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81화 (81/634)

81.

그렇게 몇 주가 지났다.

나와 부커-리의 태그 팀은 예상했던 대로 순항을 거듭했다.

그 증거물 또한 떡하니 나왔다.

경기장 한 구석의 사무실.

부커와 나는 본사의 사업팀에서 보내온 샘플을 확인하고 있었다.

“이건가.”

형형색색의 티셔츠.

디자인은 두 개였다.

부커 리의 쿵-부커 티셔츠와 내 쿵-퓨리 티셔츠. 가슴 쪽의 뭔지 알 수 없는 한자가 포인트였다.

“나쁘지 않은데요?”

역시 이 사업을 오랫동안 해와서인지 티셔츠 디자인만큼은 괜찮게 뽑아낸다.

내 물음에 부커 역시도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

“멋지군.”

확실히 돈이 되기 때문인지, 그 역시도 평소보다 반응을 보였다.

몇 주간 일하는 내내 무뚝뚝하고 심드렁하더니 말이다. 그래도 돈 앞에서는 솔직한 거겠지.

쓰게 웃은 나는 테이블 반대편에 서있는 팀장을 바라보았다.

“출시는 언제 됩니까?”

“아마 한 달쯤 뒤? 막 대량 생산에 들어간 참이라고 들었다.”

“많이 팔리겠죠.”

“……안 팔리더라도 바트는 당분간 너희 둘을 밀어주겠지. 네 세그먼트를 볼 때마다 폭소하면서 일주일 내내 그 얘기만 하니까.”

팀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리는 건지 모르겠군. 쿵-퓨리.”

저기 미안한데, 현실에서까지 쿵-퓨리라고 부르지는 말아주세요.

순간 그런 말이 목까지 차오른 걸 느낀 나는 이내 웃어버렸다.

어찌됐건 의도한 대로였다.

제일 처음 쿵-퓨리 캐릭터를 받았을 때, 나는 분명 깊이 있는 캐릭터를 만들고자 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이 회사에 처음 들어와 받은 기믹이 이것’이라는 해석을 내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바트와의 대화 이후, 쿵-퓨리 자체의 과장된 캐릭터에도 역시나 큰 신경을 썼다.

바트 맥센, 다시 말해 단순해빠진 각본을 좋아하는 관객들도 즐길 수 있는 쉬운 캐릭터.

그 결과 두 각본은 서로 융화되었고, 부커와의 연합을 통해 완벽하게 버닝콩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몇 주 동안 쇼에서 부커에게 쿵-푸를 가르쳐준답시고 우스꽝스러운 훈련을 하게 만들었다.

그 끝은 매번 실패로 끝났고, 바트는 그런 각본에 호감을 보이며 출연 시간을 계속 늘려주었다.

물론 쿵-퓨리가 겉으로 보이는 것 같이 단순한 캐릭터였다면 아무 반응도 없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쿵-퓨리의 행동보다도 내가 마지막에 내뱉는 대사 한마디를 더 기대했다.

그렇기에 쿵-퓨리의 과장된 행동도 ‘신입사원의 비애’ 같은 느낌으로 다들 즐겁게 봐주었다.

‘아마 신인 시절인 지금이 아니면 써먹을 수 없는 각본이겠지.’

어쨌든 바트와 관객들의 호감을 동시에 얻을 수 있어서 좋았다.

명색이 기업 회장이라는 사람의 취향이 일반 대중과 괴리되어 있다는 게 어쩐지 참 서글펐지만.

어쩌겠는가.

그가 프로레슬링을 좋아하기 시작했던 시기는 70~80년대였다. 캡틴 로건이 나타나기도 전인 것이다.

그럼에도 바트는 기회가 될 때마다 자기 취향인 선수를 밀어주었지만 항상 죽을 쑤고는 했다.

그리고 자신의 실패를 선수의 탓으로 돌리고 이를 묻어버렸다.

