연봉 50만(6억) 달러.
2. 일주일에 최대 6일 일한다. 경기는 10개를 넘길 수 없다.
3. 선수의 링네임과 캐릭터인 ‘신’의 소유권은 WWF가 가진다.
4. ‘신’의 키인 188cm를 기준으로 계약서의 내용이 유효할 때, 선수는 체중 100kg, 체지방률 15퍼센트를 유지할 의무가 있다.
5. 페이퍼뷰 출장료는 전체 입장료 수익의 0.005퍼센트를 배분 받는다. 세금은 배분 후 계산한다.
6. TV 쇼에 출연할 시 시청률 수익의 0.001퍼센트를 배분 받는다. 세금은 배분 후 계산한다.
7. 타 회사에서 저작권을 대여해 제작하는 제품(이하 라이센싱 제품)은 수익의 10퍼센트가 배분된다.
8. 회사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하는 제품(이하 머천다이징 제품)은 수익의 25퍼센트가 배분된다.
8. 기믹은 GCW에서 쓰던 것을 그대로 유지한다. 단, 관객 반응이 저조할 시 변경될 수 있다.
9. 기믹을 변경할 시 따르는 비용은 회사가 부담한다. 단, 그 소유권 역시 회사가 갖는다.
10. 선수는 회사에 해가 되는 발언을 할 수가 없다. 인터뷰 내용은 회사에서 검열할 수 있다.
‘복잡하기도 하군.’
하지만 평균적인 조건이었다.
일반적인 신인 선수의 연봉이 20만 달러인데, 50만 달러인 내가 왜 평균적인가. 그것은 각종 판매 실적의 비율에서 기인했다.
WWF는 세계 최고의 프로레슬링 회사였다. 그리고 그 실적은 대부분 선수로부터 발생했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다른 회사에 비해 턱없이 적은 연봉이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 각종 상품 판매 수익을 받아갈 수가 있었다.
어찌보면 WWF는 캐릭터 회사였다. 선수들의 장난감 피규어 같은 건 아주 판매량이 좋았다.
여기서 나오는 돈이 선수의 연봉을 아득히 상회하는 것이었다.
그런 만큼 기본 연봉이 높은 건 사실 별로 중요하지가 않았다.
‘비율은 평범한 수준이야.’
그리고 나머지 조건도 다 일반적이었다. 거기에서 나는 회사가 제시하려는 의도를 깨달았다.
후려치기였다.
일반적인 일이었다. 인디 출신인 내 무지함을 이용하려는 거지.
하지만 이걸 어쩌나.
나는 이 계약서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단박에 이해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발생하는 다른 문제는 이에 대한 해결법이었다.
‘불공정 계약서’에 대응하는 건 TV 드라마와는 달리 세련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만 했기에.
“자, 그럼.”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있는 건 현장 팀의 수뇌부들이었다.
“계약서는 어떤가?”
“음,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하하, 신인 선수에게는 무척 좋은 계약이지. 50만 달러. 우리로서도 최대한 노력한 셈이네.”
“감사합니다. 네버 이스케이프에서 최대한 구른 보람이 있네요.”
“아아, 고릴라 포지션에서 보고 있었지. 결말이 아주 멋졌어.”
“사실 그때 기억이 없습니다. 순간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하하하!”
웃음을 터뜨리는 수뇌부들.
전과 달리 무척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참으로 낯짝이 두꺼운 짓이었지만 사회인으로서는 두뇌 회전이 빠른 편에 속했다.
이들이 이렇게 구는 이유는, 티파니 맥센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야욕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GCW라는 사업을 직접 맡아서 확장시키겠다고 말했다.
때문에 앞으로 GCW 출신들이 중용될 가능성이 올라가겠지.
이런 행보에 태클을 걸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밖에 없었다.
그리고 참으로 우연찮게도, 대화를 이어나가던 중 그 양반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자네들 여기서 뭐하나?”
얼굴에 주름이 짙게 새겨진 60대 노인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회색 정장에 건장한 체격은 20대와 별반 다르지 않은 풍모였다.
“회, 회장님……!”
“한참 찾았는데 왜 여기 있어?”
나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회의가 진행 중인데 제멋대로 구는 게 딱 기억하던 그대로였다.
계약에 관한 것도 보고를 했는데 까먹은 것이겠지.
“그리고 넌 대체 누구야!!”
날 돌아보자마자 곧바로 사자후를 시전하시는 우리 회장님.
바트 맥센.
하지만 놀랍게도…… 그가 지금 계약에 도움이 되어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