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80화 (80/634)

80.

결과부터 말하자면, 나는 그렉 하트와 팀을 하지 않기로 했다.

팀을 맺으면 당분간은 그 선수와 함께 일을 한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일을 한다는 건, 서로 가까이 지낼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그렉은 내가 원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나는 함께할 베테랑을 원했다.

베테랑을 넘어, 전설이 되어 이내 사라질 그렉이 아니라.

‘좀 더 커리어를 이어나가며 날 든든하게 받쳐줄 수 있는 동료.’

과연 누가 있을까.

백스테이지의 수많은 고참 선수들. 그중에 나를 제대로 이끌어줄 수 있는 것이 과연 누구일까.

그렉과 달리 되도록 오래 활동하며, 이후 내가 조금씩 만들어나갈 ‘팀’에서 고참 중 하나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

내 위에 서지 않고 서로 ‘협력하는 관계’를 구축해나갈 인물.

그리고 레슬러로서의 기술 역시 확실하게 가지고 있는 인물.

며칠 동안 고민을 거듭한 나는 어렵사리 선수 한 명을 정했다.

바로 ‘부커-리’였다.

그의 현재 위치를 생각하자면 서로가 윈윈할 수 있는 구조였다.

메인 이벤터와 미드 카더의 중간. 다시 말해 하이미드 카더 정도의 위치에 서있는 레슬러.

타 단체 출신에 흑인이라는 이유로, 실력은 출중했지만 아직 월드 챔피언에 등극해보진 못했다.

그런 그라면 분명히 내가 제시한 길에 흥미를 보일 터였다.

거기다 나에게는 그를 고분고분하게 만들 패 역시도 존재했다.

선수 락커룸.

나는 일을 마치고 퇴근하려는 부커-리를 곧장 붙잡아 세웠다.

“나와 이야기가 하고 싶다고?”

걸걸한 목소리.

키는 196cm. 탄탄한 근육질에 길게 땋은 레게머리가 매력적인 남자였다.

하지만 그는 무척이나 독특한 전직前職을 가진 인물이었다.

……무장 강도 출신이었다.

감옥에서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참회하고 나와서 프로레슬러로서 제대로 살아왔지만.

어쨌거나 그 본성 자체는 거친 일면이 있었다. 때문에 날 노려보는 그의 시선은 무척 진지했다.

야성을 담은 눈빛이었다.

처음 만나는 상대가 어떤지, 또한 자기 자신이 우습게 보이지 않도록 경계하는 눈빛이었다.

물론, 나는 부커-리를 무시할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다.

그 역시도 미래에 레전드로 불릴 위대한 선수 중 하나였다.

“예, 부커. 혹시 괜찮다면 제가 제안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제안?”

“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제가 팀이 필요한 상황이거든요.”

“나와 하고 싶다는 거냐.”

“물론 회의를 통해 성사되었을 때의 이야기지만요. 그래도 먼저 제안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왜?”

“선수 본인의 의사가 결국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요.”

“그게 아니라, 내가 왜 너와 팀을 이루어야 한다는 거지?”

“……바트 맥센이 레볼루션과의 대립을 약속했으니까요?”

“개소리군.”

그는 기가 차다는 듯 웃고는 커다란 크로스백을 어깨에 멨다.

“그 양반은 조금만 반응이 안 나오면 바로 묻어버릴 거다.”

“그러지 마시고…….”

“거기다 아시아인과 흑인의 팀이라고? 다들 좋아라 하겠군.”

“굳이 인종적인 부분부터 생각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잘 들어라. 꼬마.”

부커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난 멍청한 신인하고는 팀을 하지 않아. 매일매일 살아남기 위해서 필사적인 상황이라고.”

“좀 이야기를 들어보시죠.”

“충분히 들었어.”

“아뇨, 제 이야기가 아니라.”

나는 등 뒤에 감춰두었던 핸드폰을 부커-리를 향해 내밀었다.

참고로 나는 부커와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부터 이쪽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과 통화 중이었다.

“이분의 이야기를요.”

“……?”

[야, 인마! 부커! 전화 받아!]

“대체 어떤 새…….”

인상을 팍 구기며 내 핸드폰을 빼앗아가 받은 부커의 표정이 삽시간에 풀어지고 말았다.

아무리 무장 강도 출신의 거친 사내라도 그 위에는 바쿠가 있다.

“아, 예, 예. 바쿠. 잘 지내셨죠. 아, 안 그래도 조만간 연락을 드리려던 참이었는데……. 거짓말 하지 말라고요. 네, 죄송합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하는 부커. 순간 내 핸드폰이 방수폰이었나 하는 고민이 들었다.

어쨌거나.

바쿠는 ‘잘 좀 말해달라’는 내 부탁을 아주 흔쾌히 들어주었다.

현재 버닝콩에 소속된 흑인 선수들은 모두 바쿠를 존경했기에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다.

