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78화 (78/634)

78.

이마가 화끈거렸다.

수건으로 계속 지혈을 했지만 피는 멎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튼이 난입한 세그먼트가 끝난 뒤, 나는 심판의 부축을 받으며 고릴라 포지션으로 돌아왔다.

놈이 실수를 했다.

불필요하게 거친 공격을 했고, 덕분에 이마가 찢어졌다.

나는 곧바로 모니터링TV를 확인했다.

오튼은 관객들을 도발하며 마이크워크를 이어나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아무도 내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바트가 한 차례 힐끔거리며 날 돌아본 정도였다.

거기에서 내가 어쩔까?

닉 플레어가 오튼을 보조하기 위해 나왔다. 하지만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무시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이 머저리 새끼들이?’

선수로서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실수가 나왔는데, 왜 지금 다들 그러려니 넘어가고 있는 거지?

그야 당연했다.

오튼은 지금 라이징 스타고 나는 검증되지 않은 신인이었다.

잠시 숨을 고른 나는 흥분을 진정시키고 벽에 기대어 섰다.

그러자니, 날 부축해 들어온 심판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퓨리. 일단 들어가서 지혈부터 하지. 피가 많이 나는데.”

“……할 일이 있으니 끝나고요.”

그 말에 닉 플레어가 돌아보았다. 그 눈에 불안함이 번졌고, 나는 참지 않고 거세게 노려보았다.

이딴 상황을 겪었는데도 와서 미안하다거나. 염려도 해주지 않아? 다 진짜 죽여버리고 싶다.

말인즉슨 오튼의 행동 역시 어느 정도 의도적이었다는 말이다.

녀석은 날 우습게 여기고 동업자로 여기지 않은 것이다.

그런 상황을 겪는다면 목을 비틀어 뽑는 게 정석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가만히 기다렸다.

오튼의 세그먼트가 중반부를 지나가고, 보다 못했는지 직원 중 하나가 퉁명스레 말을 걸었다.

“저기요. 거기서 피 냄새 풍기고 있으면 일하기 불편하거든요?”

“……뭐?”

어이가 없어 되묻자 퉁퉁한 직원은 목이 거북이처럼 들어갔다.

하지만 녀석은 겨우 억누르고 있던 내 분노를 뜯어버렸다. 마치 버거 포장지를 뜯는 것처럼.

“왜, 내가 피 나오는 스테이크처럼 맛있어 보이냐? 네가 돼지 새끼인 건 알겠는데. 아무리 배고파도 지금 내 뚜껑을 열진 마.”

“으, 으음…….”

그런 내 말은 고릴라 포지션 내에 울려 퍼졌다. 팀장 급 몇몇이 바트 맥센을 힐끔 돌아보았다.

하지만 나와 눈이 마주친 바트는 피식 웃으며 상황을 관망했다.

저럴 거라고 생각했다.

저 인간은 내가 이 상황을 꾹 참으면 오히려 실망했을 거다.

왜냐고?

부당한 일을 당하고도 참는 건 ‘남자답지’ 못한 일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말이 맞았다.

나는 이런 상황에서 젠틀하게 넘어갈 정도로 호구가 아니었다.

그제야 상황이 심각한 것을 깨달았는지 닉 플레어가 다가왔다.

정장 차림의 그는 최대한 부드럽게 날 진정시키려고 들었다.

“젊은 친구, 잠깐 괜찮나?”

“뭡니까?”

“화 좀 가라앉히고. 일단 나가서 맥주라도 한 잔 어떤가? 아무리 그래도 여기는 회사야. 너무 그렇게 감정적으로 굴어서는…….”

“제 이마를 까부순 건 감정적으로 한 행동이 아니었나 보군요.”

“그게…….”

“플레어, 전 신인이지만 이 업계의 룰까지 모르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물러선다면 선수 생활 내내 호구 취급을 받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 링 세그먼트를 끝마친 오튼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고릴라 포지션의 상황을 보고는 거만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다들 왜 그래요?”

“네가 나한테 한 짓을 보고 모두 얼어붙은 거지. 랜스 오튼.”

나는 녀석을 향해 다가갔다. 플레어가 어깨를 잡았지만 무시했다.

“이거 보이냐?”

“뭐?”

“네가 링 포스트에 박아서 낸 상처지. 덕분에 이 꼴이다.”

“아, 그거? 조심하지 그랬어.”

거만하게 굴며 직원들의 반응을 살피는 오튼.

난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분명히 지금 이 자리에서 사과를 했다간 자기 자존심에 금이 가겠다는 애새끼 같은 생각이지.

난 곧바로 놈의 멱살을 잡았다.

“자, 잠깐! 퓨리, 좀 진정……!”

“네가 손을 마지막까지 잡아서 이런 거잖아. 잘난 집안에서 그딴 것도 안 배우고 온 거냐?”

“……지금 뭐라고 했냐?”

“가족 이야기가 나오지 좀 정신이 드냐? 남들이 오냐오냐 해주니까 네가 왕이라도 된 줄 알지?”