‘안타까운 일이야.’

그렇기 때문에 난 적당한 선에서 내 능력만 보여줄 생각이었다.

바트에게 실력은 보여주되, 날 컨설팅하지 않을 선에서.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동양인’이라는 위치가 큰 도움이 됐다.

‘바트가 좋아하는 건 오로지 근육질의 미국 출신 백인뿐이니까.’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얼마 후, 티셔츠 확인을 마친 부커와 나는 사무실 밖으로 나왔다.

오늘 할 일은 다 끝나 슬슬 돌아갈까 하던 찰나, 부커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조금 놀랐다.”

“티셔츠까지 나올 정도로 인기를 끌 줄은 모르셨던 겁니까?”

“그래, 그리고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걱정이 되기도 해.”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유망한 신인이 바보 같은 기믹과 각본으로 사라지는 건 자주 있는 일이다. 슬슬 벗어날 때야.”

“그런가요.”

“지금 당장은 반응이 좋지만 관객들이 원하는 각본은 아니지.”

부커의 눈은 진지했다.

“그들이 쿵-퓨리에 관심을 가져주는 이유는 네가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을 기대하고 있어서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런 기대감이 있어 이 기믹이 먹히는 것이기도 했다.

“멋진 분석이시네요.”

“……설마 내가 이 정도 각본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냐.”

“저희 작가는 그러던데요.”

“우리 작가도 현재 반응이 좋으니까 마냥 좋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역시 부커는 베테랑이었다.

확실히 반응이 좋다고 마냥 낙관할 수 없는 시기이기는 했다.

“네가 선역으로서 겟-오버하기 위해서는 지금 이 각본의 결말이 중요하지. 그런 의미에서 슬슬 준비를 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군.”

“아이디어라도 있으십니까?”

“그건 아니다. ……솔직히 말해 이게 왜 먹히는지도 잘 모르겠어.”

“웃기잖아요. 부커.”

“그래, 나는 웃긴 녀석이지.”

“하지만 우습지는 않죠. 그게 우리 팀의 중요한 부분이라고요.”

의아한 듯 날 돌아보는 부커.

주차장을 향해 이동하며 나는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나갔다.

“둘만 있으니 말씀드리는 겁니다. 일단 충분히 반응이 나오기 전까지는 비밀로 해주세요.”

“그, 그래.”

“제가 이 각본을 받아들인 이유는 친근함이 필요해서였습니다.”

“친근함……?”

“카인이나 헌터에게는 없는, 선배님만의 장점이죠. 링 위에서 윈드밀을 돌고도 월드 챔피언이 되는 것에 위화감이 없는 모습.”

“그래서 나와 팀이 된 거냐? 내가 가진 친근한 모습 때문에?”

“예, 그게 첫 번째 이유입니다.”

“……두 번째도 있다는 거냐.”

“물론이죠.”

내 대답을 들은 부커는 기가 막힌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이거 무서운 꼬마였군.”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래서, 친근한 모습을 보여서 대체 어떻게 하려는 속셈이냐?”

“선역으로 정착을 해야죠.”

나는 레볼루션의 대립까지 이어지는 긴 각본을 생각하고 있었다.

“제가 쿵-퓨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게 있잖습니까?”

“음, 뭐가 있지?”

“절 속여서 이런 기믹을 할 수밖에 없도록 한 상대방이죠.”

“확실히 그렇군. 그 상대가 있어야 뭐가 좀 이야기가 되겠어.”

“아마 바트가 저희를 밀어준다면 레볼루션의 멤버 중 하나가 그 역할을 맡는 게 타당하겠죠.”

“그렇게 대립으로 잇는다고……. 도대체 몇 수 앞을 내다본 거냐?”

“별건 아닙니다. 이야기가 될 만한 걸 엮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나온 시나리오인 거죠.”

감탄을 금치 못하는 부커의 앞에서 나는 머쓱해져 웃었다.

