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76화 (76/634)

76.

“신인이라고?”

바트가 눈썹을 찡그렸다.

이 시기, 그는 쇼에서 입은 부상으로 한 달간 병원에 입원한 뒤, 얼마 전 막 퇴원한 상태였다.

따라서 나를 보는 건 처음일 터였다. 뭔가 좀 이상하지 않으냐고? 회장이 자기 쇼도 안 보냐고?

어쩔 수 없었다.

환자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병원에서 프로레슬링과 관련된 컨텐츠를 전면 금지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더해 입원 기간 내내 바트에게 수면제를 먹여 허튼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조절했다.

안 그랬으면 바트는 병원을 탈출해 현장에 복귀했을 양반이었다.

실제로 내장 파열이란 큰 부상을 진통제로 버티며 계속 일하다가 피를 토한 뒤에야 입원했다.

레슬링 너드.

일중독.

금수저 출신.

프로레슬링 역사상 다시는 나오지 않을 악마이자 혁명가.

바솔로뮤 케이브 맥센.

그렇듯, 바트는 일반적인 사람들과는 어딘가 좀 달랐다.

유치할 정도로 지기 싫어했고 자신의 일에 열정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상반된 평가를 낳았다. 무능함과 유능함이 공존된 최악의 독재자가 바로 바트였다.

업계에 혁명을 가져올 정도의 천재였지만, 나이를 먹은 뒤의 변화에는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가 원하는 탑은 언제나 터질 듯한 근육을 가진 백인들 뿐.

시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언제나 자기 방식을 고수했다.

그게 문제였다.

바트는 자신이 좋아하는 프로레슬링 세계를 만들기 위해 온갖 재능 있는 선수들을 묻었고, 경쟁 단체를 사들여 수없이 박살냈다.

자신이 만들어낸 쇼가 옳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차라리 철저하게 사업가적인 마인드였다면 오히려 편했겠지.’

그냥 악덕 기업주 말이다.

하지만 그는 아니었다.

그는 미친 악덕 기업주였다.

거대 기업의 회장이 현장 팀에서 주로 일하며 각본의 최종 결정에 관여한다는 점부터가 그런 사실을 반증하는 부분이었다.

‘여전하군.’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눈.

그럼에 한 번의 기회는 주겠다는 듯 바트는 내게 호통을 쳤다.

“내가 물어보지 않았나? 멍청하게 서있지 말고 이름을 말해!”

갑자기 왜 이러는가?

그 나름대로 처음 만나는 선수를 시험하는 방식이었다. 다짜고짜 먼저 성질을 부리는 것이었다.

기업주가 그러는 만큼 일반적인 선수들은 당황해 절절 매겠지.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

오히려 눈썹을 잔뜩 찡그리며 이렇게 말하는 게 정답이었다.

“그쪽은 누군데 그래요?”

“뭐……?”

“귀청 떨어지겠네. 저는 그쪽과 달리 아직까지 잘 들리거든요?”

침묵하는 바트.

방 안에 있던 다른 임원들도 모두 당혹스럽다는 얼굴이었다.

그야 당연했다.

“자네 지금 누구 앞에서……!”

“누구긴요. 회장님이죠.”

“어떤 분이신지 알면서도 그런 거였나! 당장 사과드리게!”

“……죄송합니다. 회장님.”

나는 순순히 사과하는 척하다 이내 싱긋 웃어보였다.

참고로 바트 맥센은 그런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회장님도 절 모른다고 농담을 하셔서 한번 받아쳐봤습니다.”

“널?”

그가 피식 웃었다.

첫 번째 좋은 신호였다.

“예, GCW의 아이콘이었죠. 신이라고 합니다. 회장님.”

“신인가. 그쪽 쇼는 신경 쓸 겨를이 없어서 말이야. 미안하네.”

바트가 관심을 갖는 건 오직 WWF의 메인. 개중에서도 1군이라고 여겨지는 버닝콩뿐이었다.