“이 새끼가!”

오튼이 흥분해 날 밀어냈다.

“둘 다 좀 진정해라!”

플레어를 사이에 끼운 채 녀석과 나는 잠시 뒤엉켜 다퉜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내 머릿속은 냉정하기 그지없었다.

다른 직원들이라면 몰라도 바트 맥센은 오히려 우리의 이런 다툼을 흥미롭게 보고 있을 터였다.

왜냐면 그는 이런 다툼과 날선 분위기가 실제 쇼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실제로 그렇기는 했다.

옛날의 선수들은 서로를 같이 일하는 동료라기보다 벨트를 두고 경쟁하는 상대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이런 백스테이지에서의 다툼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그로 인해 프로레슬링이 주는 현실감은 훨씬 더 증대되었다.

실제로 선수들이 상대방을 진심으로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업계가 커지며 그와 같은 양상은 많이 줄어들었지만, 바트는 분명 그 시절을 그리워할 터.

나는 그걸 재현해주었다.

거기에 날 우습게 여기고 있을 놈들에게도 똑똑히 알려주었다.

내가 이런 부당함을 꾹 참고 있을 멍청이가 아니란 걸 말이다.

나는 오튼의 힘에 밀리는 ‘척’ 고릴라 포지션을 빠져나왔다.

락커룸과 바로 연결된 긴 복도.

선수들이 우리의 소란을 듣고는 웅성거리며 바깥으로 나왔다.

“감히 우리 가족을 모욕해?!”

“하, 네가 그렇게 가족을 위했으면 그딴 실력은 아니었겠지!”

“이 새끼가……!”

“그만해라! 좀!”

우리 사이에 끼어든 플레어가 악을 써댔지만 상황은 쉽사리 통제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이를 빠득 깨문 오튼은 이내 내 멱살을 쥔 채 넘어뜨리려고 했다.

기술도 뭣도 없는 어린애들의 폭력이었다. 물론 나는 그것을 호락호락 당해주지 않았다.

‘선수들도 충분히 모였으니 이제 슬슬 실력을 보여줄 때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멱살을 쥔 오튼의 손가락을 잡고 휙 꺾었다.

순간 통증에 눈썹을 찡그린 오튼이 머리로 들이받으려 들었다.

그 어린애 같은 유치함에 나는 경탄마저 드는 것을 느꼈다.

‘어이가 없군.’

오튼의 머리를 툭 쳐내고 물러서며 동시에 허리를 붙잡았다.

“뭐하는 거냐?”

동시에 옆으로 휙 내쳐버렸다.

190이 넘는 오튼의 거구는 내 기술에 꼼짝도 못하고 말려들었다.

이래 보여도 전생에도, 회귀한 후에는 더더욱 꾸준히 각종 무술을 연마해왔던 나다.

개중에서도 가장 자신이 있는 건 바로 레슬링. 오튼은 정신을 못 차리고 바닥에 휙 처박혔다.

“크흑?!”

하지만 내가 완전히 힘을 주지는 않아서 타박상 정도에 그쳤다.

나는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오튼의 귀에 대고 차갑게 속삭였다.

“여기 아스팔트 바닥이야.”

“뭐…….”

“내가 링 위의 너처럼 했다면 지금쯤 어딘가 부러졌을 거다. 네가 한 짓이 얼마나 위험한 행동이었는지 이걸로 알았겠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말이 통하질 않는군.

오튼은 내게 제압당한 것이 창피했는지 몸을 비틀며 저항했다.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코어 근육을 손쉽게 제압한 나는 오튼을 애처럼 가지고 놀았다.

버닝콩의 선수들이 이내 그런 오튼을 낄낄 웃으며 놀려댔다.

“뭐야. 오튼.”

“먼저 힘쓰더니 결국 이러냐?”

“좀 빠져나와보라고!”

레볼루션의 악명은 선수들 사이에도 유명했다. 더욱이 오튼의 태도에는 치를 떠는 이들이 많았다.

나는 그런 오튼을 참교육하면서 선수들의 호감을 쌓아 나갔다.

“힘 빼. 힘. 허리 나간다.”

“끄그그극……!”

“이거 안 되겠는데. 초크라도 걸어서 기절해봐야 좀 진정하려나?”

“이, 이 개자식이……!”

“같은 선수로서 동업자 정신도 모르는 놈이 이렇게 쪽팔린 일을 겪어야 꼭 정신이 들지?”

나는 오튼의 목과 머리를 양손으로 휘감고 조르기 시작했다.

새하얀 얼굴에 피가 몰리며 녀석은 삽시간에 기절…….

“그만!!”

바로 그 순간 이어지는 노성.

고개를 들자 바트 맥센이 서있었다. 나는 곧바로 오튼에게 건 초크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콜록! 콜록! 커흑!”

“랜스……!”

그 직후, 얼어붙은 채 상황을 지켜보던 플레어가 다가왔다.

선수들은 심각한 보스의 표정에 오튼을 비웃고 놀리던 걸 멈췄다.

