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79화 (79/634)

79.

조수석에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던 휴대폰이 한차례 진동했다.

‘……드디어 올 게 왔군.’

차를 운전해 다음 도시로 이동하는 중이었던 나는 대충 무엇인지 예상하고 핸드폰을 확인했다.

헌터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왔다.

[금요일까지 피츠버그에 도착해서 나한테 연락해라. 반드시.]

‘그러면 그렇지.’

랜스 오튼과의 사건에 대해서 뭔가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겠지.

이렇게 나올 것이 너무나도 뻔한 인간이었다. 헌터는 받은 건 반드시 되갚아주는 성격이었다.

바트 맥센이 ‘맥센’의 이름을 위해 티파니를 비호하듯, 헌터 역시도 자신이 리더로 있는 레볼루션과 백스테이지 파벌의 안위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오튼에게는 그런 동양인에게 당했냐면서 화를 냈겠지.

안 봐도 뻔했다.

자신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버닝콩에 등장한 짜증나는 신인.

그게 거슬리던 찰나, 내가 먼저 나서서 선공을 친 것이었다.

헌터라면 분명히 여기서 날 짓밟아두지 않으면 향후 문제가 생길 거라고 판단했을 터였다.

‘아마 그걸 열겠지.’

나는 황량한 고속도로를 질주하며 한 가지 이름을 떠올렸다.

바로 ‘레슬러 법정’이었다.

그것은 1988년도에 멕시코의 한 단체에서 일어난 선수 간의 살인 사건이 계기로 만들어졌다.

말했듯, 프로레슬링 업계는 거칠고 험난한 인생을 살아온 한량, 마초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건 현재까지도 유효한 사실이었다. 각종 업계에서 불운한 이유로 적응하지 못한 이들이 택하는 진로 중 하나가 바로 이곳이니까.

그리고 WWF쯤 오는 이들은 대부분 재능은 있되, ‘불미스러운 사고’를 친 이들이 많았다.

폭력 사건 같은 거 말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선수를 두들겨 패거나 엿 같은 감독을 반신불수로 만들어놓은 양아치들.

그런 이들이 여기에 와서 개과천선하겠는가? 아니다.

오히려 개 같은 근무 환경에 더 날카로워지기 마련이었다.

1년에 300일 이상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가족도 보지 못하는 더럽고 위험한 인생.

그런 남자들을 통제하기 위해 도입된 제도가 바로 이것이었다.

……뭐, 간단하게 설명하면 그냥 선수들이 실제로 싸우면 잘잘못을 가리고 판결을 내리는 거다.

‘……거기다 군기 잡는 용도로 사용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지.’

그 두 가지 케이스 모두 나에게 해당이 되었다. 그러므로 헌터는 반드시 벼르고 있을 터였다.

선수들 사이에서 나를 물 먹이고 자기 위신을 세우기 위해.

이를 어찌 반응해야 할까 고민하던 나는 이내 피식 웃어버렸다.

‘참, 이상한 업계야.’

남자답고 거친 풍모가 선수에게 가장 중요했기 때문일까. 이 시절에는 진짜 별의별 출신이 많았다.

클럽 바운서, 무장 강도 전과자, 뒷골목 복싱 선수, 갱스터까지.

이런 위험한 인간들이 서로 협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정말 법정이라도 필요한 것이었다.

* * *

마침내 도착한 펜실베이니아 주의 대도시, 피츠버그.

나는 곧바로 연락하라는 헌터의 말에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아, 일단 호텔에 짐을 풀었다.

아, 그리고 밥을 먹었다. 건강한 식당을 찾느라 시간이 좀 걸렸다.

아, 마지막으로 운동도 했다.

헬스장에서 근육을 단련하고 프로틴도 타서 마시고 힘을 뺐다.

아아, 그리고 거기에 더 마지막으로 한국식 사우나가 있기에 가서 신나게 몸을 지져줬다.

……그리하여 내가 헌터에게 연락을 한 것은 오후 11시 55분.

[늦었군.]

“차가 막혀서요.”

[연락이라도 하지 그랬냐. 지금 어디에 있지?]

“사우나에서 막 나와서 차를 타러 가는 중입니다.”

[사우나?]

“당신 같은 위대한 레슬러가 절 찾는데 꾀죄죄한 몰골로 갈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좀 씻었죠.”

[……경기장으로 와라.]

전화가 뚝 끊겼다.

‘삐졌구만.’

가볍게 놀린 것뿐이었는데 말이다. 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바로 옆을 돌아보았다.

물론, 지금의 나는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에 이러는 것이었다.

그렉 하트.

“지금 오라고 하냐?”

현재 백스테이지의 왕인 헌터가 유일하게 껄끄러워하는 상대.

이번 주까지 휴가였던 그가 타이밍 좋게 복귀한 것이다.