얼마 후, 전화를 끊은 부커가 한숨과 함께 내 얼굴을 바라봤다.

“……이름이 뭐라고?”

“신입니다. 현재는 쿵-퓨리이지만 신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래, 신. 이렇게 뻔뻔하게 인맥을 쓰는 건 네가 처음이다.”

“감사합니다.”

“칭찬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후우, 맥주는 마시냐.”

“아뇨.”

“이런 빌어먹으으을…….”

열 받아도 별수 있나.

이제 우리는 팀인 것을.

* * *

부커-리와 나는 팀이 되었다.

우리는 곧바로 맥주를 마시러 갔고, 나는 펍에 먼저 모여 있던 다른 선수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그들은 20대 중반의 애송이인 나와 30대 중반의 부커-리의 팀 업 이야기를 듣자 박장대소했다.

“푸하하하! 부커! 언제부터 유치원 선생이 되기로 결심했나?”

그렇게 말하는 건 베테랑 레슬러 중 하나인 록 시몬스였다.

그 외에도 백인 한 명에 흑인 선수가 둘이 더 있었다.

부커를 포함해 총 다섯 명이 모여 백스테이지 크루를 만들었다.

그렇다. 백인이 한 명 있다.

사람들이 무조건 피부색을 우선으로 해서 뭉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피부색이 문화적인 차이를 가르는 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농구나 힙합 같은 흑인 문화를 접하고 자란 선수들이 이렇게 뭉쳐 다니는 것이었다.

그 대부분이 흑인인 거고.

어쨌든, 부커의 크루는 딱히 백스테이지에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들지는 않았다.

같이 여행을 다니고, 술을 마시고 놀며 친목을 다질 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부커도 먼저 내게 ‘맥주는 먹냐’고 물은 거겠지.

“조용히 하십쇼, 록.”

그는 피로감을 느끼는지 연신 맥주를 들이켰다. 나는 그 옆에서 차근차근 분위기를 살폈다.

일단 다들 내 등장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는 얼굴들이었다.

거기다 질문도 해왔다.

“꼬마, 오튼과는 어떻게 됐냐?”

“헌터가 절 죽이려고 하던데요.”

“뭐? 근데 어떻게 살았어?”

“그렉이 도와줬거든요.”

“그렉? 아, 그러고 보니 너 그렉이 꽤나 마음에 들어 하던데.”

“팀을 하려면 그 양반이 낫지 않았을까? 이런 바보보다는 배울 점이 더 많을 것 같은데.”

“록, 적당히 하십쇼.”

부커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것도 좋았겠지만, 저는 부커와 일을 하는 게 더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습니다.”

“호오, 어떤 면에서 부커가 그렉보다 낫다고 판단한 거지?”

그런 시몬스의 질문에 맥주를 들이붓던 부커조차도 흥미롭다는 듯 내 대답을 기다렸다.

지금껏 바쿠의 부탁(?)이라 어쩔 수 없다는 태도를 취했던 부커.

그런 그에게 호감을 딸 절호의 찬스!

난 씨익 웃으며 말했다.

“웃기잖아요.”

“……? 뭐?”

“그렉보다 훨씬 웃겨요.”

“푸, 푸흐흐흡…….”

“빌어먹을, 제기랄. 바쿠의 부탁이라고는 해도 어떻게 이런…….”

“말인즉슨, 저희 팀은 약간 코미디로 시작하지 않을까 싶네요.”

“코미디……?”

“이름하야 쿵-퓨리와 쿵-부커.”

“쿵…….”

“푸하, 푸하하하하! 아! 제기랄! 너 진짜 최고다! 하하하하!!”

결국 참지 못한 록 시몬스가 테이블을 두드리며 폭소를 터뜨렸다.

반대로 부커는 사색이 되었다.

하지만 어쩌랴.

떠오른 아이디어가 있는데.

* * *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내 주도 하에 짠 각본을 제출하자 사람들은 좋은 반응을 보였다.

특히나 최종결정권자인 바트 맥센은 앉은 자리에서 폭소를 터뜨리다 의자에서 떨어질 정도였다.

그렇게 부커-리와 나는 팀 업을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갔다.

3월 1주차의 버닝콩.

오프닝이 끝난 뒤, 거대한 스크린에 부커-리의 모습이 나타났다.

쇼를 찾아온 관객들이 그 등장에 열화와 같은 환호를 보냈다.

부커는 특유의 시원시원한 킥과 유머, 진지함이 잘 조화된 선역으로서 언제나 큰 인기를 끌었다.

실력에 비하면 많은 기회를 받지는 못했으나, 언제나 관객들을 즐겁게 해줄 수 있는 선수였다.

그의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부커, 작년 월드 챔피언전 이후로 영 기세가 줄었다는 세간의 평가가 있는데요. 혹시 이에 대해서 해줄 말씀이 있으신가요?]

[테리, 저는 세간의 평가 따위는 신경 쓰지 않습니다. 기회는 다시 올 테고, 저는 그때를 기다리며 저 나름대로 준비를 할 뿐이죠.]