개중 몇몇은 자리를 빠져나갔다.

하지만 나는 엉덩이를 탁탁 털며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났다.

바트가 말했다.

“그만하면 됐다. 일단 피부터 지혈하고, 쇼가 끝난 뒤에 보자.”

“바, 바트, 이 자식이……!”

“넌 뭐 잘했다고 큰 소리야? 링 위에서 동료한테 그딴 식으로 했으면 사과를 먼저 해야지!”

뭔가 변명하려던 오튼은 완전히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이거지.’

주변 선수들의 속이 통쾌하다는 듯한 표정에 나는 싱긋 웃었다.

* * *

그렇게 멋진 사고를 친 나는 일약 소문의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그로 인해 은근히 선수들 모두가 나에게 호감을 내보였다.

가장 좋은 점은 샴푸를 두 번 짤 수 있다는 부분이었다.

신인은 경기장에 있는 샴푸만, 그것도 한 번 짜서 씻어야 하는 불문율이 있는데 오늘은 두 번 짜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스포츠 업계의 병폐로군.’

하지만 뭐, 그 나름대로 명확한 기준과 목적을 가지고 세워진 룰이라 적당히 넘어가기로 했다.

샴푸를 두 번 짜면 안 되는 이유는 도저히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고요한 락커룸에서 쇼가 끝나기를 기다린 나는 적당히 시간이 지난 뒤 바트의 사무실로 향했다.

오늘 저녁까지만 경기장을 쓰기로 했기 때문인지 시설팀 직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해체되는 링을 지나쳐 복도 안쪽으로 들어간 나는 이내 바트의 사무실을 찾아 노크를 했다.

“바트, 접니다.”

[잠시만 기다리게.]

그런 말에 나는 퀭한 복도에 서서 들어오란 대답을 기다렸다.

그나저나.

대충 안에 누가 있는지를 알 것 같다고 생각하면, 이건 예언인가?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바트와 이야기를 나눌 만한 인간은 단 한 사람 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트리플H.

경기를 준비하고 있어 오튼과 내 사이에 끼어들지 못했던 그가 바트에게 날 처벌하라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생각이 맞았다.

“…….”

얼마 뒤, 문을 벌컥 열어젖힌 헌터가 밖으로 나왔다. 그 뒤에는 닉 플레어 역시도 함께였다.

나를 보고 기다렸다는 듯 다가온 그가 으르렁거렸다.

“너 나중에 나 좀 보자.”

“마음대로 하시죠.”

“헌터, 가세. 가.”

다행히 레볼루션 내에서 비교적 온건한 플레어가 그를 만류했다.

덕분에 나는 가볍게 눈빛 교환만 몇 번한 뒤, 바트의 사무실에 무혈 입성할 수가 있었다.

“왔나.”

“예, 보스. 선약이 있으셨군요.”

“제멋대로 온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바트는 헌터의 앞에서는 내 처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겠다고 했겠지.

그런 능구렁이 같은 부분만큼은 참 대단한 인간이었다.

사무실은 대부분의 자재를 치워 황량한 상태였다. 정장을 입고 서있던 바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더니 씨익 웃었다.

“속이 후련하더군.”

“정말로요?”

“그래,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되지만 정말 죽여주는 초크였어.”

“그런 놈한테는 제대로 된 교육이 필요한 법이죠. 한 번쯤은 참교육이 필요한 타이밍이었습니다.”

“내 마음 같아서는 그 참교육 각본을 한번 써보고 싶군.”

“하지만 그랬다간 헌터와의 관계가 일그러지지 않겠어요?”

“……자네는 가끔 신인이 맞는 건지 싶은 소리를 할 때가 있군.”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각본가를 구워삶는 것도 그렇고, 쿵-퓨리를 내가 싫어하는 캐릭터로 만드는 것도 그렇고.”

“싫어하십니까?”

“그래, 난 그런 건 영 별로야. 사람들이 웃고 있는데 나만 침통해지는 게 기분이 더럽다고.”

“조만간 회장님께서도 즐거워하실 각본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자네가 날? 나 같은 늙은이를 즐겁게 하기는 어려울 텐데.”

“오히려 쉽죠.”

“자네는 참 신기한 친구로군. 오만한데 기대가 되는 오만함이야.”

“저에게 기회를 주신다면 최선을 다해 부응해보겠습니다.”

“그래, 그거지…….”

나는 기대감에 차 바트를 바라보았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그는 이어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리고 그건 내 예상과는 완전히 달랐다.

“태그 팀으로 푸시를 해주지.”

“예?”

“일단 팀원부터 찾아보게.”

그 말에 잠시 당황했던 나는 이내 바트 맥센의 의도를 깨달았다.

‘레볼루션과의 대립이군.’

현 태그 팀 챔피언은 닉 플레어와 게이브 바티스타였다.

바트는 내가 위로 올라갈 당위성이 있는지를 보려는 것이었다.

그야 물론 태그 팀에 대한 생각을 안 해둔 것은 아니었다.

‘재미있겠어.’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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