나는 곧바로 연락을 취했고, 그렉은 곧바로 내 편이 되어주었다.

그렇게 만난 우리는 함께 사우나도 즐기며 아주 잘 놀았다.

아마 그가 없었다면 헬스장까지만 하고 경기장으로 향했겠지.

“예, 지금 오라는데요.”

“그 미친놈은 잠도 없나. 뭔 밤에 사람을 경기장으로 불러?”

“자기 딴에는 절 확실하게 교육해주고 싶은 것 같은데요.”

“그 자식은 자기 실력이나 키울 것이지 남들 괴롭히는 것만 좋아해서 대체 언제 철들런지.”

혀를 차는 그렉.

믿음직스러운 선배였다.

그렇게 백업을 준비해둔 나는 곧장 경기장을 향해서 운전했다.

물론 말했던 것처럼 나는 그렉의 밑에 들어갈 생각은 없었다.

그는 시나의 시대가 오기 전에 업계를 은퇴했고, 자신의 레슬링 철학을 후세에 전달하지 못했다.

역사의 승자는 헌터였다.

따라서 그렉과 함께하는 건 미래가 없다. 나는 그렇게 평가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다만 그렇다 쳐도 받을 수 있는 건 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나는 이번만큼은 그렉의 호의를 잘 이용할 생각이었다.

경기장에 도착한 우리는 헌터의 메시지에 따라 사무실로 향했다.

불이 꺼진 복도.

시설 설치는 아직 덜 됐다. 대충 천막을 치고 현재 모두 퇴근해 각자 쉴 곳으로 돌아간 듯했다.

‘이 시간에 사람을 부르다니.’

보통 또라이가 아니다.

하지만 이건 아이러니하게도 헌터가 이 프로레슬링이라는 일을 사랑하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캐릭터를 최고에 두고 싶어 했고, 업계에 불멸의 역사를 남기는 걸 소망했다.

나와 똑 닮았다.

그렇기에 나는 지금의 헌터를 딱히 개자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단지 잘못된 순간에 잘못된 장소에서 만났을 뿐.

‘마치 맥케인 형사 같은 거지.’

액션 무비 ‘다이 핫’의 주인공인 맥케인 형사 말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서로를 더 망설임 없이 쏴버릴 수 있었다.

불을 켜둔 사무실 안.

오튼을 뺀 레볼루션의 세 사람이 모여 있었다. 책을 읽고 있던 헌터가 먼저 고개를 들었다.

“왔군……. 뭐야?”

목소리를 낮게 깔았던 그는 그렉을 발견하고 눈이 동그래졌다.

“그렉, 무슨 일로 온 거지?”

“변호사가 필요할 것 같아서.”

너스레를 떨며 받아치는 그렉.

바티스타도, 플레어도 표정이 굳어졌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목적을 이루는가 싶었는데, 상황이 꼬여버린 것이다. 당연히 기분이 다들 불편하겠지.

하지만 어쩌랴.

난 신나는데.

헌터의 표정이 볼만했다.

“변호사? 나는 딱히 레슬러 법정을 열 생각은 없는데.”

“그럴 리가. 헌터. 같이 오래도 일했으니 네 성격은 알지.”

앞으로 나서는 그렉.

분위기를 보니 딱히 내가 나설 순간은 오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법정의 부도덕한 기업가라도 된 양 여유롭게 웃었다.

“상황은 들었다. 이 녀석이 네 꼬마를 좀 혼쭐 내줬다는데.”

“…….”

“오히려 레슬러 법정에 회부시키고 싶은 건 그 녀석이야.”

“오튼 말인가.”

“그래, 왕이라도 된 것처럼 군림하는 것도 좋지만 좀 더 민중의 이야기를 듣는 게 좋지 않겠나?”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이를 악물며 대답하는 헌터.

방금 말이 내게는 ‘므슨 므른즈 므르긋근…….’과 같이 들렸다.

‘이거 진짜로 편한데?’

거기다 좀 재미있기도 했다.

링 세그먼트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구겨져가는 헌터의 얼굴을 여유롭게 지켜보았다.

“오튼 그 자식 말이야. 건방지다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그 사람 좋은 카인이 같이 못해먹겠다고 할 정도야. 적당히 교육 좀 시켜.”

“…….”

“너도다. 게이브.”

그렉이 카리스마 있게 돌아보자 순간 바티스타의 몸이 굳어졌다.

“정신 차려. 이 업계는 무엇보다 상대의 안위가 가장 중요하다. 너를 상대하는 놈이 계속 아파하고 부상을 당할수록 너와 일하기 싫어하는 놈만 늘어날 거다.”

명언이다.

“들었으면 대답해라.”

“예, 예. 알겠습니다.”

눈치를 보던 바티스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길게 한숨을 내쉰 플레어가 이내 앞으로 나섰다.

“그렉.”