만약 GCW라면 여기서 내가 아이디어를 전하고 채택되어 그대로 이야기가 진행되었겠지.

하지만 여기는 메인 쇼였다.

말인즉슨 상대를 꼼짝 못하게 할 근거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근거는 대부분 쇼를 통한 성과와 수뇌부의 호응을 통해서 만들어지기 마련이었다.

‘지금까지는 괜찮았지.’

하지만 확실히, 부커의 말처럼 뭔가 해야 할 순간이기는 했다.

일단 각본을 함께 진행할 레볼루션하고 대화를 나눠보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 * *

버닝콩은 전 세계를 통틀어 최고의 선수들이 모인 장소였다.

이들은 업계 최고 수준의 연봉을 받았고, 웬만한 무비 스타 부럽지 않을 인기를 자랑했다.

그렇기에 이들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정말로 무슨 일이든 할 각오가 되어있어야만 했다.

바쿠는 말했다.

선수가 아무리 똥이라도 금칠을 해 상품으로 내놓는 게 회사라고.

하지만 메인에서 그건 선택받은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특혜였다.

물론 회사 역시도 최선을 다하기는 했다. 그럼에도 스포트라이트 아래 서는 이들은 한정되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문제.

그 한정된 스포트라이트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까.

답은 간단했다.

언제나 그렇다.

프로레슬링의 철칙.

결국 보다 많은 관객의 호응을 받아내는 쪽이 이기는 것이었다.

주간 쇼가 끝난 뒤의 락커룸.

대부분 선수들이 경기장을 빠져나간 가운데, 나는 일부러 가장 껄끄러운 상대와 독대 중이었다.

바로 헌터였다.

“……이거 원, 놀랍군. 네가 감히 날 부를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

“보통 선배 레슬러를 후배가 부르는 경우가 거의 없긴 하죠.”

“나는 처음 봤다.”

“뭐, 이제 어디 가서 이런 경험도 해봤구나 하실 수 있겠네요.”

“여전히 말은 잘하는군.”

헌터가 비릿하게 웃었다.

솔직히 말해, 오튼의 일 때문에 날 상대도 안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서 조금 놀랐다.

‘뭐, 헌터가 자기감정을 잘 숨길 줄 아는 인간이긴 한데.’

갓 데뷔한 신인인 나를 독대하는 순간까지 이럴 줄은 몰랐다.

뭐, 좋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결국 헌터를 이처럼 젠틀하게 만들 정도로 내 성장세가 무시무시하다는 이야기 아니겠는가?

“그래서, 무슨 일이냐.”

“바트에게 이야기하기 전에 협의를 하나 해두고 싶어서요.”

“협의?”

“이야기는 들으셨죠? 이번에 부커와 저의 태그 팀이 플레어, 바티스타와 함께 일하게 됐잖아요.”

“아직 확실하진 않지.”

“바트가 말한 건데요?”

“정말로 각본이 전개될 때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다. 애송이.”

“확실히 지금 이 좋은 반응을 태그 팀 챔피언 매치까지 끌고 갈 수 있느냐가 분수령이겠죠.”

“그렇지. 그런 의미에서 첫 단추를 아주 잘못 꿰었어.”

“그래요?”

“웃기는 캐릭터로 호감을 얻어 보려는 속셈은 잘 알겠다. 하지만 과연 그게 챔피언에 걸맞을까?”

헌터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2미터 가까운 거한, 체중 130kg 전후를 왔다 갔다 하는 신화 속 영웅과도 같은 면모의 사나이.

솔직히 말하자면 전성기 시절 헌터의 외모는 그 어떤 프로레슬러도 비견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가 이야기할 비판이 무엇인지는 대충 예상이 갔다.

“신화 속에 등장하는 두 괴물의 혈투. 사람들이 프로레슬링을 보고 바라는 건 바로 그런 것이지.”

