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로레슬링의 신-82화 (82/634)

82.

헌터를 열 받게 한 메시지는 티파니 맥센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그렇다.

나는 이 쿵-퓨리 각본을 끝내기 위해 그녀를 끌어들이기로 했다.

현재 GCW에서 직접 쇼에 출연하고 있는 티파니라면 아마 그 역할을 맡기에 부족함이 없겠지.

그동안 계속해서 연락을 주고받았던 우리는 서로의 상황에 대해서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방송국을 하나 확보한 GCW는 전국 방송을 타며 순항 중이었고, 마침 티파니 맥센의 악역 GM 각본이 막 끝난 순간이라고 했다.

그렇기에 티파니도 내가 이제 슬슬 가면을 벗을 때라고 하자 꽤나 적극적으로 반응해주었다.

[이쪽에 도착하면 연락주세요.]

2004년 8월 1주차의 버닝콩은 조지아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

그전에 총괄 각본 회의에 참여하게 된 나와 부커는 비행기를 타고 애틀랜타 공항에 도착했다.

다소의 열기가 오히려 일종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이곳에 좋은 기억이 많기 때문일까.

‘공기마저 달콤하군.’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캐리어를 끌었다. 그러자니 뒤를 따라온 부커가 말을 걸어왔다.

“그러고 보니 너는 GCW 소속으로 있다 메인에 올라온 거지?”

“용케 기억하고 계시네요.”

“……날 너무 바보로 몰진 마라.”

“하하, 농담이었습니다. 하지만 틀린 정보가 하나 있군요.”

“틀린 정보?”

“예, 저는 일반적인 선수가 아니라 ‘아이콘’이었습니다. GCW의 한 시대를 이끌었죠.”

“……푸하하하하!”

침묵하던 부커가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황당해 올려다보았다.

“아, 음. 미안하다. 순간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만.”

“…….”

“미안하다니까. 그렇게 사람 죽일 듯한 눈으로 보지 마라.”

“제가 만들어낸 시대가 러셀의 시대에서 폭발한 거 아닙니까.”

“그래, 그래.”

쓰게 웃는 부커.

사실을 말했는데도 믿지를 못하다니. 이 양반 이거 안 되겠다.

나는 GCW의 혁명가였다.

내가 있던 2년간 회사는 그야말로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보였다.

그리고 이후로도 러셀을 쇼의 주인공으로 내세워 잘 나갔다.

‘그 모든 게 내가 악역으로 러셀을 크게 띄워줬기 때문이지.’

그게 아니라면 GCW는 내가 빠진 후 원래대로 돌아갔을 터였다.

하지만 GCW는 이제 전국에 쇼가 방영될 정도까지 성장했다.

그 모든 게 내 공이었다.

“일단, 티파니가 기다리고 있다니 공항 밖으로 나가죠.”

“아, 아가씨께서 직접?”

“……당신도 그렇게 불러요?”

“아, 아니. 다들 그렇게 부르니 말이다. 왠지 모르게.”

당황한 듯 대답한 부커는 공항 밖으로 나가자 아예 까무러쳤다.

그리고 나 역시도 좀 그랬다.

“뭐, 뭐야?!”

우릴 환영하는 인파가 가득했다.

아니, 정확히는 나였다.

“신! 이쪽이야! 이쪽!”

“아, 울면 창피한데.”

나는 코끝이 시큰거리는 것을 느끼며 환영 인파를 바라보았다.

GCW에 소속된 선수들과 직원들이 모조리 나온 것 같았다.

수백 명 넘는 사람들이 피켓까지 만들어 들고 날 환영했다.

나는 그 중심에 서있는 러셀을 확인하고 가까이 다가갔다.

“잘 지냈냐? 챔피언.”

“물론이지. 쿵-퓨리.”

“……너까지 그러기야?”

“평소와 다른 모습이라서 신선하게 보고 있어. 몸도 더 좋아진 게, 여전히 멋진데.”

“너도 혈색이 훨씬 좋아졌는데. 이렇게 보게 될 줄은 몰랐지만.”

“놀랐어?”

“솔직히 울 뻔했지. 다들 아직도 날 기억해주는구나, 하고.”

“당연하지, 인마!”

그렇게 대답한 것은 선배이자 같은 메인 이벤터였던 바비였다.

그렇게 몇몇 선수들 및 팀장급 직원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눈 나는 할리와도 악수를 나눴다.

“돌아온 걸 환영한다.”

“잘 지내셨어요?”

“티파니 맥센 덕에 업무량이 늘어서 말이 아니다. 그래도 네 덕분에 즐겁게 일하고 있지.”

“다행이네요. ……아,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어요? 마중 나오겠다더니 왜 정작 자리에 없지.”

“근처 카페에 있다. 우리 보더니 기가 차서 일 끝나면 부르라던데.”

