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77화 (77/634)

77.

며칠 뒤, 전화를 받았다.

티파니 맥센이었다.

[미쳤어요?!]

차를 운전하고 있던 중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강렬한 목소리.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지 싶었던 나는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귀청 떨어지겠네.”

[아니, 그딴 기믹을 받아놓고 지금 웃음이 나와요?! 왜 나한테 전화를 하지 않았던 거죠?!]

“……방송은 보고 하는 소리야?”

[요새 일이 바빠서 사진 자료만 봤는데, 아무리 그래도 당신한테 쿵푸 기믹이 말이나 되요?!]

영 말을 안 듣는 아가씨로군.

나처럼 통찰력 깊은 멋쟁이들이 매번 입에 달고 사는 말이 있다.

결국 악마는 디테일에 있는 법.

경기가 끝난 뒤의 마이크 워크를 듣지 못한 티파니는 지금 상황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상황을 바로 잡는 대신 일부러 좀 더 끌고나갔다.

티파니가 우리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좀 궁금했다.

“회장님의 명령이니까?”

[그-으건 나로서도 별수 없긴 하지만……. 우리 그래도 협력하는 관계 아니었어요? 서로 이런 일 있으면 말해주기로 했잖아요.]

서운하다는 목소리를 내는 티파니. 나는 그녀와 맺고 있는 이 미묘한 신뢰 관계를 재확인했다.

“감동적이네요. 그쪽이 GCW를 떠난 날 이렇게 걱정해줄 줄이야.”

[무슨 소리에요. GCW의 탑이었던 당신이 메인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줘야 이쪽 위상도 덩달아 높아져서 이러는 거잖아요.]

“물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쪽은 요새 좀 어때요?”

[저희요?]

“예, 방송은 계속 챙겨 보고 있는데 뭐 달라진 거 있나 해서요.”

[이번에 전국 방송 계약을 추진 중에 있어요. 러셀이 챔피언이니 당신보다는 그림이 살더라고.]

“그렇겠죠. 그 친구는 회사에서 원하는 백인 챔피언이니까.”

[…….]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아무 생각 없이 대답했던 나는 거기에서 순간 실수를 깨달았다.

적당히 웃으며 넘겼다.

“농담이에요, 농담. 아무리 그래도 악역보다는 선역이 회사 간판이 편이 여러모로 낫겠지.”

[내가, 뭐라도 좀 해볼까요?]

하지만 넘기지 못했다.

티파니 맥센은 인종적인 문제를 먼저 이야기한 나를 보고 뭔가 이상하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나 역시도 약간 그것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트라우마 때문인가.’

아무리 지금 이 ‘쿵-퓨리’ 기믹이 회귀 전과는 다르다고 해도, 무의식중에 좀 짜증이 나는 걸까.

‘그럴지도 모르겠군.’

확실히 이 기믹은 최악이었다. 더럽게 인종적이어서 뉴스레터 같은 곳에서도 비판을 쏟아냈다.

그리고 티파니 맥센을 비롯한 내 지인들도 모두가 내 상황이 괜찮은지 걱정할 정도였다.

거기에서 나는 피식 웃었다.

“아뇨, 말했듯이 이건 당신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문제잖아요?”

[그래도 뭔가 해야죠. 당신 재능을 이대로 그냥 썩힐 거예요?]

“그건 아니죠.”

[그러니까 뭐라도 해야죠!]

“진정해요, 티파니. 당신, 한 가지 잘못 생각하고 있으니까.”

[뭐, 뭔데요?]

“전 아직도 신이에요.”

[예?]

“내가 자기 눈으로 보고 판단을 내리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예, 분명히 보고…….]

“쇼를 사진으로 봐요?”

대답하지 못하는 티파니.

결국, 그녀가 제대로 쇼를 시청한 뒤에 다시 통화하기로 했다.

‘그래도 꽤 똑똑한 인간이니까 보면 곧장 내 말을 이해하겠지.’

그나저나 이런 식으로 신경을 써주다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물론, 그런 관심을 기왕이면 더 좋은 쪽으로 써줬으면 하지만.

‘시나라던가.’

오히려 나보다는 그 녀석에게 더 도움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나중에 이야기를 해둬야겠군.’

그렇게 결론을 내린 나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분명 WWF 메인에서의 생활은 GCW와는 크게 달라질 터였다.

티파니 맥센을 필두로 보다 정치적으로 영민하게 굴어야겠지.

단순히 내 편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선수로서 어떻게 소비되는가를 생각해야만 했다.

그걸 잘 해놓은 트리플H 일당은 현재까지 버닝콩의 중심 각본에서 계속해서 활약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지지 않을 우리 GCW 일파의 팀을 만들어야만 했다.

‘일단 랙다운 쪽은 시나를 중심으로 키워나가면 될 테고.’

그를 돌봐주며 이끌어줄 보조 팀을 하나 더 꾸려야만 했다.

거기에 나 역시도.

‘누가 좋을까.’

기분 좋은 고민에 빠진 채 나는 남부로 향하는 차를 몰았다.