“거기에 저희 쿵-푸 팀의 자리는 없다는 이야기로군요.”

“그래. 뭐, 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는 대충 알겠다.”

헌터가 눈을 빛냈다.

“바트로부터 받은 쿵-퓨리 기믹을 현실성 있게 재해석했지. 그렇게 해서 쿵-퓨리를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었어.”

“호, 이해하셨네요.”

“하지만 이거 아나? 관객들은 잔혹해. 그런 스토리로는 챔피언이 되더라도 오래 가진 못할 거다.”

헌터는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아마 역반응이 일겠지. 그런 피해를 줄 바에야 적당히 욕심 부리지 않고 끊는 게 낫지 않나?”

“최악의 사태로군요.”

“그렇지. 관객들이 우리 생각과 정반대로 반응할 때…… 네가 주창하는 이론도 박살이 나지.”

뭘 좀 모르는군.

나는 입을 다문 채 생각했다.

헌터의 방식도 역시나 구식이었다. 그는 프로레슬링의 본질이 거인과 거인의 혈투라고 말했다.

그것 또한 방법이기는 했다.

초기의 프로레슬링은 결국 극한으로 근육을 펌핑 시킨 떡대들의 신화적인 싸움이었으니까.

하지만 내 생각은 좀 달랐다.

그게 전부는 아니다.

내가 지금껏 줄곧 현실과 각본의 경계를 느슨하게 만든 이유.

그것은 사람들이 내게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함이었다.

동양인인 내가 수많은 백인, 흑인들 사이에서 관심을 받기 위해서는 이런 이야기가 필요했다.

나는 굳이 몰입하지 않아도 괜찮은 ‘동양 출신의 무술 고수’ 따위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악역으로서 강자로 포장되다 결국 미국의 주인공에게 깨지는 역할로 있는 건 정말 혐오스러웠다.

그렇기 때문에 온갖 차별을 딛고 승리하기 위해 무엇이든 할 각오가 된 남자를 만들어냈다.

좋은 동료를 만나 즐거운 시간을 갖기도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그렇기에 때로는 잘못된 길을 가기도 했고, 악역으로서 나쁜 짓을 일삼는 날도 무척 많았다.

그렇게 이어온 끝에, 이제는 잘못된 계약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는 신입 사원이 된 것이다.

나는 이 일련의 이야기에서 사람들의 응원을 받는 선역이었다.

서로가 완전히 정반대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일까. 헌터와 나는 생각하는 바가 완전히 달랐다.

“그럴 바에야 지금처럼 적당히 애들 장난 같은 수준에서 있는 편이 네 경력에 좋을 것 같은데.”

“말씀이 좀 심하신데요.”

“솔직히 말하지. 앞으로 네가 메인 쇼에서 무슨 짓을 하더라도 쿵-퓨리라는 코미디 캐릭터의 그림자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거다.”

“과연 그럴까요?”

나는 입술을 이죽이며 웃었다.

“당신 철학이랑 맞지 않는다고 해서 모두 틀린 건 아니죠.”

“지금 날 의심하는 거냐?”

“아뇨, 의심하는 게 아니라 그게 틀렸다고 말하는 건데요.”

“애송이 새끼가…….”

“웬만하면 나도 젠틀하게 진행하고 싶었는데, 안 되겠어. 이쪽 각본이 먹히는가 아닌가는 이 각본 내용을 보고서 정하지 그래?”

나는 헌터가 반박할 새를 주지 않고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어두운 녹색 화면.

그 위로 떠오른 메시지를 확인한 그 거구가 잠시 굳어졌다.

“너 이 새끼……. 또.”

“또라니. 나는 언제나 이랬어. 그쪽이 근육 펌핑에만 신경을 써서 모르고 있었을 뿐이지.”

씨익 웃으며 말한 나는 헌터의 당황한 얼굴을 잠시 감상했다.

생각했던 대로 좋게 협의가 됐으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그쪽에서 자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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