“닉, 오랜만입니다.”

“일단 나가서 이야기하지.”

헌터의 체면을 지켜주기 위함인지 그가 간곡하게 부탁해왔다.

잠시 헌터를 노려보던 그렉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돌아섰다.

“신, 따라와라.”

“옙.”

끝났군.

헌터가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에서 그렇게 인지한 나는 그렉, 플레어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그 직후, 사무실 안에서 뭔가 와장창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튼 그 자식 좀 깨지겠는데.’

헌터가 저렇게 열이 받았으니 곱게 넘어가지는 못하리라.

나는 이번 주 경기장에서 볼 놈의 얼굴을 생각하며 그렉과 플레어의 뒤를 따라서 걸었다.

자판기 앞.

주머니를 뒤적거린 플레어가 동전을 몇 개 꺼내 툭툭 넣었다.

잘그락대는 소리.

“마시고 싶은 걸로 마시게.”

“감사합니다, 닉. 언제나 선배님한테는 신세를 지는군요.”

“고맙네. 그렉. 내 얼굴을 봐서 넘어가준 게지?”

“그렇습니다.”

두 사람이 웃으며 이야기했다.

일견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서로 대립하는 레볼루션과 그렉. 그런데 플레어와의 사이는 좋다?

하지만 당연했다.

플레어는 업계의 전설이었고 누구에게나 존경 받는 선배였다.

젊은 시절 그렉을 이끌어주었고, 그랬기에 그렉은 닉을 존경했다.

……은퇴한 후에는 둘이 좀 싸웠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아니었다.

“꼬마, 신이라고 했던가? 네 기술도 멋졌다. 오튼이 순식간에 당하는 건 처음 봤어.”

“그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선배님 체면보다도 여기서 무시당하면 끝장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하하하! 이해하네. 너처럼 당돌한 신인은 처음이라서 놀랐어.”

“그죠, 이 자식 정말 대단해요.”

“맞아. 바트가 그 진가를 알아봐주는 것 같지는 않지만.”

“……쿵-퓨리요.”

“그래, GCW 때는 아주 쿨했는데 여기 와서 고생하고 있어.”

“신.”

그렉이 날 돌아보았다.

아니, 근데 왜 둘만 소다 먹냐고. 나도 소다 먹을 줄 아는데.

“내가 좀 도와줄까?”

“그렉…….”

“쿵-퓨리 기믹은 영 차별적이야. 솔직히 박살 내고 싶었다.”

“그렇긴 하죠.”

“넌 그다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지금 미국의 동양인 꼬마들은 널 영웅이라고 생각해.”

“……책임을 지란 겁니까?”

“그건 네 판단이다. 하지만 난 그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확실히 그건 그렇죠.”

그보다, 그런 것까지 신경 써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렉. 삶이 무조건 그럴 수는 없는 법 아닙니까?”

“뭐가 말이냐?”

“괴로운 것도 있죠. 이런 차별을 감내할 일도 있을 테고. 저는 지금 그런 시기를 겪고 있는 겁니다.”

“확실히 그건 멋졌다, 신.”

그렇게 대답한 것은 플레어였다.

“그 기믹을 신이 회사에 들어와 겪는 고난으로 표현하다니.”

“확실히 그건 멋지지만…….”

“그렉, 걱정 마세요. 게다가 바트가 좋아하는 캐릭터 아닙니까? 저야 관심 받을 수 있어서 좋죠.”

“……담이 큰 건지, 뭔지.”

“꼬마야, 맥센의 관심은 저주라고. 여기 이 그렉도 그 때문에 얼마나 바보 같은 각본을 수행했는지 하루 종일 떠들 수 있을걸.”

“그랬죠, 닉.”

허탈하게 웃는 그렉.

하지만 이 두 사람은 내가 전생에 얼마나 오랫동안 굴욕적인 각본을 수행하며 살아왔는지 모를 것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챔피언을 보장받았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죠.”

“챔피언?”

플레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오튼은 아닙니다. 바로 당신이죠. 플레어.”

“나와 게이브…….”

“예, 일단 그렇게 됐습니다. 바트의 말인 만큼 중간에 얼마든지 수정될 수도 있지만.”

“파트너는 누가 되는 거냐?”

“글쎄요.”

나는 그렉을 힐끔 돌아보았다. 그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설마 나는 아니겠지. 처음에는 조카와 하더니 삼촌과도 하는 건 좀 그렇지 않냐?”

“……저기요. 거기에 주어를 생략하면 좀 기분이 더러운데요.”

“음, 그런가?”

역시 하트 놈들은 좀 기분 나쁠 정도로 순진한 구석이 있다.

어이없어하던 나는 이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대강 정해두기는 했다.

내 태그 팀 파트너.

“그래서, 나냐, 아니냐.”

그렉의 재촉에 나는 곧바로 그 의문에 대답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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