* * *

말했듯, 험난한 메인 쇼를 해쳐나가기 위해서는 팀이 필요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랙다운 쪽은 내가 더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자연히 풀려가기 시작했다.

랙다운.

말하자면 2군 쇼였다.

명목상으로는 동등한 위치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송 역사가 더 긴 버닝콩을 위로 쳤다.

그럼에도 랙다운 소속인 것을 더 선호하는 선수들도 많았다.

캐스켓-테이커처럼 암투暗鬪가 싫어 그러는 경우가 일단 있고.

티켓 파워는 적지만 테크닉이 뛰어난 선수들도 바트 맥센을 피할 수 있는 랙다운을 선호했다.

바트는 나름대로 코어 팬을 끌어 모으는 그들도 자기 마음에 안 든다면서 망쳤기 때문이었다.

‘멕시코 출신의 루차도르 선수에게 그쪽 악기인 마라카스를 흔들며 등장하도록 시킨다던가.’

덕분에 반응도 뚝 떨어지게 된 선수들을 ‘원래부터 재능이 없었다.’는 이유로 여럿 내쳤다.

말하자면, 랙다운은 헌터나 바트 같은 소시오패스들로부터 도망친 선수들이 향하는 방공호였다.

‘반대로 나처럼 야망을 가진 선수들은 버닝콩으로 향하는 거지.’

그것이 현재 선수들 사이에 형성된 기류였다. 이것을 알아야만 그들을 이용하는 게 가능했다.

까놓고 말해 버닝콩은 성공을, 랙다운은 프로레슬링을 추구했다.

꿈이 직업이 되면 어쨌든 그 순수성은 훼손되지만, 랙다운 선수들은 그게 좀 적은 쪽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해볼 거 다 해보거나 대충 체념하고 좋아하는 일에 몰두한다는 이야기였지만.

어쨌든 랙다운의 선수들에게 시나의 랩은 신선하게 다가갔다.

거기에 티파니 맥센의 입김까지 더해져 시나는 곧바로 자신의 랩퍼 기믹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여기는 이쯤이면 되겠지.’

한 시름 놓았다.

이제는 내 차례였다.

버닝콩.

여기는 말했듯 프로레슬링보다는 성공의 논리가 우선이었다.

말인즉슨, 사람을 혹하게 만들 때 가장 먼저 말해야할 사실은 이미 정해져 있다는 뜻이었다.

플로리다 마이애미의 경기장.

작은 회의실에서 나는 담당 작가와 각본 미팅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서 제일 먼저 ‘왜 그런 대사를 쳤는가.’에 대한 질문을 들었고, 내 답변은 실로 간단했다.

“반응이 나쁘지 않았잖습니까?”

“뭐?”

아는 인간이었다.

아주 잠깐 만났을 뿐이었고, 20년이 지났지만 기억이 생생했다.

눈앞의 이 남자는 실적 부족을 이유로 얼마 가지 못해 회사에서 해고 당하기 때문이었다.

지금도 스트레스를 받는지 눈 밑이 시꺼먼 게 인상적이었다.

그는 현재 내가 했던 일을 보고는 무척 화가 난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여유를 부렸다.

“제 마지막 대사요. 저 나름대로 기믹을 확장시켜본 것이죠.”

“협의되지 않은 사항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기로 했을 텐데요.”

“각본을 부정하지는 않기로 했죠. 실제로 그랬잖습니까? 신나게 얻어터진 다음에 힘들다고 말한 게 각본을 부정한 건 아니죠.”

“……덕분에 저는 며칠 동안 잠도 못 자고 고민을 하게 됐죠.”

안 그래도 잘리기 직전의 상황에 나 같은 신인을 맡게 되어 그는 무척 좋지 못한 얼굴이었다.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잖아요. 옳은 일을 하면 그만이죠.”

“……까놓고 말하지. 애송이.”

작가가 눈을 부라렸다.

거기다 말을 깠다.

이 자식이.

“네 생각은 알겠어. 신이라는 기믹을 되찾고 싶은 거겠지? 그 때문에 이런 짓을 벌이는 거고.”

“해석하기 나름이죠.”

나는 싱긋 웃으며 받아쳤다.

“하지만 사람들이 왜 절 보고 환호했는지 모르시진 않겠죠.”

“그야 알지. 네가 쿵푸 멍청이의 탈을 쓰고 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한 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기랄, 들어보라고. 신.”

작가가 날 그 이름으로 불렀다.

“나로서도 모르는 건 아니야. 하지만 바트가 직접 정해준 기믹이잖아! 그걸 다짜고짜 깨고 신으로 돌아가게 할 순 없다고! 그런 제안서를 올렸다간 바로 잘릴 거야!”

“그럴 필요는 없죠.”

“뭐?”

“바트 똥구멍의 진액이나 빨면서 파리 목숨을 연명하시렵니까? 아니면 이야기에 대해서 빠삭한 당신의 눈을 믿으시겠습니까.”

“…….”

“작가 출신이잖아요. 그런데도 들어와서 단 한 번도 자기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죠. 안타깝게도.”

“그, 그걸 어떻게…….”

“그렉이 말해줬어요.”

나는 구라를 쳤다.