[멋진 말씀 감사합니다. 오늘 레지스탕스와 경기를 갖게 되었는데 혹시 파트너는 정하셨나요?]

[아뇨, 그건 확실히 문제로군요. 오늘 락커룸의 선수를…….]

부커가 인터뷰를 이어나가던 와중, 미지의 습격자가 난입했다.

캐나다 퀘벡 출신의 두 선수로 구성된 태그 팀, 레지스탕스였다.

뒷목을 붙잡힌 부커는 백스테이지의 철골 구조물에 내던져졌다.

[윽?!]

쿠당탕!

준비해두었던 기자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머리를 감싸 쥔 부커가 신음을 흘렸다.

[Booooooooooooo!]

마이크에 섞여 들어온 관객들의 야유가 이어졌다. 하지만 레지스탕스는 무참히 부커를 공격했다.

오늘 총 두 개가 나갈 백스테이지 세그먼트 중 하나가 끝났다.

사실 저건 며칠 전에 촬영된 거고, 실제 나와 부커는 락커룸에 앉아 모니터링을 하고 있었다.

광고가 이어지기 시작했고, 부커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정말 괜찮겠냐.”

“멋졌어요.”

“아니, 내가 아니라. 두 번째 세그먼트가 결국 중요하잖아.”

“멋질 겁니다.”

“빌어먹을…….”

한숨을 내쉬는 부커.

아무래도 영 못 미더워하는 눈치였으나, 난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부커의 장점이 ‘웃긴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록 시몬스나 본인은 이걸 디스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건 정말 장점이었다.

현재 WWF의 그 어떤 베테랑도 부커와 같은 친근함은 없었다. 그건 분명히 부커의 큰 무기였다.

우리는 락커룸에 앉아 계속해서 쇼가 진행되는 걸 지켜보았다.

그렉의 경기가 끝난 뒤 두 번째 백스테이지 세그먼트가 나왔다.

레지스탕스에게 맞은 충격으로 얼음주머니를 대고 있는 부커.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제기랄, 그 자식들. 경기 전에 이렇게 비겁한 짓을 해오다니.]

[비겁한 짓에는 똑같이 비겁한 짓으로 되갚아줘야 하는 법이죠.]

그 옆에서 누군가 대답했다.

카메라가 부커의 시선과 함께 돌아갔고, 이내 내가 나타났다.

입술을 말아 올리며 웃고 있는 쿵-퓨리. 그를 본 사람들이 가볍게 박수를 치며 환호해주었다.

[……? 뭐야?]

[아, 이게 아니지.]

[뭐?]

[다시 하죠. 다시.]

나는 카메라를 다시 돌렸다.

연기할 캐릭터를 잠시 착각한 모습에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아아앗-쵸오오오!!]

[뭐야?]

[쿵-부커! 자네에게는 지금 함께 할 전우가 필요한 모양이군!]

[……쿵……?]

[그래서 내가 왔다! 차이나 출신! 전설의 워리어……! 인간 병기이자 파괴의 전사! 쿵-퓨리다!]

[왜 그러냐. 갑자기.]

[계약서를 잘못 써서…….]

나는 허리를 추욱 늘어뜨렸다.

다시 보니 좀 알 것 같았다.

‘더럽게 유치하네.’

쿵-퓨리 캐릭터는 2004년의 시선으로 보아도 너무나 창피했다.

어떻게 저걸 제정신으로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관객들의 반응은 무척이나 좋았다.

왜냐고?

저 모든 행동이 연기임을 전제함으로서 상황 자체가 부조리한 코미디가 되어버리기 때문이었다.

길게 한숨을 내쉰 부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흥미롭다는 듯 날 이래저래 살펴보았다.

[나쁘진 않겠군. 네 실력이야 작년 네버 이스케이프에서 보았고.]

[……어, 무슨 말씀이신지.]

[너도 분명 원하는 게 있어서 날 찾아온 거겠지. 좋아, 어디 한번 레지스탕스를 박살 내자고.]

부커의 자신만만한 말을 들은 사람들이 크게 환호를 보냈다.

[U.S.A! U.S.A! U.S.A! U.S.A!]

미국을 찬양하는 챈트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며 영상이 끝났다.

‘이걸로 됐군.’

피식 웃은 나는 놀란 듯 눈썹을 치켜뜬 부커를 돌아보았다.

“어때요?”

“끄응…….”

“제가 분명히 사람들 반응 죽여줄 거라고 말했잖습니까, 부커.”

올라올 때 계약을 잘못해(?) 주춤하고 있는 신인과 최근 들어 기회를 받지 못하게 된 베테랑.

그런 두 사람의 팀 업은 분명히 서로에게 큰 이득이 될 터였다.

사람들 역시도 분명 두 사람이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를 무척 기대하고 있겠지.

“그럼, 가시죠.”

일단은 거기에 응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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