“괜찮습니다. 오히려 제게 목표가 부여된 기분이라서 좋군요.”

“목표?”

“회장님이 가장 눈여겨보시는 선수 중 하나가 되고 싶네요.”

“……푸하하하하하!”

바트는 웃음을 터뜨렸다.

“재미있군! 내 앞에서 이런 패기를 보이는 녀석은 오랜만이야!”

“감사합니다.”

“요새 놈들은 내 눈치만 볼 줄 알지 영 그러질 못해서 말이야!”

말했듯, 바트는 옛날 사람이었다. 따라서 그런 모습을 보이는 레슬러에게 호감을 가졌다.

기업 회장이라도 기분 나쁜 소리를 들으면 받아치는 한량들.

옛날에는 대부분의 프로레슬러들이 그렇게 날이 선 자들이었다.

나 역시도 그런 패기를 보여주며 바트를 만족시킨 것이었다.

“계약은 잘 진행하고 있나?”

“회장님 일정이…….”

“기다리라고 하게.”

짧게 받아친 그가 상석을 빼앗았다. 유도한 대로의 움직임에 나도 옳다 싶어 자리에 앉았다.

일단, 내가 바트 맥센을 자리에 앉게 한 이유는 계약서에 한 줄 정도를 추가하고 싶어서였다.

계약서를 보고 새삼 깨달았다.

역시 이 회사는 양심이 없다. 다른 일반적인 회사와 마찬가지로.

그렇기 때문에 회사에서 날 묻으려고 해도 빠져나갈 길을 만들어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비율 문제는 내년에 해결하면 그만이었으니 말이다.

‘그보다 중요한 건 내게 선수로서 얼마나 자유가 보장되는가.’

그렇게 결론을 내릴 즈음, 계약서를 확인한 바트가 싱긋 웃었다.

“50만 달러. 챔피언 출신답군.”

“예, 덕분에 제 알량한 자존감에 바람이 좀 찰 수 있었습니다.”

“뭘 고민하나? 사인하게.”

“그전에 여기 계신 분들께 뭘 좀 여쭤보고 싶었거든요.”

“여쭤봐?”

“예, 아무래도 세계 최고의 회사인 만큼 일하는 방식이 이전과는 다르지 않겠습니까? 거기에 관해서 좀 들어두고 싶었죠.”

“자네, 감이 좋군.”

바트가 눈을 빛냈다.

“우리는 철저한 분업을 지향하지. 인디 쪽에서는 선수 혼자서 모든 것을 해야 했을 테지만. 우리는 각 팀이 선수들을 서포트하지.”

경기 내용, 마이크워크, 각본, 프로모 촬영, 모든 게 그랬다.

인디와는 완전히 대척점에 서있는 셈이었다. 그리고 그 중간쯤에 있는 것이 GCW의 방식이었다.

GCW에서는 선수들을 신용하고 애드립이나 적극적인 아이디어 제출을 용인해주는 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기회를 잡아서 잘 해올 수 있었던 거고.

하지만 여기는 달랐다.

웬만큼 짬이 차지 않는 이상은 철저하게 지시를 따라야만 했다.

자신의 재능을 꽃피워보지도 못하고 지는 선수가 수두룩했다.

‘내가 할 건 간단하다.’

머릿속을 정리한 나는 바트의 눈을 똑바로 보며 입을 열었다.

“사실, 좀 걱정되는군요. 회장님 같은 분이 제 각본을 신경 써주실 것도 아닐 테니 말이죠.”

“내가?”

“예, 전 회장님께서 쓰신 각본이 정말 멋지다고 생각하거든요.”

“호오, 뭘 좀 아는군!”

환하게 웃는 바트.

여기서 정확하게 해두자.

아이러니하게도 WWF 역사상 가장 화려한 시대였던 락콜드의 각본은 바트의 작품이 아니었다.

그가 좋아하는 건 보다 전통적인 캡틴 로건과 같은 영웅이었다.