“좋은 작가가 있는데 쓰이지 못해서 안타깝다고요. 그런데 우연히도 제 작가가 되어주셨군요.”

“그, 그렉이…….”

“작가님.”

나는 여유롭게 말했다.

“어차피 이제 당분간 협력하게 된 관계 아닙니까. 우리 서로 융통성 있게 서로를 위해 보자고요.”

“하지만 회장님이…….”

“아마 그 양반도 당분간은 지켜보지 않을까 싶군요.”

“왜, 왜죠?”

“제가 계약서에 조항을 추가했을 때 허락한 게 바트거든요.”

작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가 어떻게 할지 시험해보려고 쿵-퓨리 기믹을 준 거겠죠. 하지만 이렇게 살짝 꼬아서 보면 참 재미있는 캐릭터 아닙니까?”

“쿵-퓨리가요?”

“정확히는 쿵-퓨리의 탈을 쓰게 된 신이 말이죠. 있을 법한 일 아닙니까. 회사에서 원래 계약과는 다른 일을 제시했는데 울며 겨자 먹기로 할 수밖에 없는 상황.”

“어, 그러니까……. 이 만화 같은 기믹에 현실적인 이유가 섞여 있음을 보여주자는 거죠?”

“예, 다들 즐거워할 겁니다.”

“흐음…….”

내가 비전을 제시하자 작가는 조금 전과는 달리 진지해졌다.

고민에 빠진 그가 거대한 노트북에 몇 글자를 써내려갔다.

사실 이건 운이 참 좋았다.

이렇게 무언가 다급한 사람일수록 성공을 바라고, 따라서 내 이야기에 솔깃할 가능성이 크니까.

나는 그렇게 내 트라우마가 된 친구를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좀 다를 거다.

* * *

그 주의 버닝콩.

각본은 통과되었고, 나는 쇼 중간쯤에 홀로 링 위로 올라갔다.

오히려 바트의 시험이 득이 되었다. 나는 쇼에서 무려 5분의 세그먼트 시간을 배정 받았다.

일단은 개그 선역.

그게 쿵-퓨리의 포지션이었다.

[SIN! SIN! SIN! SIN! SIN!]

링 위에 오르자 관객들 중 몇몇이 내 이름을 크게 소리쳤다.

하지만 마이크를 쥔 나는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동시에 한국어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에 순간 입을 다문 관객들. 그 앞에서 나는 인종차별적 뉘앙스가 있는 중국식 영어 발음을 구사했다.

“이게 쿵-퓨리의 출생지 말로 안녕하세요, 라는 뜻이다.”

사실 아니지만.

“내 이름은 쿵-퓨리. 계약서에 사인을 잘못…… 아, 아니. 동양의 먼 컨츄리에서 온 위대한 쿵푸 워리어다. 안녕하세요.”

다시 인사.

사람들이 폭소했다.

개중 몇몇은 아예 나를 따라 허리를 숙여 인사할 정도였다.

“어쨌든, 나는 전 세계에 쿵푸 레슬링을 가르치기 위해 이곳에 왔다. 가장 먼저 너희 미국 사람들에게 정권을 가르쳐주지.”

그런 식이었다.

사람들은 내 유창한 마이크워크에 흥미를 가지며 이야기를 경청했다. 나는 그 앞에서 현실과 각본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물론 이 현실 또한 각본이었다.

하지만 ‘신’이라는 캐릭터는 정말로 현실과 밀접하게 맞닿았다.

나의 일부분이었고 그렇기에 나 또한 편하게 말할 수 있었다.

“……이상으로 너희들 역시 계약서에 사인을 할 때 주의 깊게 확인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 그러니 다들 따라해보라고.”

즉석에서 유행어도 만들었다.

[Anyenghaseyo!]

미국인들이 묘한 발음으로 안녕하세요를 따라했다. 거기에 나는 요란스럽게 예를 갖췄다.

주먹을 픽픽 맞부딪힌 뒤 이어 휘두르며 끼요요- 소리쳤다.

그 직후.

시계가 찰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입장 음악이 울려 퍼졌다.

레볼루션.

걸죽한 락 음악은 그들의 거만함을 형상해놓은 것 같았다.

사람들이 커튼을 걷고 나온 선수를 알아보고는 야유를 보냈다.

[Boooooooooooooo!]

랜스 오튼이었다.

레볼루션의 막내이자 현 WWF 인터컨티넨탈 챔피언. 회사에서 업계의 미래라고 여겨지는 사내.

녀석은 거만한 표정이었다.

실제로도 거만했다.

‘그럴 때기는 하지.’

이때의 오튼은 딱히 프로레슬러로서 고생을 해본 적이 없는 오만방자한 망나니 그 자체였다.

주변에 오냐오냐해주는 사람 밖에 없어 덜 맞았다고 해야 할까.

이후에는 어떻게든 개념을 찾아 레전드 반열에 오르기는 하지만.

그건 미래의 일.

현재는 사고도 많이 치고 실력도 부족해 문제가 많은 선수였다.

때문에 녀석이 날 보며 씨익 웃었을 때 어딘가 좀 불안했고.

그 불안은 현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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