“바쿠는…….”

“저기 뒤에 있군.”

할리의 손짓에 뒤를 돌아본 나는 부커에게 한창 말하고 있는 바쿠의 모습을 발견했다.

“너 인마, 저 녀석 함부로 대하면 그 순간 죽는 줄 알아라.”

“아, 알겠다니까요. 바쿠.”

“각본 관련되어서도 토 달지 말고. 저 자식 믿고 따라가기만 하면 꿀이 떨어진다니까. 알겠어?”

위협적으로 구는 바쿠의 태도에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이는 부커.

쓰게 웃은 나는 과할 정도로 날 챙기는 바쿠의 곁으로 다가갔다.

“바쿠.”

“오, 신! 너 인마! 올라간 뒤로 연락 한 번 없고! 실망했다!”

“죄송합니다. 진짜 정신 없이 바빠서 계속 연락을 드려야겠다 싶다가도 자꾸 까먹게 되네요.”

“짜식, 한창 일할 때니 그럴 수도 있지! 이리 좀 와봐라!”

“아, 아픕니다. 바쿠.”

“반가움의 표시야! 크하하!”

바쿠가 호쾌하게 웃었다.

그런 나와 바쿠를 바라보는 부커의 표정은 마치 헛것이라도 본 듯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엄격하게 구는 선배가 날 이토록 예뻐하니 놀라는, 뭐 대충 그런 심리겠지.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어, 설마 신 선수?”

“돌아왔군요!”

뭔가 싶어 힐끔거리던 일반인들이 나를 알아보고는 몰려들었다.

덕분에 드넓은 공항 입구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수백 명의 직원들과 일반인들이 모두 나를 보려고 안달이었다.

“신 선수, 사인 좀……!”

“여기 좀 봐주세요!”

“러셀하고 같이 서주세요!”

“…….”

난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몰려든 인파로 인해 GCW의 동료들이 삽시간에 멀어져갔다.

내 옆에 서있는 부커는 좀처럼 지금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니, 그러다 이내 결론을 냈다.

“너 아이콘 맞구나!”

“제가 거짓말을 하겠어요?!”

조지아의 모두가 날 사랑했다.

마치 지역구에서 태어나 지역 팀에서 활약하는 스포츠 팀 선수를 본 것 같은 반응들이었다.

나는 혼이 나간 채로 사람들에게 마구잡이로 사인을 해줬다.

그러는 동시에 이 혼란으로부터 빠져나갈 길을 알아보려던 찰나.

부우웅-.

“……?”

가까운 곳에서 낮고 두터운 배기음이 들려왔다. 나는 순간 위험할까 싶어 그쪽을 살펴보았다.

붉은 페라리가 서있었다.

그리고 그 운전석에 앉은 건 선글라스를 쓴 티파니 맥센이었다.

빠아아아아아아앙!

세찬 경적이 뒤를 이었다.

거기에 깜짝 놀란 사람들이 물러났다. 나는 미세하게 벌어진 틈을 놓치지 않고 빠져나갔다.

“부커! 이쪽이에요!”

“어, 어?!”

캐리어를 뒷좌석에 던진 나는 그대로 조수석에 훌쩍 올라탔다.

선글라스를 살짝 내린 티파니 맥센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피곤하겠어요. 슈퍼스타라서.”

“그 정도까지야…….”

한숨을 내쉰 직후, 티파니는 느닷없이 페라리를 발진시켰다.

힘센 종마가 풀 스로틀로 공항 도로를 내달렸다. 나는 깜짝 놀라 홀로 남겨진 부커를 돌아보았다.

“저, 저기요?! 티파니! 아직 한 사람 덜 탔는데……!”

“늦었어요. 어차피 회의에는 당신만 있으면 되니까 알아서 오라고 문자해두세요.”

“허어…….”

나는 식빵 귀퉁이처럼 남겨진 부커를 보며 잠시 묵념했다.

후일,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가 물어봤더니 사람들이 그에게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더라.

누가 힐끔 보더니 ‘쳇, 부커-리야?’ 하고 그냥 갔다는 풍문이.

* * *

다행히도 티파니의 운전 솜씨는 바쿠에 비하자면 훨씬 나았다.

어디서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처럼 핸들을 돌리는 솜씨가 여간 탁월한 게 아니었다.

공항을 빠져나와 심리적으로 여유가 생겼던 나는 귓가를 스치는 바람을 느끼며 물었다.

“운전 잘하시네요.”

“그래요? 평범한 것 같은데.”

“일반 대학생의 솜씨가 아닌데? 어디서 배우고 그랬어요?”

“……어렸을 적에 주로 이런 일을 하고 놀다보니 익숙해졌어요.”

“이런 일?”

“사냥이나 운전, 승마. 아버지가 저를 남자처럼 키우셨거든요.”

“뭔가, 굉장히 바트답군요.”