나는 그의 간지러운 부분을 살살 긁어주며 호감을 얻어냈다.

“요즘 올라오는 각본은 영 마음에 드는 게 없어. 그러니까 선수들도 다들 기가 죽어서 지내지!”

“그런 의미에서 좀 걱정이네요. 저보다 감도 없는 사람들이 제 각본을 맡으면 망하는 거잖아요.”

“……자유를 원하는 건가?”

이해가 빨랐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예.”

“책임은?”

“회사에서 져야죠.”

“신인에게는 준 적이 없었던 파격적인 조건을 원하는 게로군.”

바로 그랬다.

‘각본 통제권’.

그렉 하트 정도 되는 고참 선수들만이 보유한 권한이었다.

그들은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각본을 거부할 권리를 가졌다.

하지만 뭐, 내가 양심 없이 그 정도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단 몇 마디면 충분합니다.”

“뭐?”

“제가 링 위에서 말할 때 정해진 각본 외에 자유롭게 몇 마디를 할 수 있다고 명시해주십시오.”

“흐음…….”

“물론, 각본을 부정하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각본을 좀 더 보강할 만한 이야기를 하는 거죠.”

“흥미롭군. 솔직히 말해 이런 조건을 말한 건 자네가 처음이네.”

그렇겠지.

나는 대답 대신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러자니 바트의 눈이 빛났다. 나는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어쩐지 불길하군.

“이건 어떤가?”

그렇게 생각한 직후, 바트는 별 일 아니라는 듯 이야기를 꺼냈다.

“제시된 연봉을 절반으로 깎고 이 조건을 추가한다면 어떤가?”

“그렇게 하죠.”

나는 곧장 대답했다.

여기서 물러섰다가는 죽도 밥도 안됐다. 바트는 지금 이 물음을 통해 날 시험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정도의 가치가 있나?”

“사실, 말 몇 마디에 수십만 달러의 가치가 있을 리가 없죠.”

“그렇다면?”

“하지만 제가 저를 위해 하는 말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크흐흐,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친구군. 아시아인만 아니었으면 당장 벨트를 줘봤을 텐데.”

“그렇군요.”

“왜, 기분 나쁜가?”

“아닙니다. 뭐, 시청자들을 생각하자면 당연한 이야기죠.”

“그래, 그래. 딱히 내가 차별주의자는 아닐세. 나는 단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제시할 뿐. 그런 의미에서 아직까지 자네는 검증이 되어있지 않은 쪽이니까.”

정확히는 자신이 그런 인간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쨌든, 좋아. 내 개인적으로도 자네의 몇 마디가 어떨지 신경 쓰여.”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아. 연봉에 관한 이야기는 당연히 농담이야.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저도 바트 맥센쯤 되는 분이 그런 푼돈을 굳이 깎으시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시금 즐거운 듯 웃는 바트.

그렇게 잘 끝나나 했다.

하지만 이어, 바트의 표정이 뭔가를 떠올린 듯 순간 굳어졌다.

이럴 때는 괴팍한 걸 넘겨 정말 어디 미친 사람 같아 섬뜩했다.

“……그러고 보니 티파니가 얼마 전 GCW에 개입하겠다고 했지?”

그렇게 기억을 떠올린 바트는 이어 통찰력을 드러내보였다.

“GCW가 떠오른 뒤 자네로부터 솔깃한 제안을 받은 거였군. 이제야 돌아가는 상황을 알겠어.”

바트는 내 산하 단체 시절을 그대로 보지도 않고 읽어냈다.

머릿속의 시청률 정보나 티파니의 이야기, 지금 내 태도. 그 모든 걸 종합해 추려낸 것이겠지.

‘어이가 없군.’

바트에게는 가끔 이렇게 무서울 정도로 날카로운 감을 발휘하는 순간이 존재했다.

문제는 이제 그걸 가지고 뭔가 안 좋은 생각을 한다는 점이었다.

‘불길해.’