“그렇죠? 게다가 16살이 되자마자 티셔츠 걸을 시키질 않나. 참으로 이상한 아버지에요.”

그러고 보니 티파니의 첫 번째 WWF 출연은 선수들의 티셔츠를 홍보하기 위한 역할이었지.

여럿 있는 티셔츠 걸 중 누군가 바트 맥센의 딸……이라는 각본으로 인기를 끌었던 게 기억났다.

솔직히 티셔츠 걸 중에서 미모가 가장 빼어나 사람들이 대부분 그녀가 딸일 거라고 생각했고.

물론, ‘진짜 딸’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잠시 생각하던 난 이내 싱긋 웃으며 이야기했다.

“재밌었겠네요.”

“……예에?”

“열여섯에 데뷔해서 중요 각본을 수행하다니. 매일 매일이 판타지 대모험이었을 것 같은데요.”

“와, 진짜……. 수많은 사람들한테 이 이야기를 했지만 당신처럼 반응한 사람은 처음인데요.”

“왜요. 별로였어요?”

“아뇨, 학교도 안 가고 죽여주게 재밌었죠. 거기다 프로레슬러들 몸 보는 맛도 있었고 말이죠.”

“…….”

“아, 왜요! 나도 이상형 정도는 있다고요. 근육 돼지 같은 거.”

“예에…….”

나는 아니라서 다행이다.

뭐, 어쨌거나.

조지아의 여름 냄새를 맡으며 나는 경기장을 향해 가는 동안 티파니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전생에서는 구름 위에 살던 인간과 이렇게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될 줄이야.’

뭐,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실제로 만나본 티파니는 시원시원한 성격에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야망도 있고, 이쪽을 배려해주는데다 서로 원하는 게 겹치지도 않아 파트너로서는 최적이었다.

또 그와는 별개로 누군가와 동등한 관계를 맺어나갈 수 있다는 게 심적으로 큰 재산이 됐다.

전생의 나는 그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는 동양인이었으니까.

‘에보니는 뭘 하고 있으려나.’

끝나면 한번 연락이나 해볼까.

오랜만에 돌아온 제2의 고향이니 더 오래 머물러도 괜찮겠지.

바로 그때, 슬슬 저 멀리 경기장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지아 인터내셔널 스타디움.

무려 2만 석 규모의 대형 경기장이었다. 때문에 멀리서도 그 모습이 어렵지 않게 포착되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그 모습을 확인한 티파니가 말을 걸어왔다.

“잘할 수 있겠어요?”

“걱정 말아요. 회장 딸도 구워삶아두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하하, 그거 내 얘기에요?”

“바트에게 각본 상의 사생아가 없는 이상은 그쪽 얘기겠죠.”

티파니가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 와, 진짜 그런 웃기는 생각은 대체 어떻게 해요?”

한 번 더 살다보니 자연스럽게 좋아졌다……고 말하긴 좀 그렇지.

나는 대답 대신 그냥 웃었다. 그러자 한바탕 웃음을 터뜨린 티파니가 세차게 액셀을 밟았다.

힘차게 나아가는 페라리.

나는 그 조수석에 앉아 마지막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일단, 티파니는 버닝콩과 GCW를 번갈아가며 출연할 예정이다.

그를 통해 반년 가까이 지나며 희미해진 나의 ‘신’으로서의 이미지를 되살리는 게 첫 번째.

그리고 티파니의 개입을 통해서 신을 쿵-퓨리 안에 묶어두었던 권력자의 정체를 밝힌다.

그에 따른 의문들도 각본을 생각하며 자연스럽게 정리했다.

왜 신이 쿵-퓨리로 데뷔하고 6개월씩이나 가만히 있었나?

그동안 티파니 맥센이 GCW에서 악역 권력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 러셀에게 패배해 권력을 잃으며 자신을 돌아보고 신을 돕기 위해서 나타났다.

이 이야기가 잘만 풀리면 현재 랙다운에서 성장하고 있는 시나와 일을 해봐도 좋을 터였다.

‘개과천선하는 이야기지.’

동시에 GCW의 브랜드 가치를 끌어올린다. 말하자면 다들 그러듯 하나의 팀을 만드는 셈이었다.

헌터의 레볼루션에 지지 않을 정도의 팀을. 그것도 버닝콩과 랙다운을 아울러 만들어낸다.

그리고 거기에 부커를 비롯한 기존의 선수들을 섞어 행여나 있을 비판이나 부담을 최소화한다.

‘아마 헌터는 찍 소리도 못하고 각본을 따라야 할 테고…….’

한 가지 걱정이 되는 부분은 회의의 주체자인 바트가 또 예상과 다른 행동을 하는 것 정도인데.

‘어차피 이쪽은 GCW와 콜라보 각본만 가져오면 되니까.’

딱히 걱정할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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