나는 그 후로 입을 싹 다문 바트의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구체적으로 찾아왔다.

계약 직후, 나는 회사의 명령에 따라 기믹 변경을 하게 되었다.

지긋지긋한 그 이름.

바로 ‘쿵-퓨리’였다.

* * *

2004년 2월 3주차의 버닝콩.

트리플H의 강점기가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레볼루션의 멤버들이 평소처럼 오프닝을 장식했다.

그 후, 광고 시간이 지나가고 링 위에 먼저 부커 리가 나타났다.

트리플H에게 패배한 뒤 위상이 낮아진 그는 현재 제대로 된 각본을 수행하지 못하는 상태였다.

때문이지 표정도 좋지 못해 자신의 대결 상대를 흥분한 채로 기다리고 있는 상황에서…….

[우화앗~쵸! 앗쵸오오~~!!]

동양의 무술 고수가 기합을 내지르는 독특한 소리가 이어졌다.

관객들이 의아해 돌아보았다. 그리고 이내 큰 충격에 휩싸였다.

“하아도오오오…….”

그리고 막 커튼을 걷고 나온 나는 우스꽝스러운 무술을 선보였다.

새하얀 도복에 머리띠.

만약 러셀이나 바쿠, 할리가 이런 날 보면 당장 기절하겠지.

어쨌든 나로서는 옛 추억에 젖……기는 개뿔. 단지 역겨웠다.

하지만 이게 ‘무엇을 뜻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받아들였다.

링 위의 아나운서가 격렬한 목소리로 내 소개를 해주었다.

[중국 출신! 193cm에 110kg! 쿠우우우웅! 퓨우우우우리!!]

리-라는 말에 맞춰 주먹을 내지른 나는 이어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취하며 링 위로 올라갔다.

부커 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서있었다. 나는 통통 스텝을 밟으며 오버스럽게 그를 도발했다.

이래야만 마지막에 칠 한 줄의 대사가 빛이 나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경기가 시작되었다.

[SIN! SIN! SIN! SIN! SIN!]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러지 말라는 듯 소리쳤다. 하지만 나는 신나게 쿵-퓨리로 행동했다.

그리고 부커 리에게 신나게 얻어맞으며 화려하게 패배했다.

지금 바트는 자신이 생각하는 최악의 데뷔를 내게 주었다. 그로써 나를 ‘시험’하려고 들었다.

내가 과연 계약 당시 주어진 한 장의 카드로 무엇을 할 것인가.

그에 대한 답을 듣고 싶어 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정성스레 기믹까지 변경시킨 것은…… 아니고.

사실, 반쯤은 우스꽝스러운 동양인 캐릭터가 보고 싶을 뿐이겠지.

실제로 나는 바트가 좋아한다는 이유로 끈질기게 회사에서 살아남았다. 그는 항상 내 우스꽝스러운 동양인 행동에 폭소를 터뜨렸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보여주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부커 리가 링 세리머니를 끝마치고 퇴장하는 것을 쓰러진 채 지켜보았다.

사람들이 다들 의아해했다.

보통 패자가 먼저 들어가고 승자가 따르는 게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돌연 링 위에 드러누워 있던 내가 벌떡 일어선 것이었다.

그리고 계획대로 마이크를 건네받은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그리고 이 한마디로 쿵-퓨리라는 캐릭터는 방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사회생활이라는 게 참 힘들군.”

잠깐의 침묵.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내 말을 이해하고 SIN이라는 이름을 드높여 외치기 시작했다.

그로서 쿵-퓨리는 캐릭터가 아니라 신이 사회생활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쓴 가면이 되었다.

나는 관객들의 열렬한 반응 속에서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이거라면 확실히 회사가 나에게 엿을 먹여도 대응이 가능했다.

‘이것 때문에 괜히 이른 타이밍에 엿을 먹게 된 것 같지만.’

아무렴, 이제 바트도 내가 어떤 인간인지 확실히 이해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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